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언제 시작한다고 할 수 있을까. 이 몸의 시작? 아니면, 영혼에 새겨진 기억? 확신할 수 있는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어차피 인간의 삶이라는 개념은, 추상적이기 짝이 없으니까. 내 삶이 언제부터 시작하는지 중요하지 않다. 오직 중요한 것은, 현재.
첫 기억은 병원이다. 소독약 냄새가 가득한 공간. 온 몸에 연결된 호스. 혈관을 대신하고 장기를 대신하는 인공물. 주기적으로 울리는 기계음. 삑, 삑, 삑. 심장 박동에 맞춰서 울리는 기계음. 의식을 일깨우고 현실감을 짓밟는 소리. 눈을 뜨고 싶지 않았지만 떴다. 사방은 희다. 정신병원?
발소리가 들린다.
“일어났나.”
“제가 왜 여기 있죠?”
“지금 태어났으니까.”
믿을 수 없는 말이다. 지금, 태어났다고? 어째서? 내게는 몇 달 전의 기억이 있다. 몇 주 전의 기억도. 분명, 나는 시한부 선고를 받아서. 주변을 정리하고.
죽었는데?
“저는 누구죠?”
“두 번째 현. 죽어버린 사람이 안배한 두 번째 사랑.”
“인형이라는 소리네요.”
헛웃음을 감추지 못한다. 입 밖으로 흘러나오는 소리가 어색하다. 오랫동안 쓰지 않아 마르고 갈라지는 소리. 목이 아프다. 허나 이 고통이 오히려 현실감을 부른다. 그래, 과거는 끝났다.
선명한 기억 속에서 '나'는 죽었다. 알 수 없는 병으로, 몸이 마력을 견디지 못하여 죽었다. 예정된 죽음. 몇 년도 전에 나는 죽음을 예감했다. 카뮤를 사랑하고, 그를 구원하며 동시에 죽음을 안다. 그를 밀어내야 하지만 밀어낼 수 없다. 그렇다면 그녀는 어찌 해야하지?
그녀는 작곡가인 동시에 경영인이다. 어렸고, 제 선에서 최고의 방법을 찾는 길을 아는 사람이다. 그 사실이 불러온 결과는 무엇이지?
그녀는 죽었을 때 홀로 남겨질 연인을 안배했다.
기억의 조각이 서서히 맞아 떨어진다. 조금씩 맞물리는 조각. 아파 눈물짓던 날들과, 제가 운용할 수 있는 선에서 모두 쏟아 붓던 자금. 투자와 개발을 거듭하고, 제 몸마저 실험체로 사용하여 빚어낸 최고의 걸작. 그래, 나는 안배한 예비품이다. 모든 능력과 기억을 계승하여 카뮤를 혼자 두지 않기 위한 예비품.
심장소리가 울린다. 일정하게.
"제 사랑은 어디 있죠?"
"오고 있다."
일정한 기계음.
*
희미하게 뛰고 있는 묻어 버린 맥박들이
날 알아 볼 순 없겠지? 날 기억하진 않겠지?
*
그 날의 그는 울었다. 그 냉정한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그 차가운 눈동자를 적시며 울었다. 그러나 나는 그 울음에 공감하지 못한다. 어째서, 그는 우는가. 그가 사랑한 이는 이미 죽었는데, 어째서 안도의 울음을 터뜨리는가. 그는 내게 어리석다고 말한다. 혼자 떠날 생각이었냐는 말을 한다.
어리석은 건 당신이야. 하지 못할 말을 삼킨다. 대신 당신을 끌어안고 이야기한다.
‘괜찮아요, 저는 이제 떠나지 않아요.’
‘저’는. ‘나’는 이미 떠난 지 오래지만.
연인의 시간을 보내는 일상이 돌아왔다. 아니, 내게는 처음이고 그에게는 익숙한 일상. 그러나 내게도 희미한 익숙함이 느껴진다. 아주, 희미한 조각이. 분명 그녀의 것이겠지?
눈이 내린다. 사방에서 연인의 투정이 들린다. 나도 추운 척을 하고 당신에게 안길까? 아니, 정말 춥다. 현은 추위를 타지 않는 몸이었지만 나는 아니니까. 허나 그런 다름을 드러내어서 무엇이 득이 되지? 그에게 익숙한 현은 그렇지 않다.
