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 인생의 전부라면, 당신은 내 전부가 되겠지. 별달리 힘들이지 않고도 이런 문장은 한 권 내내 써 내릴 수 있다. 사실, 나도 좀 미친놈 같다고 생각한다. 아닌가? 그래, 정정한다. 사랑에 몸을 맡기고 흐르는 대로 따라가는 일을 즐기고 있었다. 미친놈 취급이야 하루 이틀도 아니고, 제정신이냐는 물음은 안 받은 해를 꼽는 쪽이 빠르다. 태어나길 이렇게 태어났으니 엄숙하게 선언하건대, 글러 먹었다.
자, 이쯤에서 간단하게 자기소개를 하자. 굳이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만, 이야기의 흐름이라는 게 있지 않던가? 나는 ‘나’다. 필자이며 화자. 독백을 이끌어나가는 주체이자 관찰자. 동시에 상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의 주인공. 사실 이렇게 설명하고 넘어가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소설이란 건 그럴 수 없는 노릇이다. 그러니 부연 설명을 곁들여 보자.
다들 판타지 소설을 읽어 본 적 있는가?
장르 문학의 한 갈래로 취급되는 ‘판타지’를 이야기하는 것이 맞다. 절대 일어나지 않을 일, 삶의 너머를 상상하게 만들어 대리 만족을 안겨 주지만 현실에서 일어난다면 비명부터 지르게 될, 그런 장르. 기실 장르의 목적이 어떤지는 잘 모르는 일이니 적당히 떠들어대고 있지만, 이 장황한 이야기의 중심은 ‘절대 일어나지 않을 일’이라는 점이다. 그래. 나는 절대 일어나지 않을 일의 주인공이 되어 제 삶을 소설 취급하는 경지에 이르렀다. 그렇지 않은가? 좋아하는 게임의 가장 좋아하던 캐릭터가 사는 세계에 떨어졌고, 사실 이게 나만 떨어진 게 아니라 내가 살던 세계와 합쳐졌다는 이야기, 트렌드에 뒤떨어졌다는 이유로 요즘은 잘 나오지도 않는다.
사건의 경위를 구구절절 설명하는 일은 수치스러우니 적당히 얼버무리기로 하고, 이런저런 일을 겪어 나는 트렌드에 뒤떨어지고, 스스로 글을 쓴다고 해도 절대 채택하지 않을 소재를 제 인생에 편입시켜 직접 겪어나가고 있다. 우습지도 않은 이야기가 아니던가? 일본어를 자주 쓰게 되어 어쩔 수 없이 옮아버린 어조로 말하자면, 골계다. 다만 그저 웃을 수 없음은, 스스로 평가하기에 이토록 낡아 빠진 이야기를 정신없이 헤쳐나가며 즐거워 미칠 것 같다고 생각하는 제 감정에 있지 않을까.
사람을 사랑하는 일은 즐겁다. 하지만 선을 지키는 건 어렵다. 그러니까 선을 지키지 않아도 될 상대를 사랑하자! 몇 년 전의 저는 그렇게 생각했다. 실제로 성공했다. 화면 너머의 캐릭터를 얼마나 사랑한들 피해가 있을 리가 없잖아? ‘카뮤’는 그런 존재였다. 화면 너머의 대상. 사랑의 대체어, 삶에 있어서 사랑의 이데아. 차마 남에게 말할 수 없는 수치스러운 일도 꽤 했다. 아, 미리 말하건대 사회 도덕적으로 흠결이 생길만한 일은 하지 않았다. 그냥…… 개인적으로 조금 수치스러운 일이다. 아무튼 이 이야기는 넘어가서, 이야기의 논점은 이렇다. 그런 상대가 정말로 눈앞에 나타났을 때, 당신은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태도를 견지할 수 있는가? 나는 불가능했다. 과거형인 이유는 시도했는데 실패했다.
