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음 가득한 숲, 물가에 앉아서 저를 올려다보는 루카를 마주했을 때, 오스카는 가장 먼저 저 치의 종족을 의심했다. 얼간이 같다고 생각한다. 볕 아래서 흐르는 물을 바라보는 루카의 옆얼굴, 볕 드는 구석에서 허공을 맴도는 청아한 노랫소리. 망아지 시절부터 빗기고 먹여 키운 애마가 제 의지를 거부하고 루카에게 다가가 머리를 들이미는 모습을 보면서, 오스카는, 아. 루카가 이대로 물이 되어 저 시내를 따라 흐른들 자연스럽다 느꼈으리라.
비공도시의 여왕 시험도 꽤 진척된 시기였다. 시험이 궤도에 오르니 수호성의 일은 절로 줄었다. 여왕 폐하가 계시는 우주는 여전히 이런저런 사건이 일어나지만, 이는 하루 이틀의 일이 아니니, 오스카는 별다른 어려움을 느끼지 않았다. 그래, 어려움 없는 나날이었다. 무언가 즐거운 자극이 없는 나날. 오스카는 언제나 불꽃 같은 삶을 추구하는 남자였으니, 이런 삶이 조금 지루하다 느끼던 차였다. 그렇지 않나? 새로운 환경과 새로운 사람은 언제나 즐거운 일이지만, 그는 익숙해지는 속도도 빠르다. 즐거운 사건이 있다면 좋으련만.
수호성의 휴일이란 단조롭기 마련이다. 오스카는 기회만 주어지면 어디로든, 성지 밖도 개의치 않고 외출하는 성정이지만, 요즘은 그러기도 쉽지 않았다. 일전에 강철의 수호성, 제펠이 비공도시를 탈출해 여가를 즐기다가 그대로 쥴리어스님에게 걸리고 만 것이다. 당연히도, 빛의 수호성, 수호성의 수좌, 규율의 수호신 쥴리어스님은 진노했고, 이런 상황에선 천하의 오스카라도 몸을 사려야만 했다. 그런 연유다. 이토록 날 좋은 일요일에, 외출조차 하지 않고 비공도시에 꼼짝없이 박혀있는 건. 아, 물론 그가 원한다면 여왕 후보에게 데이트를 신청해 이리저리 돌아다닐 수 있겠지만, 오늘은 그러고 싶은 기분도 아니다. 그러니 오스카는 마구간에 들러, 제 애마를 돌보는 일에 전념했다.
말은 정직하다. 그가 망아지 시절부터 돌본 애마는 언제나 그에게 충성한다. 충성? 오스카는 당연하게도, 이 말과 제가 친구라고 여긴다. 그리고 오랜 친구는 언제나, 시선만 마주해도 마음을 읽을 수 있는 법이지. 한동안 일이 바빠 멀리 외출하는 일도 줄었다. 말이 답답증에 시달리는 것도 당연한 일. 오스카는 사과의 의미로 간식을 내어주며 마구를 채웠다. 모처럼 생긴 휴일에 고독과 운치를 즐기며 애마와 시간을 보내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뭐, 그러다가 ‘자연스런’ 만남이 생기면 어쩔 수 없고.
그는 가벼운 마음으로 이랴! 소리를 내며 그의 말과 함께 달렸다.
바람이 기분 좋게 뺨을 스치고, 거칠게 흔들리는 말등에서 안정적인 자세를 잡으며 속도감을 즐긴다. 몰입의 순간, 저 너머를 바라보며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을지 가늠하는 순간. 오스카는 말을 탈 때면 빠르게 달리는 게 좋았다. 그래, 풍경을 살피는 건 쥴리어스님의 취향이다. 그는 느긋하게 풍경을 살피는 것도 싫어하지 않으나, 속도감을 즐기며 달라진 시야와 바람을 즐기는 쪽이 훨씬 성미에 맞다. 바로 지금처럼.
그러니 오스카는 잘 달리던 말이 서서히 속도를 줄이며 멈춰 섰을 때, 희미한 불쾌감을 느꼈다. 물론 오랜 경험에 따라 길을 살피는 일도 소홀히 하지 않는다. 말은 섬세한 동물이다. 더군다나 그의 애마는 ‘호전적’이나 ‘도전적’이라는 말과는 꽤 거리가 있으니, 사소한 것에도 놀랄 수 있다. 다만 길은 어디까지나 평탄하게 뻗어있을 따름이고, 수상한 낌새는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오스카는 말에게 몇 마디 건네며 다시 출발하려 했으나, 그의 애마는 여전히 요지부동이었다. 다만 그 귀를 이리저리 돌리고, 고개를 꺾어가며, 그가 들을 수 없는 소리에 귀 기울이는 듯한 모습을 보일 뿐이다.
