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추기경이 아니던 시절을 기억합니다, 이스카리오경.”
세계의 멸망을 한 걸음 앞둔 날. 역린은 고등학교의 교회를 찾아 문득 이야기했다. 이스카리오는 광기로 번들거리는 파충류의 눈동자를 하고 역린의 말을 들었다. 단정한 음색과 조곤조곤한 말투는 이스카리오를 후원하기로 결정하던 그 어린 소녀에서 전혀 변하지 않았다. 나이를 먹고, 권력을 손에 틀어쥐어도 여전히 그녀는 무정하고 다정했다.
“저는 중요하지 않은 일은 기억하지 않는 주의입니다만, 어째서인지 당신과 만났던 것들은 잊혀지지 않더군요.”
“그건 영광이군요.”
“어째서일까요, 그저 옛 후원자와 피후원자로 남아야 할 관계에 이리 정을 주는 것은.”
이스카리오는 까닭모를 성취감에 전율했다. 역린의 옅은 눈동자는 흔들림 없이 이스카리오를 응시했다. 그 안에 담긴 것은 그 누구도 아닌 온전한 ‘이스카리오’였다. 그녀의 사랑하는 수호룡도 아니고 총애하는 신기사들도 아닌, 오롯하게 결함품인 이스카리오.
역린은, 어느 용의 약점이라고 칭해지던 지휘사는 평소의 얼빠진 얼굴대신 무표정한 안타까움을 드러냈다. 이스카리오는 그 얼굴에서 세레스의 것과 같은 감정을 읽어낸다. 역린은 마지막이 되어서야 그 견고한 가면을 벗었다. 이스카리오는 완벽하지 않음에 불쾌함을 표하며, 동시에 희열을 느낀다.
“당신의 언어를 빌려 말하기를, 저는 타인 속에서 당신을 ‘선별’했습니다.”
“그건, 영광이군요.”
“당신 답지 않네요, 같은 말을 반복하다니.”
역린은 느릿하게 아무도 없는 예배당으로 걸어 들어왔다. 흐릿한 보랏빛 하늘이 그녀의 뒤로 장막처럼 늘어지고, 색 없는 눈이 이스카리오의 것보다 더욱 하얗게 바랬다. 단정한 옷차림이 답지 않게 흐트러져서, 오랜 교제를 통한 추측으로 이스카리오는 역린이 급하게 교회로 달려왔음을 짐작한다.
하늘의 흑문이 넓게 번지고 있다. 절망이 널리 퍼져나가고, 신을 배반한 자와 신의 뜻을 울부짖는 자가 어지럽게 섞인다. 그 속에서 역린이 오롯하게 서 있었다. 흔들리지 않고, 변하지 않고, 부정적임과 긍정적임을 모두 지워낸 채. 배 앞에서 양 손을 깍지 낀 역린은 느릿하고 완벽한 걸음을 걷는다. 마치, 그녀의 길을 모두 ‘그녀’가 안배한 것처럼.
“지금 이곳에 온 것은, 추기경.”
역린은 어울리지 않게 말을 더듬다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당신에게 사과하러 왔어, 이스카리오. 내 친구의 만류를 뿌리치고.”
경어를 집어치운 역린은 깍지 낀 손을 풀어 양 팔을 활짝 벌렸다. 가볍게 어깨를 으쓱하는 모습에서는 고뇌가 묻어났고, 이스카리오는 웃었다. 당신은 그런 분이지요. 이스카리오의 웃음 앞에서 역린은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저 자의 의도대로 놀아나고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고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사과해야 하는 일은 존재한다.
“당신을 환력의 검으로 벤 것,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어.”
“그래서 그 사과로 모처럼 도망친 다과회를 다시 열고자 하는 겁니까, 현님.”
“그럴 리가. 내가 사과하고자 하는 것은 너와 내 관계에 타인을 끼어들게 만들었다는 점이야. 당신의 다과회에 다시 어울릴 생각은 없어.”
“제 모든 상처를 보았음에도, 냉정하게 잘라내는군요. 실로 무정한 결정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삿된 정에 이끌려 저 자신을 내어 줄 사람은 아니라서. 그런 사람이라면 당신도 진즉 나와 연을 끊었을거 아니야?”
“당신은 늘 현명했죠.”
역린은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며 다시 양 손을 깍지끼었다. 성자와 같은 자세가 되어서 문 앞에서 두어 걸음 떨어진 곳에서 바라보는 역린은 다시 흔들림 없는 ‘역린’으로 돌아와 있다. 추기경, 딱딱한 호칭이 이스카리오와 역린 사이에 선을 긋는다. 많은 신기사를 거느리는 대신 자신의 분신과 같은 신기사 한 명에게 모든 것을 집중한 지휘사는, 제 인생에 존재할 몇 안 되는 신기사를 바라보며 나붓한 무표정을 지어 보였다.
“당신의 과거를 기억하는 자가 얼마 없다는 사실을 압니다. 당신이 원하지 않았겠지요. 또한, 제가 그것을 보면 당신을 외면하지 못할 것도 알고 있었을 겁니다. 분명 제게 수호룡이 없었다면 당신의 손을 잡았겠지요. 그러니 당신의 불운에 유감을 표합니다.”
