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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가 끝나면

admin 2019.11.10 02:35 read.58

​​​​​  파르바네라고 하는 작자는, 때때로 그 자신의 천재성에 잡아먹히는 일이 잦았다. 제가 가진 재능에 인간성을 잃는다고 말하면 우스운 일이나, 카뮤는 때때로 작고 예의 없는 후배의 천재성에 전율을 느꼈다. 저것은 잃은 것이 아니라 내어 준 것이다. 맹수에게 제 팔을 주고 목숨을 취하는 일과 다르지 않았다. 파르바네에게 있어서 인간성이란 맹수에게 내어주기 위해 존재하는 팔과 하등 다르지 않아서, 그는 손쉽게 제 인간성을 내던졌다. 하나의 현상으로 그곳에 존재하기를 꺼리지 않았다.

  아마 그 날도 그러했을 것이다. 몇 주에 걸친 긴 작업을 끝낸 파르바네는 먼저 카뮤의 집으로 돌아가 쉬고 있었고, 그 날은 마침 카뮤의 일이 오랫동안 이어지는 날이었다. 해가 지고, 달이 떠오르고, 별이 차가운 빛을 형형하게 뿌려대고 있을 무렵. 카뮤는 달칵 소리를 내며 문을 열었다. 희미한 빛이 밝혀진 현관 앞, 파르바네는 높은 곳에 올라앉아 망부석처럼 굳어 있었다. 소리에 반응해서 고개를 돌리는 몸짓은 어딘가 위화감을 불러 일으켰고, 카뮤를 바라보는 눈은 먼 곳을 바라보는 듯 했다.
  파르바네는 환하게 웃었다.
 
  “선배.”
 
  카뮤는 이 세계에 오직 저만 남았다고 느꼈다.
 
  “막이 내려갔네요.”
 
  파르바네는 카뮤의 시선 속을 헤엄치듯이 느릿하게 일어섰다. 치맛자락이 물처럼 미끄러져 내리고, 머리카락이 흘러내려 눈을 가렸다. 검은 색인지 푸른색인지 알 수 없는 눈이 우아한 궤적을 그리고, 닫힌 문이 하나의 세계를 만들어냈다.
 
  “저는 무대를 떠날 준비가 되지 않았는데 무대는 저를 쫓아냈어요. 통탄스러운 일이죠. 그러나 공교롭게도 여기, 막이 내려간 무대는 사람의 시선이 닿지 않아요. , 그 누구도 보지 않는 무대에 오를까요? 둘이서 낭만이라도 노래 해 볼까요?”
 
  시체가 일어서기를 기대하고 불타 사라진 것이 돌아오기를 기대하는 어조였다. 기적과 가장 어울리지 않는 얼굴을 하고 파르바네는 나비의 날갯짓처럼 하늘하늘 움직였다. 올려다보는 눈은 푸른빛이 반짝였고, 영혼 바닥까지 들여다보일 정도로 깊게 일렁이는 홍채는 깜빡일 때마다 흔들리는 촛불의 불꽃을 따라 텅 비어 잘게 조각난 빛을 흩뿌렸다. 카뮤는 이대로 무시하고 들어가면 된다고 생각했으나, 어쩐지 그럴 수 없었다. 파르바네의 목소리가 기이하게도 음악을 닮았다. 첼로와 눈보라가 자아내는 새벽의 추위와 같은 것. 마알간 밤을 닮은 흔들림. 그렇기에 카뮤는 층계에 발을 올리고서도 몸을 돌리지 못하고, 낮은 목소리를 어둠속에 던져넣었다.
 
  “무얼 잘못 먹기라도 했나? 헛소리로 내 시간을 낭비하게 만들 셈이라면 사양하도록 하지.”
  “매정한 말은 그만둬요, 선배. 낭만을 노래할까요? 사랑은 어떤가요? 사랑해달라고 한 마디만 한다면 나는 당신을 완벽하게 사랑할 수 있어요. , 이미 사랑하고 있으니까 의미 없는 말인가요. 그러면 당신도 날 사랑해줄래요? 거짓이라도 좋아요. 그저 한 순간의 유흥이라도 좋아요. 이 순간을 이대로 보낼 순 없잖아요.”
  “어리석은 말은 그쯤해라. 네놈은 아침부터 일정이 있었던 게 아닌가? 여흥에 취하는 건 그만두고 내일을 위해 쉬어두는 것이 좋아.”
 
