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1: 성지와 비공도시에는 명확한 날짜가 존재치 않고 여왕 시험 개시 이후 몇 일차로 묘사하므로 하기한 날짜는 루카의 우주 기준이다)
(주2: 전체적인 묘사는 루카의 시점으로 기술하고, 부연설명이 필요한 부분은 아래 회색 이탤릭체로 다른 캐릭터의 시점을 묘사하였다)
¶1주째
3월 4일: 대학교 개강. 수업을 다녀와서 방문을 열었더니, 익숙한 ‘내 방’으로 이어져야 할 문 너머에는 ‘모르는 남성의 침실’이 보였다. 이후 매일 밤, 문 너머는 모르는 남성의 침실이었다. 매번 문을 열 때마다 보이는 건 거대하고, 긴 검은 머리의 남자. 매번 인사하고 닫았다. 잠은 거실 소파에서 잤다.
¶2주째
3월 11일 : 여왕시험 시작
3월 13일 : 술에 취해 귀가한 ‘나’는 왠지 모를 억울함, 취기, 졸음이 주는 판단력 저하로 과감한 짓을 벌인다. 남자가 없는 빈방에 밀고 들어가서는 담요를 말고 문 옆에 누운 것. ‘나’는 수마를 이기지 못하고 바닥에서 잠들었다. 밤 산책 후 귀가하여 그 꼴을 본 남자는 ‘나’를 깨우는 귀찮음과 존재의 거슬림을 저울질하고 그냥 ‘나’를 방치한다.
3월 14일 : 해가 뜨고 자기 방으로 돌아간 ‘나’는, 정오가 지나서야 숙취를 몰아내고 정신을 차린다. 이미 저지른 일 어쩔 수 없지. 산책삼아 외출하여 롤케이크를 사고, 사과의 선물로 삼기로 마음먹는다. ‘나’는 해가 지기를 기다려 남자의 방으로 들어가, ‘가족들이 걱정하니 더는 자리를 피해줄 수 없다’는 이유를 대어 남자에게 ‘침실을 같이 써도 된다는 허락’을 받는다. 하지만 많은 공간을 받는 건 부담스러우니까 문 바로 옆에서 생활하기 시작한다.
¶3주째
3월 19일 : 기이한 형태라도 ‘나’는 남자와 공간을 공유하게 되었다. 적어도 못난 짓은 하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에 남자를 살피기 시작한 ‘나’는 익숙한 우울의 흔적을 찾아낸다. 불면증이 있는 탓인가? ‘나’는 데운 우유에 꿀을 타서 남자에게 주었고, 남자는 거절했다. 거절당한 탓인가, 괜한 오기가 생겨 ‘나’는 남자에게 매일 우유를 가져다주게 되었다.
3월 23일 : 남자는 우유를 마시는 것보다 ‘내’가 옆에서 말을 거는 게 더욱 귀찮다고 생각하였는지 우유를 받아주었다. 이전에는 말을 걸면 듣기 싫다는 듯 고개를 돌렸으나, 이후엔 말을 걸어도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리지 않게 되었다. 뭐, 그렇다고 하여서 ‘내’ 쪽으로 보는 것도 아니니 좋다고도 할 수 없지만, 발전이라면 발전이다.
¶4주째
특별하게 날짜를 지정할 만한 사건은 없었다. ‘나’는 굳이 필요하지 않다면 남자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하지만 음식이 생기면 가져다주거나, 기색을 살피어 안부를 물었다. 남자는 대답하지도 않았지만 ‘내’가 가져다주는 음식을 모질게 거절한 적도 없었다. 빤히 바라보면 내키지 않은 기색으로 입에 넣기는 한다.
¶5주째
4월 6일 : 1차 정기 심사. ‘나’는 남자의 방으로 가지 않게 되었다.
그날 남자는 여왕시험에 임하는 태도 문제로 다른 자와 다투었다. ‘지치지도 않는 녀석이다…….’ 누구에게 말할 것도 아닌 불만은 남자의 속에서 곪아간다. 남자는 피로와 암울함, 우울과 무기력이 뒤섞여 늪에 빠져드는 기분으로 귀가했다. 하루가 멀다하고 귀찮게 말을 붙이던 ‘나’는 오지 않았다. 남자는 고요함에 만족하고 눈을 감았다. 어둠이 그의 방을 덮었다.
¶6주째
‘나’는 남자의 방에 가지 않았다.
¶7주째
‘나’는 남자의 방에 가지 않았다.
¶8주째
4월 23일 : 중간고사 기간. ‘나’는 대학 입학 이후 첫 시험에 정신적으로 큰 압박을 느낀다. 오늘의 시험을 마치고 비척이며 귀가한 뒤, ‘나’는 방문 너머에 다시 남자의 침실이 존재함을 알아차린다. 화나 당혹감, 짜증을 느낄 기력도 없어 ‘나’는 그냥 문간에 누워 잠들었다. 이후 새벽에 일어나 끊어지기 직전의 정신을 부여잡고 남은 과목의 공부를 시도했을 때, 남자는 밤 산책을 제안했다. 깊은 밤에 산책하러 나갈 수 있다는 건 매력적인 일이므로 ‘나’는 거절하지 않았다. 남자의 뒤를 따라 남자의 세계를 걷던 ‘나’는 벼랑 끝에 몰려있던 정신이 맑아짐을 느낀다. 좋은 기분 전환이 되었으므로 ‘나’는 산책을 데려와 준 남자에게 감사를 표했다. 이후 방에 와서는 한층 나아진 기분으로 공부에 임했다. 남자도 불면증 탓인지 잠들지 못한 채 시간을 죽였고, 동이 틀 녘에야 겨우 잠들었다. ‘나’는 그런 남자를 보며, 생각보다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9주째
4월 29일 : 남자의 앞에서 제 이야기를 떠들 정도로는 익숙해졌다. 그러나 익숙해진 탓일까, 주의력이나 배려가 떨어졌던 모양이다. ‘내’ 이야기에 남자가 ‘나’와 다른, 우울하거나 염세적인 의견을 내보였을 때, 나는 반사적으로 ‘그건 아니’라고 반대했다. 남자는 구태여 반박하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나’는 무언가 잘못했다는 생각에 필사적으로 사과하여 상황을 수습하였다.
※ 남자는 ‘내’ 말이 정론이며, 세간에서 말하는 ‘옳음’이라 인정했다. 다만 그 자신이 ‘옳게’ 행동할 수 없음이 그의 어둠이다. 그러니 그는 반쯤 조소에 가까운 무기력으로 ‘나’와 대거리하는 일을 피했다. 다만 시간이 지나, ‘내’가 이불을 말고 잠들었을 때, 남자는 달빛이 가닿지 않는 구석에 앉아 그 모습을 한참 내려다보았다. 왜 그의 앞에 이런 소녀가 다시 나타난단 말인가? 그는 빛에서 등을 돌렸다. 두 번 다시는 어리석은 짓을 하지 않으리라 맹세했다. 그러니 이런 일은 달갑지 않다. 저토록 찬란한 이는, 어울리지 않는다. 동시에, 남자는 제가 왜 이런 생각을 하는지 고민한다. 그는 또 빛에 홀려 손을 내뻗고자 하는가? 남자는 제가 불나방과 닮은 짓을 한다고 여긴다. 빛을 향해 날아가면 날개가 타올라서 종국엔 죽음과 같은 어둠의 바닥에 떨어짐을 알면서도 기어코 달려들고야 마는 불나방을 닮았다고. 하나 그는 사람이다. 어리석은 행동을 반복할 의향이 없다. 그러니 남자는 잠든 ‘내’ 모습에서 눈을 돌렸다. 달도 없는 밤이었다.
