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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의 길

admin 2018.11.18 21:46 read.15

 

  온 몸에 뒤집어 쓴 검은 피. 메시아의 검으로 사도를 베어버렸을 때야 비로소 묻어나는, 싸한 혈향. 진청의 색이 눈 안에서 거칠게 일렁임을 느낀다. 검은 죄악의 액체를 갈구하며 미친듯 날뛰고, 붉음조차 검게 물들이고자 난리치는 그 충동을 느낀다. 입술은 호선을 그리고, 성대는 흉포한 울림을 내놓으며, 검은 다시 사도의 피를 갈구한다. 이제 누가 사도인지 구분하기 어려울 지경이다. 
  이럴 때 나는 당신의 하이얀 팔을 마치 성물과 같이 받쳐 들고, 날카로워진 이빨로 피부를 찢어낸다.
  흐르는 피로 입술을 적시고, 검은 죄악과 진청의 번뇌를 씻어낸다. 검고 진득한 피의 바다. 검이 춤추고 힘이 남긴 궤적이 빚어낸 성전의 흔적. 그 위에서 순백으로 빛나는 당신과 검게 번들거리는 검. 그리고 세례를 받듯 당신의 피를 마시는 나. 성스러운 목표라도 있는 양, 누군가를 구원하기 위한 행동인 양 연기하고 있다. 그러나 당신도 나도 안다. 죽기 위해 싸워나가고 있음을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무대 위의 배우처럼, 줄 달린 인형처럼, 어쩌면 책 속의 이야기처럼 무의미한 전투를 반복한다. 죄악을 쌓고, 순교자의 길을 걸어 사도를 베어내고, 메시아의 피로 번뇌를 씻어내고. 레일위를 달리듯 정형화 된 이러한 인생. 그래, 미쳐버린 세계에서 이 또한 좋다
  검은 피위에 떨어진 붉은 피가 진청의 힘을 달래고, 나도 당신의 흰 피부 위에 입술을 부비며 연심을 달랜다. 사모의 마음은 늘 불꽃과 같으나 증오의 감정은 생명과도 같아, 죽음을 향해 달리는 일을 멈출 수 없게 만든다. 그러니 사랑아, 죽어줘. 연심 따위가 내 고귀한 목표를 망칠 수는 없는 노릇이잖니? 사랑스러운 당신은 조금만 덜 성스럽고, 사사로운 감정에 젖은 나는 조금만 눈을 감으면 된다. 목을 타고 내려가는 진득한 액체가 검은 번뇌에 젖는다. 어둠에 젖어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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