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몰아치는 금빛과 군림하는 신성 앞에서, 야나기 켄은 유독 평온했다. 눈만 동그랗게 뜨고 이 모든 것은 나와 관계가 없다는 표정으로, 평소처럼 그를 응시할 뿐이다. 의아함은 익숙한 무감함으로 곤두박질치고, 그는 어딘가 덤덤하고 어딘가 초연하게 앞으로 나섰다. 어지럽게 날아다니는 기물이 그의 온몸을 때리지만, 그것은 자신의 몸이 아니라는 얼굴로, 그렇게.
“선생님.”
짧은 순간 많은 말이 스친다. 눈빛과 눈빛이 얽혀서 세계의 최소 조건을 충족한다. 당신이 나를 보고 내가 당신을 보는 동안 우리는 우리만의 세계에 사로잡히는 것이다. 격정과 대비되는 공허가 어지럽게 엉킨다. 기이한 동질감. 토트와 야나기는 혼란으로 가득 찬 눈 속에서 동족이 된 기분에 빠져든다. 우리가, 우리의 대화가, 맞물릴 것 같다는 그 환희. 조용한 격정 속에서 야나기는 의자에 맞아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 팔을 붙잡고 입을 열었다.
“선생님. 우리는 지금껏 수많은 신을 저 하늘에서 끌어 내렸지요. 이제 라의 태양선은 하늘을 항해하지 않고, 콘수의 달은 여행하지 않으며, 이시스의 별은 시작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토트, 당신은 스스로 태어나며 스스로 낳는 자입니다. 신들의 조정자이며 모든 정해진 것의 관측자이고 별을 헤아리며 천국을 예측하는 자입니다. 그러면 당신은 이런 날이 올 것을 알고 계셨나요? 아니면, 우리는 마침내, 당신의 시선에서 벗어나 제 어버이의 신성마저 땅바닥에 처박았나요?”
“겉만 화려한 말로 논점을 흐리지 마라, 야나기. 대화의 연장선이다. 시간은 파멸을 향해 흐르기 시작했다. 네놈은 그걸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하나? 네놈을 대가로 막을 생각인가?”
“막아요? 제가? 제후티, 당신은 시간의 신이기도 하지요. 제 선택으로 정해지는 미래를 실현하고 시간을 멈추는 자는 당신이지 않습니까. 저는 가부를 예측하는 대신 그저 무력하게 선택할 뿐이지요. 당신은 마치 제게 생각이 있고 힘이 있는 양 말씀하시지만, 결국 제 선택을 실현하는 사람은 선생님이 아닌가요? 저는 그저,”
“그만. 대답도 되지 않는 말로 시간을 끌지 마라! 나는 진심이다, 네놈도 진심으로 대답해라. 자신을 희생해서 세계를 구할 것인가? 제멋대로인 신들과 죄악이 흘러넘치는 세계를 위해서 목숨을 버리겠다고?”
“…….”
격정은 잦아든다. 대화는 맞물리지 않는다. 서로의 말은 허공에 흩어진다. 신과 인간은 제 생각에 사로잡혀 저 좋을 대로 말을 늘어놓고 있을 뿐이다. 흘러넘치는 권능과 휘몰아치는 신성. 야나기는 신과 인간의 차이를 실감한다. 결국, 이렇게 되는 것이다. 이런 순간이 왔을 때 당신이 나의 말을 듣지 않는 것을 이해케 만드는 것은 당신이 신이라는 사실이다. 나의 창조주, 세계의 이름을 부른 자. 선생님. 이 대화가 이상함을 모르시나요? 대답을 강권하는 것은 당신인데, 마치 내게 권력이 있는 양 말씀하시고 있잖아요. 그는 내뱉기 위한 말을 삼켜버렸다. 차마 하지 못한 말이 만들어내는 짧은 침묵. 시선이 엇나간다. 두 사람의 세계는 서로를 추방한다. 홀로 남은 기분과 조각나는 세계를 등지고, 야나기는 낮고 느릿하게 말했다.
“아니요. 제가 희생해서 세계를 구하지 않을 거예요.”
토트의 얼굴에 안도가 스친다.
“하, 그러리라 생각했다. 어차피 네놈도 인간. 자신의 목숨이 가장 소중하기 마련―”
“절 세계와 함께 멸하세요. ”
단지 그는 너무 이르게 안도했기에 더욱 모질게 실망한 것이다.
“네놈은, 살고 싶지 않다고?”
“그렇게 되네요. 선생님”
“거짓말이다.”
“저는 죽음이 두렵지 않아요. 제가 희생해서 세계가 산다면 그리할 것이고, 그 전에 당신이 저를 포함해서 세계를 멸망시키길 원하고 있어요.”
