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에 이름이 있다면, 그건 당신이에요.
희미한 달이 하늘에 휘영청 빛나는 밤이 있었다. 잠들어 마땅한 흰 개가 내 옆을 지키고, 별빛이 희미하게 빛나는 밤이었다. 무엇을 해야할지, 어떻게 해야할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아서 숲 속을 정처없이 방황하던 밤이었다.
“알렉산더, 이렇게 말 없이 따라나와도 돼?”
“멍.”
“응, 안 된다는 소리구나. 그러면 핑계는 내 감시?”
“멍!”
“그래, 나도 네가 잘 감시 했다고 이야기할게.”
하잘 것 없는 대화, 타박거리는 발소리, 숲의 고요한 정적. 나뭇잎이 사락거리는 소리가 두렵지 않을 무렵, 기이한 부유감이 몸을 덮쳐온다. 가족하고 연락이라도 되면 좋을 텐데, 정말로 내가 한 모든 말을 본 거야? 죽고 싶다……. 고요한 정적과 격한 감정이 어지럽게 뒤섞인다. 부끄러움, 설렘, 막막함, 두려움. 그리고, 자괴감? 한심함? 이 상황에 가까운 편의점까지 걸어가서 가볍게 케이크를 사 올 생각을 하는 나에 대한 죄책감.
“알렉산더, 네 주인님의 생일은 오늘이지?”
“왕.”
“몰래 나온걸 알면 화를 내겠지?”
그 말을 들은 알렉산더는 낑낑거리는 소리를 내면서, 내 옷을 잡아 집 쪽으로 끌어당기기 시작했다. 걱정해 주는 건지, 자길 걱정하는건지. 말을 알아 듣는 개의 머리를 상냥하게 쓰다듬으면서, 다정한 목소리를 내었다.
“괜찮아, 돌아가서는 내가 마음대로 나갔다고 할테니까.”
네 몫의 간식도 사서 가면서 먹자, 응? 다정하게 달래는 말에 개는 푸우우 한숨을 내쉬고, 앞장서서 성큼성큼 걸어간다. 말로 변해서 태워달라고 하고 싶지만, 나는 안장도 없고, 승마도 서투르니까.
“그래, 빨리 가자.”
12시가 되기 전에는 돌아가야지.
꿀을 사고, 우유를 사고, 케이크를 산다. 집에서 챙기던 호화로운 생일 상, 그러니까 사실상 제사상에 가까운 무언가를 떠올리고 작게 웃는다. 어째서 너를 앞에 두고는 제일 좋은걸 줄 수 없을까. 카뮤 생일이라며 사 온 케이크를, 단 걸 못 먹는 나 때문에 가족이 다같이 나누어 먹었던 게 기억 나서 웃었다. 너는 그러지 못했을 것 같아서 웃었다.
알렉산더에게 육포를 건네주고, 나는 입에 초콜릿을 하나 물고서, 다시 타박타박 숲길을 걸어 돌아간다. 으스름달이 빛나는 밤이다. 겨울의 하늘은 휘영청 맑고, 입김이 하얗게 부서진다. 초콜릿이 달다, 너무 달아서 얼굴을 찡그리게 만드는 맛이다. 설탕과 카카오가 입속에 화상을 입힌 것처럼 강한 맛을 남기고, 나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걷는다. 나무 사이에서 빛나는 별이 달이랑 같이 반짝인다. 꽉 찬 하늘이 이상하게 기뻐서, 온 세상이 너를 축복해 주면 좋겠다고 생각해서, 또 타박타박 걸었다.
“알렉산더, 이 길이 맞아?”
당당하게 앞서 나가는 개의 꼬리를 쫓는다. 길을 물으면 그 하얀 개는 나를 뒤돌아보고 한 번 코웃음치고, 나는 그 얼굴도 귀여워서 웃는다. 동글동글한 눈망울이나 긴 주둥이나, 긴 털이나. 귀엽게 생긴 강아지는 어딜 어떻게 보아도 사랑받고 자란 티를 내고 있다. 그게 귀여워서 웃었다.
“네 주인님이 널 많이 사랑하시나보다, 그지?”
“멍.”
“그치, 당연한 걸 물었다. 이것도 사 들고 가면 좋아해 줄까?”
