셰키나 테오파네스는 때때로 저 자신이 그저 껍데기만 남은 무언가로 느껴졌다. 닳고 닳아서, 결국 겉만 남고 속이 모두 갉아먹힌 무언가. 제 속에서 미쳐 날뛰는 감정이 결국 속에서 끝나버릴 때, 죽고 싶다고 절규하는 영혼을 두고 덤덤한 표정을 지을 때, 저 자신이 껍질로 느껴졌다. 그 안에 마땅히 있어야 할 모든 것을 멸망하는 세계의 번제물로 바쳐버린 사람. 섬세하게 조각한 인간의 형태를 지닌 무언가.
모두 살아있어서 할 수 있는 생각이다.
슬픔이 개미지옥이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죄책감을 덜어주는 슬픔은 날카로운 칼이다. 나를 긁고, 베고, 찌를 수 있는 효율적인 도구. 하지만 손질할 수 없는 칼. 언젠가 이 칼도 닳아버린다. 슬픔이, 외로움이, 서러움이, 죄책감이 닳아 없어지면 나는 무엇으로 너희를 추억해야할까. 망각은 죄가 된다. 나는 어째서 기억을 버틸 수 없어 서서히 내던지는 걸까.
감정이 흔들리면 도서관을 찾았다.
제어할 수 없는 능력과 함께 도서관을 찾으면 늘 비참했다. 타고난 능력조차 제어하지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모두를 지키겠다고 생각했을까? 거대한 책장 앞에서 즐거움을 표하는 내가 꼴사납다. 잃은 것을 떠올리며 저를 타일러도 텅 빈 속은 상처입을 마음이 남아있지 않다. 이미 아물어버린 상처를 누르는 어린아이처럼, 조퇴하기 위해서 아직 아파야한다고 자신을 타이르는 학생처럼, 몇 번을 반복한다. 너는 혼자 살아남았어, 그들은 모두 널 살리기 위해 죽었어, 죽으려면 행복해져야지. 슬픔 속에서 행복해 질 수 있을까? 이런 날이면 살기위해 불행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 비참했다. 살고싶지 않은데.
몇 번이고 읽었던 이집트 신화를 다른 판본으로, 다시 읽는다. 오그도아드에 대한 이야기, 케메누에 대한 이야기, 이미 사라진 문명과 신앙에 대한 이야기를 천천히 씹어 삼킨다. 신화는 좋아해, 아버지가 늘 해 주던 이야기니까. 우리의 신은 이런 형태가 아니었지만, 모든 신화는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버지는, 어떻게 되셨을까. 어머니는? 내가 사랑하던 사람들은 모두 스러졌다. 세계와 세계사이 어딘가의 공허로 사라졌다. 적막 속에서 고독이 찾아든다.
돌아가고 싶었다.
죽음을 목도하고 실감하지 못하는 일은, 서글프고 외롭다. 나는 널 떠올리고, 우리를 떠올리고, 그곳을 떠올린다. 영영 돌아가지 못하리라 생각하며, 돌아간 자신을 상상한다. 내 기억속에는 이토록 선명하게 남아있는데, 흔적도 없이 사라졌을까? 사라졌겠지. 와닿지 않는다. 돌아가고 싶어, 돌아가고 싶어. 이제 눈물이 차오른다. 타인이 아닌 나를 위해서 울고 있다. 역겨워, 꼴사나워, 죽고싶어. 얼굴을 양손에 파묻는다. 소리죽인 흐느낌이 고적한 도서관 속에 깔린다. 달칵,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린다.
거침없는 발소리는 마음가짐을 고쳐먹을 시간도 주지 않는다. 바로 앞에 멈춰서는 구둣발소리. 눈물젖은 얼굴을 들어올리는 손. 시린 푸른색의 눈.
“왜 여기서 울고 있지.”
“……서글퍼서요.”
