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의 초입, 아직 시작이라는 사실을 고려해도 지독하게 더운 날이었다. 뭐, 바다에 걸맞은 날이라고 생각하면 그리 나쁘지도 않았으나, 볕을 싫어하고 낮을 증오하는 친구를 옆에 두면 볕이 원망스럽다는 생각이 적잖이 들었다. 물론, 생각만 했다. 이미 출발한 여로, 불만에 귀를 기울인다고 기온이 떨어질 일은 없다.
여름이 어쩌니, 더위가 어쩌니, 하는 말을 듣고 있으면 슬슬 귀가 따가울 지경이다. 이 빌어먹을 친구―웬수에 가깝다마는―께서는 한낮의 바다에 가자는 제안을 거절하지 않은 주제에 건물 밖으로 나와 빛에 닿은 그 순간부터 불만을 중얼거렸고, 운전대를 잡아 놓고 갑자기 기분이 나쁘다며 핸들을 좌우로 꺾어대길 서슴지 않았다. 옆이 절벽인 좁은 산길에서 말이지. 물론 나는 비명을 질렀고, 생명의 위협을 느낀 희생양의 처절한 비명소리가 퍽 마음에 드셨는지 까탈스러운 상전께서는 친히 운전대를 고쳐잡으셨다.
“너도 꽤나 귀여운 목소리를 낼 줄 아는군, 아가씨. 부디 평소에도 그런 목소리를 들려주면 기쁘겠어. 아, 물론 평소가 아니라 특별한 상황, 예를 들어 침대 위라도 상관하지 않겠다만.”
“그게 지금 나올 말이냐 웬수새끼야!!”
볕 따가운 숲길에 울린 목소리의 주인은 굳이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달리기를 몇십 분. 거친 운전에 긴장하고, 안전띠와 손잡이에 매달리고, 눈치 없이 끼어드는 차들에 내심 욕을 퍼붓길 얼마나 반복했을까. 겨우 조수석 창문 너머로 바다가 보이기 시작했다.
산의 나무 사이로 얼핏 보이기 시작하는 푸른 빛이 주는 안정감은 아는 사람만 만끽할 수 있는 쾌락이다. 나뭇잎 사이로 비쳐드는 햇살은 정확한 직선을 그리고, 빽빽하게 들어선 나무는 검은색과 갈색 사이 어딘가를 스친다. 자외선 강한 짙은 빛 속에서 나뭇잎은 눈이 아플 정도로 선명한 초록색을 그리고, 그 너머로 보이는 바다는 거짓말마냥 푸르다. 그래, 거짓말마냥 푸르다.
창문을 닫고 달리고 있으니 들릴 리 없는 파도 소리가 귓가를 간질이고, 금방이라도 소금 냄새가 폐부 깊숙이 흔적을 남길 것 같다. 몸이 기억하는 바다가 머릿속으로 순식간에 밀려든다. 무더운 여름날 물을 보면 으레 느끼는 청량감과, 고향에 돌아온 것 같은 안정감과, 그리운 것을 마주한 안도와 희열이 뒤섞여서 파도가 된다. 온몸으로 밀려드는 파도를 맞으며 나는 창에 매달린다.
“바다, 바다야, B!!”
“아아, 그렇겠지. 목소릴 높이지 마라, 루시. 머리가 아파……. 바다에 가고 있으니 바다가 보이는 게 당연할 게다. 무얼 그렇게 들떠 있나?”
“또 아저씨 같은 말을…….”
“실례구나, 아가씨.”
실례라고 생각하지도 않는 주제에. 하는 생각이 즐거움과 함께 떠오른다. 툭탁거리는 말 속에 가시가 없다는 사실은 새삼스럽지도 않다. 그냥, 저 인간의 말버릇이 저렇다. 무엇이든 비꼬지 않고서는 버틸 수 없고, 솔직하게 기뻐하지 못한다. 이쯤 친구로 지내면 모르는 쪽이 이상하지. 루시는 그런 생각을 갈무리하며 살가운 어조로 침묵을 끊었다.
