희게 번지는 여름의 낮은 꼭 눈물을 닮았다. 뜨겁게 달아오른 공기와 끈적하게 달라붙는 습기. 숨쉬기 어렵다는 점에서도 꼭 울음을 닮았지. 그렇죠, 와카센? 무거운 공기를 느릿하게 헤치며 걸어나간다. 희고 아름다운 낮의 과하게 뜨거운 햇볕이 검은 아스팔트를 뜨겁게 달군다. 이 위를 맨발로 걸으면 내 발은 익어버릴까? 아마도 그렇겠지. 살이 익으면 어떤 향이 날까? 멍한 머릿속을 뒤져도 그런 향을 맡은 기억은 없다. 그러니 살이 익는 향은 무향無香이다. 존재하지 않는 것을 상상해서 구현해낼 기력이 없으니 살이 익는 향은 존재하지 않는다.
궤변이 떠올라 부서진다. 숨이 물방울이 되어 터져나간다. 공기와 물은 흐를 수 있다는 점에서 다르지 않다. 형체가 없다는 점도 같네. 그러면 밀도의 차이 뿐이니 이 공기는 물과 같다. 숨쉬기 어려울 정도로 빽빽하게 들어찬 이 무언가를 물이라고 부르지 않으면 무어라 불러야 하는가. 물이 아니라면 내가 숨이 막힐 이유가 없다. 그러니 이것은 물이다. 나는 물 속에서 부력 없이 걸어나간다. 이 땅이 나를 끌어당기기 때문이다.
뜨거운 볕이 내리쬐는 답답한 물 속. 앞이 부옇게 번져 어딘지 알 수 없다. 나는 아는 것을 보고, 모르는 것을 지운다. 문득 나보다 거대한 해바라기로 가득 찬 꽃밭에 놀러갔던 기억을 떠올린다. 당신은 내가 꽃 속으로 사라져 버리는게 아닐까 두려웠다며 웃었다. 하지만 당신이 답지 않게 당황했던 순간을 알아 그 말이 진심임을 알았다. 당신이 그런 말本音을 하는건 흔하지 않은 일이다. 늘 농담처럼 숨겼던 진심을 이제는 알아 볼 수 있다. 그야, 나는 꿈 속인걸.
이것은 아름다운 백일몽白日夢이다. 나는 길고 긴 백일몽百一夢을 꾸고 있다.
너는 여름 같은 사람이야. 그래요? 당신은 환절기가 꼭 어울리는데. 건조한 가을과 차가운 겨울 사이 어딘가에서 따스한 봄을 흉내내죠. 하하, 켄쨩은 예리하네……? 그런가요? 나는 그저 사랑하는 사람을 오래 지켜 볼 뿐이에요. 그러면 당신은 조금 붉어진 얼굴을 웃음으로 감추었다. 나는 그 웃음을 사랑했다. 여름의 하이얀 빛 속에서 부서지는 물방울을 떠올리게 만드는, 뜨겁고 숨막히지만 차가운 그 순간. 나는 당신이 사랑에 빠져 어쩔 수 없다는 사실을 드러낼 때 속절없이 사랑에 빠져들었다. 아주 뜨거운 여름, 깊은 바다에서 숨을 쉬는 기분으로 즐거웠다.
나는 당신에게 여름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이야기했다. 그러면 당신은 내가 눈부시게 화려한 빛을 받은 여름의 샹들리에 같다고 이야기한다. 물방울의 샹들리에, 화려하되 친근한. 찬사 속에서 진실이 드러나 수줍었다. 우리의 사랑은 푸른 하늘 아래서 유난히 뜨거웠다. 그건, 여름방학이래서 그랬던가? 끝이 있는 사랑이라서 아름다웠다고 말하면.
아냐, 나는 그런 이유로 아름다움을 느끼지 않아.