4월 30일 : 귀가한 ‘내’게 남자는 자신의 침대를 써도 된다고 말했다. ‘나’는 방 주인의 침대를 쓸 수 없다고 질색하였지만, 남자는 의견을 굽히지 않았다. 결국 소파에서 잠드는 것으로 합의를 보았지만 여기도 마음이 불편하기는 마찬가지라, 남자가 밤 산책을 나간 틈을 타 다시 이불을 들고 문 옆의 바닥으로 돌아가 잠들었다.
※ 귀가하여 그 꼴을 본 남자는 ‘내’가 제 의견을 죽어도 굽히지 않는 인간이라 생각하였다. 저런 인종과 다투어서 귀찮아지는 것은 그이니, 그는 결국 ‘내’게 숙여주기로 한다.
5월 2일 : 간이침대가 생겼다. 역시 반발했으나 남자는 저를 ‘아이를 바닥에 재우는 무뢰한’으로 만들 셈이냐고 말했고, 나는 여기서 다시 남자의 의견에 반항했다간 관계 자체가 어그러질 수 있음을 짐작했다. 결국 ‘나’는 내키지 않았지만, 그의 호의를 받아들였다.
5월 4일 : 2차 정기 심사.
¶10주째
5월 7일 : ‘나’는 남자가 호의로 내게 간이침대를 내어주었으니 이에 보답해야 한다는 생각에, 커다란 소라 껍데기를 구해 선물했다. 소라 껍데기는 파도 소리가 난다는 ‘나’의 말에 남자는 껍데기를 귀에 대고, 저는 파도 소리를 모르지만, 이 소리는 초원을 스치는 바람을 닮았다고 말한다. ‘나’는 남자의 대답에서 그의 과거를 엿본다.
※ 남자는 아주 오래전이라 남자 자신도 잊은 과거의 조각을 들여다보는 ‘나’를 기이한 존재라고 여긴다. 더욱 이상한 점은, 남자는 ‘내’ 시선을, 과거를 들여다보는 일을 불쾌하게 느끼지 않았다는 점이다.
5월 9일 : 해가 지기 전에 집에 돌아온 날, ‘나’는 문득 기이한 발상에 사로잡힌다. 밤, 남자를 만난 ‘나’는 내일 해가 지기 전 침실 문을 열어보지 않겠냐고 제안했다. ‘왠지 그렇게 한다면 낮에도 여기 올 수 있을 것 같다’는 말에 남자는 수긍하고 그렇게 해주마, 말했다.
※ 남자는 별다른 생각이 없었다. 그냥 부탁하니 들어준다는 정도.
5월 10일 : 해가 기울기 시작한 낮, ‘나’는 방문이 열리고, 그 너머의 남자를 본다. 성공이었다. 처음으로 ‘내’ 방과 저를 기다리는 ‘나’를 마주친 남자는 ‘나’를 데리고 나가 그가 지내는 곳을 소개해 주었다. 새롭고 아름다운 풍경, 가설이 성공했다는 기쁨. ‘나’는 산책에서 돌아오는 길에 남자에게 이름을 밝힌 적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한국의 본명은 서양인의 외모를 한 남자가 발음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생각에, ‘나’는 ‘루카’라는 이름을 댔다. 그 대답으로 남자는 제 이름이 ‘클라비스’라고 일러주었다.
¶11주째
5월 14일 : 수다를 떨던 중, ‘나’는 남자에게 직업, 즉 무얼 하는 사람인지 물었다. 남자는 ‘클라비스는 이번 대 어둠의 수호성의 이름’이라고 답했고 루카는 이를 이해하지 못했다. 클라비스는 루카에게 수호성과 여왕이라는 개념, 또한 이곳 비공도시와 여왕시험에 관해 설명해 주었다. 루카는 클라비스의 상식이 제 것과 ‘완전히’ 다름을 깨닫고 이를 알린다. 클라비스는 개의치 않았으나 문득, ‘어둠’이라는 말을 듣고 자신이 꺼려지지 않냐고 물어보았고, 루카는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한 관점이라 당황한 끝에, ‘별로 모르겠고 당신이 안식을 관장한다면, 그 덕에 요즘 잠은 덜 설친 것 같다.’ 고 대답한다.
※ 클라비스는 루카가 처음 수호성과 여왕이라는 말을 알아듣지 못하였을 때 이러한 개념조차 모르는 변방의 행성 출신이라 여겼다. 다만 그가 수호성의 개념을 설명하고 제가 어둠의 수호성임을 알면 꺼리게 되는 것이 아닌가 걱정하였으나, 루카의 태도는 변하지 않았다. 클라비스는 안심하는 한편, 어둠이 무섭지 않냐고 물었을 때 루카가 클라비스에게 듣기 좋은 말로 적당히 대답함에 실망하였다. 마음에도 없는 말을 늘어놓는 건 그의 비위를 맞추려는 행동일 뿐이다. 클라비스는 루카 또한 그를 떠나리라 여긴다. 그의 곁에서 적당하게 굴던 이들은 모두 그렇게 사라졌다. 클라비스의 운명이 그렇기에.
¶12주째
특정한 날짜를 지정할 수 없으나 클라비스와 몇 번 더 산책을 나갔다. 이 이후로도 쭉 같이 비공도시의 이곳저곳에 다니는 일이 잦다.
※ 클라비스는 이즈음부터 루카를 '그런' 관계로 규정한다. 루카가 제 이야기를 하면 들어주고, 밤 산책에 동행하며, 가끔 그가 왜 떠올렸는지 모를 말을 하면 사려 깊게 들어주는 그런 사이.
¶13주째
5월 28일 : 화요일 밤, 루카는 클라비스와 밤 산책에서 돌아오는 길에, 이제는 낮에 시간을 내어 자기를 데리러 올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클라비스도 직장이 있을 테니 구태여 불편한 일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 클라비스가 돕지 않아도 비공도시로 넘어올 수 있으니 당신은 당신의 일을 하라고 일렀다. 클라비스는 루카를 한참 내려다보았으나, 침묵 끝에 “좋을 대로 하여라.”라고 수긍했다.
※ 클라비스는 루카가 저를 불편해하거나, 이 관계에서 불만을 느끼는 것이 아닌가 의심하였다. 그러나 루카는 그의 의심과 관계없이 무엇도 느껴지지 않는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고, 클라비스는 어쩐지 술렁이는 가슴을 무시하며 수긍하였다.
5월 29일 : 클라비스의 도움 없이 비공도시로 넘어온 첫날. 루카는 곧 있을 기말고사를 대비하여 교재를 들고 물가에 자리 잡았다. 적당히 집중하여 교재를 읽느라 주변에 신경 쓰지 않은 탓일까, 루카는 낚싯대를 든 남자가 조금 떨어진 호수에 자리 잡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그러고 얼마간 시간이 지났을 때, 루카는 남자의 시선을 알아차린다. 제가 아니라 책을 들여다보는 시선은 익숙한 것, 학구열이나 호기심이 가득하다. 루카는 별다른 생각 없이 제 교재를 읽으라며 넘겨주었고, 몇 마디 말을 나누다가 자리를 옮겼다.