알렉산더는 어딘가 신기하다는 얼굴을 하고 나를 쳐다보다가, 가까이 다가와서는 내가 손에 들고 있는 봉지를 코로 한 번 툭, 친다. 뜻은 알 수 없는 행동이지만 내 말을 듣고 있다는 사실은 확실하게 알 수 있어서, 다시 조심스럽게 알렉산더의 머리 위를 쓰다듬는다. 매일 정성들여 빗질을 하는 털이다. 손 아래 부들부들하게 감기는 감촉이 좋다.
“빨리 가자.”
벌써 오늘 밤에만 몇 번째 하는 말인지 모르겠다. 사실, 나도 내 상황이 우스워서 이렇게 서두르고 있다. 절대로 눈 앞에 나타나지 않겠지, 하고 생각했던 사람을 마주치고, 그게 사실은 1년이나 친근하게 대화하던 사람이라는 걸 알아차리고, 호의를 베풀지 않을 사람이라는 걸 아는데 그의 얄팍한 호의에 기대고 있다. 그리고 어쩌면 그가 배신감을 느낄지도 모르는 상황을 만들고, 그게 사랑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으니까. 이렇게 하나하나 뜯어 놓고 보면 우스울 뿐이라서, 부러 걸음을 재촉했다. 우습고 누가 보면 소름끼친다고 할 일이라도, 네 생일을 축하하고 싶었다.
1월 22일의 깊은 밤, 23일의 12시가 찾아들기 전에 돌아가고 싶어서 발걸음을 재촉한다.
점점 숲길은 익숙한 곳이 된다. 희미하게 이 곳이 방금 지나쳤던 곳임을 깨닫고, 긴 길을 모두 다녀 왔음을 알아차려서 조금 들뜬 걸음이 된다. 달은 이미 머리 위로 솟구쳤다. 오늘의 으스름달은 만월이다. 희미하지만 그 곳에 선명하게 존재하는 달이다.
저 멀리 카뮤의 집이 희미하게 보이기 시작할 무렵, 알렉산더는 갑자기 낑낑거리는 소리를 내며 내 등을 밀어대기 시작했다. 아니, 밀어 댔다고 해야할까. 그건 내 뒤로 숨으려는 행동이라서, 한 순간 이 숲에 무언가 맹수 같은 것이 살고 있는 것인지 고민했다. 물론, 바로 다음 순간에 맹수가 차라리 나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네놈, 잘도 살랑살랑 밤마실을 다녀왔군.”
“아.”
화난 얼굴, 사납게 치뜬 눈. 차가운 표정. 어딜 어떻게 보아도 화난 표정이라서, 한 순간 발이 굳는다. 이런 상황이 올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혹시 몰라서 쪽지도 남겨 놓고 나갔지만, 정말로 이런 상황이 오니까 머리가 하얗게 굳어버린다.
“네놈, 누구에게 보고를 할 셈이었지?”
무섭게 치고 들어오는 어조에, 나도 모르게 뒷걸음을 친다. 그러면 그는 한 걸음 다가서고, 나는 다시 물러 설 곳이 없을 때까지 뒤로 물러난다.
“어설프게 숨기지 않는 것이 좋다, 우민놈.”
그의 표정에서 무언가 이질적인 것을 발견해서, 나는 다급하게 입을 연다. 하지만 카뮤가 화를 내는 것이 더 빨라서, 그는 내 말을 잡아채서는 짓씹듯이 내뱉는다.
“여기는 장소가 좋지 않군, 들어라. 네놈이 어떤 속셈을 가지고 있었는지 낱낱이 밝혀주지.”
어두운 거실, 카뮤의 집 문이 열렸을 때, 나는 내 눈을 의심하고 있었다. 멍한 상태로, 여전히 돌아오지 않은 현실감을 아쉬워 하면서 그가 가리키는 대로 서 있었을 때, 문득 내가 본 것이 진실인지 의심하기 시작했다. 사실, 진실이 아니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부정하고 있었다.
“네놈, 누군가의 아래에서 일하고 있는 자인가? 누구지? 반란군인가? 샤이닝?”