추억이 또 하나 부옇게 지워진다. 흰 안개로 덧칠한 추억이 길 너머로 사라진다. 나는 어딜 걷고 있을까? 아스팔트 길. 좁고, 가운데 중앙선이 희게 그어진 시골길. 사람이 걸으라고 만들었는지 2차선이 차 한 대가 지나가기도 좁다. 나는 중앙선 위로 걸어나가며 문득, 햇볕이 뜨거운데 길 말고 다른 곳은 모두 하얀 안개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아, 물 속이었지. 당연한 일을 잊었다.
손에 들린 무언가를 알아차린다. 까칠한 포장지의 감촉이 느껴진다. 리본으로 묶은, 무언가. 아, 꽃다발. 나는 꽃다발을 들고 뜨겁게 달아오른 길을 또 걷는다. 저 멀리서 아이들이 뛰어노는 소리가 들려온다. 당신의 조카가 삼촌의 아내는 뭐라고 불러야하는지, 내가 자신의 큰어머니가 되는건지 물어보았던 날을 떠올린다. 당신도 나도 당황했다. 하지만 그렇게 기분이 나쁘지 않았던 걸 보면, 그 때도 당신을 사랑하고 있었던걸까? 당연해진 사랑은 기억 위를 덧칠한다. 사랑하지 않았던 시절을 상상하지 못하게 된다. 사랑해, 사랑해.
예전에, 마야마와 가쿠가 찾아온 적이 있다. 나를 보며 ■■■■■?라고 했지. 가쿠는 ■■, ■■■■ ■■■ ■■■. 라고 ■■■■얼굴을 했다. 나는 괜찮다고 대답하며 웃었다. 그러면 그들은 ■■■ ■■면서 ■■져서─
길 옆의 벤치에 앉아있다.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본다. 푸르네, 구름이 흐른다. 빠르게 흐르는구나. 언젠가 보건실에 누워서 이렇게 구름을 올려다 본 적이 있었다. 당신은 나와 있으면 하늘을 보는 일이 잦다고 이야기했지. 좋다는 말이죠? 물론……? 나는 네가 즐거운 일이면 다 좋아하니까……말이야. 나는 웃었다. 구름이 흘렀다. 멀리, 멀리.
걷는다. 걷는다. 발이 뜨겁다. 볕은 여전히 뜨겁다. 희게 번져나가는 시야, 눈물과 울음을 닮은 걸음. 꼭 이렇게 오열했던 날이 있었다. 저 반투명하고 두꺼운 막 너머에서 울며, 울면서, 내 목소리가 너무 멀어서 두려운 날이 있었다. 유현아, ■■■ ■■■는 ■었어. 서준이가 내 등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나는 소리쳤다. ■■! ■■■! 내 목소리가 아주 먼 곳에서 흩어져내려서 두려웠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내 목소리가 제대로 들리지 않을까 두려웠다. 서준아, 사실 너도 울고 있었지?
나는 꽃다발을 내려다본다. 아, 흰 꽃이구나. 흰 꽃이라면 벚꽃이 좋았다. 그건 굳이 따지자면 분홍색에 가깝지만, 휘날리는 순간에는 희고 아름다웠다. 꽃보라桜吹雪를 바라보면 늘 몽환적인 기분에 사로잡혔다. 그 꽃보라의 가운데서 내게 키스하던 당신을 기억해. 눈을 감을 수 없었다. 당신의 어깨너머로 휘몰아치는 벚꽃잎이, 당신의 눈 속에서 휘몰아치는 격정이 지독하게 아름다웠다. 숨기고 가리는데 익숙한 주제에, 사랑 하나를 못 숨겨서 당신은 늘 아름다웠다. 시선을 사로잡아서, 흘러넘치는 사랑으로 나까지 간질거리는 기분 속에서 어쩔 줄 모르게 만들었다.
그렇게 우리는 한 여름에 사랑했지, 마치 첫사랑에 빠져들어 속절없이 무너지는 어린아이처럼.