“내가 바다에 가자고 했잖아, 그만큼 바다를 좋아하니까 신나지.”
“사람 좋은……하아.”
“당신 진짜 낮에 약하네…….”
“그야말로 ‘이제 와서’구나, 아가씨. 우리의 교제도 꽤 오래된 관계다, 이미 익숙해졌겠지.”
“그래도 이럴 때 새삼스럽다고……. 겨우 이 정도 운전했다고 그렇게나 지루한 얼굴을 하고서는……. 잠시만 B, 앞!! 앞을 봐!! 나 말고 앞을 보라고!!”
비명이 다시 하늘을 가를 때, 파도가 높게 솟구치며 쏴아아 소리쳤다. 그게 내 목소린지, 자연의 소린지, 날 부르는 조상의 목소린지는 맹세코 신이 알고 있겠지. 이 개새끼야.
텅 빈 주차장에 고급진 차를 멋들어지게 세워두고 자체에 기대선 B, 그러니까 친애하는 웬수 새끼께서는 그 잘생긴 얼굴을 무기로 한 폭의 화보를 찍고 있다. 물론 그 옆의 나는 아직 조수석에서 내리지 못하고 숨을 몰아쉬며, 운전석 쪽에서 담배를 빠는 친구의 얼굴에 한탄하던 참이었다. 하여튼 잘생겨서는…….
여기까지 오는 길은 그리 멀지 않았다만, 체감상 텍사스에서 뉴욕까지 차로 달린 기분이다. 칼치기로 끼어드는 차를 향해서 불길하게 눈을 빛내는 친구 놈, 심심하다며 허벅지로 기어 올라오는 손을 쳐내야 하는 시간, 지루해졌다며 액셀을 밟아대는 친구 놈, 비명, 내가 운전할 걸 그랬다는 후회……. 제기랄, 다 저 새끼 탓이잖아. 턱을 괴고 느른한 표정으로 핸들을 놓았을 땐 진짜로 저 새낄 죽여버릴지 고민했다. 덕분에 이렇게 다리에 힘이 풀려서 좀 쉬고 있고.
투덜투덜 불만을 되새기는 동안 긴장이 좀 풀렸다. 막 차를 세웠을 때는 손잡이를 꽉 잡은 손이 떨리고 있었지만, 이젠 몇 번 쥐었다 펼 수 있을 정도니까. 이제 슬슬 내릴까. 공기가 조금 뜨거워지기 시작한 차를 벗어나기 위해서 손을 뻗는다.
달칵, 비싼 차는 역시 부드럽게 문이 열린다. 단정하게 열린 손잡이를 잡고 몸을 밖으로 빼면 제 친구의 청록색 시선이 느릿하게 기어온다. 마침 담뱃재를 털던 참인지 길게 뻗은 손가락이 탁탁 짧게 움직이고, 가볍게 재떨이에 비벼끄는 모습이 퍽 우아하고, 여러 번 보아 익숙하다. 손을 털고, 모자를 고쳐 쓰고, 케인을 손에 쥐는 일련의 움직임은 이미 의식 같은 것. 나도 샌들의 끈을 고쳐 묶으며 그의 구둣발 소릴 듣는다.
“그래서? 뭘 할 셈이지, 아가씨. 아무쪼록 네 수영복 모습을 보고 싶다만, 언제 누가 올지 모르는 곳이라는 점에서 망설여지는군. 나로서는 보여주는 것도 즐겁다만…… 누가 널 본다고 생각하면 꽤 마음에 들지 않아.”
“한국에 온 건 몇 번 안 되는 주제에 언제 김칫국에 맛을 들였대, B. 아쉽게도 수영복을 입을 생각은 없으니까 고민 안 해도 돼. 그냥 발만 담글 거야.”
