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뮤는 제 소파를 배부른 고양이마냥 차지하고 드러누운 사람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둥글둥글 몸을 말아서 안정적인 자세를 찾더니, 허리가 아프다며 아으으 신음을 흘리며 몸을 쭉 편다. 사람이라기 보다는 동물에 가까운 움직임을 보이다가, 몸을 반쯤 바깥에 걸치고 드러누워 팔을 바닥을 향해 늘어뜨린다. 대본을 읽는 너머로 흘긋흘긋 살펴보는 그의 시선을 눈치채지 못하고 한참 알렉산더를 쓰다듬다가, 무언가 생각난 얼굴을 하고 반짝이는 눈을 한다. 카뮤는 제가 읽던 대본의 페이지를 외운다.
“카뮤.”
“뭐지.”
어김 없이, 현은 그의 이름을 부른다.
“우리의 이야기를 책으로 쓴다면, 되게 우스울 것 같지 않아요?”
“무슨 말이 하고 싶은건가.”
“그냥, 문득 떠올라서요. 이거 글로 쓰면 되게 흔하고 재미 없는 이야기겠구나.”
카뮤는 읽던 대본을 덮으며 소파에 누워 있는 사람의 색소 없는 눈을 바라본다. 현의 취미가 글쓰기라는 사실은 익히 알고 있다. 문자를 통해 무언가를 쓰는 일이라면 가리지 않고 즐기지만, 그 중에서 소설을 쓰는 일이 가장 잦고, 즐거워한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 현이 괴짜라는 사실과, 뜬금 없이 말을 꺼내는 순간에도 이미 익숙해졌다. 그러니 카뮤는 현의 의도를 깊게 생각하는 대신, 주어진 대화 주제에 집중한다.
“흠, 내 이야기를 글로 쓴다면 백작의 전기가 되겠군.”
“아, 카뮤네 백작가에도 있어요?”
“물론, 초대부터 아버님에 이르기까지 훌륭한 선조들의 업적이 기록되어있다.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네놈에게도 보여주지.”
“재미있겠네요, 실크팔레스 말이니까 당신이 해석해줘야 하지만.”
“네가 원한다면, 언제든지.”
“근데 생각해 봐요, 카뮤의 이야기는 백작의 전기잖아요? 하지만 제 이야기를 쓰면 그건 전기보다는, 으음……. 3류 판타지 로맨스에 가깝다고 생각해요.”
좋아하던 캐릭터가 현실에 튀어나와서 결국 이렇게 동거까지 하는 이야기는, 제 입으로 말하긴 좀 그렇지만 2차 창작에나 나올법하지 않아요? 현은 멋쩍은 어조로 빠르게 말했다. 서서히 목소리의 톤이 올라가고 속도가 빨라지고 있다는 점에서, 카뮤는 현이 즐거워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린다. 그의 동거인은 기분이 좋거나, 좋아하는 이야기를 하거나, 무언가에 집중하면 말이 빨라진다.
“네가 쓰는 글은 3류일리 없다만.”
“음, 아무리 제가 자신감이 넘쳐도 그런 말을 들으면 부끄러워요. 이건 좀, 소재의 문제니까.”
“그렇다면 더더욱 최고의 글이 되겠군. 너를 소재로 삼았으니.”
“카뮤……. 아무리 저라도 그런 말은 정말 부끄러운데요…….”
글에 자신감이 있는건 사실이지만, 모자라요. 저는 아직 어리고, 경험이 그렇게 넘치는 편도 아니고, 더군다나 세계를 건너오고, 동경하던 사람과 가까워지는건 조금, 유아적인 욕망이잖아요? 현은 그렇게 말하면서 바닥에 내려 앉아 소파에 등을 기댄다. 굴러서 떨어진 주제에 소리 하나 내지 않는 기술은 어쩌면 카뮤보다 나을지도 모른다.
카뮤는 대본을 탁자 위에 내려두고 소파를 향해 걸어간다. 아무래도 말이 길어질 낌새가 보이니 오늘은 여기서 종료 할 수 밖에. 대본은 내일 대기실에서 읽으면 된다. 이미 두어번 읽어 외운 것을 확인하는 작업이니, 그다지 어려울 것도 없다.
소파에 편안하게 앉은 카뮤의 무릎에 현이 머리를 기댄다. 알렉산더도 질세라 현의 무릎 위에 머리를 올려 놓으니, 두 명과 한 마리가 기차처럼 줄줄 이어진 모양새다. 현은 잠시 말을 멈춘 동안 생각을 정리한 모양인지, 한층 차분해진 어조로 단어를 이어간다.