  파르바네는 카뮤의 냉정한 말에 기꺼운 듯 웃었다. 환한 기쁨이 혀끝에서 터져나가고 낭랑한 웃음소리가 등을 두드렸다. 해사하게, 달고 아름다운 것을 혀끝에서 녹여먹는 듯한 어조로, 파르바네는 허공에 속삭였다.
 
  “하지만, 선배. 노래가 끝났는걸요. 나는 이곳에 있는데, 이미 막이 내려가고 사람들이 떠나갔는걸요. 선배, 선배. 노래가 끝났어요, 그러면 무엇이 남을까요? 왜 나는 아직 노래하고 있지요? 아무도 듣지 못할 노래를 반복하는 건 서러운 일이에요. 선배, 카뮤. 잠시라도 좋으니까 당신의 시간을 내게 줘요. 내 옆에 있어줘요.”
 
  화려하게 휘어지는 눈과 붉은 빛이 두드러지는 입술. 메이크업을 지웠음에도 파르바네의 피부 위에는 반짝임이 감돈다. 더없이 아름다운 모습에서 카뮤는 이질감을 느낀다. 그러니까 저것은, 잡아먹히고 있는 모습이다. 파르바네는 제 안의 무언가를 주체하지 못하고 휩쓸려 사라지며, 그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뻗고 있다. 카뮤는 그 순간, 우습게도 첼로를 배우게 되었던 날의 기억을 떠올렸다.
  설원을 달리던 잿빛 늑대들 사이에서 홀로 고고하던 순백의 늑대.
  신적인 것은 제 동족에서 멀어지기 마련이다. 눈에 띄는 것은 아름답지만 고독하다. 카뮤는 문득, 파르바네의 해사하고 말간 눈 속에서 외로움과 두려움을 읽어낸다. 아니, 그는 읽지 못했다. 그저 공허한 반짝거림 속에 매료되어서 충동적으로 뒤돌았다. 파르바네와 마주하며 그는 뒤늦게, 이 건방진 후배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은 나쁘지 않은 선택이라고 되뇌었다.
 
  “그렇게까지 부탁한다면 자비로운 내가 특별이 어울려주지. 영광으로 생각하는 것이 좋아.”
  “원하시는 대로. 당신이 원하는 건 모두 이루어줄게요. 그러니까 선배, 카뮤, 나와 노래해줘요. 새로운 노래를 시작해요. 무대에 오르죠, 둘 만의 무대를 시작하는 거예요. 당신이 원한다면 나는 비극의 줄리엣에서 혁명의 마리안 이라도 되어줄게요. 선배, 당신은 낭만을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사랑을 무엇이라 생각하나요?”
  “내게 사랑은 한숨이 만들어낸 안개라는 대답이라도 기대하나? 전부 시답잖은 것들이다. 내 사랑은 주군이고 조국이며, 낭만은 존재하지 않아. 현실에 지친 자들이 좇는 환상이 낭만일 뿐이다.”
  “당신다운 말이네요, 선배. 하지만 사람은 낭만으로 살아가요. 그 예전에 사람이 무엇으로 사는지 물어본 소설에서 사랑이라고 대답한 자가 있지 않았던가요? 사람을 죽이는 것이 사랑이라면 살리는 것도 사랑이고, 사랑에 목매게 만드는 것이 끝없이 만들어져 우리를 홀려온 낭만이니, 사람을 살게 하는 것은 낭만이죠. 당신의 충성도 그렇지 않나요.”
  “, 우스운 말을. 여왕님에 대한 내 마음을 어쭙잖은 낭만이라는 말 따위로 포장할 셈인가. 충성은 그리 가벼운 것이 아니다. 나는 하찮은 소설이나 유희에 홀려 맹세한 것이 아니야. 그것보다 무거운 마음이다. 홀로 고고하게 존재하며 나라를 지탱하는 여왕님을 지지하고 그분의 검이 되는 것. 이곳에 낭만이 끼어들 여유따윈 없다. , 따뜻한 곳에서 자란 네놈이 이해하지 못하는 건 모를 일도 아니다만.”
  “그런가요? 하지만 선배, 제게는 선배조차 낭만의 일부예요.”
 