나는 실패한 일에 굳이 매달리는 사람이 아니다. 필요하고, 가능성이 보인다면 시도를 아끼지 않는다마는 실패가 뻔한 일에 기력을 낭비해서 얻을 게 무어 있던가? 애초에 불가능한 일에서 발을 빼는 순간은 빠를수록 좋다. 나는 깔끔하게 포기했다. 대신 사랑해 마잖는 사람의 옆에서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하기로 했다. 그래, 여기까지 자기소개였다. 이미 굳게 정해두었던 진로를 억지로 틀어서 팔자에도 없는 작곡을 하게 된 이유에 대한 부연 설명쯤 되겠다. 나는 사랑해 마잖는 아이돌의 미래를 구하고 세계를 구하며 겸사겸사 그의 나라와 여왕에게 권력을 조금 실어주기 위해서 ―대관절 세계의 안위와 정치 권력, 행복한 미래와 음악이 무슨 관련이 있냐고 말하고 싶은 마음은 이해한다만 이 세계는 그렇다. 음악으로 해결이 된다.― 작곡가가 되었다.
팔자에도 없는 작곡은 그리 즐겁지는 않다. 글을 쓰는 일이라면 앉아서 열다섯 시간을 내리 해도 체력적 한계를 느낄 뿐 즐겁다고 하겠지만, 음악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들어서 좋은 음악과 대중성 있는 음악의 차이를 알 수도 없고, 애초에 연주 실력을 판별할 귀라면 몰라도 곡 자체의 완성도를 평가할 수 있는 귀 같은 건 가진 적이 없다. 글을 쓰는 일이 알고 있는 험지를 탐험하는 일이라면, 음악을 작곡하는 일은 아예 모르는 어둠을 더듬어 나아가는 일이다. 어떻게든 하고 있지만, 포장하는 일도 심정을 숨기는 일도 불가능하다. ‘신이 내린 재능’이라는 말을 들어도 와닿지 않는다. 당연하지, 진짜로 신 내린 기분인데. 오선지 앞에서 이성을 잃었다가 정신을 차려보면 곡이 하나 나와 있는 기분은 그리 유쾌하진 않다. 뭐, 사랑하는 카뮤를 위해서라면 견디지 못할 불쾌함은 아니지만.
다만, 정말로 견딜 수 없는 순간은 이런 때다.
“너는―.”
“예.”
“제정신인가?”
아하하, 가벼운 웃음으로 넘겨보려고 했지만, 딱히 먹히진 않는 모양이다. 제가 생각해도 이틀을 내리 굶었다가 카뮤에게 저녁을 차려 주겠다고 제대로 요리했다가 속에 무리가 간 건 너무했다고 생각한다. 그래도 걸리지 않을 자신은 있었는데, 알렉산더 ―카뮤의 애완견이다.―가 배신했다. 내가 어쩌고 살았는지 카뮤에게 구구절절 일러바쳤다. 애가 머리가 좋으니까 소통의 편의성을 위해서 그림 카드를 만들어 줬는데 그걸 가지고 카뮤한테 일러바칠 줄은 몰랐다. 지금까지 내가 시켜준 산책이 얼마고 말려다가 바친 육포가 얼만데! 원망과 배신감 섞인 눈으로 쳐다봐도 알렉산더는 당당하게 코웃음 칠 뿐이다. 그래, 네 기준으로 잘못이 없긴 하겠지.
원망 섞인 투덜거림은 오래 가지 못했다. 이리저리 눈깔 굴리다가 걸렸다. 카뮤상은 더욱 질렸다는 표정을 숨기지 않으며 알렉산더가 가져다준 그림 카드를 손끝으로 탁탁 쳐대었고, 나는 지은 죄가 있어서 다시 눈을 데굴데굴 굴렸다. 진짜, 이번에는 걸리지 않을 자신이 있었는데.
“침식을 잊고 작업해서 대-단한 곡이라도 나오는 모양이군.”
“그건, 아니지만요…….”
“아니라면, 시위인가?”