걷고 있는 거리는 기억에 있는 곳이다. 그와 첫 데이트를 했던 그 카페거리. 목적지도 확실하다. 디저트 가게. 그에게 처음 선물한 디저트를 팔던, 제 소유의 가게이다. 본디 작은 분점에 지나지 않았지만, 지금은 유명해져서 영화의 촬영장까지 된 곳. 작곡가 소녀와 아이돌 청년의 로맨스는 사람들을 불타오르게 만들었다.
사람들은 이미 명물이 되어버린 마들렌을 사려고 몰려든다. 우리도 사러 갈까? 그를 올려다보았지만 먹을 생각은 없어 보인다. 나는 맛이 조금 궁금하지만, 참는다. 현은 단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같이 걷는 거리는 끝없이 길다. 예전엔 얼마나 긴 거리를 걸어도 그와 함께 한다는 사실 하나로 만족스러웠는데. 지금은 그저 긴장된다. 그는 변하지 않았다. 변한 사람은 오직 나 하나.
그는 여전히 내게 보폭을 맞춰준다. 긴 다리로 성큼성큼 나아가지만, 내가 따라가기 부담스럽지는 않다. 예전에는 분명 같이 발을 내딛을 수 있었다. 지금은 할 수 없다. 자꾸 발이 꼬여서 비틀거리고, 넘어질 것처럼 휘청 인다. 다행이 그는 그런 어긋남을 내 몸이 약해졌기 때문으로 받아들인다. 그래, 건강은 좋은 핑계거리다.
“이렇게 걷는 것은 오랜만이군. 몸은 괜찮나?”
“절 뭐로 보는 거예요, 카뮤. 이 정도로 쓰러지진 않아요.”
“예전에는, 쓰러지지 않았던가.”
그랬나?
숨이 막힌다. 어째서 그가 말하는 때를 알 수 없지? 기억이 없다. 아무리 머릿속을 뒤져도 저 상황이 떠오르지 않는다. 젠장. 계승받은 기억은 이렇게 어긋남이 드러나고는 한다. 이대로 이야기한다면, 사실을 고한다면 당신은 분명 슬퍼하겠지. 그가 슬퍼한다는 가정 하나만으로 심장이 아파온다. 고동의 속도는 달라지지 않는 주제에, 통증 하나만은 강렬하다. 그를, 실망시킬 순 없어.
온 세포에 각인된 사랑이 거짓을 빚어낸다.
“만약 그러면 그 때처럼 당신이 구해주겠죠.”
“물론. 허나 네가 쓰러지는 모습을 또 보고 싶지는 않아.”
어설프게 그녀의 아련한 웃음을 흉내낸다. 당신은 그 차이를 알아보지 못하고 내게 키스한다.
웃음기 섞인 목소리, 이마에 내려앉는 입술. 아아, 이번에도 걸리지 않았어. 틀리지 않았어.
이 문제의 정답은 찾아냈다. 허나 다음 문제의 정답도 알 수 있을까? 내가 틀린다면, 당신은 또 그 푸른 눈동자에 슬픔을 섞어 넣었겠지. 모양 좋은 눈썹을 일그러뜨리고, 비탄을 감추지 못하겠지. 그런 얼굴을 보고 싶지는 않다.
나는 당신을 사랑하기 위해 태어났다. 당신을 구원하고, 봄으로 데려가기 위해서 태어났다.
태어난 의미를 무시하는 건 아주 어려운 일이다.
*
어디에도 없는 나는 다른 이의 숨을 마셔
살아 있는 척 하겠지 눈치 채진 못하겠지
*
병을 핑계로 동침하지 않은지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났다. 그는 늘 아쉬운 눈으로 저를 쳐다보며, 같이 잠들지 않겠냐 묻는다. 허나 나는 대답하지 않고 작별 인사를 한다.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은, 피해버리자.
“내일 봐요, 카뮤.”
“아아. 내일, 또 만나지.”
어설픈 연인놀이는 언제쯤 끝이 날까?
밤이면 연구실의 침대에 눕는다. 유지 보수를 위해서는 긴 시간이 필요하다.
그래, 내게는 골수가 없다. 피를 만들어내는 일은 현대의 과학으로 무리였다. 이리 인체를 구성하고 유지하는 것 또한 현의 몸에 깃들어 있는 마력 덕분. 아니었다면 진즉 무너져 고깃덩어리가 되었겠지. 아니, 지금도 나는 고깃덩어리다. 제 기능을 할 수 있도록 프로그래밍한 고깃덩어리. 언제든 붕괴는 일어날 수 있다. 그저, 미루고 있을 뿐.