※ 낚싯대를 든 남자는 ‘루바.’ 지혜를 관장하는 땅의 수호성이다. 그는 루카를 처음 보았을 때 사람이 아니라 요정이 아닌가 착각하였다. 그만큼 루카는 이질적인 분위기를 풍겼고, 이를 관찰하려다 책에 관심이 있다는 오해를 받는다. 루바는 책을 넘겨받고 그 내용을 보았을 때, 적어도 이 소년이 ‘정식으로’ 비공도시에 들어온 인원은 아니라고 확신한다. 그를 알아보지 못하는 것이며, 학생이라고 말하지만 학습내용이 너무 기초적이다. 그 내용이 주성의 기술에 비해 한참 뒤떨어진 시대의 것이라는 사실을 확신했을 때, 루바는 적어도 이 소년의 존재를 아는 사람이 많지는 않으리라 판단하였다.
5월 31일 : 이름 모를 남자와 마주친 것을 교훈으로 삼은 루카는 책을 들고 적당한 자리를 찾아 헤매다 두 소녀와 마주쳤다. 루카는 제 주의력이나 운을 의심했지만, 착실하게 인사했다. 금발과 청발이 인상적인 두 사람은 각각 자신을 ‘안젤리크 리모쥬’, ‘로잘리아 데 카타르헤나’라 소개하였다. 안젤리크는 루카에게 큰 관심을 보이며 친근하게 말을 붙였고, 루카는 어색한 기색을 내비치면서도 말을 받아주었다.
6월 1일 : 3차 정기 심사
¶14주째
6월 3일 : 자꾸 사람을 만나니 조급해진 루카. 설마 한 번 만난 곳에 또 낚시하러 오려고? 싶어서 물가로 책을 챙겨 떠났다. 그랬더니 진짜 저번의 그 남자가 있었다. 누가 보아도 체면치레를 위한 낚싯대. 어딘지 자신을 기다리는 듯한 표정에 루카는 의아함을 느낀다. 하지만 공부가 하기 싫었으므로 낚싯대를 드리운 남자의 옆에서 자잘한 수다를 떤다. 제법 즐거운 대화를 끝내고, 해가 뉘엿뉘엿 넘어갈 즈음, 루카는 책을 챙겨 들고 일어섰다. 낚싯대를 거의 내팽개치며 따라 일어선 남자는 다급하게 뒤에 붙어, “저기, 그—, 다음에는, 언제쯤 올 건지 물어봐도 될까요—?” 하는 물음을 던졌다. 루카는 의아했으나, 솔직하게 “모르겠어요. 아마 다음 주?”라고 대답했다. “그런가요…” 하고 실망한 목소리를 내는 남자가 어딘지 안쓰러워, 루카는 다음 주에는 꼭 오겠다고 대답하였다.
6월 6일 : 다음 주 기말고사를 앞두고 생긴 연휴. 루카는 바람이라도 쐬려고 성지로 나간다. 물가를 따라 걷던 루카는 붉은 머리카락이 인상적인, 장신의 여자를 만난다. 머리카락 사이, 귀가 있을 자리에 보이는 것은 붉은 지느러미. 루카는 멍하게 여기가 제가 알던 세계가 아니기는 하다고 생각한다. 마주치는 것도 애매하다고 생각하여 피하려던 중, 여자는 루카를 부른다. 친근하게 말을 걸어오는 어조. 루카는 당황하였으나 뿌리치기도 어렵다고 생각하며 말을 섞는다. 비공도시의 정교함에 관해 이야기하던 중, 여자는 문득 루카에게 “격변을 맞이하겠네요.”라고 말한다. 의아함에 올려다보는 루카의 눈을 마주하고 여자는 화사하게 웃었다. “많은 일이 일어날 거에요, 그런 시기니까. 하지만, 당신이라면 괜찮아요. 저는 알 수 있어요. (いろんなことが起きるわ、そんな時期なんだもの。でも、あなたなら大丈夫。私はわかるわ。)” 하는 말. 루카는 반사적으로 저 말이 예언임을 안다. 왜 내게 이런 말을 해 주느냐 묻고 싶지만, 그런 말이 의미가 없음을 안다. 그러니 주머니를 뒤져서 여자에게 사탕을 건넨다. 여자는 사탕을 받고는 “포기하지 말아요, 사랑은 노력하는 자의 편이니까. (諦めないでね、恋は努力する人の味方なんだから)” 하고 말하며 떠나갔다. 루카는 기묘한 기분에 머리를 긁적이다가, 시험공부를 하러 돌아갔다. 힘들지만, 어쨌든 기말고사만 치면 이번 학기도 끝이니까.
※ 여자의 이름은 ‘사라’. 여왕시험을 돕는 조력자로 점술가다. 그는 며칠간 끈질기게 수정구가 비추는 곳을 찾아갔고, 그곳에서 ‘차라리 요정에 더욱 가까운’ 사람을 만났다. 사라는 반사적으로 이 만남을 위해 수정구가 그토록 끈질기게 사라를 유도했음을 알아차렸다. 입에서 나오는 말은 본능과 같은 것. 사탕을 건네주는 루카의 눈을 보며, 사라는 루카가 미숙하고 상냥하다고 생각한다. 비록 운명이 그를 고난에 밀어 넣더라도, 저 이는 그 미숙함과 상냥함으로 고난을 이겨내리라. 사라는 그 자리를 떠나며 남몰래 이름 모를 소녀를 축복했다. 그는 언제나 사랑에 빠진 소녀들의 편이므로.
¶15주째
6월 11일 : 급한 시험을 두어 개 끝내니 낚싯대를 든 남자에게 호숫가에 다시 가겠다고 한 것이 생각났다. 남은 시험이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니었으므로 루카는 산책 삼아 비공도시로 향했다. 물가를 따라 터벅터벅 걸어 도착한 곳에는, 붉은 머리의 남자가 있었다. 루카는 도대체 이 넓은 땅에서 왜 자꾸 새로운 사람이랑 마주치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나무 그늘에 숨었다. 아무래도 오늘 약속을 지키기는 글렀다고 생각할 무렵, 붉은 머리의 남자는 루카를 발견했다. “여어, 아가씨.” 하고 부르는 목소리. 평소에 들을 일 없는 호칭에 당황한 루카는 자신을 손가락으로 가리켰고, 남자는 루카가 있는 쪽으로 다가왔다. “밀회 상대인 그이를 기다리는 중인가? 아쉽게도, 오늘은 바빠서 오지 못할 예정이야.” 루카는 반사적으로 “기다리는 사람은 없어요.” 하고 대답했고, 남자는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루카의 앞을 막고, 루카의 등 뒤에 있는 나무에 팔을 대어서 몸을 숙인다. 루카는 당혹스러움에 얼굴을 찌푸리며 비켜달라 청했고, 남자는 “모처럼 온 아가씨를 그냥 돌려보내는 것도 미안한 일이다(野暮だ).”라고 대답하며 끈질기게 대화를 붙였다. 반쯤 포기한 채로 루카는 남자에게 휘말린다. 어쩐지 얕보이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에 평소 모르는 사람에게는 언제나 사용하던 존댓말도 떼어버린 채 참여한 대화. 제법 강제적인 시작에 비해 대화는 무난하게 즐거웠고, 결국 헤어질 무렵, 루카는 남자의 허리춤에 있던 검을 빌려 뽑아보기에 이른다. 진검을 만졌다는 것에 만족한 루카는 낚싯대를 든 사람을 기다리던 것을 잊고 집에 돌아갔고, 이후 시험을 치러 가는 길에야 떠올리게 된다.
