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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미한 새벽

admin 2019.06.17 01:29 read.28

 

  누군가에게 크게 화를 냈을 때, 가장 먼저 찾아오는 감정이 뭔지 아는가? 바로 수치스러움이다.
 
  카뮤와 그의 집에 얹혀살고 있는 현은 지금 매우 난감한 상태였다. 그러니까 어떤 점에서 난감했냐면, 서로를 오해해서 있는 힘껏 싸웠는데 그게 사실 오해라는 사실을 알아차렸기 때문에 난감했다.
  사건의 전말을 설명하자면 이렇다. 1 22일 늦은 밤. 현은 카뮤의 생일이 몇 시간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카뮤의 생일 케이크를 준비했다. 문제는 그 때가 현도 카뮤도 본국과 연락이 끊겨서 신경이 한껏 날카롭게 변한 시기였고, 현은 아무 말 없이 그의 집을 빠져나가 케이크를 사러 갔다는 점이다. 카뮤는 현이 누군가의 스파이라고 판단해서 크게 화냈고, 그 사실이 못내 서러웠던 현은 눈물을 터뜨리며 그에게 맞서 소리 지르다가, 12시 종이 울리자 손에 들고 있던 케이크를 건네면서 생일 축하를 주워 섬겼다.
  카뮤는 반사적으로 케이크를 받아들었고, 양손이 빈 현은 그 손으로 눈물을 닦았다. 닦아도 닦아도 흘러넘치는 눈물에 어쩔 줄 모른다는 티를 역력히 내면서, 조용히 울었다. 카뮤는, 할 수 있는 말이 없어서 침묵했다.
 
  어둠 속을 가득 채운 울음은 소리도 제대로 나지 않았다. 현은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면서, 가끔 억누른 숨을 내쉬는 정도로만 울었다. 제 울음을 누가 보기라도 할까 조심스러운 몸짓. 어딘가 익숙한 구석이 있는 울음이 가늘게 이어지고, 알렉산더는 카뮤의 손에 머리를 박고는 하고 싶은 말이 있는 얼굴로 낑낑거렸다. 카뮤는 알렉산더의 불안해 보이는 몸짓에서, 현이 순수하게 그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서 집을 나섰다는 사실을 알아차린다. 그래, 무언가 수상한 움직임이 보였다면 알렉산더가 먼저 그를 깨웠겠지.
  사실 현이 울 즈음, 카뮤는 뭔가 크게 잘못 됐다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그가 생각했던 취조 분위기랑 전혀 맞지 않았다. 날카로운 조롱의 말과 가시 박힌 비난대신 그의 행복을 비는 말과 억울함을 항변하는 말이 튀어나왔다. 그의 감정을 접고 누군가를 믿은 어리석음을 자조하는 대신 눈앞에 있는 이 작자가, 진심으로 그의 행복을 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그건 어색하고, 이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일이다. 그는 현이 저렇게 우는 척 그의 목숨을 노릴지 모른다고 의심한다. 그건 퍽 가능성 있는 추측이라서, 그는 언제까지 우는 연기를 계속하나 보자는 마음으로 현을 응시했다. 사실, 시선을 돌릴 수 없어서 핑계를 댔을지도 모른다.
 
  울음이 그칠 때까지 불 꺼진 거실에 서 있을 수 없는 노릇이라 카뮤는 조용히 전등의 스위치를 올렸다. 빛은 한 순간에 퍼져나가고, 카뮤는 조금 더 선명하게 현을 바라볼 수 있었다. 그러니까, 그의 쇄골 즈음에 머리끝이 오는, 작은 사람이 소리 죽여서 눈물을 닦는 모습을 선명하게 응시할 수 있었다. 딱히 불을 켜도 도움 될 것은 없다.
  갑작스럽게 켜진 불에 작게 몸을 움찔거린 현은 울음을 수습했다. 알렉산더가 조심스럽게 그의 손에 머리를 들이밀고 낑낑거렸다. 현은 붉어진 눈가를 한 손으로 비비면서, 나머지 한 손으로 알렉산더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위로해주는거야? 작고 상냥한 목소리가 희미하게 카뮤의 귓가에 와 닿는다. 카뮤는 움찔거리는 손끝을 안쪽으로 말아 쥔다.
  목구멍에 매달린 말을, 입술 끝으로 밀어내는 순간. 현이 고개를 든다. 눈물 젖은 백안과 마주치고, 그의 혀가 굳은 순간을 틈타서 현이 말간 목소리로 권한다.
 