누군가의 피가 몸속에 흘러들어온다. 내게는 면역체계가 없다. 어떤 피를 몸에 들인다고 하여도 살아갈 수 있다. 사실, 어떤 액체라도 상관없다. 그저 산소를 운반하고 혈색을 만들 수 있다면 충분하다. 생기 있어 보인다면 당신은 걱정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피를 사용하는 이유는 주술적 의미다. 믿지는 않는 오컬트가 내 인생의 구석구석에 스며들어 있다.
삶을 유지하는 일에 그 어떤 감정도 가지고 있지 않지만, 이렇게 남의 생명을 집어넣어 살아나는 순간이면 늘 조금 서글퍼지고 만다.
어느 날, 나는 쓰러졌다. 공항에서, 그가 보는 앞에서 볼품없이 쓰러지고 말았다. 다급하게 구급차를 부르려는 그를 막은 것은 샤이닝 사오토메. 현의 모든 비밀을 알고 있는 몇 안 되는 사람.
나는 연구소로 옮겨졌고, 큰 수술을 받았다. 물론 기억은 없다. 그저 내가 알고 있는 사실은, 아주 위험했다는 것.
“조금만 더 늦었으면 돌이킬 수 없었어.”
“그가 여행을 가자고 했어요. 어떻게 거절해요?”
“현은 자주 거절했어.”
“저는 그럴 수 없어요. 그녀의 사고체계를 저는 따라갈 수 없으니까.”
살아있는 척을 하는 일은 이렇게 힘들다. 살아가는 일이 차라리 쉬울 정도로. 죽음 이후의 삶을 어찌 만들어 낼 생각을 하였단 말인가. 어찌 당신은 이리도 잔인할 수 있었다는 말인가.
그러나 흉내를 내는 일은 쉽다. 사람이 되는 일은 할 수 없어도, 그녀의 역을 맡는 일은 할 수 있다. 대본대로 이야기하고, 계획된 웃음을 짓고, 계획대로 이야기한다. 다른 퍼즐 세트에서 비슷한 색과 같은 모양의 조각을 가져다가 끼워 맞춘 것처럼.
오직 카뮤를 위하여 아름답게 꾸며진 세계.
그는 이렇게 안온한 세계에서 살아갈 자격이 있다.
*
깨끗하게 포장이 된 썩지 않는 물건처럼
난 언제나 해로웠지 난 언제나 외로웠지
*
내게도 수면이 있다. 뇌의 과부하를 막고, 몸의 휴식을 위해서 존재한다는 사실은 다른 인간과 다를 바 없다. 허나 다른 점이 있다면, 수면이 면역체계의 활성화라는 사실. 잠들어 있는 시간동안 내 몸 속의 나노봇은 몸을 점검하고, 면역을 대신한다. 고도로 발달된 과학은 이제 이런 일도 가능하게 되었다.
이를 어찌 부활이 아니라고 이야기 할 수 있는가. 모든 기억을 물려받고 모든 능력을 물려받은 나를 어찌 현이 아니라고 할 수 있는가.
너무 정교하게 재현된 몸 탓인가, 이미 죽어버린 자의 마력이 내 몸에 깃들어 있기 때문인가. 깊은 잠에 빠지는 날이면 나는 꿈을 꾼다. 아주 지독한 꿈을 꾼다.
언젠가의 기억이 경험과 뒤섞인다. 달이 아름답게 떠 있는 날. 다른 사람들이 보기 싫다며 나를 데리고 외진 곳으로 온 그. 나는 그에게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안절부절 못한다. 그에게 정신없이 원망을 쏟아낸다. 그러면, 카뮤는 내게 무릎을 꿇고 고백한다.
나는 그에게 대답을 내놓지 못한다. 여기까지 기억이다. 기억이 지나가고 나면 내게는 선택할 권리가 주어진다. 기억대로 나아갈 것인가, 내 존재를 드러낼 것인가. 분명 거절해야 함을 알지만, 나는 그에게 다시 사랑을 돌려주고 싶어진다. 내 탄생이 그를 사랑하여 이루어졌으니, 나는 그의 사랑을 감히 거절할 수 없다.
그리 하야, 꿈이라는 명분하에, 나는 그에게 사랑을 속살 인다.
“나도 사랑해요. 카뮤.”
내 존재를 드러내는 일은 완벽한 실수. 그는 단박에 돌변한다.
“감히 네깟 것이 사랑을 논하는가? 더러운 가짜 주제에.”