※ 붉은 머리의 남자는 ‘오스카.’ 역시 여왕시험에 참여하는 아홉 수호성 중 하나로, 불의 서크리어를 담당한다. 오스카는 요즈음 루바가 여자를 만나는 것이 아닌가 의심했다. 성지에서 여자에 제일 익숙하다고 자부하는 그의 눈에, 루바는 명백하게 수상했다. 책이라면 사족을 못 쓰던 샌님이 그토록 즐기던 책을 두고 한숨을 푹푹 내쉬어 대는 꼴이며, 수상할 정도로 바깥으로 나돌아다니는 꼴은 영락없이 좋아하는 여자가 생긴 사람이다. 오스카는 사람보다 책을 좋아하는 저 샌님을 꾀어낸 사람이 누구인지 궁금하여 루바가 바쁜 날을 골라 그가 하루에 한 번은 꼭 드나들던 물가로 발을 옮겼다. 그리고 그는, 도무지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는 소년을 마주한다. 숲의 풍경과 분리할 수 없는 실루엣, 시선을 두어도 바라본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 모습. 오스카는 드물게도 당황하여 말문이 막혔고, 여유로운 모습을 보이는데 제법 시간을 들였다. 동요를 숨기고 태연자약한 태도로 장난스럽게, 조금 강제적으로 시작한 대화는 오스카 자신도 놀랄 정도로 즐거웠다. 루바 같은 샌님에게는 아까운 여자라는 느낌이 들 정도로. 동시에 오스카는 책밖에 모르는 샌님이 갑자기 여자에게 홀린 이유도 알 법하다고 생각했다.
6월 14일 : 시험이 끝난 금요일, 루카는 지친 몸을 이끌고 제 방에 드러눕는다. 종강이다. 아마 오늘은 해가 지면 방문이 클라비스의 침실로 이어지겠지. 지쳐서 사람을 상대할 기분이 아니다. 루카는 오늘은 아예 방에서 나가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느긋하게 몸을 펴고, 노을이 방을 붉게 물들이는 모습을 바라본다. 현실감이 흐려지는 광경 속에서 수마에 젖어 들 때, 루카는 문득 누군가 자신을 부른다고 느낀다. 강렬하고 간절한 기원. 그는 홀린 듯이 문을 열고, 클라비스의 방으로 넘어가, 창문을 타고 넘었다. 두어 번 있던 일이라 신발도 이미 있다. 대충 신발을 구겨 신은 루카는, 감에 의지해서 터벅터벅 걸었다. 비공도시는 공기가 맑았고, 저무는 해는 공기를 황금색으로 염했다. 현실감마저 빛바래는 순간, 루카는 나무 사이로 들리는 물소리에 이끌려, 폭포 앞에 망연하게 선 클라비스를 발견한다. "혹시…. 당신이 절 부르셨나요?" 눈이 마주치는 순간, 무심코 튀어나온 말. 클라비스는 루카를 그저 내려다보았고,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는다. 루카는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주변의 아름다운 풍경에 홀려 금세 잊었다. 두어 번 클라비스의 손에 이끌려 찾아왔던 숲의 호수는 노을에 젖어 도무지 현실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웠고, 공기는 말끔하게 개어 덥지도 춥지도 않았다. 사위는 황금빛으로 물들어 숨에서는 단맛이 날 것 같았고, 이대로 물 위로 발을 올리면 그 위에 설 수 있을 것 같았다. 아. 영혼에 새겨지는 풍경. “루카.” 몰입의 순간, 루카는 제 이름을 나직하게 부르는 클라비스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린다. “무얼 보고 있나.” 루카는 여전히 꿈결을 거니는 듯한 기분으로, “물을, 봐요. 거울처럼 말끔하게 가라앉은 저 호수를.” 하고 대답했다. 기이한 순간이었다. 말은 단어 이상의 의미를 담은 것 같았고, 루카는 제가 하는 말을 클라비스가 ‘온전히’ 이해할 수 있으리란 환상에 빠졌다. 노을에는 그런 마력이 존재했다.
※ 클라비스는 해가 지는 비공도시를 산책하던 중, 숲의 호수로 이어지는 폭포 앞에 서서, 그가 떠나보낸 것을, 손에 쥘 수 없었던 것들을 생각했다. 그의 세계에서 사라진 빛이며, 그에게 허락되지 않았던 행복. 삶의 이유가 될 수 있는 것, 그가 살아가야 할 이유가 되어줄 것, 이 고독을 함께하고, 어둠 속을 함께 걸어줄 사람을. 혹은 그를 데리고 이 어둠에서 벗어나리라 생각했던 사람과, 사랑과, 절망을. 이윽고 그러한 생각마저 사라진다. 어둡게 가라앉는다. 무엇도 느끼지 않는다면, 상처받을 일도 없다. 기대하지 않는다면 실망하지 않는다. 클라비스가 그런 말을 어렴풋이 떠올리며 침잠할 때, 수풀이 흔들렸다. 루카는 클라비스를 바라보며 ‘나를 불렀냐’고 물었고, 클라비스는 폭포에 관한 전설을 떠올린다. ‘홀로 있을 때 폭포에 기도하면 마음을 위로할 수 있는 사람이 찾아온다.’는 전설을. 그는 루카의 이름이 빛을 뜻함을 안다. 끊이지 않고 그에게 말을 걸어오는 루카의 목소리를 알았다. 감정은 언어가 되지 못하고, 감각은 심장 위를 휘돌 뿐. 그가 입을 열지 않자 루카는 등을 돌린다. 호수를 바라보는 루카는 노을에 물들어 금빛으로 찬란했고, 그대로 풍광에 녹아들어 흐려질 것 같았다. 도무지 그와 같은 세계를 산다고는 느껴지지 않는 모습에, 클라비스는 루카가, 언젠가 저를 떠날 것을 직감한다. 루카는 그와 같은 삶을, 같은 시간을 살아갈 수 없는 존재다. 이는 운명으로 안배된 것이라, 그가 어떻게 바꿀 수 없다. 이를 알면서도, 무엇보다 확실하게 알아차렸음에도, 클라비스는 루카를 불렀다. 그를 돌아보게 만들고, 무엇을 보고 무엇을 느끼는지 들었다. 발걸음을 옮겨 루카의 등 뒤에 섰다. 노을을 가리기 위해서. 밤이 오기 전까지, 햇살이 루카를 물들이지 않도록 그늘을 드리우려고.
