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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도 소리

admin 2019.05.28 23:17 read.112

 

  파도가 밀려온다. 밀려와 치솟고, 저 자신을 이기지 못하고 부서진다. 치솟은 물이 끝에서부터 하얗게 부서져 내리고, 모래사장 위에서 모래를 한아름 쓸어간다. 발 끝을 간질이다가, 온 몸을 후려치다가, 발 끝에도 닿지 못하고 돌아가는 파도. 저 멀리 보이는 수평선과, 그 너머에는 존재하지 않을 세계를 상상한다. 세계와 세계 사이 존재하고 있을 작은, 거대한 틈을 상상한다.
  파도가 친다.
  녹음으로는 담아낼 수 없는 소리가, 심장 위를 후려치고 무언가를 들고 나가기를 반복한다. 내가 지내던 곳에는 늘 바다가 보였다. 연구실은 혹시 탈출한다면 사람에게 피해를 입히지 않도록 섬에 지어두었고, 학교도 똑같은 이유로 바닷가에 있었다. 나는 바다 근처에서 태어났다는 말을 들었다. 나를 가졌던 곳도 바다 근처였다. 나는 늘 바다의 곁에서 자랐다.
 
  하늘 높은줄 모르고 치솟은 물이 다시 넓은 품으로 돌아간다. 나는 희미하게, 저들은 대양에 속박된 몸일까, 하고 생각한다.
 
  서서히 생각이 사라진다. 파도의 소리, 해가 진다. 해는 지고, 밤이 찾아와 달이 떠오르고, 달이 진다. 해가 다시 떠올라 하늘을 불태우고, 푸르게 여명을 이끌어내고, 또다시 파란 하늘이 된다. 바다는 파아란 색으로 투명하게 빛나다가, 붉게 타오르다가, 검게 가라앉는다. 별이 빛나고, 달이 지고, 해가 진다. 파도가 친다.
  내 머릿속에, 내 주변에, 내 안에 파도가 들이친다.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나와, 파도와, 바다와, 그리고 무엇이 있어야 할까. 아무것도 없어도 좋다는 생각이 들고 나서 웃음이 나왔다. 이런 생각을 한게 얼마만일까. 그리도 강렬하던 슬픔이 옅어진다. 그런 제가 싫어서 억지로 상처를 헤집어본다. 그래도 아무렇지 않다. 파도소리가 일정하게 울린다.
  해가 지는 바다는 피로 가득 찬 것 같다. 그 물의 색은 선명한 붉은 색이지만, 아름답게 빛난다. 주황색으로 물들었다가, 붉은색으로 둥글게 불타오르는 해. 물비늘이 반짝거리는 바다. 온통 바다 뿐이다. 달이 희고 거대하게 떠오른다. 해가 지는 곳과 달이 뜨는 곳은 다를텐데. 희미하게 그런 생각을 했다. 그래, 그런 생각을 했다.
 
  “네놈은 여기서 뭘 하고 있지.”
 
  그냥, 바다를 보고 있어요. 파도가 치니까.
  희게 떠오르던 달이 당신이 오니까 황금빛이 되었다. 어째서 황금의 영광은 모두 태양이 가지고 가는 것일까. 저토록 선명하게 빛나는 것은 달인데. 만월의 밤이다. 당신이 있으면 그곳이 어디어도 만월이지만, 오늘은 선명하고 둥근 달이 떠올랐다.
 
  “뭘 멍하게 있나. 묻는 말은 제대로 대답해.”
 
  당신의 짜증섞인 얼굴을 보고 나서야, 나는 파도소리로 지금 이야기함을 깨닫는다.
 
  “바다를 보고 있어요.”
  “그런 것은 보면 알아. 학교를 빠지고 바다를 보고 있는 이유를 묻고 있다.”
  “…….”
 
  그러게, 왜 바다를 보고 싶었을까? 그의 말에 나도 선뜻 대답할 수 없어졌다. 파도가 발을 때린다. 강한 파도가 밀려와서 내 몸을 크게 흔든다. 토트는 얼굴을 찡그리며 팔을 뻗어 내 손을 잡고, 얇고 질긴 피부 아래로 뜨거운 사막 모래의 열기와 태양이 느껴진다. 그래, 태양이 느껴진다.
 
