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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장미가 붉게 타오를 때

admin 2020.02.08 01:12 read.141

  새삼스러운 일을 비밀스러운 어조로 고하건대, 나는 단 한 번도 꽃에 취미를 가져 본 적 없다. 릴리아나라는 이름은 내가 검은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로 백합을 가져다 붙이며 킥킥거린 친구들의 장난이 흔적으로 남은 것이고, 굳이 따지자면 꽃보다는 그 색에 뜻이 있었다. 취미 삼아 꽃다발을 이 사람, 저 사람 가리지 않고 선물했던 적도 있으나 이는 결국 선물이라는 행위에 을 사용할 때 부여되는 의미를 즐겼던 것이지 꽃 자체에는 별 감흥이 없었다. 아름다움을 판별하는 눈 정도는 있으나 개인적인 호불호는 희미하고, 굳이 따지자면 시들지 않고 형태 좋은 꽃을 선호한다, 정도의 감각만 남아있는 내게 이러한 정원은 과분할 정도로 아름답다. 내 것이 아님에도 과분함을 떠올리게 만드는 공간.

 

  숨을 쉴 때면 폐 속 깊이 들이치는 장미의 향.

 

  녹색과 적색을 섞어 놓으면 으레 성탄절을 떠올리기 마련이다마는, 장미를 보면 도저히 그런 기분이 들지 않는다. 성탄과 같이 신성하고 왁자지껄한 축제보단 고급스러운 정적과 기이한 고요가 어울리는 꽃. 비밀스럽고 적막하며 요사스럽고 유혹적인. 그래, 선혈을 닮아있다.

 

  가장 아름다울 때 무엇보다 붉고, 꽃이 지면 검붉은 색으로 물든다. 겹꽃이 삶을 구가하며 하늘을 향해 고개를 치켜들고 가시를 위협적으로 뻗어댈 때면 꽃의 여왕이자 아프로디테의 상징화인 그에게 경의를 표하지 않고서는 버틸 수 없다. 그래, 그들의 신성함이라면 이러한 종류의 것이다. 무릎 꿇고, 굴복하며, 갈망하게 만드는 것. 분류와 이름 모두 오롯이 저들의 것으로 점철한 오만한 꽃이 무엇보다 붉고 아름답게 피어 흐드러진 정원.

 

 

 

  도무지 마피아의 저택이라고는 믿을 수 없지.

 

 

 

  릴리아나 다몬은 책을 제 코 아래로 덮으며 온 사방에 가득한 장미에서 눈을 돌렸다. 시야를 가득 채운 장미, 장미, 온통 붉고 완벽한 장미! 눈에 보이는 것이 몇 송이나 되는지 세어보다가 100을 넘기고는 셈하는 일을 그만두었다. 단지, 고개를 돌려 모든 장미에 도장 찍듯 시선을 주고, 아플 정도로 선명한 적색에 눈을 깜빡였다. 이 지랄도 족히 몇 시간을 했다. ‘시간이 의미 없고 흐름이 존재하지 않으며 오직 하늘의 색이 바뀌는 것으로 흐름을 짐작할 수 있는 세계라고 하지만, 심장이 일만이 넘는 박동을 반복했다는 사실은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읽고 있는 책이 지루한 나머지 잠시 미쳤던 모양이지. 눈을 감아 눈꺼풀이 주는 붉고 뭉근한 어둠을 즐기며 중얼거렸다. 노을로 물든 세계에서 붉은 장미가 무슨 색인지 확인하고 싶다니.

 

  영문 모르고 이유가 결핍된 세계라고 하지만 내 살던 곳보다 마음에 드는 구석 몇 가지 정도는 있다. 개 중에서 기분 좋은 것을 하나 꼽아보자면 같은 시간대 속에서는 하늘의 색이 바뀌지 않음이다. ‘저녁인 동안 언제까지나 이어지는 완벽한 노을. 푸르지 않고, 검푸르지 않으며, 완벽하게 난색이라 차가운 공기도 잊고 공해空海가 타오르는 환상에 젖어 들게 만드는, 이 온전한 노을. 태양이 어디 있는지 알 수는 없으나 그렇기에 더욱 안온하다. 적당한 온도와 적당한 바람 속에서 향수와 회향에 젖어 들어 기이한 침울함을 즐길 수 있는 시간대. 가주의 책장에서 적당한 책을 빼어 들고 정원 구석에 드러누운 건 그러한 연유였다.

