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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고 푸른 화원

admin 2022.06.25 01:34 read.29

  블러드 듀프레는 언제나 낮을 증오한다. 그토록 졸리고 짜증 나는 시간, 그대로 사라져버리면 좋겠다고 생각할 정도로. 허나 외부인이 그의 저택에 체재한 뒤로는, 때때로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는 순간이 있다. 푸르게, 역겨워서 토악질이 날 정도로 푸르게 펼쳐진 하늘 아래서 객은 그 검은 드레스와 붉은 리본을 두른 채로 정원의 장미 속에 깊이 파묻힌다. 제 존재를 통째로 지워버리고 싶어 하는 얼굴로, 제 살갗을 가시에 내어주어 이곳저곳 긁힌 채로 그렇게. 블러드 듀프레는, 그 붉은 피를 볼 수 있다면 낮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는 순간이 있었다. 끔찍할 정도로 역겨운 이 낮에만 네가 피를 흘린다면, 기꺼이 한 두 시간대는 버텨줄 수 있다고.

 

 

 

 

 

길지 않은 외출이었다. 역할을 받지 못한 이들은 역할이 있는 이에 비하면 터무니없을 정도로 약하고 무의미해서, 이 의미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세계에서도 특출나게 하찮다. 그러니 얼굴 있는 그는 얼굴도 없는 이들을 아무리 죽여대도 희열을 얻을 수 없다. 어딘가의 여왕은 오직 피를 보기 위해서 제멋대로 머리를 쳐댄다고 하지만, 블러드는 해가 뜨는 순간이면 그럴 기력도 없었다. 아아, 이 얼마나 귀찮은 일인가. 그는 다분하게도 연극적인 어조로 한탄하며 힘없이 발을 뗐다. 무언가 재미있는 일을 만들어 줬다면 좋으련만, 얼굴이 없는 자들은 개성조차도 박탈당했는지 그의 계획 바깥으로 벗어나는 일이 없다. 지루함을 버티지 못하고 몇 구석 무너뜨려 주어도 똑같다.

 

 

 

 

 

  “블러드, 돌아가면 술이라도 마실까?”

  “아니. 이 정도로 낮이 길면 그럴 생각도 들지 않는다…… 졸려.”

  “, 블러드는 낮에 잤으니까. 아아, 생각하니까 짜증 나네. 그 녀석들, 오랫동안 버티지도 못할 거면서 사고를 쳐서 블러드를 낮에 저택 바깥으로 끌어내고 말이야…… , 블러드가 나올 정도로 사건이 커졌다는 점에서 사건이 작다고는 할 수 없지만…….”

  “엘리엇,”

  “? , 블러드?”

  “시끄럽다.”

 

 

 

 

 

  블러드 듀프레는 케인을 고쳐잡아 몇 번 휘두를까 생각했으나, 그럴 기운도 없었고,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아아, 지루해. 몸은 무겁고, 볕은 따갑다. 벌써 세 시간대나 낮이다. 이대로 밤이 올 때도 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나? 이 세계의 변덕스러운 시간은 언제 바뀌어도 이상하지 않지만, 달리 말해서 얼마나 이어질지도 모른다. ‘시간이라는 개념이 의미를 잃은 세계에서 이런 생각을 떠올리는 것조차 우스운 일이다. 그는 지나가는 이를 몇 명 쏘아죽여 기분을 풀까 생각했으나, 그러고 싶지도 않다. 시끄러워. 총성조차 귀찮을 정도로 졸리다.

 

   그는 끝없이 이어지는 짜증을 쏟아내며 저택으로 귀환했다. 느릿한 말투의 사용인이 그를 환영하고, 묻었던 피는 걸어오는 동안 사라졌다. 지루해. 그는 사후처리를 한 마디로 갈음하고 사라졌다. 뒤에서 엘리엇이 블러드! 뒤처리는 맡기고 가서 쉬어!’ 같은 소리를 지껄였으나, 애초에 할 생각도 없었다. 이토록 밝은 낮에 밖에서 일하란 말인가? 포로의 처리 따위, 사용인들이 알아서 할 일이다. 피에 미친 놈은 하나둘이 아니니, 그들이 저 좋을 대로 날뛰면서 정보를 빼내겠지. , 지루해. 그는 발 닿는 대로 걷는다. 피처럼 붉은 장미가 만개한 그의 저택. 제법 구석진 곳에 가면 역시나, 검은 원피스 자락을 찾을 수 있다.

 

 

 

 

  “아가씨.”

  “돌아왔구나.”

  “가주의 귀환이다, 객으로서 마중도 나와주지 않을 셈인가?”

  “……다음부턴 주의할게.”

  “재미없는 대답이구나.”

