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땅은 우리를 아래로, 그저 아래로 끌어당긴다. 당기는쪽이 아래인지, 아래로 당기는지 알 수 없다. 그저 우리는 추락하고, 침몰한다. 무거운 것은 가벼운 것 아래로 가라앉는다. 나는 사랑을 바라보며 절망 속으로 사라진다. 당신, 너무 힘들어하지 말아. 당신은 실패하지 않았어. 그저, 모든 절망이 사랑보다 무거울 뿐. 나는 꽃잎 위에 누워 눈을 감는다.
그저 장미 속으로 침잠한다.
***
카뮤는 오늘이 로즈데이라는 사실을 지독하게 실감했다. 아이돌이란 그런 직업이다. 무언가 특별한 상술이나 행사가 있다면 하루종일 그것을 팔아야 하는 일. 그는 제 일에 특별히 불만을 가진 종자는 아니었으나 온종일 같은 말을 하는 건 지치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그가 손에 장미 한 다발을 들고 귀가한 것은, 세뇌당해버린 탓일까. 그는 그런 식으로 생각하기로 마음먹었다. 기실, 그쪽이 더욱 합당한 발상이라는 점은 명백했다. 카뮤라는 사람의 근본은 영구동토의 땅에 뿌리를 내렸고, 그가 봄날의 따사로운 볕 아래 선다면 녹아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이 자명하다. 그러니 카뮤에게 있어서 이 꽃 한다발은 큰 의미를 가지지 못했다. 그저, 제 사랑스러운 연인이 기뻐할 것을 알고있기에 사 오는 식물의 아름다운 부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코 끝을 간질이는 장미의 향기. 향수로도, 사탕으로도, 수많은 스위츠로 경험했던 향은 생화에서 올라오는 순간 조금 다른 질감을 가진다. 물의 푸릇한 향과 초록색이 만들어내는 시각적인 향기와 뒤섞인, 싱싱한 향. 진실로 봄의 푸름과 사랑의 즐거움을 노래하는 향기. 카뮤는 제 손에 들린 꽃다발에서 그러한 향이 올라오고 있다는 사실을 어색하게 생각해야할지, 제가 그러한 생각을 하고있다는 사실에 경악해야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그러니 불확실한 생각에 집중하는 대신, 제 연인이 이 꽃을 받으면 어떤 얼굴을 할지 상상하기로 마음먹었다. 사실 그건 쉬운 일이다. 파르바네는 늘 카뮤를 바라보며 희미하고 알아차리기 어렵지만 눈에 띠는 애정을 표시했고, 그가 선물하는 것을 받아들고 겨울날 눈꽃처럼 웃으며 고마워요, 선배. 정말 기뻐요. 하고 속삭였기 때문이다. 카뮤는 그 순간 파르바네의 입술 속에서 울리는 진실한 기쁨의 말을 사랑했다. 그 한순간 만큼은 파르바네가 세상 그 누구보다 행복하다는 사실을알 수 있어서 그 또한 행복했다.
그러니 그는 마땅히 파르바네의 웃음을 기대했다.
카뮤의 집, 파르바네의 방 앞. 언젠가는 강제로 가졌던 동거가 어느 날부터 사랑의 상징이 되어버렸을 때. 카뮤는 방 하나를 파르바네의 의지대로 꾸미게 허락했다. 사실, 허락의 형태를 취한 것은 그의 오만이었다. 파르바네는 그의 허락이 없더라도 방을 제 멋대로 사용했을 것이고, 그에게 마땅한 양해를 구하지도 않았으리라. 그러나 카뮤는 ‘허락’의 형태를 취할 때, 파르바네가 행복하게 웃는 얼굴이 좋았다. 고마워요, 선배. 하고 웃는 얼굴이 사랑스러웠다. 그러니 파르바네에게 그 방을 허락했다.
유난히 짙게 느껴지는 장미향. 굳게 닫힌 방문 앞에서 문고리에 손을 올리고, 작게 심호흡한다.
“들어가지.”
파르바네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카뮤는 신경쓰지 않았다. 으레 있는 일이다. 파르바네는 뮤즈의 축복을 받아 음악에 있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재능을 지녔고, 이는 상상을 뛰어넘는 집중력으로 이어졌다. 작곡을 하고 있는 날이면 카뮤가 제 옆에서 밥을 떠먹여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는 사람이 그의 소녀였다. 무언을 허락으로 받아들여 문을 여는 순간, 카뮤는 숨 쉬는 법을 잊어버렸다. 제 몸쪽으로 당겨 연 문 너머로 쏟아지는 장미 꽃잎. 발목까지 차오른 식물의 잔해와, 그 위에 누워 눈을 감은 파르바네.
플라워 박스 속에서 침잠하는 그의 연인.
한 순간 카뮤의 의식을 잠식하는 감정은 공포였다. 숨을 쉬고 움직이는 행위 모두가 공포로 다가왔다. 절대적인 정적, 머릿속에서 울리는 악상마저 덮어버릴 침묵의 위협. 동시에 침묵은 안정을 의미했다. 파르바네는 그 누구보다 편안한 무표정으로 눈을 감아, 제 위로 떨어진 꽃잎 속에 누워있었다. 짙은 장미 향이 코를 찌른다.