 

  본디 시간대가 바뀌기 전에 한 권을 완독하고 다음 시간대에는 돌려 줄 생각이었으며, 가능하다면 가주와 얼굴을 맞대고 책의 감상이나 두어 마디 늘어놓을 셈이었다. 그러고는 산책을 나가 새 책의 감상을 푸른 머리의 친구에게 주절주절 떠들어 댈 심산이었으나 모두 뒤틀려버렸다. 책이 중간부터 완전히 쓰레기 같은 내용으로 전락한 탓이었다. 아아, 모처럼 빌려온 책을 다 읽지도 않고 서재에 돌려놓는 일은 그다지 내키지 않는데. 얼굴을 덮은 책을 눈 위로 밀어 완전히 빛을 가리며 중얼댔다. 읽어 재미를 주는 본분을 다할 수 없다면 햇빛 가리개라도 되어야지. 애독가이며 물건을 소중하게 쓰는 릴리아나로서는 드물게 박정한 어조였다.

 

  하아, 길게 한숨을 내뿜으며 릴리아나는 의식적으로 온몸의 긴장을 풀어냈다. 좀 전부터 느껴지던 거대한 기척이 이쪽으로 오고 있다. ‘가주이며 영주인 이곳의 주인은 허명뿐인 지위가 아니라 실제적인 힘을 얻었는지 저택 안이라면 어디에 있어도 느껴졌다. 도무지 무시할 수 없는 저 거대한 존재감이란. 자그마한 한탄을 사고 중간에 섞어 넣으며 생각을 바깥으로 굴린다. 그래, 책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었지. 손을 타지 않은 책을 꺼낸 게 문제였나. 읽던 시리즈나 마저 읽던지 가주의 추천을 순순히 받아들이든지 양자택일하는 쪽이 훨씬 현명했을 것이다. 책이 만들어 준 완벽한 어둠. 릴리아나는 눈꺼풀에 초점을 맞춰 어둠을 바라보았다.

 

  타박, 구두가 풀을 밟는 소리.

 

 

 

  “이런, 꽤나 지루해 보이는 모양새구나, 아가씨.”

  “좋은 저녁, 보스.”

  “우울한 목소리구나. 동감하지 못할 것도 아니야, 낮보다 낫다고는 하지만 이토록 밝고 선명한 햇볕 아래서는 누구나 몸이 무거워지기 마련이다.”

  “…….”

  “물론 객의 편의를 보는 것도 가주의 의무지. 너를 이렇게 내버려 두었다가는 내 명예에도 문제가 생긴다. 평소라면 정원의 티테이블에서 홍차라도 대접하겠다마는 이렇게 짜증스러울 정도로 밝은 볕 아래서는 그럴 기분도 들지 않아. 그러니 어떤가, 릴리아나. 내 방에서 다회를 가지는 건.”

  “……아쉽게도 사양할게, 조금 있다가 산책하러 나갈 생각이라.”

  “산책, 인가. 너는 건강한 모양이군. 부디 그 기력을 내게도 써 줬으면 한다만.”

 

 

 

  께느른한 목소리가 세례마냥 위에서 아래로 쏟아진다. 여유인지 지루함인지 모를 것으로 길게 늘어진 목소리는 이 자의 상징 같은 것이다. 느릿하게 늘어놓는 단어는 타인이 자신의 목소리에 귀 기울인다는 확신 없이는 성립하기 어려운 어조이니 무시하고 싶은 기분이 들 때도 있다만, 목소리가 좋은 탓인지 저 느른함이 유혹적으로 들린 탓인지 나조차 귀를 기울이게 만든다. 당연한 오만함을 장신구처럼 거느리고도 아름다운 것은 조직의 장을 맡은 자로서 당연한 소양인지, 이 자 특유의 재능인지 가늠하기 어렵다. , 십중팔구 양쪽 모두 해당하겠지만.