그리고 마침내 그의 말이 숲을 향해서 터벅터벅 걷기 시작했을 때, 오스카는 말을 거는 것도 포기하고 고삐를 늘어뜨렸다. 총명한 그의 애마가 이렇게 행동한다면, 마땅한 이유가 있겠지. 물론 나름의 기대가 없었다고 하면 거짓이다. 어찌 되었든 성지와 이 비공도시의 경비 최고 책임자는 오스카고, 무슨 일이 생긴다면 그의 책임이다. 뭐, 솔직하게 말해서 무언가 일이 생기면 재미있다는 이유도 한몫했다. 그는 수호성으로서 성실하게 임무를 다하고 있으나, 성지와 비공도시는 좀 자극이 부족하지 않던가? 즐거운 일이라면 가릴 처지가 아니다.
체고가 높은 그의 말과, 키가 큰 그의 머리가 나뭇가지에 걸리지 않을까 걱정하며 숲길을 헤치고 들어갔을 때, 오스카의 귓가에도 높은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저 너머에서 들려오는 듯 흐리면서, 말의 의미와 가사를 이해할 수 없어도 귀에 틀어박히는 목소리. 오스카는 바로 다음 순간에, 숲이 기이할 정도로 조용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마치, 저 노래를 듣기 위해서 숲마저 숨을 죽이고 있는 듯 적막하기 짝이 없다. 하나의 거대한 극장과도 같다는 생각이 그의 뇌리를 스칠 때, 숲길이 끝나 그늘의 아치 너머로 빛이 쏟아지고,
루카가 있었다.
높게 올라간 음이 청아하게 공기를 가르고, 날아든 새가 앉을 수 있도록 팔을 내민다. 손가락 위에 앉은 새를 제 뺨에 비비며 루카는 노래했다. 선율과 가락, 목소리와 가사에서 올올히 묻어나는 기쁨, 그 기쁨이 사위를 뒤덮어 찬란한 볕마저 빛바래게 만든다. 오스카는 음악에 고견이 있는 인종은 아니다. 그의 상관은 장대한 클래식 따위를 즐겨 듣지만, 그는 심장이 뛰는 군가나 강한 음악이 더 좋다. 그럼에도, 지금 이 순간 들려오는 노랫소리에선, 무언가, 대단히 문학적인 표현을 가져다 붙여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가 자주 읽지 않는, 시 따위에서 끌어다 붙인 표현을―
아. 노래가 멎었다. 새가 날아올라 동그랗게 빈 하늘을 가득 채우고 나뭇잎이 다시 스스스 노래한다. 가만히 멈춰있던 그의 말이 소리를 내고, 루카가 고개를 돌려 그와 눈을 마주쳤을 때, 오스카는 아까 그 광경보다 지금이 더욱 현실감 없다고 생각했다. 무언가에, 무언가 대단한 운명 같은 상황에 홀려버린 기분. 루카의 눈이 금과 백색을 품고 볕 아래서 반짝일 때, 루카의 이름이 ‘빛’이라는 뜻을 품고 있음을 실감한다. 저 눈이 빛과 볕을 담고 있음을 뼈저리게 안다. 시선을 뗄 수 없다. 시선이 얽혀들어서, 루카의 색도 생각도 없이 투명한 눈을 들여다보면, 노래가 끝나 울리기 시작한 소리가 다시 사라진다. 제 말이 푸르릉 소리를 내며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도, 오스카는 이를 인식하지 못했다. 영원과도 같은 한순간이 지나고, 루카가 그 고개를 꺾어 머리카락을 옆으로 비끄러뜨렸다.
“말, 만져봐도 돼?”
자주 듣던 목소리가 특히나 청아하게 사위를 울렸을 때, 오스카는 현실로 돌아왔다.
“아, 아아.”
“백마…… 처음 봐.”
오스카는 제가 사람을 앞두고 말에 앉아 한참을 내려다보는 무례를 저질렀다는 사실에, 심지어 그것이 여성을 앞에 두고 이런 얼빠진 짓을 저질렀다는 사실에 경악했다. 루카는 전혀 이상함을 느끼지 못한 채 그에게 다가왔으나, 오스카 스스로 용납할 수 없는 추태다. 이걸 뭐라고 설명한단 말인가? 나무 사이로 비쳐 드는 빛 아래서 반짝이는 루카의 머리카락이, 투명하고 붉은빛 도는 갈색으로 반짝이는 모습과 그 아래의 눈이 빛 가루라도 뿌린 양 반짝이는 모습이 아름다웠다고? 요정이라고 생각하다니, 군사학교에 다니던 애송이 시절에도 이런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는 분명 여성을 진심으로 찬양하는 뜨거운 심장의 소유자였으나, 공과 사를, 현실과 꿈을 구별하지 못하는 얼간이는 아니었다. 그랬을 터인데.
“이 녀석이 마음에 들었나?”
“응. 말, 원래 좋아하거든. 이렇게 가까이서 보는 건 처음이야.”
