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은 추락하지 않는다. 그들은 아주 먼 곳에서 부동하는 존재이니, 오직 방황하는 것들이 추락한다. 공허를, 어둠을 유영하다 빛과 색에 홀려 추락하는 것들이 불타오른다. 아름다움에 홀려, 중력에 이끌려 낙하하는 자들. 그를 거부하는 세계를 이기지 못한 채 타오르며, 별이 된다. 그러면 사랑도 유성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모두를 포기하고, 미래를 잃고, 생존마저 불투명해진 이후에야. 별 아닌 것이 별로 빛나게 되는 걸까?
볕이 아름다운 날이 있다. 일어나야 할 시간을 놓쳤을 때, 해야만 하는 일을 잊었을 때, 무언가 잘못되었을 때. 이상하게도 볕은 아름답다. 기이한 일이다. 평소의 일상 속에서는 느껴지지 않는 아름다움이 급박함 앞에서 눈을 가득 채우는 건. 그래서 죽어가는 사람들은 모두 세상이 아름답다 소리치는 걸까? 세상이 너무나 아름답다는 사실은 죽기 직전에야 깨달을 수 있기에, 우리는 죽음이 다가와야 살고 싶다고 그토록 간절하게 비는 걸까?
그 자체로 대답이 되는 질문을 두서없이 던져대는 건 오랜 버릇이다. 세상만사를 의문으로 여기는 것도 오래된 버릇이다. 기억하는 가장 과거부터 그런 아이였으니, 나는 아마 태어나길 그리 태어났던 모양이다. 아. 하지만.
세상 사람들은 이런 세계를 어찌 아무렇지 않게 살아가는가?
평생, 여생 동안 생각하지 않을 의문은 생각의 끄트머리에 달려 자연스럽게 끌려 나온다. 타인을 궁금해한 적 없음에도 이리 생각하게 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답을 알고 싶어 질문하지 않으니, 이 사유는 모두 시간 보내기에 불과하다. 알고 있음에도 왜 나는 이토록―. 아. 흐트러진 감정이 가라앉지 않는다. 머리와 심장을 어지럽히는 소음, 소란. 이토록 고요하여 멸망인가 의심스러울 정도로 정적인 난장판. 귀로 들려오는 소리는 없다. 오감의 전부를 백색으로 덧칠해도, 이 괴로움은 가시지 않는다. 무얼, 도대체, 어찌해야…….
눈을 깜빡였다.
‘내’ 방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기엔 조금 시간이 걸렸다. 지독히도 떨어지는 현실감은 이 방이 익숙지 않던 탓도 있는 모양이다. 여기서 지낸 지, 얼마나 지났더라. 잠기운이 가시질 않는다. 머리가 멍해. 한 번 떨어진 사고 속도는 돌아올 기미가 없다. 기억이 온전하지 못함은 이미 익숙해져 별다른 감흥이 들진 않는다마는, 직전에 하고자 했던 일을 떠올리지 못함은 조금 치명적이다. 무얼, 하려고 했더라. 뻑뻑하게 돌아가는 기계장치와 같은 사고를 재촉한다. 무엇을, 아. 여긴 내가 사는 ‘우주’가 아니었지. 느릿하게 떠오른 사실이 현재의 위화감을 설명한다. 아무래도, 나는, 제정신을 차릴 수 없는 곳에서 눈을 뜬 모양이야.
여기는 ‘비공도시.’ 오직 시험을 치르기 위한 장소다.
언젠가 이곳의 그림을 보았던 순간을 기억한다. 우주에 땅덩이 하나 덩그러니 떠 있는 모습이 얼마나 이질적이었던가. 내게 그 그림을 보여준 사람이 그 모습을 당연하게 여겼기에 이질감은 두드러졌다. 아. 나와 정말로 다른 사람, 다른 세계. 어설프게 웃어넘겼던 순간의 위기감을 기억한다. 솔직하게 말해서, ‘여왕’이니 ‘여왕 시험’이니 하는 건 잘 모른다. 존재하지 않는 개념을 떠올리고 이해하는 일은 품이 들고, 애초에 그 정도 품을 들일 정도로 관심이 있지 않았으니. 그러게. 나 엄청 무심하구나.