“아니, 이건─”
“아니, 어설픈 변명은 됐다. 2년을 숨기고 있을 정도였다면 이 정도로 쉽게 속셈을 불지는 않을 터. 데이터를 엿보고 타인인척 하는 놈일 수도 있겠군.”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비수가 되어 박힌다. 아까까지 생일을 축하할 생각을 하고 있던 내가 바보같아진다. 울컥, 하고 치솟는 감정. 눈 뒤쪽이 타는 듯이 뜨거워져서, 아까 먹었던 초콜릿이 입 속에 남긴 화상이 아직도 강렬하게 남아있어서, 이를 악문다.
“알렉산더, 너도 너다. 감시역을 맡겼다면 수상한 일이 있을 때 내게 알리라고 하지 않았나. 저 자가 첩자일 가능성을 부정하지 말─”
“아뇨, 당신. 틀렸어요.”
카뮤는 알렉산더에게 향했던 시선을 돌려 나를 쳐다본다. 그의 얼어붙은 하늘 색 눈동자 너머에서, 여전히 남아 있는 감정을 알아보고 이를 악문다. 한 순간 흔들리던 동공이 차갑게 얼어붙고, 그는 오만하고 확신에 가득 찬 어조로 입을 연다.
“아니, 틀리지 않았다.”
“왜 말을 그렇게 해요?!”
울음에 가득 차서 내지른 말이 비명처럼 울려퍼진다. 한 순간의 정적, 눈물이 터져 나옴과 동시에 벽의 회중시계가 울음을 운다. 열 두 번을 울리는 종이 비명소리가 아릿하게 남은 귓가에 울린다. 뎅, 뎅, 뎅. 마지막 세 번이 울리고 조용해진 거실에, 내 훌쩍거림이 볼품없이 남았다. 훌쩍, 훌쩍 하는 소리에 알렉산더가 끼이잉 소리를 내며 내 손을 햝고, 나는 정말 형편 없이, 멋 없고 봐 주기 힘든 모습으로, 그에게 케이크를 안겨준다.
“생일, 축하해요. 태어나줘서, 지금까지 살아와 줘서 고마워요.”
이렇게 하고 싶었던 건 아닌데. 자괴감이 울컥 치솟아 오르지만, 그것보다 아까 그의 눈 속에 그득히 들어 차 있던 배신감이 더 아프다. 당신을 믿게 만들었다는 기쁨보다, 가장 먼저 배신과 위협을 떠올려야 하는 당신의 삶이 아프다. 이런 저런 말을 하고 싶었는데, 울음 속에서는 생각했던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 나는 그저, 입에서 나오는 말을 그대로 주워섬긴다.
“당신의 세계에는 으스름달이 떠 있다고 말해주고 싶었어요. 분명히 겨울밤은 시리겠지만, 그곳에도 달은 뜬다고 말하고 싶었어요. 맑고 추운 하늘 위에는 잘 보이지 않아도 분명 별과 달이 빛나고 있다고. 그러니까, 그러니까.”
좀 더 행복해달라고 말하고 싶었어요……. 가장 하고 싶었던 말이 훌쩍임에 먹혀 사라진다. 그렇게 한참을 훌쩍이는 소리가 울렸다. 결국 당황한 카뮤가 내 등을 두드려 달래고, 알렉산더가 그 대신 사과하는 시간이 꽤 오랫동안 지속됐다. 그게 내가 처음으로, 카뮤에게 제사상 대신 생일 상을 차려 준 날이었다.
단언컨대, 내가 챙긴 그의 생일 중에서 최악이다.
댓글 0
14 | 동거 생활 1 | 2021.06.21 | 2023.05.22 | 116 |
13 | 네게 바칠 사랑의 세레나데 | 2021.06.13 | 2021.06.13 | 66 |
12 | 드림 전력 「깜짝상자」 47회 주제 : 책으로 쓴다면 | 2019.06.20 | 2019.06.21 | 59 |
11 | 희미한 새벽 | 2019.06.17 | 2019.06.17 | 28 |
> | 으스름달 | 2019.06.05 | 2019.06.05 | 35 |
9 | 대추나무 카뮤 걸렸네 1 | 2019.02.26 | 2023.05.22 | 111 |
8 | 마법소녀 합작 | 2018.11.18 | 2018.11.18 | 15 |
7 | 상처 | 2018.11.18 | 2018.11.18 | 6 |
6 | 노래합작 - 국카스텐, Pulse | 2018.11.18 | 2018.11.18 | 10 |
5 | 마지막. | 2018.11.18 | 2018.11.18 | 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