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난 이의 사랑이 산 자를 살게 한다는 사실은 늘 처참하다. 인간으로 태어나 의심을 배운 자들은 언젠가, 떠난 이를 의심하게 된다. 내 기억을, 당신의 존재를, 내게 남은 흔적들을 의심하며, 부정하고, 잔불처럼 남은 온기에 의존하여 숨쉬게 된다.
그러니 우리는 저 스스로 살아갈 방법을 찾아나가야 한다.
우리 스스로 호흡하지 않으면, 내 세계의 공기를 빨아들이지 않으면, 언젠가 누군가를 갈구하며 매달리게 된다. 조각난 애정을 그러모아 울게 된다. 동경은 본디 닿을 수 없는 것에 대한 질투를 곱게 다듬은 것. 너무나 당연한 말이지만, 우리는 쉬이 손에 쥘 수 없는 것만을 동경한다.
수 천년간, 우리는 절대적이고 완전한 사랑을 동경했다.
신이 인간에게 주는 사랑, 인간이 신을 숭배하는 마음, 어미의 사랑, 부모의 사랑, 동물을 아끼고 세상을 사랑하며 아름다움을 찬미하는 노래. 그 모두가 사랑이고, 이별이고, 우리의 삶을 아름답게 수놓는 감정이고, 동경의 대상이다. 현실은 잔혹하다. 신은 인간에게 변덕스러운 감정을 휘두르고, 인간은 신을 정치의 도구로 삼으며, 인간은 동물을, 세상을, 누군가를 원망한다. 세계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진 자는 많지 않다.
그러나 그런 사람이 존재한다.
야나기 켄은, 괜찮다면, 모형정원에서 그런 인간이 되고 싶었다. 제가 죽어도 상관 없다. 기억을 잃은 자는 그대로 스러져 사라진다. 그렇다면, 한 순간 타올라 사라질 ‘나’를 만들어낸다면, 그건 아름다운 인간이고 싶다. 사랑을 노래하고, 아름다움을 찬양하고, 당신들에게, 인간이란 이러한 존재라 이야기하는 사람이고 싶다.
죽음 이후에, 영영 만나지 않을 사람들에게, ‘켄’이라는 이름이 조금쯤 따스하고 상냥한 온기로 기억될 수 있도록, 그렇게 살고 싶다.
세상은 늘 마음 먹은대로 흘러가지 않지만.
절대적인 지식을, 가질 수 없는 정보를, 배움에 대한 열망을, 그 모두를 충족시켜 줄 수 있는 당신을.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단어들로 얽힌 감정을 모두 손에 쥐어주고 싶었다. 저 차가운 얼굴에 금이 가는걸 보고 싶었던걸까? 걸맞은 단어를 찾지 못한 감정은 실타래에 불과하다. 나는 이 실타래가 당신에게 조금이라도 보드랍기를 바라며, 도서관의 책상 위에 곱게 펼쳐 깔아놓는다.
“선생님.”
작별의 시간이 서서히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신은 이곳에 없다. 당신들은 인간을 배웠다. 사랑을, 인간으로서 살아가기 위한 조건들을, ‘인간다움’을 잔뜩 손에 쥐었다. 그 조각들을 주기 위해서 쿠사나기 유이와 나는 이 모형정원을 정신없이 뛰어다녔다. 보드랍고 아름다운 조각들을 주워 모으기 위해서, 산산조각난 감정의 스태인드글라스가 아름답게 반짝이기를 빌면서.
“오늘은 여기서 책을 읽어도 될까요? 마지막으로 읽는 책이라면, 별을 보면서 읽고 싶으니까.”
거절의 말을 예상한다.
“거절한다.”
토트 카도케우스는 변하지 않는다. 그 사실 하나로 안심한다. 내가 깔아놓은 감정은 당신에게 얽혀들지 않으리라. 그 사실이 나를 안심하게 만든다. 처절한 작별은 이미 질려버렸다. 로키의 숨기지 못한 상처가, 토르의 조심스러운 외로움이, 타케루가, 츠키토가, 하데스가.