시선을 돌렸다. 긴 생각을 하고 싶지 않아. 푸른 하늘이 네모나게 비쳐오는 창문 너머. 투명하게 뚫려 우주의 별이 들여다보이는 저토록 멸망에 가까운 투명한 하늘을 바라보며, 지독한 부유감이 다시 감각을 뒤집어 놓음을 자각한다. 계절이 존재하지 않으며, 따라서 시간의 흐름도 존재하지 않는 이상적인 공간. 이를 모방한 시험장. 흐린 날을 본 적 없는 이 도시의, 이름만 아는 사람의 침실을 빌리고 있는 현실. 안일함. 미래를 생각하지 않는 멍청함. 온도 없는 볕은 창 너머에서 밀물처럼 쏟아진다. 그 부드러운 빛 아래서, 그늘과 빛의 경계가 명확하게 그어질 때, 세상은 이미 끝나버린 무언가로 느껴진다. 시간도, 공간도, 내일도, 미래도, 현재도, 어제도, 모두 섞여서, 나는 그저 끝나버린 무대의 조금 남은 자투리를 살아있을 뿐이라고.
나는 진실로 살아있던가?
강하고 선명한 볕이 온도를 잃을 때, 기묘한 부유감은 불현듯 찾아들어 저주처럼 이어진다. 나이를 먹어도 떠나가지 않는 고질병과 같은 감각. 꿈에서, 현실에서, 몸이 좋지 않은 날, 머리가 아픈 날, 잠을 제대로 잘 수 없었던 날, 제대로 깨어나지 못한 날. 세상 모든 것이 제 모습을 잃는 순간이면 발작처럼 찾아와 현실감을 지우고 중력을 빼앗아 나를 세상에서 박리하고, 감각을 죽인다. 나는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잊고 오직 ‘내’ 안에 갇힌 채, 그저. 아, 땅을 딛어도 발이 닿은 느낌이 들지 않는다. 몸을 움직여도 움직임을 확신할 수 없다. 삶을 확신할 수 없을 때, 사람은 존재를 잃는다.
네모난 창, 이를 반쯤 가린 검은 벨벳 커튼 너머로 보이는 푸르른 하늘. 발이 땅에서 뜨고 시선이 허공을 부유할 때, 저토록 선명하게 푸른 하늘을 보면, 문득 생각한다. ‘하늘’은 없다. 우리는 끝없는 허공을, 아주 머나먼 곳을, 별이 빛나고 공허하게 비어있을 우주를, 시선이 닿지 않을 곳의 왜곡된 상을 보며 머리를 가려줄 ‘하늘’을 상상할 뿐이다. 말이 의미를 잃고, 감정이 색을 잃고, 감각이 예기를 잃으면 미아가 된다. 무엇하나 확신할 수 없는 세계에서 ‘나’는 홀로 남는다. 잠에서 깨어 사랑하는 어미와 가족이 모두 떠나 집에 홀로 남았음을 알아챈 어린아이처럼. 타인이 없으면 ‘나’를 규정할 수 없는 무인도의 표류자처럼.
미지는 낭만이다. 무지는 축복이다. 예지는 저주이며, 글쎄. 감지는 생존이 아닐까. 그 모두를 잃은 채 홀로 남은 자는 무엇이 되는가? 아니, 무엇이 되는지 따위 아무래도 좋다. ‘나’는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어떤 모습을 해야 하는지,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모두 기억 너머의 부연 윤곽 속에서 희미하게 흐려지고 말았다. 그러면, 나는 지금, 살아있나? 꿈의 끝과 현실의 시작이 흐려지고, 삶과 죽음의 경계가 흐려져서, 기어코 환상과 현재가 하나로 뒤섞이고 말았다. 손을 들었으나 얼굴을 가린 느낌이 들지 않는다. 열감 섞인 둔통이, 통증 없이 촉각을 빼앗았다. 아프지 않으나 무엇도 느낄 수 없다. 열이 올라 사경을 헤맬 때 흔히 느끼던 그, 부유감. 땅을, 땅을 딛고 있나?
나는 살아있나?
두려움이 엄습한다. 움직여야, 움직여야 한다. 놀라 걷어찬 이불이 튀어 오르는 모습이 느리게 눈 안을 유영한다. 부풀어 오른 천 아래로 공기가 흐르고, 느릿하게 빠져나가며, 그 아래로 아무리 노력해도 시간을 거스를 수 없는 몸이. 아. 사고가 가속한다. 나쁜, 나쁜 버릇은 사라지질 않아서. 달아올라 멍하게 변한 육체에 갇혀, 그저 열감에 달아오른 정신이 가속하며 부정적인 상상을 토해놓는 것을 마주하고 있을 뿐인 이 끔찍한.