“그건 유감이군.”
“맘에도 없는 소리는.”
아무도 없는 해수욕장은 자그맣고, 좁다랗다. 양옆이 막힌 해변은 막 짓고 있는 등대길로 어수선하고, 하얀 백사장은 흔히 상상하는 것처럼 곱진 않다. 한구석에 깔린 그물은 배에 매달려 바다로 끌려나가고, 제트스키를 탄 직원이 배를 쫓으며 바다 바깥쪽에 그물을 친다. 누가 보아도 ‘막 개장한’ 해수욕장의 손님은 우리밖에 없고, 우리는 바다 깊이 들어가 물장구를 칠 계획은 없으므로 바다는 오늘 사람을 받지 않는 셈이다.
하얀 모래 위로 내딛는 기념비적 첫발은 손을 꽉 붙들린 B가 함께했다.
익히 알다시피 모래 위는 맘 편하게 걸을 수 있을 만큼 단단한 땅이 아니다. 내딛는 발은 모래를 파고 들어가고, 박차고 나오는 힘은 몸 대신 모래를 밀어내는 게 반이다. 고르지 않은 밀도 덕분에 몸은 이리저리 휘청대고, 잡을 곳도 마땅찮은 덕분에 팔은 허공을 휘젓게 된다. 그러니까, 보통 그렇다고.
“팔을 빌려줄까, 아가씨.”
“히죽거리지 마, 기쁘게 빌리겠지만 갚진 않을 거야.”
“이런, 팔을 빼앗기다니 곤란한 일이다. 이 뒤로 팔을 쓸 일이 생기면 네가 대신해 준다는 거로 괜찮을까, 아가씨.”
“미안, 바다 가까이 가면 돌려줄게.”
나보다 머리 한 개는 큰 친구는 구두에 정장, 모자에 케인까지 들고도 얄밉도록 균형을 잘 잡았다. 내가 옆에서 휘청휘청 갓 태어난 기린 새끼마냥 불안하게 걷는 동안 런웨이를 방불케 하는 우아한 걸음을 뽐냈다는 뜻이다. 다리는 또 더럽게 길어서 바다 주변으로 성큼성큼 걸어가는 속도가 내 두 배는 될 것이다. 물론 의욕이 나서 저럴 리가 없으니, 용무를 빨리 끝내고 돌아가겠다는 속셈이겠지.
B의 팔에 거의 매달리다시피 팔짱을 꼈다. 손에 닿는 감촉이 퍽 얇은 것을 보아서는 여름용 정장인 모양이지. 아마 겉옷을 벗으면 소매가 짧을 것이다. 아마……? 겉멋에 살고 허세에 죽는 나의 친애하는 친구, B께서는 긴 팔 셔츠를 입었을지도 모른다. 물론 상상만으로도 덥다. 그쯤 하면 미친놈이지, 이미 미쳤지만.
그까지 생각하면 밀려드는 불안에 괜히 B의 손목 어름을 만지작거렸다. 장갑도 벗었는데 아니지?
“뭐지, 갑자기?”
“아니, 갑자기 당신의 셔츠가 긴팔인지 반팔인지 궁금해져서.”
“궁금하다면 벗어서 보여줄수 있다만…… 어때?”
“미친 생각이지 걍 쪄죽어.”
여튼, 걱정이 필요없는 새끼다.
해변 안쪽으로 들어가면 파도가 닿는 곳을 명확하게 알 수 있다. 바다가 올라오는 곳의 모래는 짙고, 단단하며, 걷기 쉽다. 경계는 명확하지만 파도는 불확실하므로, 신발을 적시고 싶지 않다면 모래의 색이 변할 즈음에 신발을 벗는 쪽이 현명하다. 그런고로, 나는 친구의 팔에 매달려 샌들을 벗기 시작했다.