  “우유, 사왔으니까. 데워줄게요. 마실래요? 이렇게 된 거, 케이크 한 입은 먹고 자요. 모처럼 사왔으니까.”
 
  현은 대답을 듣지 않고 그의 손에서 봉투를 받아든다. 카뮤는 무심코 봉투를 넘기고, 현은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내면서 앞장선다. 카뮤는 제가 하고 싶었던 말이 무엇인지 헤아려보고, 현은 제 손으로 연신 머리를 들이미는 알렉산더에게 나는 괜찮다고 작게 속삭인다. 끼이잉, 하고 작게 울어대는 소리가 괜찮지 않다고 말해주는 것 같아서, 현은 이상한 생각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웃었다. 상냥한 개다. 상냥한 주인에 상냥한 개다.
  주방에 들어선 현은 카뮤에게 그릇과 수저의 위치를 물어가면서 끝까지 제가 하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원래 생일의 주인공은 태어난 사람이라고, 당신은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 제가 하고 싶어서 고집을 부리고 있으니까 당신은 그저 나한테 진 척 한번만 해달라고. 카뮤는 실크팔레스의 풍습은 그렇지 않다고 이야기 하고 싶었다. 축하를 받는 것을 감사하며 상대방을 대접하는 것이 당사자의 일이라고 설명하고 싶었다. 하지만 여전히 잔 울음이 남은채로 그에게 부탁하는 사람을 이길 수 없는 노릇이라, 그냥 그가 일러달라는 물건의 위치를 알려주며 조용히 식탁에 앉아있었다.
  현은 잔 울음이 남아 훌쩍이면서, 맑은 눈물 냄새를 맡았다. 한참 울고나면 나는 향이다. 소금의 향이 나는, 바다와는 다른 냄새. 눈물이 가시고 감정이 사그라지면 나는 이 냄새는 늘 평화롭다. 격한 감정과 어두운 생각이 모두 가시고 나면 나는 눈물 냄새는 평화의 상징이다. 현은 내심 이 평화가 반가워서, 조용히 따뜻한 우유를 젓는다. 새하얗고 불투명한 액체가 달콤한 색으로 녹아들 때, 조금씩 부끄러움이 찾아든다. 과했다, 과하게 화냈다. 이렇게 소리치지 않아도 됐는데. 조금 차분하게 조근조근 말해도 괜찮은 일이었는데. 정신없이 주워섬긴 말이 수치스러움이 되어서 돌아온다.
  카뮤는 우유를 젓는 현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언젠가의 채팅방에서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린다. 힘으로 억압하는 일은 정말 싫어한다는 말. 자신이 반항할 수 없는 방식의 억압은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고 주지시키는 것 같아서 증오스럽다던 말. 카뮤는 드물게 빠른 타자로 격양된 어조를 사용하던 현의 말투와 그가 눈앞을 막고 섰을 때 보였던 절망에 가까운 얼굴을 떠올리고 착잡한 심정이 된다. 무언가, 목을 돌덩이가 막고 있는 느낌이 든다.
 
  “, 여기 다 됐어요.”
 
  케이크를 예쁜 접시에 담아서 내놓은 현은 따뜻하게 데운 우유를 카뮤의 앞에 내려놓는다. 정작 준비한 사람의 몫이 없다.
 
  “너는 먹지 않을 셈인가?”
  “, 저는 단 걸 안 좋아해서요. 잘 못 먹어요.”
 
