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걸로 30전 30패. 네놈의 패배다.”
“아니, 선생님은 봐 준다는 개념이 없으십니까?”
“충분히 봐 주고 있음에도 네놈이 못할 뿐이다.”
“아니, 그런 문제가 아니지 않나요.”
애초에 지혜의 신과 인간이 세네트를 둔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된다. 내가 살면서 이런 경험을 해 본적이 있어야지. 장기도 둬 본 적 없는데 신과, 그것도 세네트로 달 따먹은 신과 마주 앉아서 두고 있으니 기분이 참 묘하다. 뭐라고 해야하지, 이런걸 보통 ‘형용할 수 없는 기분’이라고 하던가. 진짜로, 뭐라고 말하기 애매한 기분이다.
다시 판을 차리고 말을 쥔다. 가위바위보로 순서를 정하자고 했다가 장렬하게 까인 덕에 지금은 그냥 처음에 패를 던져서 더 높은 수가 나오는 사람이 먼저 던지고 있다. 이번에도 승자는 선생님. 어떻게 31판 중에서 내가 먼저 하는게 10판이 안 될 수가 있는지.
한참 경기가 진행되는 꼴을 보고 있으니 이번에도 지게 생겼다. 아니, 뭐 이기려고 하는게 아니기도 하지만. 31판을 내리 지면 오기가 생긴다. 내가 못해도 무승부는 한 번 내고 싶다는 그런 마음.
그런 맥락에서 튀어나온 말이었다.
“그러고보면, 선생님이 달의 신인것도 세네트 경기에서 이겨서였죠?”
앗싸, 패 좋게 나왔다. 일단 세네트는 윷놀이랑 비슷한 것이라고 이해하고 있긴 하지만, 이것저것 다른게 꽤 있어서 정형화 하기 어렵다. 이집트에서 보편적이라고 하긴 했지만, 현대까지 살아남은 게 있어야지. 그런 의미에서 정통 세네트를 배우게 되었다는 건 정말로, 운이 좋다. 이거 나중에 까먹으면 서럽겠는데.
“흥. 콘수가 멍청했을 뿐이다.”
무덤덤하게 던진 패는 또 내 패를 한참 뛰어넘는다. 이쯤되면 진짜로, 뭔가 지혜보다는 운빨의 문제가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드는 것이다. 사실 세네트에서 이기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건 운빨이 아닐까? 라의 태양선도 운빨로 지금까지 살아남아온 거라면? 사실 나도 운빨의 노예가 아닐까?
선생님은 말을 움직여서 골인 시켰다. 이걸로 31패.
“네놈의 패배다.”
“아니 제후티님이 너무 사기적인게 아닐까요?”
“당연한 것을.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지?”
“이 세계의 위대한 창조자, 지혜를 관장하는 제후티님이시죠. 그리고 제 선생님인데 31판을 내리 이겨먹으셨고.”
한 판쯤 져 주면 어디가 덧납니까? 라는 말이 목 끝까지 차올랐지만 현명하게 입을 닥쳤다. 저 선생님 앞에서 주둥이가 가볍다고 그대로 나불거렸다가는 가벼운 주둥이에 숙제를 매달고 무거워지는 수가 있다. 나는 내일 죽어도 다시 5000년 역사 정리를 하고 싶진 않아. 미쳤다고 이집트 역사를 다시 정리해?
“네놈의 실력이 모자랄 뿐이다.”
“아, 아누비스는 저보고 처음하는데 그 정도면 잘 한다고 했는데.”
설마 또 잘못 알아들었나? 그런 말을 중얼거리고 있으니 선생님이 세네트 판을 정리하여 안겨준다. 동시에 머리 위에서 울리는 벨. 또, 일과시간의 끝이다.
“오늘도 한 시간만 더 있게 해 달라고 하면 쫓아내실거죠?”
“그렇다면?”
“삼십분만 있게 해 주세요.”
“꺼져라.”
오늘도 여전히 차가우시네요, 하고 눈을 찡긋거리면 창문으로 쫓겨나겠지? 좋아, 오늘은 여기서 포기하자.
“그럼 내일 봽겠습니다!”
세네트 세트를 품에 안고 뒷걸음질 친다. 등으로 문을 밀고 나가면 보이는 것은, 노을지는 복도. 학교가 마쳐도 해가지지 않는다니, 참 편한 삶이다. 돌아가면 힘들어서 어떻게 사나 몰라.
뭐, 기억 못하겠지만.
한 손에 들어오는 작은 말을 만지작거린다. 이렇게 또, 하루가 지나갔다. 뭐라고 해야할까, 일년은 365일이다. 수능을 앞두고 있을 때는 그렇게나 길게 느껴지던 날들이. 곧 죽게 된다고 생각하면 짧아서 두려울 정도다. 이제 얼마나 남았지? 200일 남짓? 꼭 수능날을 기다리던 기분이라 갑자기 웃음이 튀어나왔다.
그래, 열심히 살아야지.
어차피 사라질 기억이라고 해도, 지금의 이 모든 감정을 잃고 이 성장을 거친 나는 죽어버린다고 해도. 현재에 충실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게 인간으로서, 인간으로써 이곳에 불려나온 내 지위에 걸맞는 일이 아니겠는가. 이상적인 인간이라도 되어 보이지 않으면 안 되겠지.
내일은 무슨 이야기를 할까? 무난한 이야기를 고르는 것도 참 일이다. 이 패배를 빌미 삼아서 콘수의 이야기를 더 이끌어낼까? 궁금하기도 하였으니 재미있겠다.
콘수가 내어준 것은 5일치의 달빛. 태양과 같았던 달은 그 날로 빛을 잃고 차고 기울기를 반복하게 되었다. 그는 도박에 저 자신의 권능을 걸었다는 뜻이지. 그러면 나는 무엇을 걸어야할까? 인간의 권능, 인간이 아니면 가질 수 없는 것은 무엇이 있을까. 유한하고, 끝을 보이는 시간이라도 걸어야 하는 것인가. 그러게. 내일은 내 시간을 패배의 대가로 내어놓겠다고 이야기하며 들러붙을까. 선생님의 질색하는 얼굴이 떠올라 홀로 큭큭거렸다. 마치 야생동물 같다. 선을 지켜 조금씩 다가가면 곁을 허락한다. 조급하게 성을 내면 밀어내고, 완전히 떠난다면 다가온다. 적당한 거리를 지켜서, 조금씩. 그러나 토트 카도케우스라는 작자는 아무리 노력해도 어차피, 곁을 허락하지 않을 신이다. 그래서 더욱 다가가고 싶어지는 것이지만.
뭐 아무래도 좋다.
“아누비스를 찾아서 세네트를 두자고 할까. 여차하면 내 방에서 자라고 하면 되니까.”
지금 이 순간에 충실하지 않으면, 이 덧없는 순간이 아깝지 않은가.
2018.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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