  “두려워서요.”
 
  말이 제멋대로 튀어나온다.
 
  “갑자기 두려워졌어요, 이 세상은 내가 알던대로 돌아가는 것이 하나도 없구나, 하고. 그런 생각을 하니까 다시 무서워졌어요. 내가 하는 사랑이 사랑일까? 내가 느낀 행복이 행복일까? 내가 생각하는 꿈은 꿈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당신은 아연한 얼굴을 한다. 나는 그런 얼굴을 바라보며, 실수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가장 곱고 소중한 감정을 모아서 안겨주어도 사랑이라고 확신할 수 없다. 나는, 실수했다.
  또다시 강한 파도가 밀려든다. 나는 휘청이고, 당신은 내 팔을 붙잡은 손에 힘을 준다.
 
  “정말로 하찮군, 한심한 이야기다.”
  “알고 있어요.”
 
  반사적으로 말을 내뱉는다. 휘청이는 몸을 바로 세우려고 노력하지만, 발 아래 모래를 쓸어나가는 파도 속에서는 쉽지 않은 일이다. 발 아래가 파인다. 내가 서 있는 곳은 깊어진다. 물은 서서히 내게 다가온다.
  파도가, 친다.
 
  나는 라는 걸 확인 받고 싶었어요. 셰키나 테오파네스 속에 아직 이 살아있는지 확인하고 싶었어요.
 
  “고래의, 울음소리를 들은 적이 있어요.”
 
  나는 다른 이야기를 꺼내 놓는다.
 
  “언제인지 기억나지 않아요. 아마, 물속에서 숨쉬는 연습을 하던 시기였겠죠. 넓은 바다를 향해서 헤엄치다가, 해류에 휩쓸려서 저 멀리 깊은 바다로 밀려간 적이 있어요. 숨을 쉴 수 있으니까, 무섭지 않아서, 그냥 그렇게 하염없이 물살에 휩쓸려서 어디론가 떠내려갔어요.”
 
  귓가에 끊임없이 보글거리던 그 소리를 기억한다. 공기가 아니라 물이 전해주던 그 조용한 소란과, 물고기가 헤엄쳐 가는 모습을 신기하게 바라보던 시야를 기억한다. 그래서 나는 눈을 감았다. 서서히 생각이 사라져가던 그 날의 나를 기억한다. 내가 바다가 되고, 바다가 내가 되고, 종국에는 그 무엇도 없어지던 그 순간을 기억한다.
 
  “위도, 아래도, 옆도, 나도, 바다도, 세상도, 그 무엇도 없어지는 순간이 와요. 문득 생각했어요, 이대로 죽어도 좋겠다고. 나는 살아도 산 것이 아닐텐데, 여기서 죽어도 죽은 것이 아니라고.”
 
  그 덤덤한 죽음의 기운을 떠올리면 죽어가던 너희들의 얼굴이 떠오른다. 반항 한 번 하지 않고 죽음을 받아들였던 선배의 얼굴을 기억한다. 전쟁 소식을 듣는 순간 눈에서 빛이 사라지던 그 사람을. 선하기 위해서 평생을 노력했지만 그 자신에게 배신당했던 사람을 기억하고 있다.
 
  “그러자 저 멀리서 고래 울음소리가 들렸어요. 멀고, 희미하고, 거대한 진동이 절 휩쓸고 지나갔어요. 다시 울음소리가 들렸을 때는 등 뒤였고, 그 다음에는 거대한 꼬리가 날 물 위로 밀어 올렸던 것을 기억해요.”
 
  수면을 불태우며 나를 찾던 너를 기억한다. 울며 선배가 죽은줄 알았다고 절규하던 작은 등을 기억한다. 너무 오랫동안 물 속에 있어서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 팔다리로 너를 끌어안았더니, 정말 서럽게 울었다. 선배가 죽는 것보다, 선배가 죽으려고 했다는게 두려웠어요. 선배를 살려도 산 것이 아닐까 두려웠어요.
 
  “나는, 그 모든 말이 고래의 울음처럼 들렸어요. 나를 꽉 채운 무언가를 강하게 울리고 지나가던 그 소리처럼.”
 