기척이.
놀라 고개를 돌린다. 소리 없이 열린 문 너머에서 거대한 천 덩이를 먼저 본다. 어두운 남색의 천이 무겁게 늘어진 모습. 시간 속에서 그대로 잘라내어 박제한 것과 같은 밤. 부드러워 보이는 두꺼운 천을 따라 시선을 확장한다. 목까지 모두 가린 칠흑처럼 검은 이너. 그 위를 장식하는 마름모꼴의 자수정은 거대하다. 들어 올린 왼팔을 휘감은 천 자락, 길게 늘어진 흑단 같은 머리카락. 아. 내려 깐 눈이 나를 바라보고 있음을 뒤늦게 알아차린다. 방, 주인이지. 클라비스. 이름을 떠올려 정보 값을 누덕누덕 기워낸다. 무언가 말을 해야. 무슨 말을? 어떤 말을 해야? 나는, 지금 어떻게 행동하고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하지?
“……루카?”
“클라비스, 님.”
대답은 하여도, 내어놓을 말은 없다. 끔찍한, 끔찍한 감각이다. 아. 몸뚱이째로 허공에 내동댕이치면 이런 기분이 들까. 당신의 침묵과 그, 시선이. 짓눌린다. 존재감에, 아니, 존재에, 아니야. 당신에게 잘 보이고 싶다고 생각하는 내 욕구에 짓눌린다. 짓눌려 뭉개지고야 만다. 도망치고 싶어. 문을 가리고 선 그의 몸에 달려들어 밀쳐내고 달아나고 싶은 욕구, 열린 창문 너머로 사라지고 싶다는 압박감. 발작과 발악을 닮은 감각 속에서 ‘나’는.
“저, 바다에 가고 싶어요.”
문득, 되지도 않는 소리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제 고향은, 바다와 가까워서. 언제나, 바다가 보였던 기억이 있어요. 괴로워요. 바다에, 가고 싶어요. 여긴, 파도치지 않으니까…… 너무나도, 고요해서…….”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무슨 말을 해야 하는데, 도대체 어떤 말을 하고 싶었는지 알 수 없다. 모르겠어. 그냥, 이대로, 이대로. 바로 다음 순간의 욕망을 짐작할 수 없다. 그저 존재할 뿐인 순간, 육체에 묶여서 괴로움을 곱씹으며 시간을 흘려보내는 일 말고는, 무엇도 할 수 없는, 아아. 무어라고 불러야 하지? 목이 메서, 졸려서,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아. 아무리 깊게 들이켜도 얕게 가슴을 맴돌 뿐일 공기. 당장이라도 뛰쳐나가고 싶다. 어딘가로, 어딘가로. 여기 이렇게 있고 싶지 않아. 무엇이라도 쥐어야 할 것 같아서, 칼을 들고 무언가 내리찍고 싶은 충동을 다스릴 수 없어서, 그럴 수는 없으니까. 왼 손목을 쥔다. 손마디가 희게 질릴 때까지 쥐어도, 감각은 둔하기만 하다. 둔탁하게 무뎌진 촉각은 열감과 둔통을 안긴다. 정신이 돌아오지 않아. 목이 졸리는 기분. 숨을 길게 내뱉어도, 가슴 속에 들어앉은 무언가는 사라지지 않는다. 아무리 숨을 깊게 들이마셔도, 심장 저 아래에 있을 무언가에 공기가 가닿지 않는다. 숨이 막힌다. 숨이 쉬어지지 않아. 숨이.
“클라비스님…….”
나는 무엇을 해야 할지도 몰라서 당신의 이름을 부를 뿐이다. 그저 당신이 보이니까. 당신이 무엇을 해주리라 생각하지 못하고, 무엇을 해달라 바라지도 못한 채, 방향을 잃는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내가 여기서 왜 이러고 있는지 떠올리지도 못한다. 숨을 몰아쉬어 생을 유지하기도 벅차서, 내가 살아있다고 확신할 수도 없어서, 당신의 얼굴조차 보지 못한 채. 그저 수치심을 떠올린다. 수치스럽다. 당장이라도 사라지고 싶다. 왜 이러지? 말을 삼키지 못한 채 토해내며, 발악하고, 이토록 나약한 모습을 온 사방에 전시할 이유가 어디 있던가? 고개를 숙인다. 희게 질린 손과, 손목의 둔통에 집중한다. 이를 악문다. 버티면, 버티면 지나갈 순간이다. 몇 번이고 겪어오지 않았던가. 그냥, 스트레스를 받아서. 그래서 이런 거야. 몸을 옹송그리고, 둥글게 말아서, 그냥, 숨을 쉬면서. 끔찍하게도 흐르지 않는 시간을 버틴다. 시간은 너무나 길게 늘어나서, 몇 분이나 지난 것 같아도 몇 초가 흘렀을 뿐이다.