  발갛게 달아오른 눈가로 현은 어색하게 웃어 보인다. 좋아하지도 않는 것을 먹으라고 강요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서, 카뮤는 조용히 제 앞에 놓인 케이크를 포크로 잘라 입에 집어넣는다. 달다. 그의 입맛에 맞을 정도로 달다. 그는 제가 달게 먹는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으니, 이 음식은 현의 입맛에 전혀 맞지 않으리라. 이 작자는 오직 그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서 좋아하지도 않는 음식을 사왔다.
  입술 끝에서 떨어지지 못하고 매달린 말이 아슬아슬하게 달라붙는다. 이번에야말로, 하고 생각하며 혀끝으로 쓰다듬은 단어가 소리가 되기 이전에 현이 선두를 잡아챈다.
 
  “미안해요.”
   
  그는 마시던 우유의 단 맛이 갑자기 느껴지지 않았다.
 
  “경솔했어요. 그러니까, 당신이 놀랄 거라는 생각을 못하진 않았어요, 카뮤. 그냥, 생일 축하니까, 조금 놀래켜주고 싶었어요. 어쩌면 그냥, 그래요. 쪽지를 남겼어야한다는 생각을 못하지 않았는데. 내 잘못이 맞아요, 미안해요.”
 
  미안해요. 잘게 남은 훌쩍임을 끌어안은 목소리가 공기 중에 맴돈다. 어색한 목소리로 내던진 단어는 지독하게 어울리지 않는다. 끼이잉 소리를 내는 알렉산더가 다시 현의 손 아래로 머리를 들이밀고, 혀를 내밀어 손을 핥는다. 제가 정말 잘못했다는 생각이 희미하게 든다. 나는 괜찮아, 알렉산더. 하고 상냥하게 울리는 목소리가 끝나기 직전, 카뮤는 반사적으로 그 말을 내뱉는다.
 
  “나도, 잘못했다. 미안하다.”
 
  현은 정말로 의아하다는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 그는 그 눈을 마주한다. 막상 내뱉고 보니 단순한 말이다. 그러니까, 그가 그 동안 고민한 시간에 비해서 턱없이 짧다.
 
  “과했다. 그렇게까지 말 할 생각은 없었다, 단지.”
 
  카뮤는 그 즈음에서 말을 삼킨다. 현에게 하지 못할 말이 그의 입 속에서 맴돈다. 그러면 그렇지, 라고 생각했다. 그에게 상냥하게 대해준 사람이 이유가 있으니 한 편으로는 안심했다. 더 이상 사람을 믿지 않아도 괜찮으니 정을 뗄 작정이었다. 차마 하지 못할 말. 현은 그런 카뮤의 갈등을 기다리지 않고, 다급한 어조로 말한다.
 
  “, 아니에요. 카뮤. 당신이 사과할 일은 아니에요.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일이니까. 나빴다고 생각하지도 않아요.”
 
  작은 훌쩍임이 남아서 말끝에 달라붙는다.
 
  “제가 알아서 정리하면 되는 감정이에요. 너무 신경 쓰지 말아요.”
 
  말갛게 웃는 얼굴이, 부어 있는 눈이, 그가 내뱉는 말이 어울리지 않아서, 문득 붙잡아야 한다는 의무감이 치고 올라온다. 저대로 홀로 감정을 정리하게 두어서는 안 된다. 정말로 비이성적이고, 이해할 수 없는 생각이지만, 그의 감이 그에게 그렇게 명령한다. 저대로 두었다가는 영영 소통할 수 없으니까, 지금을 놓치지 마라.
 
  “그런 표정을 하지 마라. 나는 사과하고 있다. 그래, 네놈이 생일을 축하해 준 것에 대한 보답과 이번 건에 대한 사과로 무엇이든 부탁 하나를 들어주지. 네놈이 바라는 무엇이라도 좋다. 이 내가 특별히 무엇이든 들어주겠다고 말한 것이니 감사하는 것이 좋아.”
 
