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우스 몬레이는 분명 루시라는 인간이 주의를 요하는 사람임을 알고 있었다. 이는 비단 ‘부외자’라는 그 자신의 특성과 관계없이, 저 인간이 태생적으로 타고 난 결함이나, 혹은 그에 준하는 특징이 빚어내는 결과로, 루시가 언젠가 크게 사고를 칠 것은 예상하는 바였다. 아니, 루시와 함께하는 삶이 언제나 자잘한 사고로 가득 차 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유리우스는 이런 상황에 그런 생각이 스쳐 지나간다는 사실에 욕설을 내뱉었다. 피가, 질리도록 봐서 감흥을 느끼지도 못하는 피가 번지고 있다.
”루시, 너, 지금 무슨…….“
“다녀, 왔어. 쥴.”
“지금 상황이 ‘다녀왔어’로 끝날 일인가! ‘그래, 어서 와’라고 일축할 상황이라고 생각했으면 네 머리는 꽃밭, 아니, 그것보단 상처의 치료가 우선이군. 거기서 기다려라, 구급상자를―”
“그렇게 당황 안 해도 돼, 그것보다, 이거, 피 괜찮아? 들어가면 묻을 거 같은데…….”
“그런 걸 신경 쓰고 있을 때인가!”
유리우스는 벌컥 화를 내고 이내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루시는 이 상황에서도 그가 소리쳤다는 사실 하나에 놀라서 울 것 같은 표정을 한다. 어쩔 도리 없는 녀석! 루시는, 평소처럼 그의 작업장 문틀에 기대어 서 있었다. 배를 짚은 손 사이로는 피가 비어져 나왔고, 옷은 온통 너덜거렸으며, 얼굴에도 고통스러운 기색이 가득하다는 사실을 제외하면 평소와 다름없었다. 그래, 언제나, 그가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확신하고 그의 작업장으로, 루시 자신이 ‘집’이라고 여기는 곳으로 돌아왔다는 사실은 다르지 않았다. 전신이 피로 흠뻑 젖을 정도로 큰 상처를 입고도 루시는 그의 방으로 돌아왔다.
유리우스 몬레이는 눈에 선한 붉은 빛을 몰아내기 위해서라도 다른 생각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붕대와, 응급 처치를 끝내면 데려갈 만한 곳 따위. 의사와, 그가 들고 달릴 수 있는 속도나, 이 시계탑을 굳이 올라오고야 만 루시의 미련함에 대한 원망. 원망. 원망은 빠르게 비관으로 이어진다. 루시가 다른 곳, 예를 들어 모자가게 저택이나 하트 성 따위에 살고 있었다면 이렇게 의사를 찾아 데리고 뛸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하트의 여왕은 시끄럽고 짜증스러운 여자지만 권력이 있으니 금세 사람을 불러들였을 것이고, 모자 장수는 애초에 폭력에 익숙한 족속이다. 그의 저택에 상주시키는 의사 –십중팔구 조직원이겠지만- 도 있을 것이며, 연락 체계도 잡혀있겠지. 이는 유원지라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오직, 그의 탑이, 제때 사람을 불러들일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는 곳이다. 다른 영주들과 친분이 깊은 루시는 제가 원했다면 언제든 옮길 수 있었을 텐데. 아니, 루시가 원하지 않아도 그가 먼저 권해야 했을지도 모른다. 그래, 그래야 했을 것이다. 차라리 그가 루시를 내쫓았다면 이런 일이 일어날 리는 없었겠지.
“저기, 쥴.”
그는 구급상자를 찾아 몇 걸음에 방을 가로질렀다. 발치에 채이는 책이나 상자 따위는 난폭하게 걷어차인다. 루시는 날카로운 금속음과 둔탁한 타격음을 들으면서, 아직 귀는 들리는구나. 하고 자조한다.
“쥴!”
“듣고 있어. 앉아라, 아니, 움직일 수 있다면 방으로 들어가서 앉겠나. 그럴 여유도 없겠군. 어째서 가장 먼저 지혈하지 않았나! 일단 손을 치워, 상처의 상태를 봐야 붕대를 어떻게 감을지라도 결정할 수 있다. 나는 의학에 조예가 없어, 지혈이 끝나면 바로 의사를 찾아가서 상처를 보이는 편이 좋아. 염두에 두는 의사라도 있나, 없다면 가장 가까운 곳에 가서 진찰을 받는 동안 내가 다른 의사를―”
“쥴, 필요 없어.”