“네놈…… 제정신인가?”
“저는 언제나 제정신이었어요, 선생님. 이런 상황이 아니었더라도 저는, 똑같은 선택을 했을 겁니다.”
“뻔한 소리를 지껄이지 마라! 네놈도 결국은 인간. 살고 싶다고 생각하지 않나? 자기 자신이 가장 소중할 터. 지금이라도 말해라, 구걸해! 네놈만이 살고 싶다고 빌어라!”
“……제가 그래야 하는 이유가 있나요?”
말이 베고 지나간 허공으로 파고드는 냉기. 익숙한 침묵은 익숙한 원망을 떠올리게 만든다. 너는 감정도 없냐고 비난하던 사람들의, 그것들을. 상처받은 신의 얼굴은 그리 원망하던 사람들의 눈빛과 닮았다. 배신감, 이질감, 멀어지는 거리를 재기 위해서 손을 뻗으면 그 손을 뿌리칠 저 표정.
“진심으로 대답하라고 하지 않으셨나요. 제가, 거짓을 고해야 했나요?”
문득 야나기는, 제가 살려달라고 빌었다면 어땠을지 고민했다. 내가, 순종할 수 있었다면. 당신이 말하는 대로 세상을 포기하고, 누군가가 나를 원한다는 이유로 나의 세계를 포기할 수 있었다면? 가능성이 된 미래가 포말처럼 떠올라 부서진다. 당신의 상처받은 얼굴 앞에서 나는 무력해지고, 무력함 속에서 기이한 절망이 떠오른다. 내가 순종할 수 있었다면 무언가 달라졌을까요? 당신을 선택하고 세계를 내던지며, 이것이 사랑이라고 자신에게 을러줄 수 있는 사람이라면?
아니. 이런 식으로 말하고 싶은 게 아니야.
나는, 금빛 파도 앞에서, 어느 날의 노을을 떠올리며, ‘나’를 포기할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하고 자조하고 있다. 내가 당신의 권력 앞에서 굴복하고 끝나는 이야기였다면.
“제후티님, 위대하신 따오시시여, 절 죽이세요. 멸하세요. 저희가 잘못되었다고 판단하였다면 그렇게 하세요. 어째서 제게 의견을 묻나요? 당신의 생각이 옳다면, 저희는 잘못된 존재가 아니었던가요?”
단지 그러지 못하기 때문에 나의 인생은 그토록 험난했고, 이토록 뒤틀렸으며.
“저는 답이 정해진 연극의 배우로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에요.”
이리 끝나는 것이다.
“네놈은, 죽고 싶은 건가?”
“굳이 따지자면……. 아니요. 저는 할 수 있다면 살고 싶어요. ‘생존’하는 것이 아니라.”
“모순이다.”
토트는 기이할 정도로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직전의 격정은 거짓이라는 양 가라앉은 눈동자가 섬찟한 구석이 있다. 그러나 저 신은 저런 눈으로 타인을 관찰할 때 가장 ‘토트’라는 이름에 걸맞은 존재가 되는 것이다.
“네놈은 모순되는 말을 하고 있어.”
확신에 가득 찬 언어는 그의 입 밖으로 나오는 순간 현실이 된다. 그가 미래에 대해 한 말은 예언이 되고, 그가 적어 내린 기록은 변하지 않으며, 그의 확신은 깨지지 않는다. 타오르는 금빛 눈 앞에서 야나기는 단지, 그의 모든 권위를 담담하게 수긍할 뿐이다.
“인간은 그런 존재죠. 제가 인간 대표라면, 기꺼이 모순을 떠안을 뿐입니다. 저는 제가 가장 소중하지만, ‘저’라는 존재를 이루는데 필요한 요소가 있잖아요. 선생님, 비록 제가 선생님에게 배운 것은 없지만,”
이쯤 말했을 때, 그는 이런 말을 하면 신성모독이 되어 심장을 암무트에게 먹히고 영원토록 고통받게 되며, 세켓트 하테페트에는 들어서지 못하게 되는가 태평하게 고민했다. 하지만 토트가 야나기에게 가르친 것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데. 거짓과 신성모독의 죄 중 어느 것이 무거운지 고민하던 야나기는, 세계가 멸망한다면 모든 저승도 사라질 터이니 아무래도 좋다고 결론지었다.
“이것 하나는 확신할 수 있어요. 저는 홀로 존재할 수 없으며, 지금 당신을 택해도 결국 다시 저 자신을 택해서 도망치게 될 것을.”