  고래를 신으로 모시던 과거의 부족들을 이해했다. 그 울음소리가 바다의 영혼을 부른다고 생각하던 자들이 옳았다고 생각했다. 죽어가던 영혼을 뒤흔들어 깨운 소리가 두렵고, 이것이 두려움인지 거대함인지 알 수 없어서 혼란스러웠다.
 
  “선생님은 고래의 울음소리를 들어 보았나요?”
 
  인간의 성대로 따라할 수 없는 그 진동이 몸을 휩쓸고 지나가는 순간을 아나요?
  토트는, 저 지고하고 위대한 지식을 지배하는 신은, 모양 좋은 눈썹을 작게 찡그린다. 나는 그 얼굴을 보고서 희미하게, 저 사람은 참 어리게 생겼구나. 하고 생각한다. 소년같다. 그하고 가장 어울리지 않을 말을 꺼내어 내 속에서 곱게 다듬는다. 어리고, 냉정한 소년의 얼굴을 하고 있다. 소년과 청년 사이에서, 차가운 얼굴을 하고 있다.
 
  “네놈은 파피루스가 흔들리는 소리를 들어 본 적 있나.”
 
  그는 끝을 알 수 없는 깊은 눈을 하고 나를 바라본다.
 
  “파피루스의 얇고 하늘거리는 풀이 서로 부딪혀서 나는 소리가 조용한 밤을 가득 채우던 날을 상상할 수 있나?”
 
  나는 천천히 고개를 젓는다. 상상할 수 없다. 나는 한 번도 그런 소리를 들어 본 적이 없으니까. 모르는 것을 안다고 대답할 수 없어서 고개를 천천히 내저었다. 토트의 푸른 눈이 완벽한 어둠과 거대한 달 앞에서 깊은 색을 띤다. 그의 동공 속에서 나는 그의 세계를 엿본다. 문득 그가, 정말로 나이들어 보였다. 이 세계만큼이나 나이를 들었다고 생각했다.
  모래바람이 저 멀리서 불어와 나일의 품 속에서 풍요로워 지는 곳. 모래 땅 위에서 나일이 실어다 주는 흙이 농사를 짓게 만드는 곳. 초목이 울창한 그의 도시. 근원을 알 수 없어서 그 누구에게나 위대했던, 저 스스로 이름을 부른 창조신의 세계를 본다.
  그의 세계에는 나일이 흐르고 있다. 물가에 사는 따오기가 파피루스 사이에 숨어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다.
 
  “그건 선생님의 세계인가요?”
 
  대답은 돌아오지 않는다. 나는 희미하게, 간질간질한 소리를 듣는다. 이건 억새풀이 스치는 소리를 닮아있다. 조용히 강이 흐르는 소리가 들리고, 희미하게 사람들의 목소리와 신성한 음악이 흐르는 곳. 일정하게 흔들리는 풀 속에서 가끔 따오기가 운다. 신성한 따오기들은 밤이 되어 달을 보아야 운다. 그 따오기 울음이 긍정을 노래한다. 오늘과 같은 만월이 검고 맑은 하늘 위에서 화창하게 빛나는 날. 파피루스가 흔들리던 날이 보인다.
  이것은 사라진 이야기이다. 그의 세계이다. 그는 자신의 상처를 꺼내 하여금 나를 위로하는 것이다.
  나는 내 팔 위에 있는 그의 손을 바라본다. 그 위로 내 손을 겹쳐본다. 피부 아래서 느껴지는 열기와 태양. 모래바람의 냄새. 하지만 그 속에서, 그의 피를 따라 흐르는 나일강의 지류를 떠올린다. 부드럽고 말랑한 피부, 조금 질기고 억센 감촉, 그 너머에서 느껴지는 선명한 열기. 강도 파도가 칠까?
 
  “나일은 아직도 흐르나요?”
  “네놈은 당연한 것을 묻는 재주가 있군.”
 
  파도는 어디에서나 친다. 강은 어디에서나 흐른다. 바다 비린내와 모래의 건조한 냄새가 뒤섞인다. 그 너머에서 희미하게 강의 물비린내가 느껴진다.
 
  “파도는 계속 칠까요? 고래는 언제나 울음을 울까요?”
 
  나는, 여전히 나인가요?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눈을 들여다 보면 파피루스 소리가 들린다. 그의 세계 속에서 사락사락하고, 얇고 보드라운 것이 흔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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