“헛소리하지 마라! 농담도 못될 일을, 이 정도 상처를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할 생각이라면 닥쳐라. 네 눈은 단추 구멍인가?!”
“쥴, 제발 진정해.”
“진정할 일이라고 생각하나, 너는!”
“하지만 이제 와서 응급 처치를 해도 늦었어. 찔린 칼에 독이 묻어있었단 말이야. 여기까지 어떻게든 왔지만, 사실,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아. 응? 나는 죽어, 쥴. 그러니까, 그냥, 나랑 이야기해줘, 응? 제발.”
“독?! 농담도 못될 말을, 알았다면 어째서 그 자리에서 해결하지 않았나!”
“나는 농담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어, 쥴. 지금부터 할 말도 농담이 아니고. 그러니까, 응? 제발.”
유리우스는, 의식의 틈새로 흘러드는 루시의 목소리가 목 졸린 동물을 닮아있다고 생각한다. 그의 등 뒤, 열린 창 너머로 바람과 볕이 들어온다. 루시의 얼굴은 볕을 받아 하얗고, 피가 빠져 탈색된 얼굴을 바라보며 유리우스는 직감한다. 출혈이 심하다. 죽기 직전이라는 루시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그는 반사적으로 그 생각을 덮어버리기 위해서 발악하지만, 그런 변죽 좋은 일에 능하지 않은 성격은 그 자신에게 낙인처럼 사실을 찍어 누른다.
루시 윌로우는 죽는다. 그의 눈앞에서, 부정할 수 없이.
그는 이를 악물었다. 까득, 하고 이빨이 갈리는 소리가 날 것만 같다. 아니, 났다 한들 그 자신은 느끼지 못했을 게 틀림없다. 그는 간절한 얼굴로 저를 올려다보는 루시의 눈이 반짝거리는 보석처럼 찬란한 빛을 흩뿌리는 모습을 바라본다. 영원토록, 영원토록 잊지 못할 광경이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광경도 잊히겠지. 그가 기억하지도 못하는 아주 오래된 루프처럼. 영원한 것은 그 무엇도 없다. 모든 것은 무의미하다. 오직, 대체할 수 없고, 다른 부외자들과도 전혀 다른 저, ‘그의’ 루시만이 의미 있는 세계에서, 루시는 죽는다. 그가 고칠 수조차 없는 심장은 덧없이 멎어버리고 그의 어깨까지 겨우 닿는 머리와, 그를 지탱하고 있을 얇은 몸은 움직이지 못하는 고깃덩이가 되어버린다.
그러고 나면 사라지는가? 루시는 남길 시계조차 없는데?
그는 어지럽게 산란하는 사고와 참을 수 없이 솟구치는 감정을 억누르고, 가만히 무릎을 꿇었다. 침착한 손길로 구급상자를 열고, 루시의 손을 떼어내 상처를 확인한다. 루시의 말이 맞았다. 상처는 이미 보라색으로 변해 검게 죽어가는 조직이 보이고, 칼날은 장기를 모두 헤집어두었으며, 피를 너무 많이 흘린 게 틀림없다. 그 사실을 알면서도 유리우스는 거즈를 대고 붕대를 감아 지혈한다. 그가 할 수 있는 사실이 이것뿐이었다.
“…….”
“저기, 유리우스.”
“말하지 마. 상처에 울린다.”
“말하지 마, 라니. 나 졸리면 말 많아지는 거 알잖아. 슬슬 춥기도 하단 말이야. 그냥 이러다가 조용해질 테니까, 그냥 들어줘.”
“붕대를 감고 의사에게 간다. 그때까지 버텨라. 춥다면 담요를 감아서 안아 들면 되겠지.”
“필요 없어.”
“얼빠진 소리를.”
“저기, 쥴. 그냥……. 나, 무릎베개 해주면 안 돼? 예전부터 부탁하고 싶었단 말이야.”
