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 여기 느낌표가 하나 있다. 사람 모양이라고? 느낌표다. 아무렴, 심장 대신 시계가 자리하고 사람 모양을 한 숫자와 시간이 의미 없이 흘러 넘치는 세계에서 사람 모양을 한 느낌표 하나 있어도 별로 신비할 일은 없지 않겠는가. 자,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여기 느낌표가 하나 있다.
느낌표, 라고 몇 번 반복하고 있으면 사람의 머리는 신비한 작용을 시작한다. ‘느낌표’라는 단어가 이상해지기 시작한다는 뜻이다. 느낌, 느낌이라. ‘느낌’이 무엇인지, 어떤 단어인지, 왜 쓰고 있는지 확실하게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이것 보아라, 물음표는 물을 때 쓰인다. 하지만 느낌표는 어떤가! 이렇게 문장 뒤에 붙이면 쩌렁쩌렁 소리치는 사내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기도 하다. 사내가 아니라고? 그렇지. 지금 말하고 있는 화자의 목소리는 조금 높은 편이다. 아무렴, 신체적 여성인 만큼 변성기를 거쳐 목소리가 높아졌지. 나를 다시 설명하겠다.
여기, 이상한 세계의 느낌표인 루시 윌로우가 있다.
루시 윌로우는 이상한 인간이었다. 그러니까 이건 개인적인 의견이 아니라 지인 의견 대부분을 종합한 것으로, 그들은 누구나 입을 모아서 ‘그런 생각을 하다니 역시 부외자는 신기하네.’ 따위의 이야기를 해대곤 했다. 물론 나는 현명한 루시이므로 그들 앞에서 나는 내 세계에서도 언제나 그런 이야기를 들었다는 말을 꺼내는 대신 아하하 웃어넘기는 쪽을 택했다. 기실 그들이 생각하는 대로 ‘의미 없는’ 일에 체력을 낭비하기 싫어하는 것이 성품이라는 사실도 부정할 수 없었다. 이해해 줄 수 없는 상대에게 길게 말을 늘어놓는 것이 자기위안 –줄이면 큰일 난다.- 외에 어떤 역할을 가진단 말인가? 루시는 그런 일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게다가―
아, 왜 자꾸 자신을 3인칭으로 부르고 있냐고?
감이 좋네. 이래서 감이 좋은 꼬맹이들은……. 아, 장난이다. 그런 눈으로 보지 마라. 원래 해설의 주인공이라는 인종들이 장난을 좋아하는 법 아니겠는가. 입을 잘 터는 정도가 작품의 질을 결정하는 ‘글’이라는 매체의 해설을 담당하면 이렇게 되는 법이다. 자자, 그런 건 넘어가자고. 그래, 당신이 옳다. ‘나’는 ‘루시 윌로우’이되 루시가 아닌 사람이다. 본명은 넘어가자고. 굳이 이야기할 만한 것도, 떠올릴 것도 아니다. 그러니까, 이런 걸 읽어대는 사람이 친구 중에 존재하는 탓에 마음 놓고 생각도 할 수 없다.
아, 물론 나의 사랑하는 친구, 독자인 당신을 포함하는 말이다. 그렇지 나이트메어?
“아아.”
읽지 말라니까 이 몽마, 또 읽고 있었구만?
“들리는 것을 듣지 말라니, 너무한 것을 요구하는군, 루시. 네가 원하는 대로 이렇게 쓰디― 쓴 약까지 마셔주고 있지 않은가. 좀 더 상사를 존경해! 위대하다고 생각하란 말이다!”
음, ‘들리는 것을 듣지 마라’ 라던가 ‘보이는 걸 어쩌라는 말인가’라는 점에서는 동감하지만 –애초에 내가 타인의 생각을 읽고 짐작하는 것도 그런 맥락이고 말이야.- 나는 고쳤잖아? 당신도 나를 친구로 존중하기 위해서 안 읽는 노력이라도 해 달라고. 아니면 티를 내지 말아 달라고 부탁하고 있잖아. 게다가……. 아니다. 그래, 당신 대단해. 최고야! 나이트메어! 그렇게 약을 벌컥벌컥 마셔서 건강해지는 거야!