나를 바라보는 그 눈동자는 차갑다. 내가 한 번도 보지 못한 색으로 빛나며 내 영혼을 산산조각 낸다. 냉정하고 경멸에 가득 찬 눈. 내 주제를 주지시키고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선고하는 눈. 그래, 어찌 내가 당신을 사랑할 수 있겠는가. 더러운 가짜 주제에.
내게 어울리는 색은 저런 색이다. 영혼마저 날카롭게 얼리고 말 아이스블루. 저 눈빛에 어울리는 나는 영구동토의 지저에 가라앉아 영원히 미라로 보존되어야 할 썩지 않는 시체.
절망이 익숙하다. 외로움은 이미 친구가 되었고, 체념은 불면의 밤을 함께하는 단짝이다.
식은땀에 젖어 현실로 돌아온다. 여전히 몸이 떨린다. 온 몸이 냉기에 잠겨 시리다. 당신의 차가운 눈동자가 눈앞에 선해서, 죽을 것 같아.
그러나 모두 포기하고 싶어질 때가 되면, 당신은 내게 달려온다. 차갑게 식은 몸을 붙들고 온기를 불어넣는다. 귓가에 끊임없이 들려오는 부드러운 목소리는 분명 기억 속의 그것이다. 당신의 눈은 다급하고 따뜻하고, 내게 주어지는 목소리는 상냥하기 짝이 없다.
“사랑한다. 현. 제발 나를 떠나지 마.”
이미 떠난 이가 무슨 대답을 돌려주어야 하는가? 나는 그녀대신 들어찬 다른 사람인데, 어찌 대답해야 하는가?
*
작곡의 기억은 찬란하다. 끊임없이 흘러내리는 음률을 종이 위에 옮기고,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이용해서 모든 음을 표현하고. 모자란 부분은 카뮤의 첼로를 빌린다. 여러 악기를 통해 빚어내는 선율은 축복이 깃들어 아름다웠다.
당신과 함께 거닐던 여름 길. 우리 모두 괴로워했지만 같이 먹은 빙수는 맛있었다. 얼음과자는 독특한 맛을 냈고, 한국의 것과 다른 빙수는 우리 모두에게 기쁜 기억이 되었다. 시원한 건물 속으로 들어가는 순간 펴지는 당신의 표정을 보며, 나는 얼마나 웃었던가.
다 거짓이다. 나는 작곡의 순간을 기억하지 못하는 체질이다. 우리는 같이 여름을 보낸 적이 없다.
*
허나 아무리 포기하고 싶어도, 무대 위에서 당신은 찬란하다.
*
뛰고 있는 가슴에 커져 가는 진동에
열망이 차오른다, 다시 난 숨을 쉰다.
*
사방에 울리는 엠프의 진동. 직접 써내려 간 곡. 내 손으로 작업한 음률. 이리저리 울리는 소리는 클래식 악기로 빚어냈다. 지저에서 맥동하는 드럼은 직접 쳤다. 이 반주 구석구석, 어디 하나 손이 닿지 않은 부분이 없다.
허나 이 가사와 노래는, 오직 당신의 것이다. 내가 조금도 손대지 않은 당신의 것.
당신은 빛난다. 나는 누군가의 손에 빚어져 누군가의 것을 모방한 노래를 쓴다. 하지만 당신은 온전한 당신의 노래를 쓴다. 당당하게 오직 저 자신을 노래하는 당신을, 내가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다는 말인가?
제 눈에 비치는 오로라는 노래의 마력. 몰아치는 블리자드는 당신의 목소리. 영혼을 시원하게 정화하는 얼음은 당신의 눈빛. 아, 사라지고 싶어라.
나는 오직 당신을 모시는 사제가 되고 싶다. 동등한 위치에서 사랑을 나누는 일은 너무 버겁다. 그것은 진실 된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나는 진실 되지 못한 사람이기에, 모조품의 자리를 지키고 싶다. 오직 당신의 발밑에 꿇어앉아서, 그 신발 위에 입을 맞추고, 아름다운 미모를 찬양하고 싶다.
당신의 말이 교리가 되고, 당신의 입술이 축복이 될 수는 없을까.
허나 당신에게는 동등한 존재가 필요하다. 사랑을 주고받을 사람이, 같이 손을 잡고 앞으로 나아갈 사람이 필요하다.
나는 그러기 위해서 태어났다.