나는 수긍하되 순종할 수 없다. 신의 권위 앞에서 복종하고, 당신의 완벽함에 기대어 나를 포기하고, 그저 행복하게 타인의 뜻대로 살 수 있기를 그토록 빌었으나 불가능함을 인정해야 하는 순간이 기어이 들이닥쳤다. 극단적이고 연극적인 상황 앞에서, 야나기는 덤덤하게 제가 가지고 있던 마지막 기대를 내려놓았다.
“야나기, 야나기 켄.”
단지 야나기가 얻은 평화만큼 토트의 마음이 가라앉지 않았음이 문제가 되었다.
“네놈은 어리석은 짓을 하고 있다. 멸망할 세계와 운명을 같이 할 셈인가? 네놈의 죽음은 아무런 의미를 가지지 못하고, 네놈의 존재는 사라지겠지. 그래도 좋은가?”
“예.”
“그것이 고통스러운 길이라고 해도?”
“그건…… 좀 고민스럽지만.”
야나기는 제 오른팔을 주무르며 공허하게 웃었다. 지금 아픈 것도 신경 쓰이는데, 제가 소멸하는 고통은 어쩌지. 하는 생각이 눈에 훤하다. 저 치는 저런 이였다. 죽음의 공포와 세계의 소멸을 저울에 걸고도 다른 생각을 하는 자. 언제나 그의 뒤를 반짝이는 눈을 하고 쫓아오던 인간. 어떤 말을 듣고도 제 눈치를 보며 도서관의 문을 두드리던, 매일 저녁에 조금만 더 같이 있게 해달라고 애걸하던―
애정을 숨기지 못하던 인간.
토트는 제 확신의 기저를 발견하고 코웃음 쳤다. 그는 저 인간이 그를 사랑한다 확신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저 인간에게 하는 모든 말에 기이한 격정이 섞이고, 당연히 세계를 버릴 것이라 확신하며, 그를 선택하지 않았을 때 배신감을 느꼈다.
혼란과 격정은 가라앉고, 감정은 사그라들며, 빈자리로 파고드는 이성은 냉정하다. 토트는 격심하게 밀려드는 피로 속에서, 익숙한 감각을 되찾았다. 검은 혼돈을 걷어내기 직전, 그의 입술에 걸려있던 세계의 이름을 밀어내게 만든 그,
“야나기, 네게 다시 기회를 주겠다.”
그는 순식간에 지친 신의 얼굴을 한다. 토트는 지는 해의 태양선에 올라탄 라를 닮아있다. 노인의 얼굴을 하고, 저승에서 숙적과 치러야 하는 영원한 싸움을 예견한 주신과 같이 노련하고, 피로하며, 텅 비어버린 눈.
야나기는 토트의 눈에 깃든 체념을 보며 끝을 예감한다. 이 기회를 거절하면 그들의 관계는 완전히 종말을 맞이하는 것이다. 그는 차라리 안심했다. 이러한 논쟁은 피곤한 일이다. 눈을 내리깔며, 바닥에 꼼꼼하게 새겨진 메두 네체르를 좇는다. 한 번, 단 한 번만 더 거절하면 이 괴로운 일도 끝나겠지.
“네놈만은 살려주지.”
허나 언제 신과 관련된 일이 인간의 예측대로 흘러간 적이 있던가.
무거운 말이 지금까지 나누던 대화와 완전히 다른 무게를 가지고 처박힌다. 야나기는 퍼뜩 고개를 들어 올린다. 숨기지 못한 경악, 눈 속에서 일렁이는 정의하지 못한 격정. 금빛, 다만 금빛이 흘러넘치는 공간에서, 세계를 만들어낸 신이 나는 살려 주겠다는 말로. 오직 인간 대표로 불러오던 날과 같이, 내 의견 따위는 무시하고 제멋대로 선택하면서.
왜 그런 자조적인 어조로.
“왜……?”
“네놈에게 설명해도 이해할 수 있나?”
생기가 사라진 눈. 얼핏 다정해 보이고 얼핏 무심한 표정. 눈을 내려 저를 쳐다보는 얼굴. 야나기는 이 느낌을 알고 있다. 똑같은 장소에서, 똑같은 신과 함께, 비슷한 이야기를 나눌 때 느꼈던 감각이다. 지독한 단절, 이질감, 무력감. 무슨 말을 해도 닿지 않을 것이다. 당신의 입으로 직접 고했던 그 한 마디. 그날도, 분명 당신은.
“또, 그런 말을 하실 거죠. 진실로 서로를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니까?”