“우우……. 무리한 요구를 하지 마라! 이것만으로 충분히 괴로워……. 나는 최선을 다했다……. 으으, 기분이 안 좋아. 토기가 올라온다……. 토할 것 같아…….”
우왁, 참아! 참아! 여기서 토하면 애써 마신 약이 소용이 없잖아! 게다가 넘어온 약이 다시 입에 남는다고? 엄청 쓰다고?
“으으……. 그런 말을 들어도……. 상상해버리지 않았나……. 토할 것 같아……. 피라던가 다른 이런저런 걸 토할 것 같아…….”
우와악! 참아! 참으라니까!
“……. 저기, 나이트메어님, 윌로우. 두 분…… 두 사람…… 아니, 아무튼, 둘은 도대체 뭘 하고 있는 거지? 내게는 일방적인 시선 교환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만……. 나는 나이트메어님과 같이 마음을 읽을 수 없으니 말로 해주지 않으면 알 수 없다. 게다가 나이트메어님, 당신은 대단하십니다. 예에, 대단하고 말고요. 약도 드시지 않으셨습니까. 이 기세로 토기도 참고 약이 들으면 다시 책상에 앉아 서류를 처리하시는 겁니다. 당신은 할 수 있습니다.”
“으으…… 이런 고생을 겪은 날 위해서 휴가를 준다는 발상은 없는건가?! 그레이, 넌 도깨빈가?!”
“예, 예. 저 서류가 끝나면 얼마든지 휴가를 가지셔도 됩니다. 게다가 서류를 위해서라면 도깨비든 귀신이든 되고 말고요. 밀린 서류가 벌써 10시간대치는 될겁니다.”
“무리, 절대 무리다. 절대로 저 서류를 하는동안 다시 상태가 나빠질게 분명해.”
“그럼 조금이라도 더 할 수 있게 당장 시작하셔야겠군요.”
나이트메어와 그레이는 평소와 다름없는 언쟁을 시작했다. 어차피 해야 하는 서류니까 나라면 빨리 끝내버리고 다른 일을 할 텐데, 아무래도 나이트메어는 나랑 가치관이 다른 모양이지. 아무튼, 두 사람? 도마뱀과 몽마? 가 언쟁을 벌이는 동안 다시 생각을 이어가자. 자, 내가 어디까지 이야기했더라? 아, 본명에 관해서 이야기하다가 말았지. 그래, ‘루시 윌로우’는 내 본명이 아니다. 동시에 ‘나’도 아니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이 세계에서 편하게 살기 위한 대외적 아바타, 쯤 되곘다. 조금 더 자세하게 설명해 보자.
우리는 여러 가지 게임을 즐긴다. 그러니까, 왜, 많잖아? 굳이 내가 이야기하지 않아도 당신이 게임 속 캐릭터에 이입해서 즐길만한 게임은 여럿 있잖아. 무얼 생각하든 자유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게임 속 당신의 선택은 ‘당신’의 선택이면서 동시에 당신의 선택이 아니다. 게임이 당신에게 안배한 성격이 있잖아? 거기 맞춰서 선택해본 경험, 없나? 그치, 있겠지. 없어도 괜찮다, 있다고 생각하고 이야기를 마저 진행하면 된다. 나의 ‘루시’는 그런 아바타와 같다. 모든 것은 진심이지만 동시에 ‘루시 윌로우’라는 사람을 만들어서 그가 할 법한 행동을 연기하고 있다. 그들과 어울리는 내가 가진 사랑은 거짓이 아니지만, 동시에 거짓 하나 없는 ‘나’로 그들과 마주하고 있냐고 묻는다면 글쎄…….