6월 15일 : 저번에는 붉은 머리의 남자 때문에 만날 수 없었으므로, 루카는 다시 물가를 향했다. 낚싯대를 들고 있던 남자에게 이번 주에 오겠다고 말했으니, 약속은 지켜야지. 루카는 주말을 할애하여 다시 물가에서 책을 읽으며 기다렸다. 하지만 이번에 온 것은 낚싯대를 들고 있던 남자가 아니라 안젤리크와 로잘리아. 안젤리크는 오늘 해야 할 일을 끝내고 둘이서 산책을 하던 중 문득 루카가 생각나서 이곳에 왔더니 정말 있었다고 들뜬 어조로 이야기했다. 로잘리아 또한 크게 반가워하는 기색이었기에, 루카는 책을 덮고 두 사람과 수다를 떨기 시작한다. 선물 받았다는 케이크와 쿠키를 차려놓은 작은 다과회. 하릴 없는 수다는 고민 상담으로 이어지고, 루카는 두 아이의 고민을 성실하게 듣고 답한다. 두 사람은 마음이 가벼워졌다며 즐겁게 손을 흔들며 떠나고, 루카는 결국 오늘도 낚싯대를 든 남자는 만나지 못했다는 생각에 한숨을 푹 내쉰다.
6월 16일 : 오늘 못 보면 정말 끝이라는 마음가짐으로 다시 찾은 물가. 이번에는 남자가 먼저 낚싯줄을 드리우고 멍하니 앉아있었다. 루카는 반가움에 가까이 다가서며 “그렇게 멍하니 있으면 물고기를 놓칠 거에요.” 하고 말을 걸었고, 남자는 화들짝 놀라 일어서다 그대로 낚싯대를 걷어차고, 거기 발이 걸려 물가로 넘어질 뻔하였다. 루카는 황급하게 끌어당겨 물에 빠지는 대신 땅 위로 넘어지게 했고, 대가로 같이 넘어갔다. 작은 소란이 지난 후, 남자는 루카가 오지 않을 줄 알았다는 말과 함께 반가움을 표했다. 루카는 낚시를 하고 있었냐며 말을 받았고, 남자가 낚싯줄을 드리우는 동안 수다를 떨었다. 루카는 남자의 이름이 ‘루바’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의 지식이 상당한 수준임을, 나아가서 살면서 이 정도로 넓고 깊은 지식을 가진 사람을 만나기 어려울 정도임을 짐작했다. 즐거운 수다의 끝, 루카는 루바에게 다음 주 당신 편할 때 당신이 추천하는 책을 빌려주면 좋겠다고 말했고, 루바는 그러면 수요일에 책을 가지고 여기 오겠다고 답했다. 루카는 기쁘게 웃으며 이를 받아들였다.
¶16주째
6월 17일 : 루카는 클라비스를 떼어놓고 홀로 밤 산책에 나섰다. 정처 없이 걷던 중 루카는 절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고, 붉은 머리의 남자와 재회했다. 친근하게 말을 붙여오는 옆에서 당혹스러운 표정을 보였던 루카는, 결국 이번에도 휘말린다. 밤 산책을 함께 하던 중, 남자는 제 이름을 ‘오스카’라고 알려주었다. 루카도 떨떠름한 표정으로 제 이름을 알려주었고, 집까지 데려주겠다고 하는 것을 끈질기게 거절하며 만난 자리에서 헤어졌다. 이후로도 홀로 밤 산책에 나서는 날이면 제법 자주 오스카와 마주친다. 언제나 친근하게 말을 붙이며 관심을 가지는 오스카가 신기하다고 생각하지만, 밀어내진 않았다.
6월 19일 : 책을 들고 온 루바와 물가에서 만났다. 루바가 골라온 책은 어느 별의 문화가 어떤 요소에 영향을 받아서 어떤 풍습을 가지게 되었는지 연구한 서적으로, 루카는 뛸 듯이 기뻐했다. 루바는 그 기쁨에 휩쓸려서 연구자의 성향이나 별의 특징 등을 이야기해 주었고, 이내 저 혼자 떠든 것이 아니냐며 우려를 표했다. 루카는 즐거웠으니 상관없다며 이야기를 더 해달라 종용했고, 루바에게 이야기를 듣고 나서는 다음 주에 책을 돌려줄 때 감상을 알려 줄 테니 새 책을 가져다 달라고 부탁했다.
6월 22일 : 토요일 저녁, 클라비스의 침실로 넘어간 루카는 클라비스에게 흰 백합 꽃다발을 선물 받는다. 루카는 이를 받고 잠시간 굳어 있다가, 얼떨떨한 기쁨으로 가득 찬 표정으로 클라비스를 올려다보았다. “꽃, 선물해 본 적은 있지만 받는 건 처음이에요…….” 클라비스는 루카와 눈을 마주치고는, 한숨처럼 웃으며 그렇게 기쁘냐고 물었다. 루카는 꽃을 선물 받을 거라고 생각한 적은 없어서 이렇게 기뻐질 줄 몰랐다고 어딘지 멍하게 이야기하고, 이내 조금 불안한 얼굴을 하고서는 시들 것을 걱정했다. 클라비스는 꽃이 시들면 다시 주겠다고 웃으며 말했으나, 루카는 그러고 싶지 않다고 대답했다. 식용이 가능한 꽃이라면 먹겠지만, 그런 것도 아니었으니 루카는 꽃다발을 클라비스의 방구석에 걸어두고 말리기로 하였다.
※ 클라비스는 처음 꽃다발을 받아 든 루카가 가만히 있는 것을 보고 꽃을 좋아하지 않는 것이 아닌지, 그가 선물하여도 기쁘지 않은 것은 아닌지 후회했다. 어울리지 않는 짓은 하지 않는 게 좋다고 생각할 무렵, 루카가 고개를 들었다. 입가가 풀리고 웃음이 새어 나올 정도로 선명한 기쁨과 환희. 저리 기뻐한다면 꽃을 선물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하였다. 몇 번이라도, 저 웃음을 볼 수 있다면.
¶17주째
6월 24일 : 평소와 같이 촛불에 의지하여 클라비스는 수정구를 바라보거나 타로점을 치고, 루카는 제 침대에 누워 이야기를 떠들던 밤. 클라비스는 문득 한숨처럼 “너와 대화하고 있으면 잊었던 것이 떠오를 듯한 기분이 든다. ……무엇을 잊었는지도 모르는 주제에 말이다.” 하고 중얼거린다. 그리고 그 순간, 루카는 클라비스의 얼굴이 그늘에 가려 보이지 않음을 알고, 문득 계시처럼 클라비스의 가장 큰 문제를 알아차린다. 클라비스 자신조차 자아를 거의 잊게 만든 것, 그 누구도 그의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았기에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던 감정이 검게 뭉쳐서, 결국 그를 집어삼킨 공허가 된 것. 누구도 클라비스를 들여다보지 않았기에, 그 자신도 스스로를 돌보지 않게 된 것. 루카는 클라비스가 외로웠기에 저렇게 되었음을 안다. 동시에 클라비스가 타인의 온기 없이는 스스로 일어설 수 없음을 직감한다. 애정이, 애정이 필요하다. 사람은 외로움을 홀로 해결할 수 없다. 누군가 온기를 나누어주지 않으면, 손을 뻗지 않으면 안 된다. 루카는 이 순간 클라비스에게 책임감이나 사명감에 가까운 것을 품는다. ‘누군가’ 해야 하는 일이라면, 그 무게를 아는 자가 해야 한다. 루카는 클라비스에게 어떻게 애정을 주고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알기에, 저는 클라비스가 일어설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고 생각한다. 바로 이 순간, 루카는 클라비스에게 얽매인다.