루카는 오스카에겐 눈길도 주지 않은 채, 홀린 듯한 표정으로 손을 뻗었다. 말이 놀라지 않도록 조심하는 몸짓. 말에 익숙하지 않다는 건 사실인지 능숙하다는 기색은 찾을 수 없지만, 호의나 즐거움 따위는 넘칠 정도로 보인다. 그의 애마는 주인의 의지도 배반하고 노래를 쫓아 온 주제에, 이제 주인은 신경조차 쓰지 않고 처음 보는 사람에게 애교를 부린다. 루카는 제 어깨 위에 턱 머리를 올리는 백마를 끌어안고, 우와아……. 따뜻해……. 같은 소리를 중얼거릴 뿐이다.
아예 눈을 감은 말이나, 그걸 쓰다듬으며 ‘이름이 뭐야?’ ‘예쁘다…’ 같은 소리를 중얼대는 루카 옆에서 그는 철저하게 외부인이다. 여기 데리고 온 건 그의 말이라지만, 일단 주인에게 말을 거는 게 먼저 아닌가? 루카와 오스카가 모르는 사이도 아니고, 오스카가 검을 가르쳐 준 지도 제법 시간이 지났다. 루카는 원래 이런 남녀 사이의 일이나 색스러운 밀고 당기기엔 관심도, 재능도 없다고 하지만, ‘이’ 오스카를 두고 저렇게 하는 건 역시 자존심이 상한다.
그렇게 중요한, 그가 이르기를 ‘남자의 자존심’에 상처 입은 오스카가 입을 열려던 순간, 어김없이 루카가 고개를 든다. 언제나 시선과 언어를 빼앗는 금과 백의 눈동자. 그의 가슴께나 닿을 머리통이 작다.
“근데 오스카, 왜 숲에 말을 타고 들어왔어? 당신, 키도 크잖아. 얘도 체고가 낮은 말이 아닌 것 같은데. 나뭇가지에 부딪히면 아플걸? 당신 기준으로는, 꼴사납기도 할 테고. 원래 말은 숲에 타고 들어오지 않는 걸로 아는데, 내가 잘못 아는 건가?”
“그건…… 루카, 너를 만나기 위함이라면 믿을 건가?”
“또 헛소리. 내가 여기 있는 걸 어떻게 알고.”
“진짜다. 이 녀석이 갑자기 멈춰서더니 이쪽으로 왔다. 아가씨의 노랫소리에 이끌려서 말이야. 그리고 백마 탄 기사님 행세를 하려던 나도 네 노랫소리에 취해서 이렇게 포로 신세, 라는 결말이다.”
“오스카, 혹시 뭐 잘못 먹었어?”
루카는 의아하다는 얼굴을 숨기지 않은 채, 장난기를 가득 담은 목소리로, 조금 질렸다는 어조를 담아 그에게 묻는다. 하지만 그건 외려 오스카가 묻고 싶었다. 루카야말로, 대관절 무슨 짓을 했기에 이런 일이 일어났나? 본디 수호성은 신비에 익숙한 존재다. 그렇지 않은가? 저 옆의, 어두운 곳에서 하루종일 수정구만 들여다보는 그 수호성의 수정구만 하여도 상식으로 설명할 수 없다. 그러니 오스카는 웬만한 일에는 눈썹 하나 꿈쩍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지만, 지금 이 상황은.
오스카의 말은 성품이 사납지는 않았으나, 그만큼 예민했다. 제 주인과 오래 보아온 사람이 아니면 머리를 얹기는커녕, 제 몸에 손을 대는 것도 기껍게 여기지 않는다. 경계심이 강하고, 타인의 손길을 허락하지 않는다. 물론 오스카는 제 말의 그 귀부인 같은 성품을 더없이 기꺼이 여기나, 객관적으로 보아서 타인에게 소개하려면 주의를 충분히 기울여야 한다. 그는 부주의하게 손을 내밀었던 사람이 물렸던 광경도 보았다. 분명 그랬는데.
“힘들어? 네 주인이 무거웠어? 사실 그래 보이긴 해. 갑옷도 입었고, 키도 크고.”
땅 위에 털퍼덕 주저앉아 흐르는 물로 목을 축인다. 루카는 그 옆에 태평하게 앉아서 등허리를 쓸어내리고, 이내 말의 몸에 반쯤 기대앉는다. 평소라면 질색을 할 녀석은 만족스럽게 푸르릉거리고 그 머리를 바닥에 내려놓고 누울 뿐이다.
“하하, 언니랑 놀래?”
루카는 제 다리 위로 올라오는 머리를 태평하게 쓰다듬고, 주머니를 뒤져 나오는 게 없는지 찾는다. 풀을 뜯어주면 안 되겠지? 주변 풀을 더듬는 손에서 그 머릿속이 훤히 들여다보인다.
“비세테.”
오스카는 이 광경이 어딘지 마음에 들지 않아 제 말의 이름을 불렀으나, 그의 말은 귀를 돌릴 뿐 고개를 돌리진 않는다.