“그냥, 꽤 오래 생각했거든요. 왜 이런 일이 나한테 일어났을까, 어쩌면 이건 누군가 쓰는 소설이나 이야기의 일부가 아닐까? 그러면 나는 주인공이거나, 하다 못해서 비중있는 조연일 자신이 있거든요? 그런데 이게 이야기라고 가정한다면, 장르를 규정할 수 없는거예요. 로맨스도 아니고, 스릴러는 당연히 아니고. 모험물도 아니고, 판타지인가? 하면서.”
“굳이 규정할 필요는 없지 않나, 네놈의 마음이 가는대로 하면 그만이다.”
“그건 그렇지만, 가끔 좀 두렵거든요. 이러다가 이게 꿈이면 어쩌지? 내가 길고 긴 꿈을 꾼거라 어느 날 깨어나서 당신이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면?”
“그런 일은 없다. 나는 이곳에 있어, 틀림없는 현실이다.”
“으응……. 그건 사실이지만……. 문득 드는 생각은 어쩔 수 없잖아요.”
투정 부리듯이 그의 무릎에 머리를 부비적거리는 모습을 보고, 카뮤는 현을 안아 올린다. 그를 소파에 나란하게 앉히자 알렉산더는 불만스럽게 낑낑거리며 머리를 카뮤의 무릎에 올린다. 카뮤는 목을 울려 웃으며 알렉산더를 쓰다듬는다.
“네놈 답지 않게 자신감 없는 생각이군.”
“당신에 관한 일이잖아요, 카뮤. 음, 그리고. 재미있어서요. 내 이야기를 책으로 쓰면 어떨까? 당신의 이야기를 책으로 쓰면 어떨까? 언젠가 자서전을 내볼까? 양장본으로 만들어서 아무도 모르게 내 관에 넣어달라고 할까? 같은.”
“네 관에 들어갈 물건이라면 내게도 보여줬으면 한다.”
“자서전은, 좀 부끄러울거 같은데.”
“너에 대한 것은, 얼마나 알아도 좀 더 알고 싶어.”
“카뮤, 요즘, 약간…… 그런 작업멘트가 늘지 않았어요?”
“그저 말로 꺼내는 빈도가 늘었을 뿐이다.”
그렇다고 해도……. 현은 작게 꿍얼거리며 그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그는 그 모습이 귀여워서 보이지 않게 웃는다. 대놓고 놀리는 말에는 이제 반응을 하지 않는 주제에, 이런 말에는 일일이 반응하느 것을 구경하는 것도 재미이다.
카뮤는 현이 말을 멈춘 동안, 그가 말한 ‘책’의 형태를 그려본다. 아마 백작가의 전기와는 다른 모양새와 갖춤새를 가지고 있겠지. 일생을 모두 담은 두꺼운 자서전은 검은 표지 위에 금박으로 글씨를 새겨넣으면 어울릴 것이다. 현은 제 이야기가 3류 로맨스라고 이야기했지만, 카뮤는 달리 생각했다. 아마 현은 사랑과 구원, 성장에 관한 이야기를 쓸 것이다.
침묵 끝에 그의 머리카락에서 얼굴을 들어올린 현이, 반짝이는 빛을 눈 안에 한가득 담고 그에게 조심스럽게, 흘러넘치는 기쁨을 주워담지 못한 어조로 속삭였다.
“알잖아요, 카뮤. 나는 무언가를 쓰기 위해서 살아요. 그러니까 이건, 내 삶에 대한 이야기라고 해도 괜찮아요. 책을 쓰기 위해 사는 삶을 책으로 쓰면 어떤 느낌일까? 역설적이라서 즐겁지 않나요?”
“네가 즐겁다면.”
“그런 대답 말고.”
“솔직히 내게는 먼 이야기군, 죽은 이후 명예롭게 남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있다만 후대에 내 이야기를 남길 생각은 구체적으로 해 본 적 없다. 백작가의 전기도 모두 업적에 관한 이야기이니. 네 표현을 빌려서, ‘인간 카뮤’에 대해서는 생각해 본 적 없어.”
“나도 바로 그 기분이에요. 나를 객관적으로 기록하면 볼품 없겠지만, 소설적 각색을 가한 ‘사람’ 나는 어떤 느낌일까?”
“여전히 먼 이야기라 대답할 수 없군. 그래도 현, 하나 약속해 주었으면 하는게 있다.”
카뮤는 고개를 숙여 제 연인의 얼굴을 들여다본다. 백색 눈 속에서 반짝이는 열정을 탐닉하며, 낮고 거칠어진 목소리로 나지막하게 속삭인다.
“네 책에 등장하는 나는, 카뮤가 아닌 ‘크리스자드’였으면 하는군.”
“그건 당연하죠.”
그의 연인은 웃으며 눈을 감는다. 카뮤는 그의 볼을 잡고 조심스럽게 입맞춘다. 알렉산더는 작게 멍, 소리를 내더니 제 집으로 돌아가고, 카뮤는 그대로 현을 안아올린다. 그렇게 거실의 불은 꺼지고, 아무도 남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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