6월 26일 : 낮에 물가로 가서 루바에게 책을 돌려주었다. 기대했던 것보다 즐거웠다며 흥미로웠던 풍습이나 궁금한 것을 물어보고, 루바의 감상과 첨언을 들으며 즐겁게 떠든다. 이후로도 아주 바쁘지 않다면 수요일에 만나서 책을 빌려주었으면 좋겠다고 말하고, 루바는 크게 당황했으나 루카가 불편하지 않다면 자기도 제안하고 싶었다고 대답한다. 이후 두 사람은 매주 수요일에 둘만의 독서회를 가지게 되었다.
6월 27일 : 낮, 숲의 호수로 산책을 나간 루카는 풍경화를 그리는 물빛 머리의 남자와 마주친다. 이쯤 사람을 마주치면 숨을 기분도 들지 않아, 루카는 남자의 그림을 힐끔힐끔 구경한다. 루카는 결국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남자에게 말을 걸었고, 그의 그림을 칭찬하며 그림을 원래 그리는 화가냐며 묻는다. 남자는 그렇지는 않다고 대답하며 웃었지만, 싫지는 않아 보였다. 대화를 이어가는 도중 남자도 하프를 연주한다는 것을 알게 된 루카는 저도 음악을 좋아한다 하였고, 대화의 주제는 음악으로 넘어간다. 남자도 바이올린을 켠 적 있다는 말에 환담을 나누던 도중, 저 너머에서 루카를 발견한 오스카가 루카를 부른다. 루카는 남자에게 양해를 구하고 작별한다.
※ 남자는 상냥함을 관장하는 물의 수호성 ‘류미엘.’ 마음이 복잡하여 다스릴 셈으로 풍경화를 그리던 중이었다. 멀리서 기웃대던 소년이 다가와 말을 걸었을 때는 당혹스러웠으나, 그를 수호성이 아닌 그저 한 사람으로 보고 다가왔음을 알고 조용히 기뻐했다. 순수한 찬사와 동경, 그는 거리감 없는 소년의 어조에 이끌려 대화를 나누었고, 그림과 음악을 주제로 편안하게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상대임에 더욱 호감을 품었다. 소년의 이름이라도 물으려고 할 무렵, 오스카가 찾아와 소년을 불렀다. 본디 오스카를 그리 좋아하지 않던 류미엘은 어딘지 실망감에 가까운 감정으로, “오스카와 만나는 사람이었을 줄이야…” 하고 중얼거렸다. 그는 이후로 여왕시험이 끝날 때까지, 비공도시에서 그 소년을 다시 마주치지 못했다.
6월 29일 : 4차 정기 심사
6월 30일 : 일요일 저녁, 해가 저무는 숲에서 오스카와 만났다. 몇 번 오스카와 만나 대화하며 마음의 거리를 제법 좁힌 루카는, 오스카가 허리에 차는 검을 받아 끌어안고 대화를 나누는 일에 익숙해졌다. 평소와 다르게 어딘지 비장한 얼굴을 한 오스카는, 검술대회에 출전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여기 비공도시에서 새로운 시험을 치르는 동안 심경의 변화가 생긴 만큼, 그가 가진 강함은 무엇인지, 검술대회에서 어디까지 올라갈 수 있는지 증명하고 싶었다고. 대장장이가 유명한 행성에서 신분을 묻지 않고 열리는 검술대회에 출전하여 얼마나 올라갈 수 있는지 직접 알아보고 싶다고 말한다. 루카는 그런 대회가 있다니 정말 내가 살던 곳이랑 다르구나, 하고 가볍게 생각하며 오스카를 응원했다. “이왕 나가는 거라면 우승을 노려봐, 오스카.” 진심을 담은 응원으로 원한다면 손수건도 찾아서 주겠다는 루카에게, 오스카는 승리의 보상으로 주어지는 검 정도는 아니지만 제법 괜찮은 검을 사다가 네게 선물하겠다며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검을 좋아하는 네게 어울리는 것으로 가져다주겠다는 말에, 루카는 기쁘게 웃었다. 진검을 가져본 적 없으니 당신이 선물할 검을 기대한다는 말로 그들은 가볍게 헤어졌다.
¶18주째
7월 4일 : 슬슬 오스카가 돌아올 때가 되었다는 생각에 비공도시를 정처 없이 돌아다니던 루카는, 자주 만나던 곳에 어딘지 의기소침한 기색으로 선 오스카를 발견한다. 아무래도 검술대회에서 좋은 성과를 내지 못한 모양이지. 결과를 묻지 않는 게 좋겠다고 생각하며 다가간 루카는, 그 주제를 피해 가볍게 대화하던 중 오스카의 얼굴에 난 자상을 발견한다. 크게 당황하여 반사적으로 손을 뻗어 만지려고 들었던 루카는 오스카에게 설마 검술대회에서 입은 상처냐고 물었고, 오스카는 진검으로 겨루는 대회이니 상처를 완전히 피할 수는 없었다고 자존심 상한 듯이 말한다. 루카는 이를 듣고 하얗게 질려서, 더듬더듬 사과한다. “미…안해, 오스카. 진검을 쓰는 대회인 줄 몰랐어. 알았다면 조금, 조금 더… 걱정이라도 했을 텐데. 그렇게 가볍게, 잘 다녀오라고, 그냥 보내는 게 아니라, 말려보기라도 했을 텐데.” 루카가 반쯤 패닉에 빠져 몇 번이고 사과를 반복하자, 오스카는 루카를 말리며 선물을 가져왔다고 진검을 내밀었다. 그토록 바라던 것이지만 온전히 기뻐할 수 없는 상황. 루카는 당신이 다치면서도 이런 걸 챙겼냐고 반쯤 울상으로 말했으며, 오스카는 “그런 걱정보다는 기뻐해 주는 쪽이 좀 더 기쁜 법이야, 아가씨.” 하고 웃어 넘겨버렸다. 루카는 다시 사과하며 검을 꽉 쥐었다가, 검술을 가르쳐 달라고 청했다. 당신이 그토록 증명하고 싶었던 그 검을, 내게도 가르쳐 달라고. 조금 더 이해할 수 있도록.
※ 기실 오스카는 의기양양하게 나갔던 검술대회에서는 좋은 성과를 내지 못했고, 몰래 빠져나갔던 것은 걸려 잔뜩 질책을 받았기에 조금 의기소침해 있었다. 그가 가진 강함이란 무엇인지, 그가 증명코자 했던 것은 모두 만용에 불과했는지 의심하게 되는 순간. 루카를 만나고 싶지만 이렇게 꼴사나운 모습을 하고서는 만나고 싶지 않다는 양가감정 속에서 자주 마주치던 곳에 서 있을 때, 루카가 나타났다. 그를 배려하는 기색이 엿보이는 태도에 조금 더 비참해질 무렵, 루카가 그의 상처를 발견했다. 이토록 자존심 상하는 순간은 없으리라 생각하며 검술대회에서 입은 상처임을 고백했을 때, 루카는 크게 당황한 기색을 보이며 오스카를 걱정한다. 그저 검에 얕게 베인 상처 하나인데, 루카는 오스카가 위험한 곳에 나가는 것을 너무 가볍게 보냈다며 몇 번이고 사과하고, 안절부절못하며 지금이라도 치료해 주면 안 되겠냐 청하기까지 한다. 자책으로 이어지기까지 하는 모습에 오스카는 이유를 알 수 없지만, 어둡게 가라앉았던 감정이 사라짐을 알아차린다. 이윽고 루카가 검술을 가르쳐달라고 청했을 때, 오스카는 의기소침함을 완전히 털어낸다.