“비세테?”
오스카는 조금 더 단단한 목소리로 불렀으나, 이제는 아예 무시하기로 작정했는지 머리를 통째로 돌려버린다. 아하하하하! 루카의 청아한 웃음소리가 울린다. 무엇이 그리 웃긴지 바닥을 탁탁 쳐대며 웃는 모습은, 아. 오스카는 루카가 저리 웃는 모습은 처음 보았다. 대련할 때, 어려운 기술에 성공하거나 도박에 성공해서 웃는 모습과는 다르다. 그런, 호전적이고 성취감에 들뜬 얼굴이 아니라, 완전히 긴장을 풀고, 그저 이 순간이 즐거워서 어쩔 수 없다는 얼굴로 웃어대는 모습이.
“오스카, 당신 무시당했네!”
오스카는 루카가 웃어대는 얼굴에, 반사적일 정도로 장난스러운, 혹은 분위기를 그에게 끌어올 대사를 몇 마디 떠올렸다. 그렇지 않은가? 그는 언제나 여성과 함께할 때 대화를 주도하는 사람이다. 이렇게 제멋대로 휘둘리는 건 어울리지 않는다. 다만, 그래. 그 말을 하려고 고개를 들었을 때, 루카의 웃는 얼굴이.
오스카는 루카를 제법 보았고,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꽤 파악했다 생각했지만, 맹세컨대 지금 마주하는 루카는 그가 지금껏 알던 사람과 전혀 달랐다. 그에게 언제나 보이던, 호승심을 불태우게 만들던 투명하고 높은 벽이 사라져버린 느낌. 호전적이고, 날카로운 구석이 있으며, 지는 걸 싫어해서 언제나 많은 일에 진심으로 임하던 루카는 없다. 여기 있는 건, 오히려……. 삶의 기쁨에 젖어 세계의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가희와 같지 않은가.
“아아, 완전히 말이야.”
“당신도 차이는 날이 있네.”
“다음에는 반드시 만회할 테니 전략적 후퇴, 라고 해 두지.”
“헤에, 패자敗者가 맨날 하는 대사.”
“이 오스카가? 설마. ‘패자霸者’라고 불러줘.”
오스카는 루카의 저 분위기를, 저 기분을 망치고 싶지 않아서, 그냥 지금은 좀 져주기로 했다. 그는 언제고 주도권과 분위기를 되찾을 수 있으니, 잠시 맞춰주는 것도 풍류지 않던가? 레이디와 보내는 즐거운 데이트에서 주도권을 잡고 상대방을 이기기 위해서 집착하는 건 어설픈 꼬맹이나 보이는 태도다.
“악, 잠시만! 무거워!”
제 애마의 머리가 루카의 머리 위에 올라가자 비명을 질러대며 ‘오스카, 이 말 이름이 뭐였지?!’ 같은 소리를 하는 루카를 보고 있으면, 조금 우습기도 하다.
“비세테다. 아름다운 레이디지.”
“비세테! 내려줘! 나 목 아파!”
“하하, 애정 표현이다. 받아주면 어때?”
“기쁘지만! 목 꺾일 것 같아!”
비세테는 영리한 말이니 정말로 목이 꺾이게 두지 않는다. 그냥, 루카가 마음에 든 모양이지. 저 까다로운 말이 머리를 올리는 장난을 치는 게 어떤 의미인지 루카는 아나? 오스카는 루카가 알지 못하리라 확신하고, 내기를 걸 수도 있었지만, 굳이 알려주지 않기로 한다.
비세테! 하고 다시 소리치는 루카의 목소리는, 어딘가 부들부들한 풀이나 천을 떠올리게 만든다. 언제나 단단하고 높게, 혹은 낮고 강하게 나오던 단어들. 루카는 오스카와 함께하는 순간에도 주도권을 넘기거나, 그의 페이스에 휘둘리는 일을 즐기지 않던 사람이다. 물론 오스카는 루카의 그런 태도도, 긍지 높거나 당당한 모습도 기껍다고 여기고, 그런 면이 마음에 들었기에 이렇게 오래도록 어울리고 있지만, 그래. 저렇게 완전히 경계를 푼 모습을 보면, 어딘지 배덕적인 느낌이 든다. 정정당당하게 함락해야 할 성을 뒷문으로 들어가서 정복의 깃발을 올렸을 때 느끼는 감각.
“오스카, 어떻게 좀 해 줘!”