“인간은 홀로 태어나 홀로 죽는 존재다. 그건 신이라고 다르지 않아. 한데 찰나를 사는 인간이, 영원을 사는 신을 이해할 수 있을 리 없다. 네놈도 똑같다, 야나기.”
“이해받고 싶은 생각도 없는 주제에!”
야나기의 비명은 얇고 높아서, 온 사방의 공기를 찢어발겼다. 단말마처럼 내지른 절규가 신성한 공간의 엄숙한 정적을 난도질한다. 그의 눈 속에서 타오르는 것은 애정이고, 단절이 무력감으로 이어지는 것은 여전히 토트를 이해하기 위해, 그의 고독을 위로하기 위해 발악했기 때문이다. 단지, 배신 뒤에 이어지는 애원은 닿을 수 없다는 사실이 야나기와 토트를 비극으로 이끌고 있다.
“‘서로’ 이해할 수 없음은 오직 선생님이 이해받을 생각이 없기 때문이 아닙니까! ”
“그걸 네놈이 말하나?”
“…….”
“애초에, 이해받을 생각조차 없이 다가왔던 네놈이 말하냐고 묻고 있다.”
토트의 눈은 차가운 금속의 색이다. 금 또한 금속이라는 사실을 이런 방식으로 실감한다. 어딘가 냉정하게 내려꽂히는 시선 앞에서, 야나기는 치부를 드러낸 인간이나, 상처를 강제로 만지작대는 상대를 만난 동물처럼 굴었다. 뒤로 물러서며, 반사적으로 부정하고자 입을 달싹였다는 뜻이다. 그러나 야나기는 본능보다 이성에 의거하여 움직이는 자였고, 달싹이는 입에서 부정의 말이 흘러나오는 일은 없었다.
어찌 되었든, 토트의 말이 틀리지 않았던 탓이다.
“네놈은 거만하게 입을 놀려대고 있지만, 본질은 다르지 않다. 아니, 오히려 ‘솔직’하다는 기만을 자랑스럽게 떠들어댔던 건 네놈이 아니었나?”
“…….”
야나기는 이를 악물었다. 그와 함께한 시간이 통째로 짓밟히는 기분이 들었다. 아니, 그것보다 더했던가. 배신감은 토트만 느끼는 감정이 아니었다. 어떻게 당신이 그런 말을, 차마 내뱉지 못하는 상처가 어지럽게 얽히고, 감정의 공이 되어버린 생각들 속에서 문득 내가 죽음을 택했을 때 당신이 느꼈을 감정이 이러했나 이해한다. 하지만 그뿐이다. 이미 되돌리기에는 늦어버렸는데.
“다른가?”
“예.”
“다르지 않겠지.”
“당신의 착각입니다. 아니, 착각은 아니지만, 선생님, 예. 저는 이해받을 생각이 없었어요. 하지만, 어떻게 이해를 구합니까? 저는 저를 ‘인간’이라고 생각한 적이 한 번도 없는데. ‘인간 대표’가 인간이 아닌 자신을 이해해 주는 신을 원해야 했나요? 인간을 가르치는 자리에서?”
야나기는 말을 내뱉는 내내, 이것이 치졸한 변명에 지나지 않음을 의식했다. 변명이다, 당위에 맞는 방패를 내세울 뿐이다. 하지만, 하지만.
“변명이군.”
“예, 변명입니다.”
두려웠는데.
“저는, 할 수 없었어요. 아니, 두려우니까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제가 늘어놓은 변명 또한 진심이지만, 이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생각이네요. 선생님, 위대하신 창조주시여, 저는 두려웠어요. 이해받지 못하는 것이.”
세계를 멸망시키기 위한 힘은 이미 형태를 갖췄다. 그의 말 한마디에 이 세계는 사라지고, 우리의 찬란한 업적은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이며, 신들 또한 공허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홀로 태어나 홀로 만들어내는 존재. 그 누구도 그를 낳은 자 없는 신은 그가 불렀던 이름을 거두어들이고 공허 속에 홀로 남을 것이다. 토트는 입술 끝에 멸망을 걸고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고, 야나기는 이를 알면서도 두렵지 않았다. 다만 두려운 것이 있다면 저 신은 홀로 남는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선생님, 저는 최소한, 타인이 이해하지 못하도록 저를 가린 적은 없었어요. 그게 저의 최선이었으니까.”
“최선의 노력이 최선의 결과로 이어지지 않는 일도 있다.”
“허나 시도하지 않는 것보다는 낫겠지요.”
“그것이 기만이 된다고 해도?”
“기만이 된다고 하여도.”
야나기는 제가 유언을 남긴다면 오롯이 사랑에 근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가 살아남기로 결정하고, 외로움을 극복하고, 앞으로 나아가게 만든 것이 사랑이라면 그의 끝 또한 사랑이 장식해야 한다고 굳게 믿었다.