 

  눈을 한 번 꾹 감았다 뜨며 책을 치웠다. 상대하기 귀찮은 사람이지만, 블러드 듀프레, 이 저택의 가주이자 모자가게령의 영주이며 체제지 되는 저택의 주인인 마피아의 보스는 귀찮음을 감수하면서도 상대하지 않으면 안 되는 존재다. 하아, 적당히 넘겨줬으면 좋겠는데. 그러지 않을 상대임을 알면서도 허망한 기대를 걸어보는 것은 장미가 아름다웠던 탓인가. 빛을 등지로 내려다보는 얼굴과, 그 위에 얹힌 모자가 노을 속에서 묘하게 색기를 띤다. 빙글빙글 웃어대는 얼굴 위에 걸려 있는 것은 명백하게 악의에 가까운 것으로, 진실로 저를 괴롭게 할 셈은 아니겠지만 쉬이 포기할 기미가 보이지도 않는다. 아아, 정말로 귀찮은 상대야.

 

 

 

  “어떻게 해서라도, 라고 한다면 참가하겠지만……, 늘어진 상대와 재미없는 다회를 가지고 싶진 않을 텐데, 보스.”

  “재미없을 리가. 너는 귀중한 부외자. 더군다나 우리 저택의 드문 객이기도 하지. 그런 네가 하는 말이 지루할 리가 없지 않나?”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라는 협박이군. 릴리아나 다몬은 속으로 쯧, 하고 혀를 찼다. 누워서 대충 상대하면 갈까 했지만, 적당히 결론짓지 않으면 움직일 생각이 없어 보인다. 집 없는 식객의 삶이란 이토록 서러운 것이다. 사회생활 몇 년 만에 느껴보는 설움이 무척이나 강렬한 덕분에 아무렇게나 널브러뜨린 몸을 추스를 기운이 생겼다. 제멋대로 펼쳐지고 올라간 치맛자락을 정리하고, 목 부근에 얌전한 척 매인 리본을 매만지며 그의 말대로 아가씨마냥 얌전하고 새침하게 표정을 가다듬는다. 저 치가 내게 원하는 것이 재미라면, 장단에 맞춰줘도 괜찮다. 그의 목소리와 얼굴은 그리 싫어하지 않으니 몇 마디 섞는 정도라면 개같은 책으로 뒤집힌 기분을 어렵지 않게 만회할 수 있을 터.

 

  정원의 구석, 장미로 사방이 막혀 사람 한둘 들어설 자리밖에 없는 은밀한 공간. 가시를 세운 넝쿨이 벽을 타고 오르고 만개한 장미 향이 사람의 체향을 가린다. 시간의 흐름이 존재하지 않는 세계에서 흐름을 가늠케 할 타인이 없는 공간, 오롯이 하나의 개체로 존재하며 세계에서 유리된 느낌을 즐기며 회한에 젖어 들던 때를 방해받은 기분은 그리 유쾌하지 않다.

 

  허나 그의 말에서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듯 제가 원하는 결과 이외에는 받아들이지 않겠지.

 

  가벼운 포기 뒤로 이어지는 건 상황의 파악과 납득. 부러 외진 곳을 찾아 몸을 숨겼다지만 기본이 넓은 저택이다. 소담하다 하여도 사람 하나 더 들어올 자리를 만드는 일은 어렵지 않다. 내뻗은 다리를 거둬들이고 책을 무릎 위에 올리면 릴리아나 다몬은 꽃봉오리마냥 펼쳐진 치맛자락을 모아 쥐며 블러드 듀프레의 눈 어름, 그러니까 어깨너머로 보이는 무언가에 시선을 두고 얼굴을 바라보는 척 초점을 맞췄다.

 

 

 

  마냥 서서 이야기하는 것도 뭐한데, 을 셈?”

  아니, 그렇게까지 할 생각은 없어. 좁은 곳에 몸을 밀어 넣고 너와 밀착된 시간을 즐기는 것도 꽤 매력적인 제안이다만, 이 미지근한 볕 아래서 그런 숨 막히는 짓을 하고 싶지는 않군.”

  “그래? 그래.”

  “아까부터 쌀쌀맞은 대답뿐이구나, 아가씨. 심기에 거슬릴만한 일이라도 있었나?”

