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별의 날에 할 말은 무엇이 좋을까? 역시 다시 만났을 때의 첫 인사를 정하는 게 좋을 것 같아.
‘다시 만났을 때는, 역시 환하게 웃는 걸로 인사를 대신하기로 해요.’
‘아아, 약속하지.’
나는 그 낮은 목소리에 울 것 같은 기분이 되어서 웃고, 그는 그저 손을 뻗어 눈물을 닦아주려 하다가─
아, 또 이 꿈이다.
망할, 자습시간에 자다가 꿈을 꾼다니, 추태도 정도가 있다. 고 생각은 하지만,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다. 일단 고등학교는 너무 힘들다니까. 아침부터 밤까지 한 교실에 앉아있는 건 여러 가지 의미로 곤욕이다. 아아, 아직 4시간이나 남았다니. 정말로 싫다.
“오늘은 야자 쨀까?”
금요일이잖아. 하기 싫다. 그런 얼굴을 하고 있으면 딱히 돌아오는 말은 없다. 사실 내가 생각해도 별 이유를 다 대며 도망치고 있으니까 별로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고. 그래도 새삼스럽게 이야기하는 이유는, 그저 감일까. 오늘은 학교에 있으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진짜, 오늘은 하면 죽을 것 같아.”
“그럼 가던가.”
“역시 그렇지? 좋아, 교무실 갔다 올게.”
졸음기가 완전히 가시지 않아 멍한 몸이 삐걱거린다. 지쳤다. 게다가, 뭔가 잊어버리고 있다는 느낌도 가시지 않고. 이건 몇 주 전부터 가시질 않는다. 기억 한 구석이 완전히 비어버린 것 같은 느낌. 텅 비어서, 무언가 잊어버리고 말았다는 의무감. 마치 누군가를 잊어버리고, 소중하게 간직해야 할 기억을 잊어버린 것 같은 불안감. 도대체 만사에 집중할 수 없게 만드는 감정이다. 그나마 지금 시험이 모두 끝나서 망정이지, 아직 남아있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다시 글자가 읽히지 않아서 필사적으로 노력하고 있을 것을 생각하면 조금 아득하다.
뭐, 어쨌든. 오늘은 집에가서 쉴 예정이다.
“그럼 나는 간다.”
“잘 가라 배신자 놈.”
“기숙사 파이팅!”
“아, 오늘은 집에 가거든?”
교복을 챙겨 입고, 가방을 챙기며 평소와 별반 다를 바 없는 대화를 나눈다. 아무렇지 않은 척 필사적으로 행동하지만 둘 다 어딘가 공허하다는 사실은 서로 잘 알고 있다. 마치, 둘이 동시에 무언가를 까먹은 것 같은 감각. 진실로 인간의 인지 범위 바깥에서 무슨 일이라도 일어나고 있는가?
어이없는 생각이 떠오르지만, 완전히 부정하지 않는 자신이 조금 우습다.
평소와 다를 바 없는 하굣길. 서서히 해가 지고 있는 거리와, 이미 겨울이 되어 꽁꽁 싸매고 있는 사람들의 옷. 얼어서 깨질 것 같은 몸과, 칼날 같은 바람. 익숙해져서 별 감흥도 느껴지지 않아야 할 것들에게서 위화감이 느껴진다. 어느 절대 신의 기분에 따라서 바뀌는 계절을 보았던 기분이다.
버스가 도착하고, 창밖으로 지나가는 풍경을 바라보며 위화감은 깊어진다. 저 노을, 저 하늘은 무언가를 을러주고 있는데, 나 홀로 읽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집과 가까운 정류장. 학교에서부터 만지작거리고 있던 물건을 꺼낸다. 누군가의 이름이 적힌 물건들. 그 옆에 작게 메모되어 있는 ‘잊지 마’ 라는 말. 분명히 내 글씨체이지만 쓴 기억은 없다. 게다가 이 재질은 가지고 있지 않다. 정말, 나는 무엇을 잊었는가?
한숨을 푹 내쉬고 돌아서는 순간, 누군가와 눈이 마주친다.
아, 키 크다. 외국인인가? 왜 우리 동네에 있지. 머릿속을 부유하는 생각을 굳이 제어하지 않다가, 지그시 바라보는 눈을 제대로 마주하는 순간, 모든 사고가 정지한다.
나를 알고 있다. 어쩌면, 나도 그를 알고 있다. 잊어버린 기억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르는 사람. 기다렸다. 분명, 나는. 어지럽게 조각난 기억과 빈자리의 흔적이 물밀듯이 쏟아진다. 어느 것 하나 언어로 규정할 수 있는 것이 없다. 나는, 저 자에게, 무언가를 약속하였을 터인데.
쏟아질 것 같은 눈물을 가리려 환하게 웃는 일 밖에 할 수 없다.
“…….”
마주 웃어주는 얼굴이 슬퍼 보이는 것은 분명 착각이 아닐 것이다. 분명 나도 형편없는 얼굴을 하고 있겠지. 자리를 피해야 하는데, 익숙하지 않은 얼굴과 모르는 사람에게 이렇게 할애할 시간은 없었을 터인데, 우스울 정도로 발이 움직이지 않는다.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사이, 코끝에 무언가 차가운 것이 떨어진다. 손끝에, 나뭇잎에, 온 시야에 흰 눈꽃들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아, 첫 눈이다. 이 지방에는 좀처럼 오지 않는 눈이, 거짓말처럼 내리기 시작한다.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고 있으면, 어딘가 익숙한 낮은 목소리가 들린다.
“눈을, 좋아하나.”
“아, 네.”
분명 오늘 처음 만난 사이인데도, 이런 말을 함이 어색하지 않음은.
“그, 그쪽은 어떤가요. 첫 눈인데, 눈 좋아하시나요?”
당신이 내가 잃어버린 기억의 주인공인가?
2017.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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