  파르바네는 바닥에 내려선다. 촛불이 흔들리며 쏟아내는 희미한 빛으로 가득 찬 현관. 맨발은 바닥에 부딪혀 탁탁 소리를 내고, 파르바네는 제 머릿속에서 흐르는 리듬에 맞춰 몸을 움직인다. 발과 손, 옷자락이 스치는 소리. 카뮤의 숨소리와 심장소리. 그곳에 존재하는 모든 진동이 악기가 되고, 음악이 되고, 세계가 된다.
  파르바네는 제 세계를 있는 힘껏 펼쳐보인다.
  카뮤는 제 앞에 다가와서 제 허리로 손을 뻗는 후배의 몸을 가볍게 피한다. 파르바네는 그조차 기껍다며 웃고는 둥글게 몸을 돌린다. 흰 원피스의 아래가 부드럽게 부풀어 카뮤의 다리를 스치고, 그는 두꺼운 옷 위로 느껴질 리 없는 천의 감촉을 선명하게 기억한다. 파르바네는 가볍게 흥얼거린다. 허밍은 들어본 적 없는 음률을 따라 악기 없이 오롯하게 흐르고, 끊어질 듯 이어지며 사람의 숨통을 쥐어놓는다. 여전히 맑은 목소리로군. 카뮤는 냉정하게 파르바네의 목소리를 평가했다. 아니, 냉정하다고 생각했다.
  광기는 쉬이 전염된다. 노래는 마음의 틈으로 파고들어 자리잡는다. 가사 없는 노래가 카뮤의 틈을 파고들고 그의 수정같은 눈동자에 한 줄기 흐림이 찾아들었을 때, 파르바네는 손을 뻗어 카뮤의 목을 끌어 안는다. 카뮤는 밀어내야 한다고 생각하며 작은 후배가 끌어당기는 대로 허리를 숙인다. 맑게 일렁이는 흑청안. 선명하게 색이 나뉜 눈동자가 맑개 개어 텅 비어있다.
 
  “선배, 선배, 선배. 선배는 자신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모르죠? 때때로 당신은 사랑하지 않고서는 배길 수 없을 만큼 매력적이에요. 당신의 말대로 저는 따뜻한 곳에서 자랐죠, 그렇기에 혹한을 동경해요. 오로라와 다이아몬드 더스트, 범접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지닌 설원과 그 위를 달리는 늑대를 동경하듯이 당신을 동경해요.”
 
  사랑을 속살이는 자의 눈이 텅 비어있다는 사실은 얼마나 거대한 모순인가. 허나 카뮤는 말에 매혹되어 진실을 마주하지 못한다. 아니, 그의 눈동자가 그득 들어찬 적이 없었기에 비어 있는 눈동자를 당연하다고 여겼는지 모르는 일이다. 허나 사랑이라는 말은 얼마나 반짝거리는가. 동경이라는 말은 얼마나 현란한가. 파르바네는 평소의 무표정한 얼굴이 믿기지 않을만큼 풍부한 표정을 짓는다. 감정을 불어넣어 웃고, 녹아내릴 듯이 휘어진다.
  사랑을 속살인다.
 
  “당신은 내게 혹한이에요, 겨울이며 영구동토이고, 당신의 조국이며 동시에 당신이죠. 나는 당신으로 하여금 겨울을 느끼고, 당신의 어조를 더듬어 오로라를 상상해요. 여왕이 통치할 저 너머의 영구동토와 그곳에서 아름다운 검을 휘두르는 여왕을 봐요. 오직 당신의 눈동자를 통해서.”
 
  파르바네의 시선이 카뮤에게 파고든다. 가리고 연기하는 것이 익숙한 백작은 그 순간 제 바닥까지 헤집는 느낌에 움찔하며 뒤로 물러서고자 한다. 그러나 목을 휘감은 팔은 여전히 부드러운 살내음을 풍기고, 강하지 않은 힘은 글레이프니르가 되어 펜리르를 옭아맨다. 온 세계를 집어 삼킬 기세로 날뛰던 펜리르는 부드러운 비단끈에 묶여 볼품없이 널브러지고, 제 손목을 내어주고도 웃었을 티르는 아름다움으로 화해 혀가 녹아내릴 듯 단 웃음을 짓는다.
 