  “별로……,”

 

 

 

  말끝을 길게 늘이면서도 제가 대화하기 어려운 태도로 대답을 내어놓고 있다는 사실쯤은 자각하고 있었다. 허나 어떻게 저런 존재를 상대로 맘 편하게 말을 늘어놓는단 말인가. 익숙하지 않은 평어는 혀 끝에 걸리고, 억지로 내려놓은 말투는 입에 붙지 않는다. 게다가 저 자는 말 두어 마디면 상황을 파악하고, 다섯이면 사람을 파악하는 작자다. 사용인들의 입과 정황을 통해서 제 일상을 보고 받고, 굳이 듣지 않아도 어렵지 않게 파악할 수 있는 존재를 상대로 가볍게 말하는 건 우스운 일이다. 더군다나 저 자는 본심을 내보여주지도 않는데.

 

  아아, 이게 문제야.

 

  절로 원망하는 투가 튀어나왔다는 사실에 희미한 절망을 느낀다. 아니, 이는 체념을 닮았고, 낙심을 빼다 박았으며, 낙망에 가까운 것이다. 아아, 블러드 듀프레, 저 빌어먹을 작자는 너무나 사랑하기 쉬운 존재다. 느릿하게 늘어지는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퇴연한 기색이며, 볕 아래서 때때로 색을 바꾸는 눈동자며, 휘장마냥 늘어뜨린 위압감에 노력으로도 가리지 못한 귀족적인 분위기까지. 핏방울처럼 그의 손끝에서 떨어지는 장미와 화약, 홍차와 희미한 연초의 향기마저 무용할 정도로 기억 깊은 곳에 파고든다. 그래, 이 구석에서 나는 깊은 절망을 느끼지 않고서는 버틸 수 없다. 나의 친애해 마지않는 리비우스를 잃고 무엇하나 확신할 수 없는 기억 속에 저 빌어먹을 블러드 듀프레가 낙인을 찍어놓고 있다. 장미 가시를 닮고, 그의 애용하는 총을 닮고, 날카로운 칼과 타오르는 불을 닮은 낙인과 감정을 영혼 깊숙한 곳까지 들이민다.

 

  바로 저 시선처럼!

 

 

 

  “어딜보고 있는걸까, 아가씨.”

 

 

 

  미묘하게 엇나간 것을 용서치 않고 눈을 얽어온다. 빛을 등지고 서서 큰 키로 볕을 가리고 제 시선을 강제로 밀어붙인다. 이는 시선으로 가하는 폭력을 닮았으며, 호의와 관심의 강압이고, 불만의 표출을 인식에 때려 박는 하나의 수단이다. 히죽거리는 웃음과, 불한당다운 분위기, 무게 없고 상스러운 언어, 비아냥으로 감춰둔 계산적이고 냉혹한 본성이 영혼의 창이라 하는 눈 너머에서 번쩍거리며 빛난다. 볕을 빼앗겨 만들어진 기이한 어둠 속에서 오직 저 블러드 듀프레의 눈이 알기 어려운 색으로 남아 시선을 사로잡는다.

 

 

 

  “날 앞에 두고도 우선 순위에 둘 것이 있다니, 꽤나 흥미로운 것을 발견한 모양이야. 이 저택은 속속들이 파악하고 있던 셈이다만, 부외자인 네게는 새로운 발견이 가능할지도 모르지. 내 지루함을 덜어주기 위해서라도, 부디 그게 무엇인지 알려주지 않겠나? 릴리아나.”  

  “…….”

  “저택의 이런 구석까지 찾아올 정도로 마음을 빼앗긴 물건이다. 네가 원한다면 넘겨줄 수도 있지. 소유권의 양도를 위해서라도 말하지 않으련.”

  “……하아.”

 

 

 

  가벼운 한숨. 묵직한 포기. 망향과 회한을 지워내는 강렬한 감각은 저 자의 의도대로 휘둘리는 것이다. 보아라, 한숨을 내쉬며 어깨를 내리는 그 가벼운 동작에도 의도를 읽어내어 만족스러워하는 기색이 읽히지 않는가. 타인의 뜻대로 움직이는 일은 선호하지 않지만, 모자장수는 이 저택의 가주고, 제가 사랑하지 않기 위해서 노력해야 하는 남자이며, 이 장미들의 적법한 주인 되는 사람이다. 이토록 아름다운 꽃을 본 대가를 치르지 않으면 파렴치한이 되겠지. 그러면 노을과 장미에 취해 광대놀음을 한 바탕 놀아보는 일도 그리 나쁘지 않다.

 

  짧은 계산이 끝나고 흘러나온 목소리는 제 귀에도 느껴질 만큼 다른 음색.