반항하지 않는다, 숨기지 않는다, 절대자에게 순종한다. 순종은 사랑에서 오는가 신앙에서 오는가. 나의 사랑은 신앙을 닮았으니 구별할 필요 없다. 눈을 내리 깐다. 늘 하던대로, 왼쪽 아래를 응시한다. 어딘가의 신앙에서 전승되는 구절. 창세의 따오기, 누군가 자신의 이름을 스스로 불러 신이 되고, 세계의 이름을 불러 세계가 되었다. 그가 따오기 신, 지혜의 지배자, 제후티이다.
그러면 이 자는 세계가 존재하기 이전을 알겠구나. 알아차리니 호기심이 일었다. 호기심이라 칭하는 자신을 경멸하며 나는 당신을 올려다 보았다. 당신의 눈 속을 들여다보기 위해 발악한다. 사랑하는 사람, 사랑하기로 결정한 사람. 당신의 눈과 얼굴에서 나는 심장 깊숙이 들이치는 사랑을 느낀다. 사랑은 긴장과 괴로움과 동일한 느낌을 준다. 즐거움과 긴장, 그 아픔이 뒤섞인 심장을 끌어안고 나는 용기를 그러모은다. 바싹 마른 입에서, 가냘프고 볼품없이 흘러나온 목소리로 감히 묻는다.
“당신은 세계가 멸망한 뒤에 어떻게 되는지 알고 있나요?”
“네놈도 알고 있을 터인데.”
“아뇨, 저는 알지 못해요. 저는 세계 밖에 있어 본 적이 없으니까, 제 세계가 번제물이 되어 사라질 때 이곳으로 떨어졌으니까. 제가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건, 울며 저를 사랑한다 절규하던 아이의 목소리 뿐이에요.”
울먹이던 너를 떠올린다. 나를 위해 모든 것을 토해내고 죽어가던 이들의 눈을 떠올린다. 끝을 모르고 치솟는 아픔에 내 아픔을 모두 내던졌던 순간을 떠올린다. 떠올린다, 생각한다, 뒤진다. 그 어디에나 ‘무언가’가 존재한다. 나는 ‘무無’를 상상하지 못한다.
“그러니 제후티, 제발 말해줘요. 세계가 사라지면 무엇이 남나요?”
그는 침묵한다. 오랜 침묵이 고적함을 되돌린다. 눈 앞에 존재하는 자가 존재하지 않는다. 어느 순간 창세를 이해한다. 모든 것이 그고, 그가 모든 것이니, 나는 이 곳에 오직 홀로 존재한다. 그의 권역 밖에서 오롯히 홀로 존재한다. 아아, 그래서 내가 그를 사랑할 수 있구나. 자기애를 넘어선 사랑을 줄 수 있는 건 오직 나 뿐이구나.
거대한 깨달음 끝에 진동이 울린다.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온 우주가 대답한다고 생각했다. 온 공간의 말을 듣는다. 토트의 눈 속에서 금빛이 휘몰아친다. 나는 그의 벌린 입 속에서 우주를 본다. 저 치를 찌르면 그 속에서 피 대신 금빛 모래가 쏟아지겠지. 저 인간 모양의 곽 안에는 우주가 맥동한다. 나는 그의 눈 속에서 은하를 발견했다는 착각에 젖어든다.
“공허 속에서 누와 누에트가 태어나기 이전, 그 무엇도 없는 곳에 오직 홀로 존재했다. 존재 조차 없던 곳에서, 입 끝에 걸린 이름을 불러 모든 것이 시작했다. 사라지는 것도 다르지 않아. 무엇도 없던 때로 돌아갈 뿐이다.”
“무엇도 없다는 건 뭔가요? 제후티, 저는 공허를 상상하지 못해요. 그건 제 인지 밖의 일이니까요.”
“오래 지나지 않아 알게 되겠지.”
지치고,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 인격을 지니기 이전의 신성, 그 신성이 지녔던 음색. 그의 등에서 날개의 환상을 본다. 코트자락이 신성이 되고 양 소매가 날개가 되어 펄럭인다. 등 뒤로 흘러넘쳐 휘날리는 코트, 다리를 휘감고 올라선 부츠. 그의 셔츠가 한 순간 시야에서 사라진다.