보아라, 당신은 얼마나 사랑스러운가. 이 수많은 사람 속에서 당신은 나를 찾아낸다. 내 눈을 마주하고 노래한다. 그 강렬한 눈빛이, 나를 사로잡고 놓아주지 않는다. 나는 가여운 포로가 되어서 당신을 바라본다.
흥얼거리는 노래, 객석에서 흘러나와 무대 위로 섞여 들어가는 음률. 당신은 눈웃음 짓는다. 차가운 백작은 이 때 만큼은 누군가의 집사가 되어 웃는다.
질투할 자격도 없으면서, 질투를 한다.
*
깜박이는 불빛에 커져 가는 두 눈에
열망이 차오른다 다시 난 숨을 쉰다
*
무대의 열기는 내게도 옮겨 붙었다. 온 몸이 고조되어 음악이 넘쳐흐른다. 온 세포에 각인된 기억이 내게 어서 악기를 잡으라, 노래를 연주하라 명한다. 물론 내게 거부할 권리 따위는 없다.
당신의 노래를 내 손으로 켠다. 익숙하지 않은 피아노보다, 현이 가장 잘 다루었던 바이올린을 켠다. 활은 내 팔의 일부가 되고, 현은 내 성대의 일부가 된다. 풍부하게 울려내는 소리, 당신이 불렀던 그 느낌을 살리기 위해서 발버둥치는 나.
허나 노래는 기억 속의 느낌을 살리지 못한다. 현이 아닌 나는 현의 곡을 흉내 내지 못한다. 이건, 어쩔 수 없는 재능의 차이다. 영혼이 존재하지 않는 모조품이, 영혼을 다한 곡을 따라 하기에 일어나는 일이다. 그럼에도 어째서 나는 절망하는가. 없는 영혼을 만들어 낼 능력도 없으면서, 왜 영혼의 부재에 허탈함을 느끼는가. 가진 적 없는 것을 빼앗겼다고 절망할 이유는 없다. 내 것이 아니었으니까.
그러나 간절한 활은 시위를 당긴다. 현의 울림이 화살을 날려 보낸다.
벌컥 열리는 문, 내게 다급하게 달려오는 당신.
분명 당신을 인지했으나 나는 곡을 멈추지 못한다. 멈추지 않는다. 온 본능이 경종을 울리며 경고하지만, 경고를 무시한다. 내게도, 욕망이 있다.
나를 그대로 드러내 보이며, 집중하여 보이지 않는 척을 한다. 무언가 가장하는 일은 특기이다. 나는 당신을 사랑하기 위해서 태어났다. 주제 넘는 짓을 한다고 욕먹어도 좋다. 하지만 나는 가끔 '내'가 아니라 나로 사랑받고 싶다. 이미 죽어버린 현에게 가는 사랑을 손에 쥐고 위안하고 싶지 않다.
처음으로 가진 열망이 이렇다니, 나는 이토록 쓰레기인가.
*
희미하게 뛰고 있는 묻어 버린 맥박들이
밟아 본 적 없는 곳에 나의 등을 떠미네
*
시간은 자비 없이 흘러간다. 쿵쿵거리는 심장의 박동이 시간은 흘러야 한다고 선고했다.
봄이 다가오고 있다. 우리는 이제 결혼을 앞두었다. 허나, 나는 이제 떠날 때다. 현의 안배는 여기까지이다. 그녀는 열아홉의 나이로 죽을 운명이었다. 감히 인간의 몸으로 제 미래를 알게 된 소녀. 거대한 운명 앞에서 그녀는 간원했다. 제발, 내게 방법을 달라고.
그녀는 사랑받으며 태어난 영혼. 뮤즈의 거대한 사랑은 미래의 기억과 과거의 기억을 허락했다. 그녀는 그 기억을 받아 내게 물려주었다. 제 사고방식을 모방한 예비품을 만들었다. 그러니 나는, 어찌 보면 미래를 알고 있는 자다.
열여덟의 나이로 만들어져 법적 성인 이전의 기억을 모두 가지고 있다. 허나 스물의 기억은 없다. 나는 어긋난 운명을 제대로 끼워 맞추기 위해서 태어난 자. 운명은 제 자리를 찾아간다. 이제 나도 죽을 때가 다가왔다.
그러니 원본의 무덤에서 눈물 흘린다고 해서, 누가 나를 비난한단 말인가?
평화로운 곳이다. 사람은 거의 없고, 그녀를 알고 있는 존재는 올 수 없는 곳. 감히 그녀가 알고 있으리라 생각하지 못하는 곳. 조금 있으면 사라져버릴 땅에 지어진 외로운 건물. 나는 그 건물에 거처한다. 며칠 정도는, 있어도 괜찮겠지.