  오만한 단어에 어울리지 않는 다급한 어조. 현은 카뮤의 그 말을, 예전에도 들은 적 있다. 비록 그 상대는 제가 아니라 다른 작곡가였지만. 그는 같은 상황이 오면 같은 말을 하는, 제가 아는 카뮤라는 사실을 실감한다.
  현은 방금까지 서러웠다는 사실도 잊고, 제 눈앞에 있는 카뮤가 사랑스러워져서 바라는 것도 없으면서 이것저것 머리를 굴려본다. 역시 바라는 건 없다. 제가 카뮤에게 바라는 것은 행복해지는 것 하나지만, 대뜸 내가 안 우는 대신 행복해져달라고 부탁 할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소원을 대신할 한참 말을 고르다가, 문득 떠오른 말을 내뱉는다.
   
  “그럼, 같이 별을 봐 줄래요?”
 
  ‘무엇이든 이라는 단서가 붙은 소원에 이야기하기엔 조금 멋없는 부탁이다. 카뮤는 현이 제게 사랑을 속삭여 달라고 하거나, 제 시중을 들어달라고 하거나, 특별취급을 해달라고 할 것을 예상했다가 하잘 것 없는 대답에 맥이 풀린다.
 
  “물론. 그 정도는 얼마든지 해 줄 수 있다.”
  “, 그럼 잠시 만요. 옷 입고 올게요.”
 
  현은 제 방이라고 빌려준 곳에 올라가서 오늘 카뮤의 집에 올 때 입고 있던 옷을 입고 내려온다. 옷이라고 해도 낮에 입고 돌아다니기 위해서 가지고 온 것이라서 1월의 새벽 추위를 막아주기에는 역부족이다. 더군다나 오늘의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아서, 평소보다 날이 차갑다. 카뮤는 추위에 익숙하지 않은 현을 걱정스럽게 바라보지만, 현은 눈치 채지 못한다. 그냥 그가 혹시라도 마음을 쓸까봐 제 본국은 이것보다 춥다고. 일본의 추위는 견딜 만 하다고 너스레를 떤다.
  숲은 바닷가보다는 춥다. 익숙하지 않은 공기가 차갑게 느껴진다. 현은 가볍게 떨려오는 몸을 쓰다듬으면서, 숲의 나무 사이로 보이는 만월의 으스름달을, 그 옆에서 반짝이는 별을 바라본다. 본국과 다르지 않은 별이다.
 
  “별을 좋아하거든요. 밤에 이렇게 별을 바라보는걸 좋아해요. 여기는 저희 집보다 잘 보이지 않지만.”
 
  카뮤는 현의 말을 듣고 하늘을 눈으로 훑는다. 몇 년의 시간을 일본에서 보냈지만, 조국의 것과 다른 별자리는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는다. 도심에 가까운 숲에서는 많은 별이 보이지 않아 더욱 그렇다. 그는, 오로라가 뜬 하늘이 더욱 익숙하다. 아름다움이라면 눈 위로 춤추는 빛의 너울에 있다고 생각한다.
  
  “아까 그 달 이야기, 생각나는 대로 이야기해서 두서없고 알아듣기 어려운 말이 되어버렸지만, 그냥, 아무리 외로운 순간이라도 누군가는 당신을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 줬으면 한다는 뜻이었어요. 그게 꼭 내가 아닐 수도 있지만 아 물론 저는 당신을 생각하지 않는 순간이 더 적기는 한데, 이렇게 말하면 크리피하니까 밀어두고. 누군가 당신을 너무나 사랑해서 늘 떠오르는 사람이 없더라도, 잔잔한 사랑이라면 잔뜩 있다는 뜻이에요.”
 
  이렇게 이야기해도 두서없기는 마찬가지지만, 그래도. , 그러네요. 새벽이라 이렇다고 생각하고 넘겨주세요. 하고 덧붙이는 말이 겨울밤의 시린 공기 속에서 하얀 입김으로 부서진다. 카뮤는 그 말을 내뱉는 현의 뒤로, 희미하게 밝아오는 여명을 본다. 그런 말을 하고 있는 네가 태양처럼 떠오르고 있지 않냐고. 그런 주제에 희미한 빛이라는 이야기를 하냐고, 그렇게 묻고 싶었다. 그러나 말하지 않았다. 대신 하늘로 눈을 돌려 별의 개수를 가만히 헤아렸다.
  겨울밤은 차가워서, 생각과 말 모두 하얀 숨으로 부서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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