샌들이라고 한다면 보통 밑창 위에 끈을 달아놓은 것이 많다. 아무리 튼튼한 소재를 쓴다고 해도 끈은 결국 끈이므로, 대개 샌들은 흐물거려서 벗기 힘든 모양새를 취한다. 이건 내가 신고 온 샌들에 관한 이야기이므로, 나는 두어 번 휘청이고 세 번쯤 낑낑거린 뒤에야 맨발로 모래사장 위에 설 수 있었다.
“바다에 들어갈 셈이라면 혼자 가라. 나는 사양하지.”
“쩨쩨하기는.”
“그건 내 명예를 위해서라도 변명해두지. 이토록 해가 강한 날, 낮에 운전까지 해가며 널 바다에 데리고 온 것이다. 도무지 쩨쩨하다고는 말 할 수 없을 정도로 파격적인 서비스 아닌가?”
“뭐, 그건 부정 못하지만.”
맨발에 닿는 젖은 모래는 단단하고, 조금 축축하고, 여름에 걸맞지 않은 차가움을 겸비하고 있다. 물론 온도는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것이므로 온도가 그렇게 낮진 않겠지만, 희게 달아올라 열을 내뿜어 대는 백사장에 비하면 놀라울 정도로 차갑다.
한 손에 샌들을 들고 조십스럽게 걸어 내려가면, 젖지 않은 모래보다 조금 덜 파이면서 발자국이 남는다. 서서히 내려가는 동안 파도가 밀려오고, 거센 파도가 내딛는 순간의 모래를 갉아먹는다. 휘청, 크게 흔들리는 몸. 넘어지면 갈아입을 옷 없는데! 다급한 생각이 스친 순간, 팔을 단단하게 잡는 손이 있다.
“위험하군, 아가씨.”
“고마워, 블러드,”
“천만의 말씀. 샌들은 이리 주게나, 그걸 들고 있으면 쓸데없이 더 휘청일 것 같군.”
케인을 든 손으로 샌들을 받아간 잘생긴 친구, 블러드께서는 내가 제대로 설 수 있을 때까지 단단하게 몸을 받쳐주었다. 덕분에 중심은 어렵지 않게 잡을 수 있었고, 양손이 더 자유로워진 만큼 균형을 잡기도 더 쉬워졌다.
“나는 가까운 곳에서 지켜보지. 아무래도 이 더위에 옷을 걷어올릴 생각까진 들진 않아.”
유난히 늘어진 말투로 한마디를 남긴 블러드는 물이 닿지 않는 흰 모래 위로 걸어가고, 나는 그의 발자국과 반대로 바다를 향해 걷는다. 일정하게 밀려오고 부서지는 파도소리, 그물 작업을 끝냈는지 어느새 사라진 요원들, 바다에 들어가지 않아 오지 않은 안전요원. 자연물의 소리는 정적을 닮아있다.
발목까지 핥고 사라지는 바닷물은 놀랄 정도로 미지근하다. 연안이라서 데워진 걸까. 실없는 생각은 입수에 대한 상상으로 이어진다. 이런 날은 바다가 따뜻해서 물에서 놀기 좋은데. 튜브를 띄우고 위에 눌러앉아 파도가 오가는 대로 둥실둥실 떠 있는 건 즐거운 경험이다. 언젠가 가족과 함께 해수욕을 즐겼던 날의 기억이 희미하게 떠오른다. 그때도 즐거웠지. 기억을 지표 삼아 다시 바다 쪽으로 한 발 내디딘다.
조금 더 깊이 들이치는 파도, 반복 속에서 익숙해진 소리, 이따금 파도 소리를 닮은 나뭇잎 물결치는 소리가 들리는 걸 빼면 놀랍도록 조용한 해변. 나는 볕이 내리쬐는 쨍하는 소리가 들리는 착각에 빠져 먼바다를 바라본다. 아아, 역시 푸르다. 이토록 밝은 날의 세상은 눈이 시릴 정도로 선명하고, 아름다워서, 푸른색이 심장 깊은 곳까지 스며든다.