오스카는 결국 비세테에게 가볍게 손짓해서 머리를 치우고, 그의 말은 불만스러운 소리를 내고, 루카는 말에게 사과한다. 다음에 만나면 각설탕이라도 줄게, 응? 같은 소리. 오스카는 그 단어의 어절과 어절이 모두 애정으로, 혹은 호의로 가득 차 있음을 안다. 그는, 어쩌면, 보아서는 안 되는 곳을 엿보고 있을지도 모른다. 루카가 언제나, 그 태도로 가리고 있던, 감정이나 속내. 그를 향해서 쏟아지는, 오스카가 루카와 조금 더 친해지면 알게 되었을 호의나 감정을, 이렇게 애마의 도움을 받아서 조금 비겁하게―
루카가 제 기분을 이기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릴 때, 오스카는 어딘가 끓어오르는 충동을 닮은 감각으로, 저 치도 사람이라고 실감한다. 동시에, 그렇게 웃음을 터뜨리는 맑은 얼굴과, 그 어깨를 향해 날아와 앉는 새를 보며, 사람이기는커녕 실제로 존재하는지도 의문스럽다고 생각한다. 지금 루카가 입을 열어, 사실 나는 요정이었다고 말한들, 오스카는 놀라지 않고 사실로 받아들일 것이다. 새가 앉아도 익숙하게 손에 앉히고, 휘둘러 날려 보내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세상 그 누구라도 그리 믿으리라.
루카는 꽤 편한 자세를 취하고 오스카에게 이것저것 말을 걸어온다. 그래봤자 대단한 질문은 아니다. 어째서 여기 왔냐느니 ―사실대로 말했지만 루카는 오스카가 적당한 말을 하여 넘기려고 한다고 생각했다.― 지금 휴일이냐느니, 원래 말을 자주 타냐느니 하는 것. 원래도 경계라곤 찾아볼 수 없는 얼굴을 하던 루카는, 그와 대답하다가 마음이 편해졌는지, 결국은 그의 다리 위로 제 다리를 올려놓기까지 했다. 방만한 자세로 비세테에게 등을 기대고 있으니, 아마도 의식하고 한 일은 아니리라. 오스카는 본디 저를 이토록 경계하지 않는 모습을 보면 골려주고 싶어 하는 족속이었지만, 지금은, 그래. 여러 번 말하지만 ‘그럴 기분조차 들지 않는다.’
일요일의 날씨 좋은 오후, 시냇물이 졸졸 흐르는 소리를 내는 숲. 이따금 새가 날아오고 말이 푸르릉거리는 맑은 날. 아주 쓰잘데기없는 잡담을 늘어놓으며 무엇도 하지 않고 시간을 죽여버리는 일. 오스카는 남녀 간에는 언제나 아찔한 밀고 당기기나, 색사를 암시하는 사랑의 장난 따위가 어울린다고 생각하는 인재이며, 낯 모르는 여성에게 구애하는 것을 취미로 삼은 카사노바이다. 그는 제 여성 편력을 부끄럽게 여긴 적 없다. 그는 언제나 모든 사람에게 진심이고, 그들에게 소홀히 대한 적도, 가볍게 대한 적도 없다. 공사를 확실하게 구별하여 사는 그에게 사적인 취미는 치부가 될 수 없다.
허나 오스카는, 이렇게 루카와 긴장감이라고는 전혀 없는, 오히려 평소의 그라면 여자에게 얼마나 관심이 없으면 그러고 시간을 보내나 무시할 정도의 심심한 시간을, 즐겁다고 여긴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이런’ 식으로만 만나도 괜찮겠다고 생각했다. 분명, 상대가 루카라면, 그는 원래 즐기던 방식으로 루카를 대하지 않아도 즐거우리라 여겼다.
“어이, 이 ‘화염의 오스카’ 님의 우선순위가 말 보다 밀린다니, 농이 심하지 않나?”
“하지만 오스카, 비세테보다 작잖아? 난 큰 동물이 좋아.”
깔깔대는 루카를 따라 진심으로 웃을 뻔한 오스카는, 등골을 싸하게 타고 흐르는 얼음과 같은 감각으로, 무언가 직감한다. 낭패다. 어쩌면, 오스카는, 루카와 함께하며 지는 날이 더 많을지도 모른다는 감각.
물론 그는 사랑에 도가 튼 사람이다. 이러한 관계를 즐기는 법도, 모르지 않는다. 애초에 이런 사람도, 이런 상황도, 처음이라고 하기엔 너무 많이 겪지 않았나? 긴장을 풀어주기 위해서 말을 데리고 나온 적도, 동물을 좋아하는 여자를 꾀기 위해서 비세테와 함께 달린 적도 여러 번 있다. 그런데도, 그런데도.
오스카는 제가 루카에게 완전히 져버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우스운 일이 아닌가? 오스카에게 루카는 ‘그런’ 상대일 수 없었다. 루카는 처음에는 소년이나 아직 성인이 아니라고 착각할 정도였고, 그 이후로도 오스카와 ‘그런’ 식으로 논 적 없다. 말이 잘 통하는 상대로 여길 수는 있었지만. 애초에 루바의 여자라는 소문을 듣고 한번 말이나 걸어보려고 한 게 아니었던가? 책과 낚시에만 관심 있는 샌님 같은 루바를 꼬셔낸 여자라니, 어떤 사람일지 궁금해서―
그래. 루바에게는 아까운 여자라고 생각했다.