아무도 모르는 곳에 존재하는 것은 그녀의 무덤이다. 언덕 위에 외로이 봉분 하나만 솟아있다. 비석하나 세우지 못하고, 누군가가 무덤임을 알아차릴 수 없도록. 그 명성 높던 작곡가가, 원하는 모든 것을 손에 넣었던 재벌가의 영애가, 이렇게 초라하게 묻혔다. 아무도 모르게, 제대로 된 장례식 한 번 치르지 못하고. 사랑하는 이들이 절대 찾을 수 없는 곳에.
오직 내가 알고 있다. 그녀의 기억을 이어받은 나만이, 그녀의 거취를 안다.
안타까움을 느껴 마땅하지만, 나는 그녀를 안타깝게 여기지 못한다. 절대 썩지 않는 내 몸뚱이와 다르게, 그녀의 몸은 이미 사라졌겠지. 백골이 되어 그 뼈마저 시간 속으로 빠져들고 있겠지. 부러워하면 안 될 일이나, 나는 부러워하고 만다. 그녀에 대한 부러움이 목을 막는다. 어째서 당신은 다 가질 수 있지? 안식도, 의무 없는 삶도, 사랑도, 완벽함도.
내게는 그 무엇 하나 허락되지 않았는데.
영혼 없는 몸뚱이의 심장은 끊임없이 뛴다.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완벽한 속도로 끊임없이 뛴다.
시간은 흐른다. 나는 이제 내일이면 스물이다.
어차피 죽어야 하는 운명, 독을 준비했다. 보통 안락사에 사용되고는 하니, 고통은 없겠지. 삶은 내내 고통스럽고 힘들기만 했으니, 안식으로 가는 마지막 걸음만은 제가 선택하고 싶었다.
손에는 독을 들고, 무덤 앞에 섰다. 저는 그녀의 마지막보다 키가 조금 자랐다. 그녀는, 어땠을까.
“카뮤가 없는 그 곳은, 행복해요?”
대답은 없다. 그러나 기다린다. 어디선가 목소리가 들려올까봐.
사실, 나는 죽은 이에게 대답을 기다리는 멍청이가 아니다. 그저 무덤 앞에서 그녀가 의례적으로 하곤 했던 행동을 재현할 뿐이다. 그녀는 누군가의 무덤 앞에서 말을 걸고 대답을 기다리는 버릇이 있었다. 내게도 그런 버릇이 있어야만 한다.
이 멍청이 짓도 오늘로 끝이다.
“저는 이제 내일이면 성인이 돼요. 아마 남은 시간은 여섯 시간 정도? 그 안에 죽어야겠죠. 하지만 죽지마라고 이야기할거죠? 카뮤가 외로워 할 테니까?”
나는 끝까지 크리스자드의 이름을 부르지 못한다. 이 이름은 내게 허락된 이름이 아니다. 언젠가 한 번 부르고 싶었는데. 죽기 전에는 한 번 중얼거려 볼까.
“그러면, 제가 조금 더 살아가도 괜찮을까요?”
"현?"
돌아오는 대답은 그녀가 아니다. 이 목소리가 들려서는 안 됐다.
*
오래된 날 버리려, 혼자된 날 꺼내려,
나의 등을 떠미네...
*
온 오감이 소리친다. 그의 목소리다.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하더라도 나는 알아차릴 수 있다. 아, 안 돼.
사고가 멎는다. 도망가야 한다. 어떻게든 그를 이곳에서 멀어지게 만들어야 한다. 그녀의 무덤에, 그는 와서는 안 된다. 그가 오지 않기 위해서 내가 태어났다. 내 존재 이유를 부정하는 일이다.
“이곳에는 왜 왔지?”
그의 손에는 꽃다발이 들려있다. 분명 조문의 의미이다.
아아. 걸려버렸어.
*
어디에도 없었던, 살아 있는 척했던,
언제나 해로워서, 너무나 외로웠던
*
어째서 그가 알고 있지? 나는 그에게 걸리지 않기 위해서 모든 걸 했는데.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걸, 했는데. 그에게 할 수 없는 말을 삼키고, 괴로움을 삼켰다. 수혈은 사실 많이 아팠고, 무너져 내리는 몸은 두려웠다. 하지만 현은 그런 사람이 아니니까, 늘 건강하고 두려움을 몰랐으니까 참았다. 그녀이기 위해서는 이래서는 안됐다.