“예전에도 이야기했지만, 토트님. 희망은 무지에서 나오고, 확신은 무지를 덮어버리며, 견고하고 완벽한 세계 속에서 이변은 일어나지 않기 마련입니다. 예측할 수 있고 예외가 없는 세계에 희망은 존재할 수 없어요.”
“네놈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지? 이미 멸망이 결정된 세계 앞에서 희망론이라도 이야기할 셈인가? 허울 좋은 소리를 지껄이지 말라고 했을 터인데. 야나기, 네놈은 나를 설득할 셈인가?”
“아뇨, 그냥, 희망을 놓지 말라 이야기하고 싶었을 뿐이에요. 모든 것은 바뀌기 마련이고, 제가 직접 당신의 예상 밖으로 걸어 나가 증명하지 않았던가요. 당신의 예측이 완벽하지 않고, 당신의 이해가 온전하지 않다면, 얼마든지 상식 밖의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금색 빛의 세례 속에서 야나기의 갈색 눈은 토트의 것과 똑 닮은 색을 띠었다. 신의 상징이 되는 금안은 인간의 얼굴 위에 올라서도 어색하지 않았고, 만지면 부드러울 뺨 위로는 힘이 기어 다녔다. 토트는 그 모습을 바라보면서 문득, 신의 좌에 올라서 그의 옆에 서 있을 저 인간을 상상했다. 그의 영원을 함께하며, 그의 예상을 벗어나는, 오래도록 함께할 존재를.
“선생님은 사랑이 한순간의 착각이며 고독을 잊기 위한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고 했지만, 그 환상에 젖어 평생을 살아간다면 퍽 괜찮은 삶이 아닌가요. 고독을 느낄 틈도 없이 사랑한다면, 사랑받는다면, 그리 나쁘지 않은 일생이 될 텐데.”
“네놈의 낙관론은 결국 자기만족에 지나지 않는다. 책임지지 않을 말은 누구나 할 수 있지. 유언인 양 떠들어대는 말은 비장하지만 그뿐이다. 바른말을 내뱉고 정론을 이야기하는 자는 널려있어. 겨우 그걸로 이 나를 설득할 수 있다고 생각했나?”
“……설득당하지 않아도 상관없어요.”
“제멋대로군.”
비장함도, 격정도, 체념도 사라진 자리에 깃드는 것은 결국 피로밖에 없다. 야나기와 토트는 한풀 꺾인 목소리로 저만의 상념에 갇혀 저 좋을 대로 말을 내뱉었다. 대화의 끝이 찾아오고 있다는 사실은 명백했다.
“그래서 네놈은 내 마지막 기회를 거부할 셈인가?”
“……예. 당신이 모든 신을 데리고 사라져 저희를 독립시킬 것이 아니라면, 차라리 저희를 멸하세요. 단지 희망을 버리지 말아달라 부탁하는 것이 제 유언이 될 겁니다. 포기하지 마세요. 당신이 세계를 만든 이유가 틀렸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그게 전부입니다.”
동상이몽 속에서 야나기는 유언을 내뱉었고, 그것이 그의 운명을 결정했다. 그는 정신을 잃었고, 하나의 세계는 막을 내렸으며, 한 인간을 남기고 모든 것은 사라졌다. 토트는 공허와 어둠 속에 남아있는 인간을 내려다보며, 야나기가 알아차리지 못한 단 한가지 사실을 곱씹었다.
그가 준 마지막 기회는 그가 야나기의 의견을 존중할 수 있도록 의견을 돌릴 기회였을 뿐이다.
댓글 0
> | 마지막 기회 | 2020.05.19 | 2020.05.19 | 44 |
26 | 외로움 | 2019.08.19 | 2020.06.05 | 129 |
25 | 고독의 이름 | 2019.06.23 | 2019.06.23 | 36 |
24 | 파도 소리 | 2019.05.28 | 2019.05.28 | 112 |
23 | 떠난이의 사랑이 산 자를 살게 한다는 것은 늘 처참하다 | 2019.05.18 | 2019.05.18 | 26 |
22 | 인정받는 일 | 2019.05.18 | 2019.05.18 | 11 |
21 | 세네트 | 2019.05.18 | 2019.05.18 | 7 |
20 | 켄과 켄 | 2019.05.18 | 2019.05.18 | 11 |
19 | 어느 방과 후 | 2019.05.18 | 2019.05.18 | 10 |
18 | 네가 죽었다 | 2018.11.18 | 2018.11.18 | 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