오스카는 제가 한동안 밖에 나가지 못해서 굶주렸나? 자문했으나 아니었다. 설마 그가 그 정도로 이성을 잃는 얼간이였다면, 그는 여기서 수호성의 직위를 반납하고 고향에 돌아가야지. 게다가 루카는 오스카에게 ‘그런’ 관심을 두지 않는다. 지금도 보아라. 그에게 옆얼굴을 드러내고, 비세테에게 말을 거는데 집중한다. 대답을 돌려주지 않는 말과 대화하고 있다. 그 옆얼굴. 턱과 뺨, 그 위로 희게 비치는 솜털, 금빛 눈. 그늘에서 만나는 일이 잦아 검다고 생각했던 머리카락이, 햇볕에 닿아서 갈색으로 투명하게 빛나는 모습. 붉은빛이 도는 짙은 갈색. 끊임없이 조잘대는 목소리는 다정하고 부드럽지만, 귓가에 틀어박혀 떠나지 않는다. 모양 좋은 입술은 자그마한데, 그 사이로 때때로 엿보이는 흰 이빨. 그에게는 돌아오지 않는 시선, 얼굴, 어조와 언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오스카는 불만과 어딘지 비어서 차오르지 않는 부분이 있는 감각 속에서, 조금은 짜증스럽게 몸을 숙여 손을 뻗고―
루카가 고개를 돌린다. 눈이 마주친다. 시선이 맞닿았다는 사실에 놀란 듯 크고 동그랗게 뜨이는 눈. 색이 다른 눈동자. 이윽고, 즐겁게, 더없이 밝고 해사하게, 맑게 떠오르는 웃음. 못 말리겠다는 얼굴인지, 간지러운지 판단할 수 없는 저 웃음이.
아, 오스카는 제가 첫사랑에 빠진 얼치기 소년으로 돌아간 것 같다.
“오스카, 표정이 왜 그래? 질투하는 사람 같아.”
루카는 큭큭 소리 내어 웃더니, ‘비세테가 다른 사람에게 친근하게 구니까 섭섭해?’ 하고 물었다. 그 어조에선 짙은 친근감과, 어딘가 장난스러운 기색이 묻어난다. 오스카 네가 말에게, 나아가서 사소한 것들에 얼마나 정성을 기울이는지 안다는 어조였다. 네가 어떤 말을 해도, 그가 과장하고, 비틀고, 가끔은 비아냥대는 언어로 표현하는 그 너머의 감정을 나는 알고 있다는 듯이. 오스카는 침묵했다. 저 얼굴, 저 얼굴 앞에서 어떻게 말하란 말인가?
질투, 그래. 그는 질투했다. 다만 그 앞에서 죽어도 밝힐 수 없는 것은, 루카가 아니라 그의 애마를 질투했다. 네가 다정하게 웃고, 긴장을 풀고 닿으며, 비밀이야기라도 하는 모양으로 소곤거리는 모습을 부러워했다. 이를 고해하라고? 그건 입이 찢어져도 못 할 짓이다. 루카가 저리 구는 이유가, 오스카의 말이라서 그렇다는 사실을 아는데. 오스카를 친근하게 여기고 귀중히 대하기에, 그의 애마에게도 정성과 애정을 다함을 아는 이 와중에? 오스카는 짧게 침묵했고, 이러한 침묵이 바꾸어 버린 분위기를 느꼈다. 그는 진실을 고할 수 없고, 또한 루카가 본 것이 진실이라 알려줄 수도 없다. 그러니 그가 가장 잘하는 일을 하기로 마음먹는다.
당당하게 굴고, 조금 강제적인 수단을 취해서라도 상황의 흐름을 그에게 되돌리고 주도권을 잡는 일. 얼빠진 얼굴을 내보이느니 분위기를 바꾸어 버리는 일! 그는 당당한, 어딘가 오만하게 느껴지는 웃음을 짓는다. 그 웃음이 어떻게 보이는지 그가 제일 잘 안다. 그러니, 오스카는 제가 어떤 말과 어떤 행동을 해야 하는지 안다.
“호오? 루카, 이 나를, 불꽃의 오스카를 놀릴 셈인가?”
그의 말과 함께 간지러운 분위기가, 조용하고 다정한 순간은 종막을 고한다.
“그건 용기 있는 일이지만― 마음에 들진 않는군.”
“잠시만, 오스카?”
그는 일어나, 비세테의 고삐를 당겨 일으켜 세우고 ―이제서야 그의 말을 듣는 비세테에게 아쉽지 않았다면 거짓이다. 하지만 이 순간에도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면 더 실망했을 테니 그는 이 점은 너그러이 불문에 부치기로 마음먹는다.― 과장되고 화려한 동작으로 올라탄다. 말에 기대고 있던 루카는 중심도, 위치도 잡지 못한 채 방황한다. 오스카는 바로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루카를 잡아채, 그의 안장 앞에 앉혀버린다.