유리우스는 고개를 들어 올린다. 묵묵히 상처에 붕대를 감던 손이 느려지고, 그는 그제사 루시의 눈을 제대로 쳐다본다. 그의 얼굴 위로 눈물이 떨어진다. 결국, 울어버린 루시는 뚝뚝 떨어지는 눈물을 닦지도 못하고 그를 내려다본다. 내려다보는 얼굴에서 떨어진 눈물이 유리우스의 뺨 위를 기어 떨어진다. 마치 그가 우는 듯한 기분이 되어서, 흘러넘치는 눈물을 닦아 주지도 못하고,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모르는 채, 그는 루시의 얼굴을 올려다본다. 형편없이 일그러져서도, 여전히 아름다운, 그의 눈에는 언제나 눈부실 정도로 빛나고 있던 그의.
“응? 그냥, 제발.”
“……누워.”
그는 결국 방문 앞에 주저앉는다. 루시는 그의 어깨 위로 쓰러졌다가, 그의 팔에 안겨서, 결국 그의 무릎을 베고 눕는다. 무릎이라고 할 수도 없는 다리 위쪽을 베고 누워서 차가운 복도에 몸의 반 이상을 내려놓은 루시의 옷은 붉다. 유리우스는 문득, 저 피가 말라붙기도 전에 흔적이 사라지는 것을 두려워하기 시작했다. 대량의 피가 말라 굳기도 전에 시간대가 바뀐다면, 어느새 루시의 옷이 입어 줄 사람을 기다리는 것처럼 하얗게 변한다면, 그는 그 옷을 버릴 수 있을까.
“미안해, 축축할텐데…….”
“그런건 아무래도 좋아. 너는, 그 상황이 되어서도 옷을 걱정할 기분이 드는 건가. 대단한 녀석이군. 폼으로 유력자들과 어울리는 건 아니었나.”
“상냥하게 말 해줘……. 언제나 그러지, 나는 당신 말밖에 믿을 게 없는데 당신은 언제나 불만이랑 비아냥밖에 입에 담는 게 없고. 날, 좋아하기는 하는건지 알 수도 없는데…….”
“갑자기 무슨 말을―”
“늘 물어보고 싶었어. 날 좋아하긴 해, 쥴? 조금이나마 날 사랑했어? 당신이 주제로 걸리면 나는 늘 아무것도 모르겠어. 예전부터 그랬지. 신이든 세계든 사람 아닌 무언가는 언제나 날 사랑하지. 나도 언제나 자신이 있었는데…… 내가 사랑하는 것은 그렇게나 어려워서. 하나도 모르겠어.”
“……내가 싫어하는 사람이랑 동거할 정도로 호인으로 보이던가?”
“……아니. 하지만, 내가 싫어져도 쫓아내지 않을 정도로는 상냥하잖아. 그게 늘 두려운 거야.”
유리우스는 엎드린 루시의 콧날이나, 얼굴의 굴곡이 천 너머에서 닿고 있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자각한다. 축축하게 젖어 들어가는 천은 체온을 빼앗아 따뜻하고, 유리우스는 루시가 억지로 톤을 높여 아무렇지 않은 ‘척’ 하는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그러니까, 이건 진심이다. 그는 루시가 죽음을 앞두고 나서야 평생 묻지 않을, 영원토록 묻어 둘 말을 충동적으로 꺼냄을 알아차린다. 그의, 루시는, 결국 아무것도 모르고 그의 옆에서.
그는 입안의 살을 씹는다. 짓이겨진 살에서는 피 맛이 배어 나온다. 비릿한 향과 들큼하고 짭조름한 맛과, 목이 꺼끌꺼끌하게 죄어드는 감각. 그는 몸을 지탱하던 손을 쥔다. 짧은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고, 하얗게 질린 마디는 힘을 견디지 못하고 잘게 떨린다. 유리우스 몬레이는 그런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동요했다. 그의 눈에 보이는 것은, 그의 다리 위에 머리를 둔 동거인의 얇은 몸. 언제나 팔랑거리며 돌아다닐 때는 드러나지 않던 둥그런 어깨와 볼품없이 굽혀버린 등. 그는 어렵사리 손을 뻗어 루시의 등을 쓸어내린다. 손끝에서, 옷과 피부 너머에서, 마지막을 모르고 약동하는 ‘심장’의 박동이 선명하게 느껴진다.