더운 날에는 달라붙는게 참 싫었다. 여름은 축축하니까. 하지만 담력시험을 하던 밤에는 좀 무서웠던 것 같기도 해. 수영장을 개방하던 날에는 신나게 뛰어놀고 다쳐서 보건실에 찾아갔다. 당신은 제가 더 아픈 얼굴을 했고, 수영장에서 대운동회를 한 날에는 멋지게 우승해서 남몰래 영광을 바쳤다. 아, 정말 많은 일이 있었죠, 와카센? 아아, 그러네……?
나는 당신의 목소리를 좋아했어요. 그건, 영광이네……? 켄쨩, 좋아한다는 말은 잘 하지 않고. 음, 그건. 이제와서 하는 말인데, 당신의 어딘가를 좋아한다고 말하면 그 점 때문에 당신을 좋아한다고 오해할 것 같았거든요. 조금 겸연쩍은 마음이 되어서 당신을 올려다보면, 놀란 얼굴. 정말 의외인 말을 들은 얼굴. 당신은 나랑 있을 때만 이런 얼굴을 한다. 그래서 사랑했어요, 당신이 나한테만 보여주는 조각들을. 그러면 당신은 조금 볼을 긁적이면서 소년 같은 얼굴을 한다. 부끄러워 하는거지. 당신이 당황하고 부끄러워 할 때는 나와 있을 때 밖에 없다는 사실을 안다. 나는 심장을 깃털로 간질이는 감각으로 괴로워한다. 행복해.
나는 꽃다발을 들어 향을 맡는다. 아, 이건.
와카사 이쿠토와 말을 나눈다. 당신은 내 눈을 바라보며 주의 깊게 말을 경청하고, 대화를 잇기 위한 추임새를 넣는다. 그러면 나는 신이 나서 이런저런 말을 떠들고, 어느 순간 그에게 불평한다. 내 말보다 목소리를 듣고 있는거죠? 아니야, 듣고 있어……? 그러면 당신은 얄밉게 웃으면서 내가 한 말을 모두 늘어놓지. 그러면 나는 문득 당신이 나를 사랑해서 더욱 주의깊게 말을 듣는다는 사실을 알아차리는거야. 그러면 사랑이 다시 차올라서, 작게 웃으면서 부끄러움을 감추고. 여름의 볕은 뜨겁게 내리쬐고, 매미는 맴맴 울어대고.
찢어지는 소리로 울어대는 매미가 거슬리는 날은 에어컨이 고장난 날이었지. 온 학교가 불만에 가득차서, 사이온지 렌이 수영장을 개방했다. 우리는 수업도 그만두고 풀장으로 뛰어들었지. 마야마의 잔뜩 찡그린 얼굴을 봤어야 하는데. 풍덩! 하고 물에 뛰어드는 소리. 멀고 둔탁하게 들려오는 아이들의 웃음소리─
나는 몰래 도망쳐서 보건실에 앉아있었어. 수영복을 입고, 다친 척 하고 누군가 들어오면 아프다고 이야기 할 셈으로. 와카센, 오늘은 땡땡이 치는거 봐 주기에요, 하고 속삭이면서. 그러면 당신은 사랑스럽다는 얼굴로 웃으면서, 몰래 숨겨둔 얼음을 주스에 띄워줬어. 와카센, 그거 알아요? 당신은 내가 당신을 위해서 무언가를 했다는 얼굴을 하면, 좋아서 어쩔 줄 모르겠다는 표정을 해요. 헤에, 그래……? 처음 듣는 이야기네. 그래요? 이야기 한 줄 알았는데. 그야 켄쨩.
내가 살아있을 때는 한 번도 이야기 해 주지 않았잖아……?
이제 소리가 들린다.
매미가 찢어지는 울음을 운다. 물에서 방금 빠져나온 것처럼 멍멍한 귓속은 진동의 구석 없이 조용하기만 하다. 매미가 만드는 공기의 떨림이 고막을 자극한다. 오늘도 너무 밝아서 눈을 찡그리게 만드는 빛. 나는 당신의 이름 앞에 꽃다발을 내려놓고, 여전히 비어있는 감각을 반추한다. 이 기나긴 백일몽은 언제쯤 깰까. 여름은 언제 지나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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