 

 

 

  “무의미한 버릇이라는 사실을 알면서 파고들지 말아줘, 보스. 여기까지 온 것도 그냥 조용히 책을 읽을 곳이 필요했을 뿐이니까.”

  “호오. , 인가.”

  “그래, 당신 서재에 새로 들여놓은 신간 중에 하나.”

  “그러고 보면 좀 전에 대량의 책을 들여놓은 직후였군. 독서를 방해받은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나? 그런 것 치고는 꽤 지루해 보이는 태도였다만.”

  “……. 맞아, 그 이야기를 할 생각이었지.”

 

 

 

  무릎 위에 올려둔 묵직한 책을 집어 든다. 고급스러운 가죽으로 겉을 씌우고 금박을 박아넣은 양장본. 제목과 작가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으나, 내용이 완전히 쓰레기 같다는 사실을 알게 된 지금은 기억하고 싶지도 않아서 부러 시선을 돌린다. 평소라면 두께감 있는 책은 뒤에서 반전이 일어날지 모른다며 조금 더 끈질기게 매달려 보겠지만, 이런 상황을 마주하고 나면 그런 기분도 들지 않기 마련이다. 그런 생각으로 더욱 시선을 멀리 보낸다. 제 손에 있는 것을 바라보지 않기 위해서는 제 앞에 있는 사람을 볼 수밖에 없는 노릇이라, 강제로 밀어붙인 시선에 제대로 응대한다. 고개를 들어올려 노을빛을 뒤집어쓴다.

 

 

 

  이 책, 돌려줄게. 물론 제대로 빌린 것이 아니니 돌려준다는 말에도 어폐가 좀 있겠지만…….”

  “내 방의 출입을 허락한 건 나이니 그런 소소한 부분에 책임을 물을 생각은 없다만…… 드문 일이로군. 읽던 책을 중간에 내던진다니, 책임감 강한 너로서는 보기 어려운 일 아닌가, 아가씨.”

  “그런 생각을 하기도 어려울 정도로 쓰레기라서 말이야, 안 읽어도 결말이 빤히 보이고. 그 책, 버리는 걸 추천할게.”

  “참고하지. 이 내 책장에 그런 책이 들어와 있다는 건 모욕이나 다름없다. , 제대로 읽지도 않는 마피아 주제에는 당연한 일이겠으나, 모처럼 학식 있는 객이 읽고 평가해주지 않았나. 의견 하나 듣지 않아서는 무학無學이 온 사방에 탄로 나기 마련이다.”

  “빈말은.”

 

 

 

  그의 방에 있는 모든 책을 손에 쥐어보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내게 그런 말은 진실로 비아냥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 이토록 비틀린 사람이다. 마피아의 보스에게 솔직함을 요구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었으나, 속을 터놓고 의도를 투명하게 드러낸 친구들과 생각마저 공유할 수 있는 친애하는 리비우스와 오랜 시간을 보내고 있으면 이러한부류의 인간에게서 평소보다 큰 피로감을 느끼기 마련이다. 속을 보여주지도 않으면서 내 속을 바닥까지 헤집으려 손을 쓰는 상대. 이런 작자를 사랑했다가는 나야말로 명예가 바닥까지 꺾여버린다. 사랑은 선택하는 것. 내가 시작할 사랑은 이러한 형태가 아니다. 이는 릴리아나 다몬으로서 확언하고, ‘로서 확신하는 가치관.

 

  그럼에도, 어떠한 순간은 기이한 감각을 심장에 아로새긴다.

 

  가벼운 어조의 목소리가 허공에서 부서진 뒤 감도는 정적. 타오르는 하늘에서는 타닥타닥 소리가 날 것 같고, 피어 흐드러진 장미에서는 붉은 향이 흐를 것 같다. 모자에 장미를 장식하고 가격표를 붙여 모자장수라 자칭하는 마피아의 보스는 정녕 이름대로 미쳐있고, 검은 머리에 검은 원피스의 속단과 리본을 붉게 물들여 착장한 푸른 눈의 소녀는 백합이라는 이름을 가졌다. 무뢰배와 폭력의 본거지는 퇴연한 기색을 띠고 모두가 나른하게 늘어져 느릿하게 움직이고, 가장 비밀스러운 곳부터 가장 자랑스러운 곳까지 장미가 피어 붉은 향이 아찔하다. 검은 어둠 아래서는 위험하기만 했을 분위기는 붉은 노을 아래서 회한과 망집을 품고 아주, 위태로워진다.