“……좋아한다, 루시. 나는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과…… 이렇게 오랫동안 생활하고, 걱정하고, 많은 것을 공유하지 않아. 애초에 너도 알다시피 나는 편벽하고, 우울하며, 비관적인 남자다.”
“당신을 나쁘게 말하지 마.”
“사실이잖아. ……. 하지만, 너하고 함께라면 미래를 생각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했어. 그 정도다.”
“…….”
“……뭔가 말해.”
그는 평정을 가장해 이야기한다. 부끄러움을 감추기 위한 척 내뱉는 말이 가린 것이 울음임을 모르지 않는다. 아마, 루시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는 습관처럼 그리 생각하다가, 그의 무릎 위에 누워있는 얼빠지고 바보 같은 동거인은 모를 수도 있다고 마음을 고쳐먹는다. 지금까지 알아차리지 못한 인간이다. 아마, 이렇게 묻지 않았다면 영원히 저렇게 생각했겠지. 유리우스는 루시가 얼마나 고지식하고 보수적인 인간인지 알고 있다. 제가 생각한 것을 절대 바꾸지 않고, 타인의 말에 흔들리지 않는 인간이니 그와 오래도록 살면서도 미움받았을지 모른다 두려워했을 것이다.
루시는 몸을 돌려 그를 바라본다. 가벼운 동작에도 피가 배어 나오고 고통의 흔적이 느껴진다. 아까보다 창백하게 질린 얼굴은 보기 괴로울 정도로 하얗다. 희고, 창백하고, 그럼에도 여전히 눈부신 웃음. 눈물로 얼룩지고 피로 더러워도 빛바래지 않는, 언제나 그를 발견하고 뛰어 올 때면 만면에 띄워 올리던 그 표정.
“그러네, 어차피 앞으로는 영원히 말도 못 하게 될 테니까 말 해둬야 하는구나. 아, 이렇게 말하면 안 되나? 근데 당연한 거니까, 넘어가 줘.”
“너는 이런 순간까지도 헛소리를 지껄이지 않으면 안 되는 병이라도 있는건가?”
“설마, 농담도 헛소리도 아니야. 당신들도, 나도, 태어난 건 언젠가 죽어. 태어나는 건 마음대로 할 수 없으면서 죽음도 뜻대로 하기 어렵다는 건 우습지. 그래도 나는…… 딱히 저항할 기분도 안 드네. 뭐, 좀 더 먼 미래에 죽을 거라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어차피 언제가 한 번은 찾아올 끝이니까.”
“……. 너는, 시계로 움직이는 우리와는 달라. 죽으면 대체할 수 없지. 영영 사라지는 거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런 말을 하는 건가.”
“알고도 이런 말을 하는 거야. 뭐……. 그래도 아쉽기는 하네. 나, 언젠가 당신이나, 내가 사랑하는 다른 사람이 결혼해서 가정을 꾸리고, 아이를 가지게 되면 대모가 되고 싶었어. 그게 내 꿈이었거든. 그럴 일은 이제 없겠지만……. 어쩌겠어. 원래 죽음이 그런 거지. 허망하고, 갑작스러우며, 수긍할 수밖에 없는 거잖아.”
루시는 킥킥거려고 했는지 어깨를 몇 번 떨다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유리우스는 신발코를 적시기 시작하는 붉은 액체에서 눈을 돌려 루시의 눈을 덮어주었다. 눈이 부신지 미간을 찌푸리던 루시는 그의 손 아래서 닥딱하게 굳는다. 굳었다가, 이내 힘을 풀고, 제 손을 들어 그의 손 위로 겹친다. 차갑게 식어버린 손이 딱딱하다. 시체의 손과 다름없는 상태로 힘겹게 그의 손을 붙잡는다. 나는 괜찮아, 쥴. 작게 속삭이는 루시의 목소리가 갈라진다. 그는 그 ‘괜찮음’을 기꺼이 연기해주기로 마음먹는다.