“오스카!!!”
딱딱하게 굳은 몸과, 비명처럼 터졌으나 크기가 크지 않은 목소리. 당황이 선명하게 드러나는 모든 징후 속에서 오스카는 이제야 상황이 ‘제대로’ 흐른다는 자신감과 만족감에 웃는다.
“승마는 처음인가, 아가씨?”
“당연하잖아?! 아까 당신 말을 보고 보인 반응을 보면 알잖아?! 말에 익숙해 보였어 내가? 모를 인간도 아니면서 왜 이러는 건데!!”
“아가씨가 아무래도 이 녀석을 상당히 마음에 들어 하는 모양이라.”
그는 루카를 품 안쪽으로 당기며, 고삐를 단단히 틀어쥔다.
“자, 꽉 잡아라. 이랴!”
“오스카!!”
물론 완전히 초보자를 태우고 처음부터 달릴 일은 없다. 비세테는 그의 의중을 알아채고 천천히 걷기 시작할 따름이다. 물론 불만스러운 모양인지 고개를 돌려 그의 발을 툭 치긴 했으나, 루카를 태운 게 불만인지 루카를 당황 시킨 게 불만인지는 모를 일이다. 오스카는 자신감 넘치는 수호성답게, 전자로 해석하기로 마음먹는다.
움직이는 말 위는 제법 불안한 장소다. 흔들리는 건 둘째치고, 위아래로 흔들리는 게 아니니 중심을 잡기도 힘들다. 더군다나 제대로 등자에 발을 넣지도 않은 루카가 기댈 곳은, 결국 오스카밖에 없다. 루카는 흔들리는 말 위에서 잠시 긴장하더니, 단단하게 굳은 몸을 의식적으로 풀어내기 시작한다. 체중을 뒤로 실으며, 오스카의 품속으로 몸을 밀어붙여 고정한다. 오스카는 품을 가득 채우지도 못하는 작은 몸이 가깝게 붙는 것이 기꺼워 목을 울려 웃는다.
“제대로 잡아, 나 여기서 떨어지면 죽어. 안 죽어도 뼈는 한두 개 부러지겠지. 그러면 진짜로 당신을 칠 거야. 검 가져다 달라고 해서 검집 안 빼고 칠 거라구.”
“그러면 너를 떨어지지 않도록 더 확실하게 붙잡지 않으면 안 되겠군.”
“당신, 너무 능숙한 거 아냐?”
허리를 당겨 안으면 루카는 툴툴거리지만, 그의 팔을 붙잡는다. 조금 경직된 몸에서는 긴장의 기색이 선명하다. 그의 팔뚝을 다 감싸지도 못하는 손으로 최대한 힘을 주어 잡는 그 감각. 루카에겐 안 된 일이지만, 오스카는 이 상황이 더없이 기꺼웠다. 평소엔 손가락 끝이 닿을 일도 잘 없는 사람이다. 그런 루카가 지금은 그의 품속에 안겨, 그의 팔을 잡고 의지한다. 남자라면 언제고 이런 상황을 기껍게 여기리라. 그는 이 상황을 즐거워할 수호성의 이름을 댈 수도 있다.
허나 오스카는 소리 내어 웃는 제 목소리를 들으며, 기이할 정도로 제가 들떴다는 사실도 자각했다. 이런 일이 한두 번 있던 것도 아닌데, 그는 어째서 이토록 기뻐하고 있지? 오스카는 마치 정신 빠진 얼간이처럼 기분이 좋아, 되지도 않는 농담과 장난을 잔뜩 늘어놓으며 루카가 성실하게 대답하고, 태클을 거는 순간을 즐겼다. 그와 대화하며 루카가 긴장을 풀고, 굳어있던 몸이 풀리고 늘어져 그에게 무게를 실어서, 이윽고 완전히 기대는 감각을 즐겼다. 모든 순간이 선명하고 찬란해서, 정말로 첫사랑에 빠진 얼간이 시절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어때, 마음에 드나?”
“여기서 그렇다고 대답하면 자존심이 상하는데, 엄청. 나, 말 타보고 싶었거든.”
“그럼 영광이군. 여성의 바람을 이루어주는 일이야말로 이 오스카의 기쁨이지.”
“그 바람둥이 같은 말만 아니면 조금 더 점수를 주겠는데 말이야.”
오스카는 그 다정하고, 조금 간질거리는 비단과 같던 순간을 찢어냈다는 아쉬움, 그 순간에 언제까지고 머무르고 싶었다는 가벼운 후회를 금세 털어냈다. 루카는 평소와 같은, 하지만 조금 더 친근해진 어조로 그에게 몸을 밀어 붙였고, 기대에 차서 그를 흘끔거렸다.
“오스카, 이왕 이렇게 된 거, 걷는 데 적응했으니까, 달려보자. 당신이 안 떨어지게 잡아 줄 거잖아? 응?”