아, 고향에 돌아온 기분.
나는 바다에 와야만 집에 온 기분이 든다. 나의 고향은 집이고, 동시에 바다라는 뜻이다. 간만의 귀향에 괜스레 들뜬 마음은 물 위를 부유하고, 나는 신나서 파도 속을 걷고 있다.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바닷속 모래는 생각보다 단단해서, 쉽게 넘어질 일은 없다. 젖은 모래라는 점에서 방금 걸어 내려온 경사로와 큰 차이점이 없긴 하다. 하지만 사람이 디딘 부분은 파도에 쓸려나가지 않고, 단단하게 발아래 붙어있는 모래 덩어리는 안정감을 준다. 그렇게 안심하고 나면 걷는 건 어렵지 않다. 양팔을 벌리고, 조심조심 균형을 잡으며, 파도에 맞춰 발을 뻗는다. 물론 흐름을 거스르진 말고. 이렇게 하면 웬만해서는 넘어질 일이 없다.
물론 강한 파도가 오면 휘청거리지만.
“조심하거라, 루시. 그러다가 넘어질지도 몰라.”
갑자기 들이친 파도에 한 번 휘청였을까, 저 멀리서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고개를 돌리면 보이는 건 검은 정장을 입고, 넥타이에 커프스, 넥타이핀까지 완벽하게 갖춰 입은 남성이, 실크햇을 쓰고 케인을 든 채, 여성용 샌들을 한 손에 들고 있는 모습. 께느른한 표정은 여느 때와 다름없지만 명확한 방향을 가지고 뻗어 나온 목소리가 독특하다. 언제나 퇴연한 목소리로 타인이 제 말을 들으리란 확신 속에서 느릿한 어조를 구사하던 사람이, 들리지 않을까 목소리를 높이는 모습이라니! 걸맞지 않은 행동이 드러내는 것은 결국 걱정이라, 금새 기분이 하늘을 향해 치솟는다.
“괜찮아! 그것보다 당신이 정장만 아니었으면 같이 들어오자고 할텐데. 물 진짜 시원하거든!”
“사양하지. 자못 나른할 것 같은 그런 놀이는 귀찮다.”
“하여튼 당신은!”
쾌활한 웃음소리가 텅 빈 소리를 채운다. 볕 내리쬐는 소리와 파도 소리, 나뭇잎이 이따금 출렁이는 소리를 제외하면 기이할 정도로 조용한 백사장을 가득 채우는 소리는 머릿속까지 밀고 들어온다. 유쾌함, 즐거움, 기뻐 어쩔 줄 모르겠다는 감정이 숨길 수 없이 뚝뚝 떨어지는 웃음소리가 블러드를 난감하게 만든다.
“뭐가 그렇게 즐겁지, 아가씨.”
“당신이 여기 있어 준다는 게? 좋아하는 친구랑, 좋아하는 곳에 있는데 즐겁지 않고 배기겠어! 금방이라도 차에 돌아갈 줄 알았더니 기다려주기도 했고.”
“그건…… 그저 변덕이다. 나는 하고 싶을 때 하고 싶은 것을 하는 주의지. 지금은 때마침 널 지켜봐 주고 싶었을 뿐이야, 루시.”
“어련하겠어!”
파도 소리를 닮은 목소리가 하늘을 향해 넓게 퍼지는 순간, 블러드는 어색함을 감추기 위함인지, 우연인지 머리를 긁적였다. 모자가 잠시 들려 올라가며 보이는 얼굴은 어린 기색이 엿보이고, 난감한 듯 멍한 표정은 그의 외양을 소년처럼 꾸민다. 그 앞에서 루시는 동년배 소년 마냥 웃는다. 파도에 맞춰 발장구를 치고, 뛰고, 물을 튀기며 노는 루시는 바다에서 갓 올라온 인어처럼 보였다가, 바다로 돌아가길 기다리는 해인으로 보이고, 동시에 물놀이가 즐거워 어찌할 줄 모르는 학생을 닮아있다. 언제까지고 즐겁게 파도와 장난치면서, 인간과는 더 이상 교류하지 않을듯한 얼굴.