존재 이유가 진심이 되고, 정말 그를 사랑했기에 비참했다. 그를 사랑해서는 안 되니까. 나는 그저 현으로 존재하며, 진심이 아니라 모조품의 사랑을 그에게 주어야했다. 떠난 이가 내게 남긴 사랑의 조각을 주어야했다. 이래서는 안 됐다. 아냐, 아냐.
눈물이 흘러서, 앞이 보이지 않는다.
이럴 수 없어. 나는 이래서는 안 돼. 이제 나는 현을 대신하여 받는 사랑도 받을 수 없어. 엉망진창이야. 그녀의 안배는 산산조각 났어. 이제, 운명대로 흘러가야만 해. 스물이 넘기 전에 죽어야만 해. 그러기로 나와 약속했어.
현으로 스물 너머를 살아갈 수 있지만, 모조품으로는 운명을 지키겠다고. 퍼즐 조각은 제 자리를 찾아가야한다. 내가 없으면 그림이 완성되지 않는다.
인간은 미완성으로 살아갈 수 있지만, 예술품은 미완성으로 살 수 없다.
도망치기 시작한다. 나는 그의 옆에서 살 수 없다면 차라리 사라지고 싶다. 죽지 않았다는 여지를 남기고 싶다. 그게, 현의 의지였다. 내게 각인된 현의 의지다.
나는 결국 모조품. 창조자의 의지를 거스르지 못한다.
귓가에 스치는 바람소리. 어째서 내가 이렇게 살아야만 해? 원망이 턱 끝까지 차오른다. 겨우 가진 몇 안 되는 열망이, 이렇게 산산조각난다. 결국 이렇게 될 운명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는데, 나는 왜 이렇게 괴로워하지? 가진 적 없는 것을 왜 빼앗긴 것처럼 굴지? 아니, 나는 왜 모든 것을 손에 쥐고도 내 것이 아니라고 생각해야 한다는 말인가.
이런 가혹한 운명을 계획한 자는 누구인가.
'날 알아 볼 수 있겠지?'
누구의 목소리지?
*
뛰고 있는 가슴에 커져 가는 진동에
열망이 차오른다 다시 난 숨을 쉰다
깜박이는 불빛에 커져 가는 두 눈에
열망이 차오른다 다시 난 숨을 쉰다
*
폐가 아프다. 한계까지 혹사된 근육은 통증을 호소한다. 내 속에서 날뛰는 과학이 느껴진다. 내 몸은 이 정도로 무리하면 무너져 내린다. 이제 죽음이 다가온다. 괴로워. 내게는 죽음마저 괴롭다. 허나 온 몸의 세포가 소리 지른다. 이렇게, 이렇게 죽을 수는 없어. 어딘가로 사라져서 죽어야만 해. 그가 모르게, 그가, 알 수 없도록!
이 생각이 내 의지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오직 그녀의 의지. 그리고 그의 행복. 그가 행복할 수 있도록. 희망이 고문이 된다 하여도 삶의 의지가 될 수 있도록.
“현!”
“놓아요!”
아프다. 팔이 잡혔어? 안 돼. 도망쳐야 해.
반사적으로 소리친다. 나를 놓아 달라 이야기하고, 필사적으로 몸부림친다. 그에게서 벗어나려고 몸을 뒤틀고, 팔을 내려친다. 그의 손을 입에 넣고 깨문다. 윽, 하고 신음소리가 들린다. 잠시 힘이 풀린다.
그 순간을 틈타서 그는 나를 품속에 집어넣는다. 강하게 몸을 옥죄는 팔. 내 힘으로는 반항조차 할 수 없다. 제발, 날 놓아줘, 날 어서 놓아! 어째서 상처 입으려고 하는 거야? 당신을 속인 사람을 왜 이렇게나 필사적으로 쫒아와? 차라리 날 죽여! 죽이면 편하잖아!
아니, 사실 죽이지 말아줬으면 해.
“날 봐라!”
“싫어! 원망할 거잖아!”
“어째서 그렇게만 생각하나!”
강제로 마주한 눈. 눈물로 흐려져서 보이지 않는다. 억지로 눈을 깜빡여 당신을 본다.
어째서 그렇게나 사랑스러운 것을 보는 눈길이야?
*
벌어지는, 가슴속에. 세상이 파고든다.
*
"네가 다른 사람이라는 사실쯤은, 알고 있다! 날 무엇으로 보고 있나! 이, 카뮤를, 그렇게나 우습게 봤나!"