 

  청록을 닮아 빛 속에서 색을 바꾸는 그 아름다운 눈 속에 보랏빛 감도는 청안이 아로새겨진다. 불꽃을 뒤집어쓴 내 눈동자는 희미한 보랏빛을 띠고, 푸르게 반짝인다. 사파이어를 닮아 맑고 푸르다는 평가를 들었던 순간이 머리를 스친다. 스쳐 사라진다. 무의미한 세계에서 무의미한 생각은 하나가 되어 스러진다. 나는 그저, 내 앞에 있는 사람의 눈 속에서 나를 보고, 내 눈 위에서 반짝이는 붉은빛이 도처에 널려 가치를 잃기 직전인 장미와 닮았다는 생각에 사로잡히고, 아주 오래전에는 푸른색과 녹색을 구별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떠올리고. 그래서였던가. 우리의 공통점이 심장에서 피어올라 머리 한가운데 자리잡는다. 책을 좋아하고, 이야기를 즐겼으며, 지루함을 경멸하고 재미있는 것을 사랑하는 자들. 그러니 우리는 분명 비슷한 것을 느끼고, 상상했을 것이다.

 

  보아, 지금 우리가 이야기의 한 가운데 서 있어.

 

  장중하게 가라앉아 기묘하게 비틀리는 분위기. 가슴 한구석을 불편하게 만드는 이 순간. 마피아의 저택에 들어앉은 소녀는 피 한 번 묻혀본 적 없고, 그는 장미 꽃잎 대신 피로 깔아온 레드 카펫의 제왕 되는 마피아의 보스를 사랑하기 직전이며, 사랑에 필사적으로 저항하는 중이다. 삼류 연애소설의 주인공이나 할 법한 독백이 내게 주어졌다는 사실 하나로 이 상황의 색은 이상하게 변한다. 허나, 상황 자체는, 빛바래고 변색 된 이 상황 자체는, 너무나도 정석적이라서. 나는 당신의 시선에 사로잡히지 않고서는 도무지 이 순간을 버텨낼 수 없었고. , 아아. 영문 모를 것으로 가득 차서 정체 모를 무게를 지닌 당신의 시선과, 그 눈과, 잠시라도 얽히면 벅차고 귀찮은 일이 생긴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기어코 시선과 말을 두어 번 섞고 마는 나의 욕심과, 결국 당신에게 보이고야 마는 이 의미 모를 애착. 노을의 정적 속에서 소란스러운 시선이 귀찮은 감정을 희미하게 폭로한다.

 

  도망치지 않고, 구실을 만들어 방문하며, 결국 당신의 방에 드러누워 책을 읽게 만드는 그 귀찮고 경멸스럽기 짝이 없는 감정.

 

  릴리아나 다몬은 제 입속에 느릿하고 선명하게 차오르는 웃음을 알아차렸다. 심장께에서 흘러나와 온몸을 채우고 결국 눈 아래까지 치솟는 이 웃음은 목을 울리고 입 밖으로 흘러나온다. 하지만, 웃지 않고서는 버틸 수 없지 않은가. 나는 깊게 얽힌 시선 속에서 발견하고야 말았는데. 당신의 눈에서, 아주 오래전에는 굳이 구별하지 않아도 되는 동색으로 성립시킨 그 눈에서, 전혀 어울리지 않는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는데. 당신이 들춰낸 나의 감정과 비슷한 것이 당신의 눈 속에서 선명하게 타올랐는데!

 

  짧은 웃음이 실체있는 소란으로 변한다. 소리는 정적을 난도질하고, 찢겨나간 적막의 피는 장미의 붉은 향이 대신한다. 그 피에 온 몸을 적시며 나는.

 

 

 

  “갑자기 웃음을 터뜨릴 줄은, 무어가 그리 재미있을 것이 있지?”

  “저기, 보스.”

  “뭔가, 아가씨.”

  “역시, 이 저택의 모든 장미는 당신을 닮아 있어. 아니, 당신 그 자체이고, 당신이 장미의 화신이며, 당신을 위해 존재한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닌 것 같아.”