 

 

 

 

  손을 뻗어 장미 덤불을 헤치면, 헛소리를. 하고 표정을 일그러뜨린 릴리의 얼굴을 볼 수 있다. 선명할 정도로 푸른 눈동자는 저 하늘보다 짙어서, 가장 비싼 사파이어를 가져다 대어도 모자라다. 희미하게 일그러진 눈가에서 느껴지는 것은, 아무리 깎아내어도 결국 드러내고야 마는 강한 공격성. 블러드 듀프레는 그 공격성에 짐짓 유쾌한 표정을 지으며 허리를 숙였다. 눈가를 장식하는 붉은 선. 가시에 얼굴을 긁혔는지 피가 배어 나는 상처. 모자 장수는 만족스러운, 혹은 짜증스러운 기분으로 손을 뻗는다.

 

 

 

 

 

  얼굴을 다쳤구나, 아가씨.”

  “금방 나아.”

  “외부인은 약하다. 흉이 남을지도 모르는 일이지.”

  “신경 안 써.”

  “……유난스럽게 말이 짧구나, 릴리. 무언가 마음에 차지 않는 일이라도 있었나? 시정할 기회조차 주지 않고 화풀이라니, 남자로선 제법 나쁜 기분이 아니지만, 가주의 체면을 위해서라도 말해주게.”

 

 

 

 

 

  뻗은 손으로 배어 나온 피를 훔친다. 장갑에 스며드는 피는 장미보다 선명한 붉은 색. 그의 몸이 드리운 그늘 속에서 릴리아나의 푸른 눈동자는 어둡게 가라앉는다. 희미하게 비틀려 올라가는 왼쪽 입꼬리. 블러드 듀프레는 다시 유쾌한 기분이 되었다. 언제나 태연자약한 태도로 사람의 위에 서는 이 외부인은, 그의 앞에서 이토록 흐트러지는 순간이 있다. 말 몇 마디를 섞는 것으로 태도가 무너지고, 그의 시선을 피하려 단어를 길게 엮지 않는다. 그는 조금 더 몸을 숙이며 릴리아나를 장미 덤불 속으로 깊게 파묻었다. 언제나 초연한 얼굴의 객은, 이리 보면 터무니없을 정도로 작다. 작고, 여려서, 그는 언제나 이 목을 쥐어 꺾을 수 있다는 사실을 자각한다.

 

  자각하지 않고서야 그대로 손을 뻗어 목을 부러뜨릴 것만 같다.

 

 

 

 

 

  “…….”

  “대답해 주지 않을 셈인가?”

  “……하아.”

 

 

 

 

 

  릴리아나 다몬은 짧게 한숨을 내쉬며, 의식적으로 몸의 긴장을 풀어낸다. 장미 덤불 속으로 더욱 깊게 파묻히며, 제 몸에 가시가 파고드는 것을 개의치 않는다. 대체할 수 없는 외부인인 주제에, 그 몸을 제멋대로 다룬다. 옷자락을 뜯어 놓은 가시와, 다몬의 몸 아래 짓눌려 으깨진 장미들. 장미와 풀의 향내. 덤불 속으로는 바람이 들지 않는다. 등으로 내리쬐는 볕이 그의 옷을 달구는 느낌은 유쾌하지 않으나, 천 장갑이 피에 붉게 물들며 그 너머로 릴리아나의 체온이 전해지는 건, 그리 나쁘지 않다.

 

 

 

 

 

  “보스, 여자가 모자라?”

 

 

 

 

 

  다만, 아무리 그라도 이런 대답은 예상하지 못했다.

 

 

 

 

 

  ……무슨 뜻이지?”

  “말 그대로. 여자에 굶주리진 않았을 것 같은 인상인데. 마피아의 보스고.”

  “왜 그 이야기를 하지.”

  “……보스, 당신, 여자로 취급하고 있잖아?”

 

 

 

 

 

  불쾌함의 편린조차 보이지 않는 푸른 눈동자. 빛을 받지 않은 눈은 오히려, 자제를 시도하던 순간보다 비인간적으로 보인다. 손에 쥘 수 있었던 것이 저 멀리 달아나버린 감각. 블러드 듀프레는 언짢음에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살기를 풀어도 릴리아나의 반응은 다르지 않다. 그저 투명하게, 동요하지 않고 그를 응시하는 시선. 그는 이 감각을 증오한다. 그를 무기물로 만드는 듯한 저 시선을, 제 뜻대로 뒤틀어 놓지 않고서야 버틸 수 없다. 그는 언제나 저 하고 싶은 것을 저 하고 싶을 때 하는 인간이니, 그러겠다 생각했다면 마땅히 이루어야 한다. 그러니 그는 릴리아나 다몬을 장미 안으로 깊숙이 처박는다. 그의 저택, 그의 영지, 마피아의 본거지에 체재하는 외부인.