7월 5일 : 느긋하게 밤 산책을 즐기던 루카는 드물게 안젤리크와 로잘리아가 머무르는 특별 기숙사의 근처로 향한다. 지금쯤 잠들어 있을 거란 생각에 찾아가진 말아야겠다고 생각하던 중, 루카는 잠옷만 걸친 채로 바깥에 무릎을 꿇은 안젤리크를 발견한다. 무언가 간절하게 기도하는 듯한 모습에 가까이 다가가 무엇을 하느냐 물은 루카는, 안젤리크에게 그들이 여왕시험의 과제로 육성하던 대륙에 천재지변이 몰아닥쳤음을 듣는다. 상황을 설명하다 울음을 터뜨리는 안젤리크를 안아서 달래며 안젤리크의 방에 데려다주고, 중요한 것은 이후의 대처이니 네가 굳건히 서서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며 위로한다. 안젤리크를 방에 들여주고 나오자 친구를 걱정한 로잘리아가 그 앞에 서 있었다. 같은 재앙을 겪었음에도 의연하고자 하는 모습. 루카는 가볍게 팔을 벌렸지만 로잘리아는 제게는 그런 위로가 필요하지 않다며 거절했다. 루카는 그냥 자신이 놀라서 그런 거니 한 번만 안아달라고 거듭 청했고, 로잘리아는 루카의 재촉에 못 이겨 루카를 안아주었다. 루카는 어딘지 위태로워 보이는 로잘리아의 등을 토닥이며, 안젤리크에게 해 주었던 것과 같은 말을 돌려주었다. “언제나, 위기는 닥치는 법이야. 로지, 넘어지지 않는 사람은 없어. 그리고 넘어지는 것은, 그 사람의 모자람이나 잘못도 아니지. 괜찮아. 언제나 중요한 것은 대처야. 최선을 다하고 있잖아, 그러면 돼. 너는 잘하고 있어.” 말이 이어지는 내내 로잘리아가 몸을 떨고 있음을, 보이지 않는 얼굴이 무언가 감정을 참아내고 있음을 알았지만, 루카는 그저 덤덤하게 말을 끝내고 로잘리아에게 제 머리를 기대었다. 그 누구도 도와줄 수 없는 일이지만, 두 사람에게 위로가 되길 바라면서.
¶19주째
7월 9일 : 루카는 걱정을 이기지 못하고 저물녘에 특별 기숙사를 찾아갔다. 이전과 다르게 조금 더 단단해진 표정을 한 두 아이는 루카에게 생각보다 빠르게 천재지변의 여파를 수습해 나가는 중이라고 답했다. 괴로워하는 대신 해야 할 일을 하겠지만, 결과에서 눈을 돌리지는 않겠다는 말에 루카는 웃었다. 그들이 괴로워하지 않는 것도, 정을 준 동생들이 성장해 나가는 것도 기뻤으므로. 그러니 루카는 “괴로운 광경을 너무 오래 바라보지 않아도 괜찮아. 다시 반복하지 않겠다는 그 결심이 가장 중요한 거니까.” 하고 가벼운 조언을 남기고 걱정되어서 가져온 롤케이크를 나누어 먹었다.
7월 11일 : 루카와 두어 번 검술 대련을 진행한 오스카는 루카가 ‘조금 다른’ 면이 있는 게 아닌지 의심한다. 승리욕이 강한 건 오스카도 그렇다. 검술에 있어 욕심을 가지는 것도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루카의 방식은, 어딘가 자기 파괴적인 면모가 엿보이곤 했다. 검을 휘두르는 방식이 어설프다고 하였을 때, 그러면 제대로 해 보이겠다고 몇 시간이고 목검을 내려치고, 손바닥에 물집이 잡혔다고 걱정하는 오스카의 앞에서 어차피 터지고 다시 굳은살이 박일 테니까 괜찮다고 대답하는 모습을 보며, 오스카는 무어라 콕 짚어 설명할 수 없지만 루카가 어딘가 ‘다른’ 면이 있음을, 그리고 이는 분명 루카가 제 몸을 귀히 여기지 않음에서 비롯됨을 짐작한다. 다만 아직 이러한 면을 짚어 설명할 만큼 깊은 관계가 아니며, 루카가 강한 승리욕에서 비롯된 욕심으로 저럴 수 있다는 생각에 심각하게 여기지는 않았다.
¶20주째
7월 20일 : 천재지변의 여파를 대륙에서 거의 다 덜어낸 기념으로 가볍게 가진 다과회. 피해를 전부 수복할 수는 없어도 재앙의 공황에서는 벗어난 모양이다. 느긋하게 차를 마시던 루카는 안젤리크와 로잘리아에게 ‘요즘 비공도시에는 클라비스님에게 연인이 생겼다는 소문이 자자하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로잘리아는 루카가 클라비스를 모를 것이라 생각했는지 그가 누군지 설명을 덧붙여 주었고, 루카는 마시던 차를 뿜어내지 않기 위해서 사력을 다했다. 안젤리크는 원래 다가가기 어려운 분위기였던 클라비스가 요사이에 누구나 알아차릴 정도로 온화한 구석이 생겼고, 때때로 검은 머리의 여자와 산책하는 모습이 보였다고 말한다. 루카는 동요를 감추려 과자만 계속 집어 먹었다. 로잘리아는 아무도 그 여자의 정체를 모르지만, 클라비스님이 귀히 여기는 것은 확실하다고 말했다. 안젤리크는 저번에 물었더니 “너희와는 관계없는 일이다.”라고 일축했기 때문에 더 물을 수 없었다고 아쉬워하였고, 로잘리아는 그런 것을 물어보는 건 여왕시험과 관련 없는 일이라고 안젤리크를 가볍게 질책했지만, 너도 궁금하지 않냐고 물어보는 말에는 부정하지 못했다. 루카는 그냥 차만 쭉쭉 빨아먹었다. 이내 두 아이는 클라비스의 연인이 어떤 사람일지를 주제로 떠들기 시작했고, 루카는 혀를 깨물고 싶은 마음으로 위태로운 다과회를 겨우 끝냈다.