‘그래, 루시. 과연 네가 말하는 사랑이 진정한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까? 루시라는 이름이 아니라 완전히 민낯을 하고서도 그들에게 사랑을 속삭일 수 있어?’
잠시만, 이 목소리는 반칙이잖아. 저기, 조커, 룰 위반이라고요. 아니, 엄밀하게 말하자면 이 세계의 룰을 위반하진 않았지만, 이 글에서는 위반이라고. 이건 클로버 탑에서 진행되는 이야기니까 당신은 나오면 안 돼. 원래 광대는 어디든 가는 존재라지만 심각한 이야기를 할 때는 빠져주는 법이라구.
‘후후, 그런 걸까. 뭐, 그럼 지금은 잠시 퇴장, 이라는 걸로 해 둘게. 다음 공연, 다음 서커스의 방문을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헹, 되지도 않는 소리를 지껄여대는 애새끼구먼! 이래라저래라 저 좋을 대로 이야기하기만 하고, 조금도 이야기를 들을 생각은 없는 주제에 잘난 듯이 떠들어대기는.’
‘이런, 조커. 그런 식으로 이야기하면 안 돼. 진실을 이야기할 때는 좀 더 배려라는 걸 익히지 않으면.’
저기, 당신 둘 다 나한테 욕하고 있다는 사실은 변함없거든요? 하여튼 둘이서 갑자기 등장해서는 이야기의 흐름도 끊고 내 생각도 끊어놓고……. 저리 가세요, 훠이. 훠어이!
아무튼, 아, 아까부터 ‘아무튼’이라는 말을 자주 사용하는 기분이 들지만, 입버릇으로 두고 넘어가자. 넘어가서, ‘루시 윌로우’는 나이며 동시에 내가 아니다. 이런 말을 하는 건 머릿 속과, 그걸 들여다 보곤 하는 배려심 없는 몽마와
“배려심 없다고 할 건 없잖아, 배려심 없는 건. 나는 언제나 배려 깊―고 부하를 생각하는 몽마라고?”
이 글을 읽고 있을 독자 되는 당신 정도다. 특별한 기분이 들었다면 영광이다. 가장 친한 친구, 친구라고 부르면 너무나 먼 느낌이 드는 나의 안내인이자 동거인, 언제 돌아왔을지 모르지만 세계관적 허용으로 넘겨버리고 그에게 재회 인사를 할 기회마저 빼앗긴 나의 사랑하는 유리우스 몬레이에게도 이런 말을 한 적은 없다. 뭐, 무슨 말이던 그에게 할만한 것은 그리 많지 않지만. 본디 사랑이란 그런 법이다. 제멋대로 사랑을 흩뿌릴 때는 그의 반응이 전혀 신경 쓰이지 않지만, 사랑받고 싶어지는 그 순간에야말로 사람은 사슬에 얽매이게 되는 법이지. 그런 이유로 ‘루시’가 아닌 이야기를 그에게 할 일은 많지 않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이쯤에서 눈치챘을지도 모르겠지만 이 이야기는 론도적 구성을 가지고 있다. 변주곡을 닮기도 했겠지. 정신없는 텍스트 덩어리를 마주하게 된 당신에게 심심한 경의를 표한다. 그리고 이 단어에는 별 의미가 없다.- 우리는 느낌표를 보고 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당신’은 느낌표를 보고 있다. 그래, ‘루시 윌로우’는 느낌표다. ‘이상한 세계’라고 하는 것은 이렇게 누군가 사람의 마음을 읽거나, 분명 사람이지만 그를 모두 ‘도마뱀’이라고 부르거나, 목숨에 의미가 없고 모든 것은 대체 가능한데 어떤 연유인지 모르지만 ‘나’는 대체할 수 없다고 말하는 세계를 의미한다.
숫자가 흘러넘치고 시간이 말하는 세계. 제멋대로 움직이는 ‘시간’ 속에서 의미를 잃은 것들의 ‘의미’가 되어주길 기대하는 친구들이 있는 세계. 이게 나의 ‘원더랜드’다.