“그, 죄송, 한데. 잠깐…… 아니, 아니에요.”
언제까지 고개를 숙이고 있을 수 없다. 사람을 앞에 두고 머리를 박고 있는 건 무례다. 언제 가라앉을지 모르는 감각 속에서 당신에게 기다려달라 말할 수 없다. 애초에 당신에겐 그럴 이유도 의무도 없지 않던가. 평정을, 평정을 가장한다. 타인 앞에서 무너질 수 없다. 여긴, 마음을 놓아도 되는 곳이 아니다. 고개를 든다. 언제 터져 나와도 이상하지 않은 감정을 내리누른다. 표정이 일그러지지 않도록 관리하는 게 최선이다.
“실례했습니다. 그, 제가 나갈―”
아, 힘겹게 고개를 들어 올려 당신의 표정을 마주하는 순간, 나는 이유도 모르고 울음을 터뜨린다. 당신이 무엇을 생각하고, 무슨 감정을 품었고, 날 어떻게 보고 있을지도 모르는데. 그 얼굴을 마주하는 순간 눈물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급하게 눈물을 닦아내도 멈추지 않는다. 왜, 왜 이러지. 끔찍할 정도로 강하게 밀려오는 당혹 속에서 당신의 옷자락이 스치는 소리가 가까워진다. 반사적으로 내뱉는 사과와, 어서 감정을 수습해야 한다는 조급함. 머리가 엉망진창이다. 열이 오른 몸은 가라앉지 않는다. 혈관을 타고 도는 것 같은 끔찍한 열감이 사라지지 않는다. 죽음과 같은, 오직 죽음과 같은 열기가.
“성지의 시간은 특수한 방식으로 흐르고 있다지만, 이따금 멈춰버린 것이 아닌가 생각할 때가 있다. 시간의 흐름마저 나를 놓아두고 떠난 게 아닌지 생각하게 되는 순간이.”
“…….”
“너는, 그것을 파도치지 않는 호수로 느끼는 모양이구나.”
당신은 손을 뻗는다. 놀라 몸이 튀어 오르는 것과, 뺨에 당신의 손이 닿는 것은 거의 동시였다. 기이한, 기이한 기분이다. 틈새를 비집고 올라와 무언가를 찢어내듯이 울음이 북받쳐서, 이를 악물어도 흐느낌이 샌다. 잇새로 토해내고야 마는 신음. 흐으, 하고 길게 늘어져서 결국 나를 볼품없게 만들고야 마는 그 순간. 당신의 손을 떼어내려고 잡았던 것 같은데, 당신의 손이 뺨과 귀를 덮고 손아귀에 미처 모두 쥘 수 없었던 손가락의 마디가 내 손바닥을 눌렀을 때, 그저 당신의 손을 부여잡고 울었다. 그냥, 그냥. 이유도 모르고 눈물이 쏟아져서. 뺨에 닿은 당신의 손은 나보다 차갑고, 그래도 따스해서.
심장을 토해내고야 말 것 같았다.