 

 

 

 

 

  객을 그리 취급할 정도라니, 어지간히 굶주리지 않고서는 그러지 않을 터인데. 여자가 모자랄 인사로는 보이지 않으니까 고민해 봤을 뿐이야, 보스. 두어 번, 들은 이야기로는 지금도 여럿 있는 것 같았는데.”

  “……부추기는 건가, 아가씨? 네가 이 정도로 남자를 다루는데 능숙하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다만, 아무래도 내 안목의 문제였던 모양이구나.”

  “……그래서, 내가 틀렸다고?”

  “그렇게 말하지는 않았어. , 여자가 모자라냐는 이야기엔 내 체면과 남자의 자존심을 걸고 부정해 두겠다만, 여자로 대하고 있다는 점은 부정하지 않도록 하지. 허나, 남자의 마음은 섬세한 법이지. 구애하는 여자에게 외려 오해받았다면, 짜증도 내지 않겠나?”

  “…….”

 

 

 

 

 

  살기와 위압이 공기를 무겁게 짓누르는 가운데, 릴리아나 다몬은 그 심장의 존재를 증명하는 듯한 초연함으로 피식, 웃었다. 공기 빠지는 소리를 닮은 그 웃음은, 명백하게 도발이다. 블러드 듀프레는 진심으로 짜중이 치솟는 기분과 함께, 릴리아나의 어깨를 잡은 손에 다시 가볍게, 힘을 주었다. 다만 부러지지 않을 정도로, 정신을 놓지는 않았으나 그의 짜증과 불쾌함을 표시하기에는 모자람이 없도록.

 

  심장을 가진 자의 몸은 대체할 수 없는 만큼 약하다. 살은 무르고 피부는 쉬이 찢겨나간다. 뼈또한 다르지 않아서, 블러드의 악력으로 으스러뜨리는 일이 어렵잖을 정도다. 그러니 그가 몸이 상하지 않도록 조절했다고 하여도, 손안에 쥐어 잡힌 어깨가 제법 통증을 느끼고 있을 터다. 허나 릴리아나 다몬은 그런 제 육체에는 전혀 개의치 않으며 그저 초연하게, 그가 무엇을 하고 어찌 움직여도 흔적을 남길 수 없다 느끼는 그 얼굴 그대로, 속삭인다.

 

 

 

 

 

  “보스, 말이 길어졌네.”

  “……무슨 말이 하고 싶나.”

  “별로? 그냥 생각났을 뿐이야.”

 

 

 

 

 

  블러드 듀프레는, 저 얼굴에 대고 당장 총을 쏴 갈기지 않은 것은 길어진 낮에 그가 극도로 지루해진 탓이라고 생각했다. 동시에, 어느 시간대에 이런 얼굴, 이런 순간을 마주해도 그는 총을 쏴 갈기지 않을 변명을 찾아냈으리라 생각하기도 하였다. 그를 응시하는 저토록 푸른 눈동자. 그가 증오해 마잖는 낮보다 짙은 저 눈. 백합은 고고하다. ‘순결을 뜻하는 꽃은 릴리아나 다몬에게 웃음이 나올 정도로 어울리지 않으면서, 무엇보다 잘 어울린다. 다만 블러드 듀프레는 타고나기를 성정이 비틀린 미친모자 장수이기에, 백합의 고고한 아름다움보단 그 지는 모양이 더욱 마음에 들어찼다. 볼품없는 색으로 물들어 추하게 지는 모습을, 그는 분명 기대하기에, 꽃을 꺾어 찢어발기는 꼴보단 스스로 지는 쪽이 더욱 즐거울 것이 분명하기에, 지금은 손을 떼야만 한다.

 

 

 

 

 

  “역시 마피아의 저택을 태연하게 체재지로 고를 정도의 담력은 있는 모양이구나. 마피아의 보스에게 그리 기 싸움을 시도하는 것은, 너뿐이다.”

  “, 그래?”

 

 

 

 

  그럼에도 어디선가, 아주 깊은 곳에서, 블러드 듀프레는 릴리아나 다몬의 아름다움을 언제까지고 보고 싶어 하리란 기분 나쁜 생각이 떠올라 사라지질 않는다. 그가 남들에게 내보이기 싫어하고, 그 자신마저 자주 떠올리지 않는 행위. 져버린 꽃의 시간을 되돌려 언제나 아름답게 유지하듯이, 푸르른 백합이 지는 꼴은 견디지 못할 것이라고. 진정으로 이 치가 몰락하는 순간이 온다면, 분명 그 사실에 누구보다 동요할 것은, 블러드 듀프레가 아닌가. 하는 역겨운 생각이, 뇌리 한 구석에서 사라지질 않는다.

 

 

  아아, 참으로 끔찍하게 짜증스러운 낮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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