손바닥 아래서 느껴지는 액체는 얼굴에 묻은 피겠지. 그는 루시의 일그러진 얼굴이 눈부심이라고 생각해 주었듯 손바닥을 적시고 루시의 볼과 귀를 따라 흘러내려 결국 바닥에 떨어지는 액체를 피라고 생각해 주기로 했다. 마지막까지 강한 척을 그만두지 못하는 그의 동거인에게 해 줄 만한 일이라고는 그 정도밖에 없었으니까. 그는, 기꺼이, 지금껏 그들이 지냈던 작업장 속에서 평소처럼 행동할 수 있다.
“있지, 쥴. 나 유언을 언제나 고민했거든. 근데……. 할 말이 마땅히 안 떠오르는 거야. 잊어달라고 말 하고 싶었지만, 어차피 날 잊게 될 거 아니야. 그게 편하니까, 그렇게 해 줬으면 하고, 그렇게 되겠지만, 그런데도 남기고 싶은 게 있으면 부탁하는 거잖아.”
“잊을 리가 없다.”
“잊어야 해, 쥴. 평생 상처와 아픔을 끌어안고 가는 건 너무 괴로운 일이야. 그래서, 내가 남기고 싶은 것 말이야, 생각해 봤는데, 내가 당신을 사랑했다는 사실이면 충분할 거 같아. 때때로 내가 떠오르면 그것만 기억해줘. 그게 전부야. 어차피 시간은 스쳐 사라지는 것이고, 산 사람은 살아야지.”
“…….”
“감정은 흐려지고 기억은 사라지는 것. 내가 유언으로 남길 말은 사랑이면 충분해. 죽은 사람이 남기는 건 사랑했다는 사실이면 충분한거야. 쥴, 나의 쥴리아, 유리우스 몬레이. 사랑해, 그게 전부야.”
유리우스의 손을 붙잡고 있던 루시의 손에서 서서히 힘이 빠진다. 바닥의 피는 차갑게 식어 버린 지 오래고, 그의 다리 위에 놓인 머리는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처럼 불안하다. 유리우스는 루시의 눈을 가려주던 손을 떼고 몸을 앞으로 굽혀 루시의 머리를 잡아주었다. 그의 손에 희미하게 뺨을 부비적거리는 몸짓에서 생기를 읽어내지만, 이윽고 사라질 온기임은 변함없다. 유리우스는 금방이라도 부서질 유리 조각을 다루는 것처럼 조심스럽게, 온 정성을 기울여서 루시를 잡는다. 루시는 그의 속도 모르고 눈을 감고서, 금방이라도 꺼질 것 같은 목소리로 속삭인다.
“다른, 내가 사랑했던 사람들에게, 아까 했던 말을 전해줬으면 좋겠지만, 안 해도 좋아. 당신에게 맡길게…….”
잠에 빠져드는 사람의 목소리처럼 희미하고, 불확실하고, 꿈과 현실의 경계처럼 애매한 것. 유리우스는 차라리 꿈이라면 제가 막아줄 수 있다고 자조했으나 자조또한 금새 몰아낸다. 그러한 감정은 앞으로 얼마든지 곱씹을 수 있을 것이다. 그는 혼자 남겨질테니까. 이 작업장에서 루시의 흔적이 사라지고, 향이 스러지고, 주인 잃은 물건들이 다시 사용할 사람을 기다리는 동안 그것들과 함께 영원토록 남아있을 것이다. 시간이 없는 세계에서 다시 무의미한 삶을 구가하겠지. 그러니 그는 미래를 생각하며 자조와 자괴를 몰아낸다. 루시의 입가에 귀를 가져다댄다.
“사랑해, 정말 사랑해……. 그게 전부야…….”
마지막 숨결은 따뜻하게 그의 뺨에 맺힌다. 맺혔다 이내 식어버린다. 그의 손안에 있던 머리도, 숨도, 피도, 심장도 차갑게 식는다. 뺨과, 뱃속, 가슴 속에 차가운 한기가 엄습한다. 한기는 주인을 닮아 제멋대로 그를 침범한다. 그래, 아마 루시가 그랬던 것처럼 한기가 제 자리를 찾는다면.
그의 시계도 루시와 함꼐 차갑게 식어버렸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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