  “그러니, 선배. 우리 낭만을 노래해요. 낭만이 없다는 소리는 하질 말아요. 나의 낭만은 당신이고, 당신은 가보지 못한 곳의 동경으로 이곳에 존재하고, 나는 노래하고 있어요. 동경으로 가득 찬 노래이고 사랑으로 흘러 넘치는 노래이죠. 들어줘요, 카뮤. 내가 또다시 홀로 노래하게 만들지 말아요.”
  “우언이고 헛소리군. 한 겹 가려둔 말장난에 지나지 않는다. 만들어낸 오로라의 아름다움은 실물을 이길 수 없고 억지로 만들어낸 눈은 결국 드러나게 되어있지. 네놈의 낭만과 동경은 결국 형편 좋게 꾸며낸 가짜에 지나지 않아.”
  “매정하게 말하지 말아요, 선배. 가짜가 진짜보다 아름답다면 굳이 진실을 고집할 이유가 있나요? 저를 보아요, 거짓임을 알고도 매달려 자신을 망치고 있어요. 하지만 제가 진실을 인정했을 때, 저는 로 남아서 웃을 수 있을 것 같나요?”
 
  카뮤는 그 순간, 파르바네의 광기가 결국 그 자신의 바닥을 들추어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는 저도 모르게 숨을 들이마신다. 작게 들이마신 숨은 기도에 턱 걸려 감정을 막고, 그는 침음성을 흘린다. 파르바네는 여전히 그의 목에 매달려 키스를 조르기라도 할 자세로 나긋하게, 기쁨에 겨워서 노래한다. 차갑게 얼어붙은 맨발은 한 번도 리듬을 멈춘 적 없고, 가만히 서 있는 카뮤를 상대로 요렁좋게 스텝을 밟아 춤을 멈추지 않았다.
  여전히 그의 세계는 바깥에 한 가득 펼쳐져 있었다.
  카뮤는 이쯤에서 파르바네를 말리고 그의 폭로를 끊어내어 광기를 잠재워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아니,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으나 음악에 취해 떠올리지 못했던 것을 떠올렸다. 그러나 그는 음악은 유희일 뿐이라 생각하는 사람이고, 그의 심장에 음악이 자리잡았다는 사실을 모르며 부정하고 있었기에, 작은 음률에 져버렸다. 막지 않은 자신에게 저 후배의 약점을 잡아 두면 언젠가 도움이 될 것이라 을렀다. 변명이라는 사실을 알았으나 그는 쉬이 지워냈다.
 
  “선배, 선배도 그저 눈을 감으면 될 문제예요. 어렴풋하게 아는 것은 모르는 것과 다르지 않아요. 당신도, 저도 능숙해졌잖아요? 생각하지 않고 움직이는 일과 멀리 보지 않는 법을 알잖아요? 그러니 선배, 저와 시선을 맞춰요. 다른 것은 보지 말고 같이 노래해요.”
 
  파르바네는 발돋움으로 숨결이 닿을 거리까지 얼굴을 가져다댄다. 아주 비밀스러운 말은 입술에서 입술로 전해지는 법이다. 코 끝이 스치고 움직이는 입술 끝이 아주 희미하게 닿을 거리에서, 맑고 아름다운 목소리가 광기로도 지울 수 없는 두려움을 담고 떨렸다.
 
  “선배, 노래가 끝나면 진실이 찾아와요. 꿈에서 깨어난 우리는 잠든 동안 외면했던 모든 것을 마주해야해요. 그러니 노래해요, 끊이지 않을 노래를 같이 연주해줘요. 절 홀로 두지 말아요.”
 
  아주 먼 훗날, 오랜 시간이 지나고 파르바네를 속속들이 알게 되었을 때, 그는 그 말이 파르바네가 저도 모르게 고백한 사랑이었음을 알았다. 그것은 죽지 말고 나를 떠나지 말아달라는 애원이었고 너만은 내 부모와 같이 되지 말라는 간원이었으며, 동시에, 저와 같이 도피하자는 청유였다. 파르바네는 그 시절부터, 그 자신이 진심이 되었다고 자각하기 이전부터 카뮤와 함께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 누구도 들일 수 없는 제 세게에 모조품을 만드는 일이 되더라도 카뮤와 함께하고 싶었다. 그러니 어쩌면 그들은 그 순간부터 사랑하기로 정해져 있었을지도 모른다. 카뮤는 희미한 생각을 더듬으며, 만약 그 순간으로 돌아간다면 대답할 말을 생각해 두었다.
  노래가 끝나면 사랑에 빠질 터이니 두려워하지 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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