클라비스는 그리 우는 루카를 그저 내려다보았다. 손가락 위로 흘러 뺨을 타고 번지는 눈물을 엄지로 닦아내며, 내장을 게워낼 기세로 흐느끼는 울음에 침통함을 느끼며. 그의 손을 구명줄로 여기는지, 단단하게 붙잡아 쥐는 손은 전에 없이 필사적이다. 그리도 간절하게 그를 부여잡는데, 우습게도 루카의 손에서는 힘이 느껴지지 않는다. 매달리지도 못할 만큼 괴로워하는 건가. 아니, 누군가를 부여잡고 버티는 법도 배우지 못했겠지. 클라비스는 제가 괴로워하는 줄도 모르고 흐느끼는 루카를 끌어당겼다. 옷자락 속으로 사라지고야 마는 몸. 당황하여 그를 짚었다가, 결국 옷깃을 쥐어 잡고 그의 가슴에 머리를 대는 순간. 그는 새삼스럽게, 루카가 아주 작음을 인지한다. 아주, 작아서. 그는 제 침실의 문을 열었을 때 루카가 그대로 빛 속으로 녹아서 사라지는 게 아닌가 두려웠다. 창문 너머에서 쏟아지는 빛은 네 온기와 기척을 모두 지워내는 것 같았고, 빛과 그림자의 경계 속에서 너는 길을 잃은 아이와 같은 눈동자로 모든 표정을 잃어버린 채 앉아있었다. 그저, 괴물에 쫓기는 악몽에 갇힌 아이처럼. 그러니 그는 이름을 부를 뿐이다. 네가 어딘가로 뛰쳐나가리란 사실을 알면서도, 그러지 않기를 바람에도, 네게 가닿을 말을 모르기에.
“루카.”
“괴로워, 괴로워요. 세계는 멈춘 것만 같고, 나는 갇힌 것 같아서. 왜 여기 있는지 모르겠어, 뭘 해야 하는지, 내가 뭔지도 모르겠어요. 난 죽어있나요? 살아있긴 하는가요?”
쏟아지는 말은 두서없어 평소의 루카를 떠올릴 수 없다는 점에서 루카의 동요를 짐작할 수 있었다. 동시에, 그 단어의 연결에서 결국 한 가지 주제가 이어지고 있다는 점은 틀림없이 루카였다. 제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몰라서 쏟아지는 단어, 평소의 능변을 떠올리기 힘든 조잡한 연결. 위로의 말이 하등 쓸모없음을 알아 그저 루카의 등을 쓸어내리던 클라비스는 어느 순간, 루카를 감싼 공기가 일변했음을 알아차린다.
고요, 훌쩍임과 바람 소리, 혼란이 가득 차 있던 방이 그저 고요해졌음을 안다. 그는 무언가 공허해진, 텅 비어버린 공간 속에서 역시 그 속을 채우던 것을 모두 비워낸 루카의 존재를 선명하게 느낀다. 눈물을 그치고 숨을 고르는 몸짓. 조용히 그의 품에서 빠져나와 클라비스를 올려다보는 루카가, 일월의 눈을 빛내며 명확하게 그의 눈을 응시하고, 동공을 좁혀 초점을 맞추었을 때, 그는 분명 심장을 꿰뚫렸다.
“……그런데 당신께서는 왜, 그런 얼굴을 하고 계시나요?”
루카는 여전히 제가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 명확하게 모르기에, 그저 속에서 뒤엉킨 것을 감각과 느낌으로 엮어 제 단어로 바꾸어냈다. 그 조잡하고 어설픈 연결 속에서도, 클라비스는 저 말이 벼려낸 칼날과 같다고 느낀다. 그를 향해서 떨어지는 심판의 날과 같은 것. 본디 불쾌하다 느껴야 할 것을 그러지 못하고 그저 받아들이고 있는 자신.
“당신께서는 마치…… 안심한 것처럼 느껴져요. 왜? 내 어떤 점이 당신을 위로했나요?”
클라비스는 그에게 옮겨붙는 기이한 열감을 희미하게 알아차린다. 공허하기 짝이 없어 무엇도 느낄 수 없는 세계에, 불쾌할 정도로 끈덕진 열기가 그의 피부를 타고 기어오른다. 옷 새로 스며들어 피부의 감각을 망쳐놓는 열기는, 그의 목을 조른다. 기도를 조여 들이쉬는 공기를 데운다. 부유감. 그는 루카의 눈 속에서 부유감을 읽어낸다. 루카가 느끼고 있을 부유감을 읽어낸다. 동조한다. 그는 이 기이한 순간에 사로잡혀, 루카의 눈이 무엇을 보고 있는지 보지 못한다. 그 눈에 비치는 상은 보이지 않는다. 그는 그저, 열감에 사로잡힌 신경이 무뎌지고 부유감이 발아래를 무너뜨리는 감각이 그를 집어삼키는 동안 무력하게, 그저 무력하게…….
“당신께서는 유성을, 별이라고 생각하시나요?”
루카의 말을 듣는다.