“아뇨, 제 복지에 불만 없는데요.”
유난히 날카로워 보이는 카뮤의 태도의 이유를 도무지 종잡을 수 없었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내가 밥을 먹든 안 먹든 무슨 상관인가? 라는 감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고용한 사용인의 건강은 고용주인 귀족의 명예와 직결된다는 말을 어디서 들어 본 적 있으니 그 정도의 감각이라 미루어 짐작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도 확 와닿진 않는다. 뭐, 관심이나 받아보자고 일부러 먹지 않았거나 자학적인 이유로 식사를 걸렀다면 좀 찔리겠다만, 이번에는 진짜로 억울했다. 제정신을 못 차리고 작곡에 몰입한 게 어디 내 잘못이던가? 평소에 몸을 챙기지 않았다면 억울하지나 않지,
물론 사랑에 권력이 있으면 더 사랑하는 쪽이 지는 싸움인 건 확실하니까 이 싸움은 결국 내가 사과하고 끝날 게 분명하다. 패배에 불만은 없다. 그게 불만스러웠으면 애초에 사랑하지도 않았다. 다만, 이상한 기분이 드는 이유는 다른 쪽에 있다.
“그으― 다음부턴 알렉산더 밥 말고 제 밥도 잘 챙기도록 노력하겠습니다……?”
“흥. 당연히 그래야 할 것이다. 네가 밀어붙여서 받아들인 파트너 자리다. 이제 와서 네가 쓰러졌다는 이유로 다른 작곡가를 받아들이는 건 귀찮아. 노력에 첨언하진 않겠다만 제 상태를 돌봐가면서 해라.”
“예에―.”
딱히 내키지 않아 길게 넘어가는 말투에 팔짱을 끼고 서 있던 카뮤상은 한 번 더 흥, 하고 코웃음을 쳤으나 등을 돌려 침실로 올라갔다. 이걸로 오늘치 훈화는 어떻게 일단락되었다는 뜻이다. 하아아……. 긴 한숨을 내쉬며 소파 위로 쓰러졌다. 알렉산더는 그렇게 될 줄 알았다는 태도로 주인을 꼭 닮은 코웃음을 치며 내 다리를 코로 밀었고, 나는 괜히 억울해서 알렉산더의 잘 빗어둔 털을 마구 헝클어뜨렸다. 도대체 왜 그런 거야! 개 주인한텐 차마 못 한 말이다. 물론 주인 닮은 개는 도도하게 앞발로 내 손을 한 번 짚고 자기 쿠션 위로 올라가 동글동글 말려 버렸으니 내 말을 들어 먹진 않았겠지.
하아.
짧은 한숨이 샹들리에 걸린 거실 속에서 부서진다. 정말로, 팔자에도 없는 작곡을 하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당신을 사랑한다. 그러니 내가 쓰는 모든 곡은 세레나데와 다름없다. 열기에 미쳐 사랑을 속삭이는 일은 특기니까 자신 있다. 다만 생각지 못한 문제는, 당신 앞에서 보이는 태도와 건네는 말 모두가 세레나데였다는 점이다. 본래 내 인생에 존재하지 않았을 이야기, 급하게 끼워 넣은 단락. 당신을 위해 준비했으니 마땅히 당신의 것이고, 이유가 사랑이니 고백과 다름없는 모든 시간과 순간들. 나름대로 노력한다고 했지만 ‘평범’이나 당신의 기준을 감을 잡을 수 없으니 이런 실수는 날이 갈수록 늘어간다. 제길. 어디 말하지도 못할 욕설은 입안의 우물거림으로 삼켜버린다. 사랑 고백은 어렵다. 적당히, 보여줄 부분만 보여주는 일은 더 어렵다. 다음엔 좀 더 신경 써야지. 그래도, 사랑 앞에서는 완벽하고 싶은게 사람 마음 아니던가.
아, 진짜로. 팔자에도 없는 짓을 하는 건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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