짐짓 뻔뻔하게 구는 어조 속에서 선명하게 드러나는 신뢰, 기대나 호기심, 그리고 오스카를 향해 쏟아지는 그 찬란한, 호의.
그는 보물찾기에 성공한 어린아이같이 기뻐져서, 소리 내어 웃었다.
“좋아, 꽉 잡아라.”
“여기서 더 꽉 잡을 수는 없거든, 오스카!”
“하하, 내 마음도 그렇게 꽉 쥐어 놓고, 엄살이 심하네, 아가씨!”
“당신 또 이럴 때 그런 소리를!”
오스카는 웃음 섞인 말로 투닥이면서도 능숙하게 자세를 바꾼다. 조금 더 안정적인 자세, 루카를 조금 더 들어 올려 고정할 수 있는 위치. 망아지 적부터 함께한 비세테는 자세를 조금 바꾸는 걸로도 그의 의지를 제 것처럼 읽어낸다. 서서히 말이 땅을 딛는 방식이 바뀐다. 느리게, 처음에는 느리게 올라가는 속도는 가속도를 받아 점점 빠르게, 빠르게! 바람이 뺨을 스치고, 거친 고동이 말의 흔들림과 겹치며, 사위가 스치는 선과 같이 변하고 흔들린다. 깊이 들이쉬는 호흡, 힘을 주어 고정하는 몸, 빠르게 뛰는 심장! 오스카는 주변의 모든 것이 그 색과 형을 잃고 스쳐 지나가는 풍경으로 전락하는 순간을, 저 머나먼 곳의 한 점을 향해 달려 나가는 이 순간을 즐기고, 진심으로 아낀다.
“우와악!!”
품속의 루카는 거친 흔들림 속에서 비명을 닮은 소리를 내더니, 이내 그 흔들림 속에서 적응하려는 듯 그의 팔에 매달려 그의 가슴으로 몸을 밀어붙이기 시작한다. 다시 단단하게 굳은 몸은 긴장의 상징이지만, 속도를 줄이라는 말은 하지 않는다. 비세테는 달린다. 한 줄기 바람이 될 기세로, 그 이름과 같이 달린다. 서서히 빨리지는 속도가 한 지점에 도달해서 고정되고, 흔들림이 일정해졌을 때, 루카는 오스카의 팔을 꽉 쥐어 잡고 웃음을 터뜨렸다. 방울 소리 같은, 저 창공을 울리는 웃음. 뺨을 스치는 바람보다 경쾌하고 시원하게, 투명하고 청명하게 울리는 웃음. 품속의 루카는 마치 감정 그 자체로 바뀐 듯, 즐거워서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 웃는다.
“우와, 빨라!”
탄성을 내지르는 목소리는 순수한 환희로 가득 차서, 오스카는 이를 악물었다. 아쉽다. 지금이라도 루카의 얼굴을 들고, 그 표정을 보고 싶다. 어떤 표정으로, 얼마나 즐거워하고 있을까. 그가 선사한 이 순간을, 그에게 온전히 몸을 내맡기고, 이토록 환희에 가득 차서 짓는 표정은 어떨까. 오스카는 당장이라도 턱을 들어 루카의 웃음과 표정을 낱낱이 뜯어볼 수 없음에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 정도로 주먹을 쥐며, 고삐를 단단히 틀어쥐었다. 지금이라도, 말을 멈추고.
“오스카, 당신 정말 대단하구나!!”
아. 오스카는 패배를 직감한다. 루카가 즐거이 웃으며 그를 올려다볼 때, 그 얼굴을 흘긋 내려다보며, 지금 그가 처절하게 패배했음을 받아들인다. 그는 이대로 루카와 비세테의 등에 올라 어디까지나, 달려갈 수 있을 것 같다. 정말, 이대로, 어디까지나.
세상 끝까지 달려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름다운 글이에요 모르는 장르임에도 빠져들듯 세계관의 공기를 읽어냅니다.
어색함없이 막힘없이 흐르는 글속에서 그 공간에 있는 제3자가 된 듯 빳빳하게 푸른 숲길과 가까이 있는 물 내음, 수면을 비추며 흩어지는 파문에서 빛과 시간을 읽어요
사랑에 빠지는 예고를 이렇게 근사한 우연처럼 풀어갈 수 있을까요. 운명을 예감한 독자임에도 남자가 인정까지 다다르는 동안 로맨틱한 기분에 설레었습니다. 신비롭고 사랑스러운 여성이 가져오는 비현실적인 편안함은 사실 오스카가 아니어도 누구라도, 그게 설사 루카와 동성이어도 이 순간 사랑에 빠지지 않는 건 불가능한 일이겠죠
그러니 제가 사랑에 빠지는 것도 당연한 순리일 것입니다.
정체된 긴 시간의 아름다운 편린을 훔쳐본 기분입니다.
글을 읽는 동안 정말 멋진 순간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