“별똥별은, 대기권에 진입한 물체가 연소하며 내는 빛이라고 해요. 유성도, 별똥별도. 그들은 스스로 빛을 낼 수 없으니 그저 허공을 유영하며 궤도를, 혹은 종착지를 찾아 움직일 뿐이라고. 그들을 거부하는 것, 멈춰 세우고자 하는 것을 마주하여 타오르지 않는 이상, 그것은 그저 돌에 불과해요.”
아니, 얼음덩어리던가. 작게 덧붙이는 말이 루카를 루카로 만든다. 그의 앞에서 내보이던 동요가 꿈이었던가 의심할 정도로, 색 없는 목소리. 울음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는 붉은 눈가와 젖은 눈. 그 뒤로 비쳐 보이는 것은 그저, 여기 존재하는 루카. 그는 루카를, 그저 그로 바라보면서, 세상에 저희만 남은 감각에 전율한다. 아니, 전율이라고 부를 수 없다. 그에게는 그렇게 강렬한 감정을 느낄 수 있는 기력이 없다. 그가 거부해 왔을 터이다. 그러니 그가 아는 것은, 그의 앞에 존재하는 루카가 무엇보다 강렬하게 그를 장악했다는 사실 하나. 오직 그 감각이 어둠을 가득 채운다. 그의 속에 달라붙어 떠나지 않던, 헤매고 헤매다 결국 움직이기를 포기하게 했던 어둠을, 루카의 존재가 가득 채워서 그는 마치 제가 채워진 듯한 느낌에―
“당신께 나는 별로 보였던가요?”
“……언제라도, 루카, 너는…… 별과 같았다.”
복종한다.
“나는 유성일 수밖에 없음에도?”
“그렇다고 하더라도…… 너는…… 언제나 빛나고 있었어.”
클라비스는 루카가 하고자 하는 말을 이해한다. 이해하기에 언어로 바꾸어 낼 수 없는 감각이 있다. 단 한 순간 존재하며 서로의 바닥에 가닿았기에, 감각으로 전해져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교류. 그는 루카가 말을 떠올리고, 지워내고, 삼키며 무언가를 골라내는 과정을 지켜본다. 루카의 속에서 휘몰아치는 혼란과, 혼돈과, 그에게 전염될 정도로 강렬한 부유감이 작은 머릿속을 휘젓는 모습을 본다. 동시에, 루카의 존재가 너무나 거대하다고 생각한다. 작고, 손에 쥘 수 있을 것 같은 루카는, 그 속에 거대한 것을 담고 있다. 광활하여 채울 수 없고, 동시에 그가 이해할 수 있는 무언가. 하나의 세계와 같이 퍼져나가며, 한 사람을 충분히 망가뜨릴 수 있는 것. 루카의 일부이고, 루카이며, 루카였으나 루카가 아닌 것. 루카의 속에서 피어나 사라지는 단어들이 점멸하는 머나먼 우주의 별과 같이 반짝일 때, 클라비스는 침묵한다. 침묵으로 상대방을 인정하고, 이해하며, 그러한 말이 모두 의미와 뜻을 잃는 교류의 순간에 집중한다.
“당신은, 이상해요.”
서툴기 짝이 없는 단어는 거부하기 위함이 아님을 안다. 루카는 화려한 단어를 찾고, 걸러내고, 고른 끝에, 결국 가장 볼품없어 미숙하게 느껴지는 진심을 택했다. 클라비스는 이를 알기에 루카의 말을 조용히 듣는다. 높지도, 낮지도 않은 목소리. 조금 느리고, 어딘지 헐떡이는 느낌을 주는 말. 조급함보다는, 물속에서 건져 올린 사람의 호흡과 같은 속도. 아, 클라비스는 들어본 적 없는, 그가 기억하지 못하는 저 너머에서 들었을지도 모르는, 어쩌면 루카가 몇 번이고 반복하여 들려주었기에 그의 기억으로 옮아버렸을지도 모르는, 파도 소리를 듣는다. 루카의 고른 호흡과 느릿한 말투 너머에서 들리는 헐떡임은, 분명 파도 소리와 함께한다. 밀려와서 돌아가는 것. 거대한 대양의 일부이며 반복인 것. 저 스스로 이기지 못하고 부서져 내리며 메밀꽃처럼 피지만, 다시 몸을 빼고 다음을 준비하는 것. 루카의 말을 이해한다. 그의 시야를 공유한다. 그는, 루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이제와서 안다. 그래, 성지는 파도치지 않는다.
“이상, 해요. 정말로.”