그 모습을 바라보던 블러드는, 문득 그 자신도 설명할 수 없는 기분 나쁨과 절박함에 사로잡혀서, 변덕스럽게 친구를 불러들였다.
“그 정도로 하고 돌아가지, 이 짜증스러운 볕은 잦아들 기미가 보이지 않아. 통탄스러울 지경이다. 여름이라고 하는 계절은 역시 증오해 마땅해…….”
“아, 갈게. 발만 씻고 돌아가자.”
물론 루시는 흔쾌히 응했다. 아무래도 블러드의 상태가 걱정되던 참이었다. 저 친구는 중증의 야행성이라서 해만 뜨면 휘청거리는 병이 있다. 이대로 버려뒀다가는 정말로 쓰러질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럼 곤란하지, 나는 나보다 머리 하나는 큰 남자를 지고 갈 힘도 없고.
루시는 물에서 뛰놀던 기세 그대로 백사장에 올랐고, 뜨겁게 달아오른 모래 위를 아무렇지도 않게 걸었다. 성큼성큼 내딛는 걸음은 아까보다 안정적이고, 블러드는 급히 쫓아갈 기분도 들지 않아 뒤에서 한참 뒷모습을 바라본다.
종아리까지 걷어올린 바지며, 발목 아래 들러붙은 모래. 열을 뿜어내며 반짝이는 모래 위로 떨어지는 발이며, 휘청이는 발목……. 그가 한 손에 쥐어서 힘을 주면 부러뜨릴 수 있을 뼈로 잘도 몸을 지탱한다. 느른해. 눈을 깜빡이며 입버릇을 중얼거린 블러드는 문득, 백사장 가운데 멈춰 선 루시를 발견한다.
“무슨일이지? 갑자기 멈춰서서는.”
“제기랄…… 발이 뜨거워.”
“뭐, 당연하겠지. 이 정도로 볕이 뜨거운 낮이다. 아가씨 같은 사람은 화상 두어 개쯤 입어도 이상하지 않아.”
“당신이 어지러울까 봐 마음이 급해서 그만…….”
“하아…… 손이 가는 친구로구나, 루시.”
귓가에 느껴지는 숨결, 등과 무릎 아래를 받쳐드는 팔,
“제대로 붙잡거라.”
언제나 느른하고 오만한 명령조.
친구의 모든 요소가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존재할 수 없을 정도로 가깝다는 사실을 깨달은 루시는 속으로 욕을 집어삼켰다.
“걸어갈 수 있어! 갑자기 무슨……!”
“그 발로 말인가? 그만둬주게나, 루시. 화상을 입었다간 곤란하지, 멋대로 내 것에 흠을 남기지 말아 줘.”
“저기, 잠시, 스톱! 무시할 수 없는 발언이 지나갔는데?”
“무엇이?”
“내가 왜 당신 건데!!”
투닥거리는 말소리가 백사장 너머까지 울린다. 루시는 퍼덕퍼덕 반항했지만, 이내 이대로 떨어뜨리겠다는 협박을 늘어놓는 친구에게 얌전히 협조하는 쪽을 택했다. 귀찮음을 싫어하는 성격에 저지를만한 범죄다. 게다가 안아 올린 자세에서는 그의 키가 있다. 이 높이에서 떨어지면 허리가 무사할 리 없다.
반항을 포기하고 반쯤 울상을 지은 채 목을 휘감은 팔에 만족스러운 표정을 내보인 블러드는 성큼성큼 긴 다리로 큰 보폭을 자랑하고, 여느 해수욕장이면 다 딸린 세족장에 도착해서야 친구가 땅을 밟을 수 있도록 해 주었다.