카뮤는 문득, 파르바네가 피투성이로 누워있어도 알아차리지 못할 것이라는 공포에 휩싸인다. 장미의 붉은 색은 눈이 시릴 정도로 선명하고, 코가 시큰하고 눈물이 날 정도로 강렬한 향은 피의 냄새를 능히 덮을 수 있다. 그 언젠가, 고대 로마의 연회에서, 노예를 장미 꽃잎으로 깔아 죽였다는 말을 들은 적 있다. 카뮤는 파르바네가 그 노예처럼 꽃잎 아래서 피를 흘리며 죽어 사라질까 두려워한다. 그의 사랑스러운 연인, 나의 사랑, 나의 보물, 뮤즈. 그는 공포를 이겨낼만큼 깊은 호흡을 반복하고, 조심스럽게 발을 옮긴다. 장미 꽃잎이 단단하고 푹신하게, 시체를 밟는 듯한 불쾌한 감각을 가지고 발 아래를 떠받친다. 구둣발 아래서 짓이겨진 꽃잎이 붉은 피를 흘린다.
카뮤는 파르바네의 옆에 조심스럽게 다리를 펴고 앉아, 코 아래 손을 가져다 댄다. 손끝을 간질이는 따뜻하고 습기 섞인 공기. 나비의 날개짓 같은 작은 온기가 그의 마음을 조용하게 달랜다. 살아있다, 살아있어. 파르바네는 아직 그를 두고 떠나지 않았다.
안도감에 무심코 한숨을 내쉰 순간, 파르바네가 눈꺼풀을 파르르 떨었다. 긴 속눈썹이 얼굴 위로 그림자를 드리우고, 다음 순간 두가지 색이 섞여서 경계를 알아보기 어려운 눈동자가 세상을 마주한다. 한 순간의 의아함, 초점을 맞춰 그를 알아보고 짓는 환한 웃음.
“선배? 언제 왔어요?”
“얼마 되지 않았다.”
“어서와요.”
“다녀왔다.”
네글자의 단어를 주고받아야 느껴지는 안도감. 드디어 집에 들어왔다는 따스한 감각이 그의 발끝에서부터 서서히 차오른다. 그는 그제야 방을 둘러 볼 여유를 가진다. 사람의 살을 밟는 느낌을 주는 불쾌한 꽃잎은 방 전체를 가득 채우고 있다. 벽은 빼곡하게 걸려 있는 장미 꽃다발 때문에 원래의 색을 알아 볼 수 없다. 얼마나 오랜 시간을 그렇게 기다렸을지 알 수 없는 곳에서, 파르바네는 평소와 다름 없이 하얗고 말간 얼굴로 카뮤의 눈동자를 응시했다. 그 눈을 바라보며, 카뮤는 문득 제 손에 들려있는 꽃다발의 존재를 자각했다.
“선배, 그건?”
“아아, 네 것이다. 오는 길에 있어서 사 왔어.”
“장미, 네요.”
오늘, 로즈데이였죠? 파르바네는 아주 생소한 어조로 그런 말을 하고는, 장미를 받아 얼굴을 묻는다. 카뮤는 그 순간 파르바네의 얼굴 위로 번지는 행복의 기운을 알아차린다. 저런 얼굴이 보고 싶어서 그는 무엇이든 파르바네가 생각나는 것을 사다가 바치는 것이다. 무감각한 얼굴 위로 번지는 저 행복을 잔뜩 안겨주고 싶어서.
“어쩌죠, 선배. 저는 선배에게 줄 장미를 준비하지 못했는데.”
장미의 한 가운데 앉아서, 장미 다발을 끌어안고, 파르바네는 그런 말을 꺼냈다. 카뮤는 문득 네가 내 장미이니 다른 꽃은 필요없다는 말을 떠올렸다가, 아무리 그라도 그런 말을 입 밖으로 낼 수는 없다고 생각하여 입을 다문다. 우언이다, 그씩이나 되는 사람이 할 말은 아니다. 그럼에도 머릿속에서 단어는 계속 맴돈다. 꽃, 나비, 연인.
“대신 이런건 해 줄 수 있어요.”
파르바네는 그런 말을 하고는 팔을 뻗어 그의 목 뒤로 감는다. 가볍게 끌어당기는 힘에 저항하지 못하고 끌려가는 몸. 카뮤는 얼굴 바로 앞까지 다가온 파르바네의 눈동자 속에서 희미하게 반짝이는 열정과, 광기를 읽어낸다. 그러고 보면 작품을 준비하고 있다고 했지. 파르바네는 무언가 열중하면 그 속에 깊게 빠져들어, 결국 성격과 자신을 잃어버리고 무대와 일상을 혼동하는 일이 잦았다.
“키스해줘요, 선배.”
그는 대답 대신 고개를 숙여 입술을 마주한다. 그의 연인이 아무리 불안하다고 하여도 그는 파르바네를 마음 깊이, 거절할 수 없을만큼 사랑했다. 그것 하나는 변하지 않을 진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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