말이 부스러진 뒤에 남는 것은 그저 아이와 같은 투정. 투정이라 부를 수 있는 단어 뒤에 숨겨진 세계. 성지엔 파도가 치지 않는다. 호수밖에 없는 성지와 비공도시는 단물이 가득하여, 소금기 있는 바람에 익숙한 이를 불안하게 만든다. 현실감을 떨어뜨리고, 몸을 받치는 것이 맞는지 의심하도록 종용한다. 바람은 아무리 강하게 불어도 부드럽기만 하여 밀려나는 느낌이 든다. 온난한 기후, 평화로운 풍경, 피고는 지지 않는 꽃, 언제나 아름다운 이상적인 곳에서 사람들은 언제나 행복해 보인다. 파도치지 않는다.
“나는 별이 아니에요. 별로 빛나지 않아요. 그러는 순간이 온다면, 분명 나는 추락하고 있을 뿐이에요. 추락하며, 돌 쪼가리로 살며 영원히 공허를 얼음덩어리 마음으로 방황하느니, 화려하게 빛나며 누군가의 희망이 되리라고, 스스로 반짝이리라고 맹세한 순간뿐이에요. 분명, 그러할진대.”
“…….”
“당신의 눈 속에서, 나는 빛나요. 이상해요. 당신은, 이상한 사람이에요.”
“피차일반이로군.”
“예에, 네, 그러네요…… 나도, 당신도, 피장파장이에요.”
머나먼 곳에서 부동하는 별은, 행성이 움직이는 탓에, 마치 움직이는 듯 보일 때가 있다. 행성 위에 올라타 움직임에 휩쓸리는 그에게, 루카는 별똥별로 보이곤 한다. 하지만 이는 그가 휩쓸림에 저항하지 않는 탓이지, 루카가 움직이는 탓이 아니다. 다만 이 자그마한 빛은, 제가 어떤지 보는 법을 모르고 스스로 별인 줄 모르기에, 제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움직이고 있으니 제가 움직인다고 생각한다. 제가 그저 파멸하고 낙하하며 타오른다 생각한다. 타인은 언제나 저보다 나은 존재라고 생각한다. 우스운 일이다. 무엇보다 반짝이며, 타인을 제게 끌어당기는 루카인데. 낙하하고 있는 것은 루카가 아니다. 아마, 루카의 눈에 부동하는 것으로 보이는 모두가, 그를 향해서, 혹은 그에게서 멀어지며 움직이고 있을 것이다. 루카가 그 모든 변화의 중심에 있다. 스스로 부동하며, 타인이 움직일 수 있도록 만든다. 루카는 언제나, 한 성계를 거느리는 별과 같은 존재니까.
클라비스는 완전히 땅에 발을 붙이고 서서, 쑥스러움에 작게 웃는 루카를 본다. 꿈질거리는 모양새는 그에게 한 말을 후회하거나, 동요를 보였음에 수치스러워하거나, 이러한 분위기에 익숙하지 않은 탓이다. 어울리지 않는다 생각하는 것은 클라비스도 같다. 그에게 이런 역할은, 역시 어울리지 않는다. 가당치도 않은 짓을 하고 있다는 자각은 있으나, 이는 결국 그가 루카에게 무언가 하고 싶은 탓이다. 울고 있다면 손을 내뻗고, 혼란스럽다면 손을 잡으며, 휘몰아치는 폭풍에 괴로워하고 있다면 비바람을 피할 거목이 되어주고 싶은 탓이다. 그는, 파도에 무너지지 않는 거목이 되고 싶었다. 비록 풍화되어 부스러진 바위와 같은 삶이지만, 쓰러지거나 무너지지 않고 버티고 설 수 있다면. 분수에 맞지 않고, 평생 해 본 적 없으며, 인제 와서 떠올린들 이룰 수 있을지도 모르는 소망. 실패에서 무언가 배우지 못하고 다시 어리석은 짓을 반복하게 만들도록 만드는 이 감정. 클라비스는 무기물이 생명을 얻고 싶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이 순간의 이름을 알고 있다. 아주 오래전, 그가 이 어둠 속에 머무르게 만들었던 감정이다.
돌과 얼음이 낙하하여 타오르며 별똥별의 이름을 얻고, 깎여나간 바위가 거목의 꿈을 꾸게 만드는 어리석음. 더없이 괴로운 것이지만 거스를 수 없는 감정.
그는 루카를 사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