  “역시 뭔가, 갑자기. 볕 아래 너무 오래 있어서 머리가 어떻게 되어버린 건가? 사람을 앞에 두고 그런 기분 나쁜 말을 하지 마라. 한기가 들어.”

 

 

 

  선고한다.

 

 

 

  하지만, 저택의 모든 장미는 당신을 떠올리게 만드는 걸. 어디 있어도 당신 옆에 있는 기분이 들게 만드는데.”

 

 

 

  아! 당장이라도 장미의 줄기를 있는 힘껏 움켜쥐고 싶은 기분이다. 손의 겉거죽이 뚫려 피가 방울지는 모습을 자랑스럽게 내보이고, 내가 저 가지와 손을 접붙여 꽃을 피워냈다 헛소리를 온 사방에 지껄이고 싶다. 당장이라도 멀리 뛰쳐나가 높은 목소리로 웃어 노을을 찢어내고, 이 뜨거운 열기를 내던지지 않고서는 버틸수 없는 충동. 릴리아나는 거칠게 날뛰기 시작하는 충동을 익숙하게 내리누르며 발악하는 몸을 우아하게 움직였다.

 

 

 

  게다가, 장미는 당신에게 어울려, 보스. , 산책 다녀올게. 이 정원의 붉은 장미들이 다시 붉게 타오를 때 즈음이면 돌아올거야.”

 

 

 

  억지로 붙잡아 다회를 가질 예정이었던 그의 의사에 정면으로 반하는 행위이다. 식객의 지위를 제안받아 저택에 눌러 붙은 제가 내보이기엔 건방진 행동이었으나 이 정도는 괜찮겠지. 설령 괜찮지 않다고 한다면 지금부터 방문할 예정인 푸른 머리카락 가진 무뚝뚝한 친구의 방에 제멋대로 밀고 들어가면 된다. 잠시 일하고 있는 곳에서 방을 얻어도 괜찮지. 아니면 그의 비밀스러운 가족에게 몸을 의탁해도 좋다. 갈 곳은 넘쳐나고, 간절함의 근원은 잘라내었으며, 무시의 끝은 퇴화임을 나는 알고 있다.

 

 

 

  갔다올게.”

 

 

 

  그러니 나는 이 감정에 이름붙이지 않고 도망치듯 자리를 피한다. 무명의 감정 대신 만족감을 배부르게 곱씹는다. 책에 대해서 떠들 예정이었지만 조금 더 즐거운 이야깃거리가 생겼으니 시계탑을 오르는 발걸음이 가벼워지겠지. 어서 속삭이고 싶어서 버틸 수 없을 지경이다. 상상해봐, . 언제나 나른하게 늘어져서 퇴연한 기색을 숨기지 않던 그 마피아의 눈 속에서, 희미한 불꽃이 타오르는 광경을 상상할 수 있겠어? 온 하늘이 주황으로 연소하는 가운데 고집스럽게 땅에서 붉게 타오르는 장미와, 그 옆에 선 장미의 주인이 무언가를 억누르는 듯한 표정을 했다는걸, 믿을 수 있어? 하지만 믿어줘, 내가 이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는걸. 착각이라고 할 수 없을 만큼 선명하게 보았다고!

 

  제 외출을 배웅하며 목적지를 묻는 쌍둥이 문지기에게 가볍게 오늘은 드물게도 문 앞에 있네하고 대꾸하며, 뛰듯 걸었다. 어서 누군가에게 말하고 싶어 분초가 아까웠다. 이런 시시하고 대단한 이야기를 아무렇지 않게 들어 줄 사람은 역시 시시하고 대단한 작업을 여상스럽게 수행하는 시계 수리공 말고는 없다. 한동안 시끄럽게 떠들면 짜증스럽게 얼굴을 들겠지만, 그때는 커피를 우려서 달래줘야지. 안온하고 만족스러운 시간 속에서 경청의 확신을 가지고 조잘거리는 시간은 언제나 기대된다. 기대되기 마련이다.

 

 

  그렇게 백합 무늬 새겨진 구둣바닥이 남긴 발자국 위에는 가벼운 노랫소리만 남고, 무엇이든 완전히 부서지지 않으면 원래대로 돌아가는 세계 속에서 다른 흔적과 같이 사라진다. 사라지고 나서도 노랫소리가 나뭇잎 흔들리는 소리에 섞여 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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