‘느낌표’라고 하면 NPC라는 단어를 떠올리는 사람이 있겠지. 그래, 나는 NPC에 가깝다. 그러니까, 확실하게 플레이어는 아니다. 이 게임은 플레이어를 위한 자리를 안배해 두었지만 그에게는 이름이 있고, 설정도 있고, 백스토리도 있다. 그리고 그 모든 이야기는 확실하게 내 것이 아니므로 나는 NPC다. 아, 물론 버그나 반칙이나, 아무튼 그런 규정을 위반하는 존재는 아니다. 그랬으면 진즉 내 사랑해 마지않는 동거인에게 일이 났겠지. 그게 아니라, 예전에는 플레이어였지만 우연한 계기로 이유 없이 이 세계로 빨려 들어온 사람쯤 된다. 돌아갈 방법도 없어서 허공의 독자를 향해서 떠들어대는 미친 플레이어. 꽤 멋진 이야기가 될 것 같지 않은가?
자 이쯤에서 전원 박수! 와!! 짝짝짝.
그리고 변명하건데, 원래 이런 성격은 아니다. 지금은 일부러 생각을 이리저리 던져대느라 이런 독백을 반복하고 있으니 이해해 줄 수 없겠나? 평소에는 좀 더, 사회 통념적으로 ‘정상’이라고 간주하는 기준 안에 존재한다. 아마? 아마 그렇겠지. 그치, 나이트메어?
대답이 없는 걸 보니 삐져서 아무 말도 하지 않기로 결정했거나, 서류 처리에 끌려가서 내 말을 들을 경황이 없나보군. 어느 쪽인지 모르겠지만 한 번 소리쳐 두겠다. 나이트메어! 방금은 짜증내서 미안해! 당신이 약을 안 먹고 그러는게 걱정 되어서 그랬어! 다음에 맛있는거 만들어 줄게 화 풀어!
“진심인가?”
“물론, 원하는 건 뭐든지 만들어줄게.”
“풀코스 디너도?”
“음……. 어려울지 모르지만 힘내볼게. 그 서류를 다 하면 다음 밥은 내가 만드는 풀코스 디너가 될 수 있을지도?”
“좋아! 약속이다, 루시!”
보상이 있으면 일하는 보람이 난다며 나이트메어가 거침없이 펜을 긋다 종이가 찢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새 서류를 만들기 위해서 저 멀리 사라지는 부하직원의 발소리와, 나이트메어 옆에서 존경이나 감탄의 눈빛을 보내오는 그레이도. 찡긋, 윙크를 날리고 다시 생각에 집중한다. 그러니까, 어디까지 이야기했더라? 그래. 내가 한때 ‘게임이었던’ 세계에 끌려들어 온 플레이어라고 했지.
원래 이 게임은 ‘다른 세계에서 넘어온 사람’을 주인공으로 하는 게임이다. 그러니까 내가 이 세계에 떨어진 것 자체는 게임과 큰 차이가 없다는 뜻이다. 단지 차이라고 한다면 나는 여기 등장인물 중 몇몇과 이미 꿈에서 괜찮은 관계를 맺어왔고, 내가 떨어진 이후에도 이어졌으며, 정신을 못 차린 루시 윌로우가 그들에게 사랑을 퍼붓는 방식으로 어리광을 부렸다는 것이겠지. 이 게임의 주인공이 사랑 따위 귀찮고 연애는 성가시다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었다면, 나는 정반대였다. 사랑은 삶의 이유이며, 내가 그들을 사랑하지 않을 이유는 무엇이란 말인가. 어차피 떠날 곳이라면 자제는 무의미하다. 무의미한 일은 별로 선호하지 않고, 나는 마음껏 그들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속삭였다.
뭐, 그러다가 흩뿌리지 않는 사랑을 하게 된건 정말 본의가 아니었지만.