“당신은 언제나 잔인하지요, 확고한 우선순위 위에서 바깥의 것을 신경쓰지 않습니다. 마치, 영웅을 골라내는 신과 같이.”
“이상한 말을 하시는군요, 추기경. 저는 그저 인간입니다. 당신이 생각하는 대로 신이 저를 사랑한다고 한들,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끝 없는 윤회 속에서 빠져나갈 수 없고, 그저 한 순간 한 순간 발악하는 것 밖에 할 수 없는데.”
“과한 겸손은 되려 오만이 되기 마련입니다.”
평소와 같이 적당한 말을 내어 놓는 역린에게 이스카리오는 속말로 대답했다. 역린은 그의 진위를 가늠하며 적당한 대답을 찾다가, 가볍게 자조했다. 사랑한다, 저 자를 사랑하고야 만 것이다. 망가지고 미치고 광신으로 타인을 바라보지 않는 저 인간을, 기어코 마음에 품었다. 물건도 10년을 보면 정이 든다. 말하고 움직이는 사람을 이토록 오래 보았으니 어찌 마음에 자리를 내어주지 않고 배기겠나. 그러니 마지막이라도 너그러워지자는 마음에 똑같이 속말을 내뱉었다.
“저는 당신과 같이 ‘그녀’를 숭배하지 못합니다, 추기경. 역천의 별 아래 태어난 모양이지요. 만일 그녀가 우리 중에서 영웅을 골라내고 있다면, 저는 그 양식장을 기꺼이 부수겠습니다. 윤회를 뛰어넘어, 끝을 가늠 할 수 없는 곳에서 끝이 끝이 될 수 있도록 하겠지요.”
“…….”
“추기경, 저는 이런 사람입니다.”
긴 침묵이 이어진다. 이스카리오의 금빛 눈은 차가운 파충류와 같이 번들거리고, 역린은 그의 모습을 그저 바라본다. 그 자신이 결론을 내리기 전까지 제가 섣불리 말할 수 없음이다. 저 자의 광신과 집착은 결국 저 자 스스로 끊어내야 할 문제다.
“그렇군요, 이해하였습니다.”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의외로 간단한 수긍, 그토록 오랜 집착의 결말이라고 보기 어렵다. 그러니, 나는 여기서 마땅히 의심해야 한다. 사랑은 얼마나 간교한 덫인가, 이변을 깨닫고도 기쁨이 눈을 가려 의심을 집어던진다.
“그러니 현님, 제가 준비한 홍차를 추모의 뜻으로 마시지 않겠습니까. 그 긴 세월에 대한 작별로.”
“……당신에게 받는 마지막 홍차겠군요.”
“예에, 물론.”
섬세하게 조각한 대리석을 닮은 손이 세라믹으로 만든 컵을 건넨다. 향기로운 차는 완벽한 온도로 식어있다. 마치, 이 순간을 위해 준비한 차처럼. 입에 머금어 삼키는 순간 올라오는 끈적하고 지독한 단 향. 문득, 위화감이 든다.
“당신이 어찌 믿고 어찌 행동해도 이 곳은 신의 모형정원입니다. 그녀의 가장 무결하고 고귀한 영웅이 윤회를 뛰어넘기 위한 곳. 그녀는 당신을 사랑하시니, 당신이 택한 것이 ‘완벽한’ 자가 아니라도 어쩔 수 없이 시선을 던지겠지요.”
“그것이 당신의 믿음이지요, 추기경.”
“그러니 제게 당신은 필수불가결한 존재입니다.”
눈 앞이 흐려지고 몸이 통제를 벗어난다. 반사적으로 뻗은 손을 잡아 제 품으로 끌어당기는 이스카리오의 도자기 같은 손. 꿈과 달리 손을 잡아채는 이스카리오는 사라지지 않는다. 모래알처럼 흩어지는 것은 내 의식이다.
“자, 이 윤회를 제가 끝내드리겠습니다. 다시 다과회를 열죠. 이번에는 환력의 검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하길 바라겠습니다.”
목덜미를 기는 가느다란 손가락. 신기사의 신체는 인간의 것과 다르다. 힘을 잃은 신체는 호흡마저 빼앗기고, 바람에 흩어져 붉은 모래로 변하는 의식은 마지막으로 이스카리오의 창백한 입가가 웃음짓는 모습을 본다. 보랏빛 하늘은 부서져내린다. 말 그대로.
힘을 잃은 몸이 늘어진 것을 받아든 모습은 피에타의 조각상을 닮아있다. 이스카리오는 역린의 눈을 감기고, 이마에 입을 맞추고, 기름을 바른다. 언젠가의 어린 소년이 노인에게 거행했던 미사와 같이. 보랏빛 하늘이 조각나는 세계 속에서, 신의 시선을 온 몸으로 만끽하며 이스카리오는 장례를 진행했다. 납관의 의식 대신 제단 위에 눕혀진 역린의 이마에 입술을 대고, 차갑게 속살였다.
“당신은 정이 너무 많습니다.”
그렇게,
7일의 시간이 뒤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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