우리의 작별을 준비하던 그 조심스러움이 내 목을 조른다. 나는 부드러운 천 속으로 잠겨들어 죽어간다. 그 조심스러움. ‘나’는 사라져 야나기 켄은 죽고, 현으로 다시 살아가며 내 인생에서 깔끔하게 사라질 이 일년. 나는 책임져야 할 변화를 너무나도 많이 만들어 놓았다. 당신만이, 지고하며 위대하신 지혜의 따오기만이.
변하지 않았다.
“뭐, 그럴 줄 알았습니다. 날이 추우니까, 조심하세요.”
무슨 말을 내뱉는지도 모르고 주워 섬기는 단어들. 눈물을 가리기 위해서 부러 올려놓은 목소리. 우리의 삶은, 관계는 이렇게 끝난다. 나는 내일 다시 야나기 켄이 되어 마지막 날을 장식하고, 죽음을 모른척 굴고, 문을 나가면 잊혀진다는 사실에 묘한 감정을 느끼며 졸업한다. 벚꽃의 어색함을 만끽하며, 제우스에게 받아낸 지식만을 품고, 평범한 삶의 궤도 위로 몸을 던진다.
그러니 당신도 그대로 변하지 않아야한다.
반복되는 단어, 우리는 지고지순한 사랑을 동경한다. 이상적인 인간을, 세상의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시선을 동경했다. 야나기 켄은 그 모두를 손에 쥔 ‘이상적인 인간’이다. 인간의 대표라면 마땅히 그래야 하는 모습에 부합한 사람. 그러기 위해서 노력했다.
세상은 아름답다. 나는 이 눈에 비친 세상을 사랑한다.
거짓 하나 없는 감정의 뒷면은, 산산조각난 마음이 붙어있다. 빛 아래 반짝이는 스테인드 글라스는 조각난 마음을 이어 붙여 만든다. 지금은 친구가 되었다고 하여서, 지금 우리가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한다고 하여서, 우리의 상처가 사라지는가? 신의 무지가 인간에게 휘두른 칼자국이 아무는가? 그럴 리가 없다. 그저 끌어안고 죽을 뿐이다. 내가 올바른 인간이라 사랑하였다 말하는 이들의 우정은, 때때로 목을 조른다. 저 고귀한 창조자만이 저를 처음과 다름 없이 여긴다. 그러니 되었다. ‘야나기 켄’은 모형정원과 함께 평화로운 엔딩을 맞이한다. 누구 하나 정도는 바꾸지 못해도 된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이 거대하고 완전한 착각을 지휘한 운명의 신은 누구인가?
토트 카도케우스는 야나기 켄이 떠나고 나서도 오래도록, 모형정원의 감촉을 떠올렸다. 정교하게 만들어져 현실과 다를 바 없던 그 정원을 떠올리며, 때때로 그에게 달려오며 선생님! 하고 외치던 목소리를 기억해낸다. 저 멀리서도 선명하게, 귀에 틀어박히던 경쾌한 목소리. 눈에 그득 들어차 있던 동경과 경이, 그의 말에 상처입고도 순진하게 질문을 끌어안고 고개를 내밀던 눈동자. 가까이 다가붙었을 때 그의 머리카락에 와닿던 조심스러운 손가락과 그 목소리.
선명한 동경과 숨길 수 없던 애정이 때때로 그의 세계에 달라붙었다.
토트 카도케우스는 신으로 태어나 의심을 배우지 못했다. 그의 오만은 거짓을 빼앗아가고, 그의 지식은 거짓을 경멸한다. 그의 의식 속에 그득 들어 차 있던 애정의 잔불이 마른 땅 위를 휩쓴다. 타오르고, 타오르고, 재가 남은 곳 위에서 불사조처럼 다시 뭉친 불꽃이,
그의 이성을 흐린다.
충동적으로 향한 시선의 끝은 어디인가?
죽어 다시 태어난 자의 잔상을 사랑한 이야기는 존재하는가?
인간은 그 무엇도 장담할 수 없으니, 우리는 그저 다시 떠올린다. 떠난 이의 사랑이 산 자를 살게 한다는 사실은 처참하기 그지 없으니, 우리는 저 스스로 호흡하는 법을 배워야한다. 제 세계의 공기로 숨쉴 수 없다면, 숨쉬는 법을 배울 때 까지 다른 세계의 공기를 앗아올지언정.
신과 인간의 시간은 다르게 흘러간다. 오직 그 사실만이 현에게 비극이었다.
2018.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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