“사람이 없어서 다행이지…….”
“나로서는 어느정도 구경꾼이 있는 쪽이 즐거웠다만.”
“잘도 그런 파렴치한 말을!”
“나는 예의를 모르는 불한당이니 말이야. 그래도 아가씨가 원한다면 신사인 척을 해 줄수는 있다만? 뭣하다면 발을 씻겨줄 수도 있어. 어쩌겠나, 루시?”
“미안, 입이 미끄러졌네. 혀도.”
“이왕이면 다음에는 입술 위로 미끄러뜨려 줬으면 좋겠군.”
루시는 얼토당토않은 말을 들은 충격으로 딱딱하게 굳어 친구를 쳐다보았으나, 능글맞은 웃음을 지은 블러드는 여전히 싱글거릴 뿐이다. 제기랄, 저 새끼를 누가 말로 이겨 말로. 물론 힘으로 이길 자신도 없었으나, 말로는 더욱 자신이 없었다. 내가 어디 가서 말싸움으로 지는 사람이 아닌데……. 루시는 뜻 모를 서러움과 괜히 밀려오는 짜증을 정리하며 물을 틀었다. 소금기 없는 물이 발의 모래를 씻어내기 시작한다.
허리를 숙여 발을 닦고 있으면, 또 찾아드는 침묵이 어색한 시간이 온다. 여름의 더위란 참으로 기묘해서, 정적이 찾아들면 온 세상의 소리를 빛으로 눌러 죽인 무대에 오른 기분이 된다. 이 세계는 나와 당신을 위해 존재하고, 지금, 이 순간을 엿보는 사람이 있으며, 나는 그들을 위하고 당신을 위해서라도 마땅히 해야 하는 말이 있다는 의무감. 물이 졸졸 흐르는 소리와 파도 소리, 햇볕 쨍하고 내리쬐는 소리와 잎사귀 파도치는 소리 속에서 루시는 정적을 느꼈다. 귀가 얼얼한 정적이다. 영화라면, 이렇게 음향이 비어서는 안 된다.
그렇게 빈 곳에 바람처럼 속말이 흐른다.
“오늘 고마웠어.”
“뭔가, 갑자기. 너무 더워서 어떻게 되버린건가?”
“그냥, 말하고 싶어서. 오늘 꼭 와줬으면 했거든.”
루시는 손을 꼼꼼하게 움직여 발을 씻어낸다. 발 위에서 투명하게 고였다 흘러내리는 물이 윤슬을 이루고, 그 속에서 나긋하게 움직이는 손가락은 동그랗고, 길고, 하얗다.
“당신도 바다를 봤을테지만 내 바다를 보여주고 싶었어.”
루시는 허리를 숙인채로 저 너머 바다를 바라보았다. 수평선을 보기 힘든 도시. 저 먼 바다를 볼 수 있지만, 그 바다와 하늘이 맞닿는 곳에는 산이 솟아있는 경우가 더 잦다. 넓고, 조금 둥글고, 편편한 수평선은 조금 어색하다. 하지만 지평선보다는 익숙하고 맘이 편하지. 넓고 끝모를 땅은 이유모를 껄끄러움이 느껴진다. 큰 물이 있으면 파도가 쳐야하고, 흐르는 물이 있으면 바다로 향하는게 당연한 도시. 그런 곳에서 자라서, 피어나서, 빚어낸 사람.
루시의 시선을 좇아 블러드가 수평선을 바라볼 때, 루시는 자신에게 을러주듯 말을 던졌다.