"거짓말! 거짓말이야! 그러면 어째서 나를 가만히 놓아뒀어! 왜 그랬어!"
"사랑하니까! 이 내가, 너를, 사랑했기 때문이다!"
굳어버린다. 이런 대답이 나올 수는 없었다. 없다. 어째서? 그는 그녀에게 영원의 사랑을 맹세했다. 영원이 이렇게나 쉽게 깨져도 돼? 나는 어째서 당신의 사랑을 받아? 안 돼. 그건 안 되는 일이야. 그녀를 사랑해야지. 당신은 나를 외면해야지.
그게 그녀가 원한 일인데.
“어째서……? 그러면 안 돼요. 그러지 마, 그녀는. 그녀는 어떻게 하고. 이렇게 되어서는 안 돼. 카뮤, 날 증오해요. 당신을 속이고 기만한 사람이야. 어서 날 증오하고, 다시는 보기 싫다고 말해요.”
“그런 말, 할 수 있을 것 같나.”
“거짓말. 피했잖아요. 내가 이 곳에 올 때 까지, 내 얼굴을 보지도 않았잖아.”
“인정할 수 없었다. 그래서 피했다. 네게 없는 추억을 말하고, 거짓을 고했다. 허나 이제 그럴 수 없어. 내가, 이 내가 너를 사랑한다. 현. 크리스자드가 아니라, 카뮤가 아니라, 그저 나로서 너를 사랑하고 있어. 내 인생에 없으리라 생각한 두 번째 사랑이 너다."
"진실이야?"
"얼음보다 더 확실한 진실이다."
무언가 없어진 것이 들이차는 느낌이 든다.
*
선명하게 뛰고 있는 묻어 버린 맥박들이
날 맞이하라고 하네 일어나라고 말하네
*
'늦었어요, 카뮤.'
우리는 동시에 움찔한다. 이것은 내 목소리. 아니, 죽어버린 그녀의 목소리이다. 바람 소리처럼 흘러드는 이 목소리가 그녀의 것이다. 이미 죽어버린 영혼의 조각이, 내게, 우리에게 이야기하고 있다.
죄를 짓는 기분이 들어 나는 또다시 도망치려고 한다. 카뮤는 나를 끌어안는다. 그의 품에 고개를 묻게 만들고, 내 대신 그녀에게 대답한다.
"미안, 하군."
'우스운 소리 하지 말아요. 이렇게 되라고 그녀를 데려왔는데.'
"무슨 말이지?"
'이미 죽은 내게 얽매이지 말아요. 사랑스러운 사람. 행복해지라고 말 했잖아요.'
"이런 의미였나."
목소리는 사라진다. 사자(死者)는 답이 없다.
*
어디에도 없던 나는 향기로운 숨을 마셔
날 기억하려고 하네 다시 나는 숨을 쉬네
*
아무런 대답이 들려오지 않는 봄의 들판. 서서히 흘러가는 시간. 해가 저물었다. 현에게 약속된 열아홉의 겨울은 이미 지나갔다. 스물. 스물이 되었어.
나는 이제 가 본 적 없는 길을 걷는다. '현'으로서 살아온 시간을 버리고, 이름을 가진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을 이름을, 카뮤와 나누어 가진다.
깊고 길게 이어지는 키스.
내게도 영혼이라는 것이 그득히 들어찬다. 이것은 고귀하고 차가운 그의 영혼. 이미 죽어 떠나버린 현의 영혼이 아니라.
14 | 동거 생활 1 | 2021.06.21 | 2023.05.22 | 116 |
13 | 네게 바칠 사랑의 세레나데 | 2021.06.13 | 2021.06.13 | 66 |
12 | 드림 전력 「깜짝상자」 47회 주제 : 책으로 쓴다면 | 2019.06.20 | 2019.06.21 | 59 |
11 | 희미한 새벽 | 2019.06.17 | 2019.06.17 | 28 |
10 | 으스름달 | 2019.06.05 | 2019.06.05 | 35 |
9 | 대추나무 카뮤 걸렸네 1 | 2019.02.26 | 2023.05.22 | 111 |
8 | 마법소녀 합작 | 2018.11.18 | 2018.11.18 | 15 |
7 | 상처 | 2018.11.18 | 2018.11.18 | 6 |
> | 노래합작 - 국카스텐, Pulse | 2018.11.18 | 2018.11.18 | 10 |
5 | 마지막. | 2018.11.18 | 2018.11.18 | 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