본의 아닌 이야기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하는 건 이쯤 하자. 어차피 이건 의식의 흐름대로 흘러가는 내용 없는 소설이다. 텍스트 덩어리, 가치 없는 단어의 집합이라고 이야기해도 된다. 음? 그렇지 않다고? 다정한 말 감사. 하지만 진실이다. 이 글이 존재하는 이유는 내 생각을 누군가에게 주절주절 떠들고 싶어서니까. 아무튼, 느낌표에 관해서 이야기하고 있었지.
본디 느낌표는 강조의 의미로 사용한다. 그리고 글에서 ‘강조’라고 한다면 작가가 특히 많은 뜻을 담았거나, 사람들이 봐 줬으면 하는 부분이 된다. 그런 의미에서 루시 윌로우는 느낌표다. 그의 행적은 모든 역할자들이 주목하고, 모니터 너머에서 바라보고 있을 사람도 주목하며, 그의 행동이 만들어낸 변화 또한 주목의 대상이다. 그는 변수이고, 정해진 길을 바꾸는 존재이며, 룰을 부수는 룰 브레이커다. 본디 예정된 것을 비틀며 이야기가 시작되는 것이 왕도인 만큼 정석적인 주인공이고, 강조점이며, 느낌표라고 할 수 있지 않겠는가.
루시는 엄습하는 두통에 머리를 짚었다.
빠르고 날카롭게 이어지는 사고는 뇌를 헤집는다. 아무리 좋게 말해도 ‘괜찮다.’라고 말할 수 없는 상태를 오랜 시간 지속하는 일은 몸에 무리가 간다. 두통, 구역감, 불안과 초조. 양 손목을 마주 잡고 하얗게 질릴 정도로 힘주고 있는 모습을 바라보며 그레이 링마크는 걱정을 삼켰다. 본래 저 정도로 불안한 인종은 아닐 터인데. 유리우스 몬레이가 옆에 없을 때도 불안하였지만, 그가 돌아오고 나서는 더욱 보기 힘들 정도로 흔들린다. 꽤 오랜 시간을 저 상태로 있었으니 두통이 심하겠지. 그레이 링마크는 예전 루시가 지나가듯 제가 패닉 상태에 빠져들면 사고가 너무 빨라서 힘들다는 이야기를 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루시.”
“아, 아. 링마크씨. 무슨 일인가요?”
“괜찮나?”
“괜찮냐니, 무슨……. 아, 방금 울먹이면서 나이트메어에게 약을 먹어달라고 부탁한 것이요? 그거라면 이제 괜찮아요. 약을 먹었으니까 아까처럼 열이 오르지도 않을 테고……. 아, 아니면 아무 말 없이 서 있는 것이요? 그것도 괜찮아요. 제가 생각하는 건 나이트메어가 듣고 있으니까 사실상 혼자 주절주절 떠들어대는 꼴이고…….”
“그게 아니라……. 잘 설명할 수 없지만, 루시, 무언가 고민거리가 있는 게 아닌가?”
꽤 조심스러운 질문법이다. 그 조심성 덕분에 루시는 제 불안이 그에게 드러났음을 깨닫는다. 아, 진짜로 귀찮은 상태구나. 그는 반사적으로 방에 돌아가 이불을 뒤집어쓰고 눕는 상상을 반복하지만, ‘방’이라고 할 만한 곳은 다 너무 멀다. 유리우스의 방은 지금 주인이 없고, 모자가게 저택까지 돌아가면 나오기 어려울 테고―
아, 쥴.
루시는 다시 엄습하는 두통을 버티기 위해서 입술을 깨문다. 그레이 링마크의 목소리는 너무 거칠다. 편두통이 심할 때는 뇌를 긁어내리는 느낌이 든다. 아니, 누구의 목소린들 그런 느낌을 안 주겠냐마는. 유리우스. 당신의 목소리도 머리가 아프면 듣기 싫었지. 하지만 지금 당장 간절하게 듣고 싶다는 사실이 우습다. 괜찮으려나. 아니, 괜찮지 않겠지. 알고 있는데. 따라가야 했는데. 제길, 이럴 때는 그가 눈치가 좋아서…….