말과 말이 맞물려 회전한다. 운명의 수레바퀴와 같이 우리의 사고는 구른다. 돌고, 돌아서, 멸망한 세계가 다시 탄생하고 탄생한 세계가 멸망한다. 긴 시간 속에서, 우주 속에서, 이 세계 속에서 나는 당신의 진실을 엿본다.
“너무 서글퍼 말아요.”
저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이 날카롭게 그에게 파고든다. 무엇도 없어 상처받지 않는 존재. 닳아 없어진 껍질 앞에, 애초에 무엇도 들어있지 않았던 곽이 서 있다. 당신은 닳아 없어 질 것이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 당신이 우주이니, 그 앞에 서 있는 당신의 속에는 그 무엇도 들어있지 않고 모든 것이 들어있다. 인지의 범위를 초월한 것에 두려움이 밀려오고, 내가 아는 당신을 지워낸다. 보이고 보이지 않기를 반복하는 당신에게, 나는 사랑해야한다는 의무감이 아닌 오직 사랑으로 손을 뻗는다.
“당신이 느꼈던 첫 고독이 모두의 고독이 되고, 첫 환희가 모두의 환희가 되었으니, 홀로 서글퍼 말아요. 당신이 느낀 모든 것을 우리가 느끼니, 우리의 사랑 또한 당신이 느꼈던 것이에요.”
“잘도 말하는군. 네놈은 이곳의 사람이 아닌 주제에.”
“하지만 당신의 세계에 서 있어요, 제후티. 나는 유일하게 당신 아닌 사람으로 이곳에 존재해요..”
침묵이 먹물처럼 번져나간다. 도서관은 한 순간 우주가되고, 그 속에서 거대한 존재를 느낀다. 두렵지 않다. 나는 그 창세의 순간을 알고 있다. 내 능력이 기억하고 있던 순간을 어렵지 않게 이끌어내 무의식에 덧댄다. 두려움을 지워낸다. 푸른 눈동자가 금빛과 뒤섞인다.
어떻게든 흔적을 남기기 위해 내뻗은 칼날 끝에 무언가 걸린다.
그는 한숨을 내쉰다. 그 위연한 실루엣이 드디어 인간으로 돌아온다. 내가 알고 있던 그 신의 모습이다. 고독을 이름붙이고 인간을 시험하던 자다. 참았던 숨을 느릿하게 내쉰다.
“종알종알 잘도 떠들어대는군.”
“해야만 하는 말이라고, 생각했으니까.”
다시 눈을 내리깐다. 카두케우스의 성을 지닌 토트가 내 얼굴을 들어올린다. 시리도록 차가운 눈을 다시 한 번 마주한다. 그러나 그 속에 우주는 없다. 알 수 없는 덩어리가 얽힌 눈을 마주한다. 이번에는 확실하게, 무슨 말을 하는지 인지한 채로 당신을 바라보며 입을 연다.
이 말은 분명 당신을 멀리하게 되겠지. 단어의 음절 하나하나가 공허하다. 이미 멈추기에는 늦어버린 말이다.
“사랑하니까, 당신을 사랑하니까 그런 말을 하고 싶었어요.”
나는 다시 한 번 나 자신에게 이른다. 그의 무표정한 얼굴을 바라보며 느릿하게, 새겨넣듯이 반복한다. 사랑하니까요. 저는, 당신을 사랑하니까. 죽기 위한 변명을, 진심이 될 때까지 이야기한다. 토트 카두케우스의 눈은 깊이를 알 수 없는 푸른색으로 잠겨든다. 겨우 잡았던 실마리가, 맞물렸던 생각이 어긋나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한다. 입에서 나오는 모든 언어가 당신을 부정한다. 그러나 죄책감이 혀를 잡아끌고 있다. 나는 사랑하지 않으면, 행복해지지 않으면, 꿈을 이루지 않으면 죽을 수가 없는데.
문득, 사랑은 내가 가진 고독의 이름이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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