“당신은 눈치가 좋으니까, 알겠지만, 블러드. 그러니까 나는, 당신이 내가 자라고 내가 내 일부로 받아들인 곳을 봐줬으면 했거든. 당신은 이제 술집의 Mr.B가 아니라 내 친구인 블러드 듀프레잖아? 그러면 최소한의 예의를 차리는 게 도리 아닐까…… 하고 생각했어. 그러면 나를 소개해야 하고, 알만한 건 알 테니까 당신이 모르고 내게 중요한 거라면 역시 고향의 바다를 보여주는 게 최고 아닐까 해서. 그러니까, 이게, 내가 당신에게 처음으로 보여주는 속마음이고, 내 영역이고, 나인 거지. 당신이 언젠가 말해준 저택처럼, 이게 내 영역인 거야. 그러니까, 우리 우정의 시작으로 퍽 나쁘지 않은 장소인거지.”
부끄러운 말을 내뱉으면 혀가 꼬이는 느낌이다. 혀끝을 몇 번이고 깨물어 빚어낸 말은 생각보다 볼품없고, 어린아이 같으며, 같잖아 보여서 루시는 다시 고개를 숙였다. 그는 얼마 남지도 않은 모래를 꼼꼼이 씻어내며 말을 마치고, 천천히 허리를 들어서, 당연하게 저를 위한 수건을 들어 주었던 친구를 향해 선다. 서로에게 낯선 상황이다. 블러드 듀프레는 어딘가 기분 나쁜듯한, 웃음을 눌러 참는듯한, 불쾌한 듯한, 혼란스러운 듯한 표정을 짓고 있고, 거북한 침묵이 내려앉는다.
그리고 언제나, 그 침묵을 끊는건 내 몫이지.
“블러드, 뭔가 할 말 없어?”
“하아……. 도대체 너는……! 부끄럼을 모르는 건가! 잘도 당당하게 그런 말을 내뱉을 기분이 드는군. 토기가 올라올 지경이었다. 우정? 친구? 마피아의 보스에게 어울리지 않는 말을 잘도 가져다 붙이는구나. 게다가 뭔가, 그 말들은. 한순간 구애당하고 있다고 생각했다고? 얼마나 대단한 바람둥이가 되어야 그런 말이 술술 나오는지, 나는 상상도 못하겠구나, 루시.”
“그래서?”
수건을 받기 위해 내뻗는 손. 잠시 굳어있는 친구. 머쓱해진 손을 한 번 흔들어 재촉하면 블러드는 한 발 앞으로 나와 수건을 건네준다. 움직이는 바람에 볕 아래로 드러난 그의 귀가 붉게 물들어 있다. 물론 얼굴 전체가 화끈거리는 꼴을 보아서는 나도 절대 덜하지 않다. 더하면 더했지. 하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이게 내가 원래 의도했던 일인 척 수건을 받고, 허리를 숙여 물기를 닦는다.
“하아…….”
머리 위에서 들리는 한숨 소리에 루시는 킥킥거린다. 분명 능글거리며 말을 넘길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뭔가, 그 반응은. 길게 내뱉는 말은 날카로웠지만, 잔뜩 당황한 목소리로 랩처럼 쏘아대서는 위압감이 없다. 물론 그가 죽일 듯이 살기를 뿜어대도 느끼지 못하는 제 느긋한 성격 탓도 있겠지만.
물기를 닦아낸 발을 샌들에 밀어 넣고, 휘청거리는 몸을 지탱할 무언가를 찾아서 팔을 휘저으면 당연하게 가져다 대는 팔. 든든하게 받쳐주는 친구의 싫은듯한 표정과 비틀린 입가.
“앞으로 잘 부탁하마, 루시.”
“나야말로, 블러드.”
결국 나나 당신이나 닮은꼴이라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호의에 약하고 애정 앞에서 흔들리는 족속들. 그러면, 먼저 밀어붙이는 쪽이 이기지 않겠어? 솔직하지 못한 친구와 거는 암묵적 승부는 이미 결판이 났다. 우리의 우정은 단지, 그 과정을 증명하는 과정일 뿐이다.
뭐, 무엇이든 결과보다 과정이 중요하다고들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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