“시계 장수는 괜찮을 테다. 그는 강……하다고는 말하기 어렵지만 역할자다. 그렇게 쉽게 죽거나 하지 않아.”
“그렇겠죠. 하지만……. 어딘가 다쳐오기는 하잖아요. 그것도 제대로 치료하지도 않고 자기 방에 틀어박혀버리고.”
“그건…… 그렇지만. 그 자도 성인이야. 네가 일일이 따라붙어 챙길 필요는 없다, 루시.”
“그렇다고 해도 걱정을 안 할 수는 없잖아요, 링마크씨. 아, 젠장, 제기랄. 지금은 불안하니까 제발 다음 시간대에 가라고 그렇게 말했는데. 같이 가겠다는 건 막은 주제에 혼자서 바쁘다고 훌쩍 가버리고……. 돌아와서 다쳐있기만 해봐라…….”
그레이 링마크는 다시 머리를 짚으며 두통과 싸우고, 결국 고통과 불안을 이기지 못해 흐르는 눈물을 닦아내며 입술을 깨무는 루시 윌로우를 걱정스럽게 내려다보았다. 시계장수, 유리우스 몬레이가 일이 있다며 나간 이후로 계속 저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나가기 전에는 전에 없이 필사적인 얼굴로 나도 따라갈 수 없냐며 매달리더니, 거절당한 이후로는 방이나 체재지로 돌아가지 않고 집무실에 들러붙어 시간을 보내고 있다.
유리우스가 나간 후로 시간대가 한 번 바뀌었으니 루시는 적지 않은 시간을 긴장 상태로 보냈다는 뜻이다. 처음에는 웃고 떠들던 루시 윌로우는 이내 머리를 헝클어뜨리기 시작했고, 조금 더 시간이 지나서는 읽던 책을 내던졌으며, 조금 더 지나서는 피를 토하는 나이트메어 앞에서 울먹이는 얼굴로 제발 날 생각한다면 약을 좀 먹으라고 애원했다. 그러고는 계속 저 상태다. 의무실에서 나이트메어의 약과 진통제를 받아와서 먹이고 먹고 나서 침묵. 실없는 농담으로 루시의 기분을 달래보려던 나이트메어는 그의 눈치만 보며 서류작업을 묵묵히 지속하고, 상사의 눈치를 견디지 못한 그레이는 루시에게 말을 걸었다. 하지만 그 뿐이다.
“좀 진정해라. 그는 쉽게 다치거나 죽을 사람이 아니야. 따뜻한 코코아를 가져다 주지. 그것이라도 마시고 조금 눈을 붙여라. 몇 시간대나 잠을 줄이고 일하지 않았나.”
“그건 괜찮아요. 지금 뭘 먹으면 확실하게 토하니까. 그리고 잠은……. 그러네요. 유리우스가 돌아오면 보스, 그러니까 블러드의 저택에 돌아가서 푹 자는 것도 나쁘지 않겠네요. 쥴이, 돌아오면…….”
루시는 그 누구의 말을 들어도 대충 흘려보내고 제 생각에 빠져들었고, 나이트메어와 그레이는 그런 루시를 무시하지 못하고 계속 지켜볼 뿐이다. 그래, 어떤 의미로든 루시는 느낌표였다. 그가 존재하는 모든 상황은 극적이고, 거대하며, 큰 소리를 내어서 쳐다보지 않고서는 버틸 수 없다. 그를 바라보지 않고서는 모든 상황이 너무나 단조롭다. 그레이는 손을 깍지끼고 다시 하얗게 질릴 정도로 힘을 주는 루시를 바라보며, 유리우스 몬레이의 빠른 귀환을 빌었다.
자, 루시. 네가 내던진 해설은 내가 이어받았다고? 다음 시간대의 식사는 호화로운 풀코스 디너로 약속한 것을 잊지 말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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