밤, 루카는 클라비스에게 소문에 관한 것을 묻는다. 클라비스는 “알고 있었다.”고 대답하고, 루카는 그러면 자신에게도 알려주었어야 하는 것 아니냐고 펄쩍 뛰었다. 클라비스는 어차피 소문이 난 것이고 너도 알게 되었으니, 이제 타인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고 그냥 네가 돌아다녀도 되는 것 아니냐고 말한다. 네가 원한다면 소문의 주인공이라 말하며 소개해 줄 수 있다는 말에 루카는 “당신의 체면을 깎아 먹는 일이잖아요. 저는 그런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아요.” 하고 답한다. 클라비스는 이에 침묵했지만, 루카는 몇 번이고 침실에 신세 지는 것도 미안한 일인데 당신에게 그런 소문까지 씌워주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이후로도 조금 조심하는 것이 좋겠다고 클라비스에게 몇 번 권했지만, 클라비스는 “그런 소문은 나와 관계없다.”라고 말하며 루카의 제안을 무시했다.
※ 클라비스는 루카가 소문에 관한 것을 강경하게 부정하는 것도, 이를 거짓말이라 공표하라고 종용하거나 소문이 더는 나지 않게 조심하는 것이 좋겠다는 말도 내심 서운하였다. 그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한 후 얼마 되지 않아 알게 되었지만, 루카와 그런 소문이 퍼지는 것은 나쁘지 않다고 여겼기에 방치하였다. 루카가 조금 더 편안하게 운신할 수 있도록 공표하고자 하는 제안을 했지만, 이를 단칼에 거절당한 건 ‘클라비스와는 그런 소문으로 엮이고 싶지 않다’는 의견으로 느껴졌다. 더군다나 ‘폐를 끼치고 싶지 않다’는 말은 그들이 아주 먼 사이거나, 남으로 느껴지는 말이 아니던가. 그토록 예를 차리는 것이 어쩐지 선을 긋는 것으로도 느껴져서 클라비스는 불쾌했다. 허나 루카가 그를 걱정하는 것은 명백했고, 루카의 행동을 클라비스의 기준으로는 이해할 수 없어도 루카는 언제나 그런 구석이 있었기에, 클라비스는 내키지 않아도 루카의 행동을 호의로 비롯된 것으로 여기었다. 다만 진실로 그는 루카가 상대라면 오해받는 것도 개의치 않았고, 타인의 시선 따위에 휘둘려서 루카와 산책하는 일을 그만두고 싶지도 않았기에, 앞으로 조심하자는 제안은 그대로 무시하였다.
¶21주째
7월 24일 : 노을 지는 비공도시에서 느긋하게 산책을 다니던 루카는 다급하게 달려온 안젤리크를 마주한다. 안젤리크가 정신없이 이야기한 내용은 한 가지, 로잘리아가 과로로 쓰러졌다는 것. 안젤리크는 아무래도 자신이 옆에 있으면 편히 쉬지 못하는 것 같아서 간호하지 못했다는 이야기와 함께, 로잘리아의 병문안을 하러 가달라고 말했다. 안젤리크의 손에 이끌려 방문한 특별 기숙사. 몇 번이고 걱정 섞인 말을 반복하는 안젤리크를 다정하게 얼러서 방으로 들여보내고, 루카는 로잘리아의 방을 노크했다. 힘없는 목소리가 안젤리크에게 자신은 괜찮다고 방으로 돌아가라 말하는 것을 들었을 때, 루카는 방문을 열었다. “언니(お姉さま)?!” 로잘리아는 매우 놀라 몸을 일으키려 했고, 루카는 빠르게 뛰어 로잘리아를 다시 침대에 눕혔다. “안젤리크가 이야기했죠? 그 아이, 나는 괜찮다고 몇 번을 말해도…!” 로잘리아가 격정적인 어조로 무언가를 말할 때, 루카는 로잘리아를 눕히며 약은 먹었냐고 물었다. “저녁은 먹었어, 로지? 죽 끓여줄까? 아니면 따로 먹고 싶은 게 있어?” 그리 말하며 주방에 내려갈 기세의 루카를, 로잘리아는 저도 모르게 붙잡는다. 손을 뻗어 소매를 잡고도 제가 더 놀라 화들짝 손을 떼는 모습. 루카는 의아하게 고개를 돌렸다가, 다정하게 웃었다. “따뜻한 물 떠올게, 로지. 가져와서 잘 때까진 있을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아프면 외롭잖아.” 그리고 루카는 정말 따뜻한 물을 떠 와서, 로잘리아가 잠들 때까지 옆에서 토닥여 주었다. 아플 때는 자는 게 최고라는 말과 일정한 토닥임은 사람의 긴장을 풀어내는 구석이 있어서, 로잘리아는 꿈도 꾸지 않고 깊은 잠에 빠졌다.
7월 27일 : 5차 정기 심사
¶22주째
7월 31일 : 루카는 로잘리아의 몸이 걱정되어서 따로 불러내어 아픈 곳은 없는지 회복은 잘 되는지, 무리는 하지 않는지 물었다. 로잘리아는 자기는 몸 관리는 만전이지만 느긋하게 쉬고 있을 시간은 없다고 답한다. 루카는 그래도 최고의 실력을 내보이려면 몸 관리도 중요하다고 말했고, 로잘리아는 “그럴 여유 따윈 없어요. 안젤리크, 그 아이를 이기려면…….” 하고 중얼거린다. 루카는 로잘리아의 상태가 좋지 않다는 생각에 조금 한적한 곳으로 옮겨 대화를 시도했고, 몇 번이고 이를 거절하던 로잘리아는 결국 대화에 응했다. 사소한 이야기에서 일상까지, 주제를 정하지 않은 잡담은 하지 않으려던 말도 끌어냈고, 로잘리아는 결국 제가 확신을 잃었다고 말한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여왕 후보였던 존재, 가문의 기대를 걸고 살아가며 비공도시에 온 로잘리아 데 카타르헤나. 그는 승리를 의심하지 않았던 시험에서 제게 닥쳐온 패배에 조급해진 상태였다. 차라리 안젤리크를 미워할 수 있었으면 편하다고 이야기하는 로잘리아 앞에서, 루카는 침묵했다. 더없이 친애하는 친구지만 맞수. 우습게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이내 동등하게 경쟁하는 상대가 되었다. 그래도 질 것이라는 생각은 해 본 적 없다. 하지만 안젤리크는 눈부신 성장을 이루었고, 로잘리아는 때때로, 제가 그를 따라갈 수 없는 게 아닌가 의심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추해요, 이런 생각. 여왕 후보에게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아요. 알고 있는데…” 로잘리아의 목소리는 격정으로 가득 차 있었고, 어쩐지, 루카는 그 흥분이 울음을 닮았다고 생각했다. “저, 라이벌로서 그 아이를 인정하고 있어요.” 하고 서두를 연 로잘리아는 안젤리크가 절 라이벌로 보기는 하는지 의심스럽다는 이야기와 함께 저 홀로 아등바등하는 모습이 우습기까지 하다고 말했다. 안젤리크는 저를 라이벌로도 보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그게 자신이 모자라서일지도 모른다니 비참하기 짝이 없다고. 그 비참함이 자신을 제일 괴롭게 한다고 말했다. 그는 언제나 긍지 높은 사람이었는데 그럴 수 없음이 괴롭다고. 이런 생각을 하는 자신이 꼴사납다는 이야기. 루카는 제가 해 줄 수 없는 말이 없어 침묵했다. 제가 살아온 삶의 목표 전체가 무너지고, 승리와 쟁취를 위해 올곧게 노력했음에도 보답받지 못하는 것을 위로할 수 있는 말은 없으므로. “그러네, 정말 어려운 이야기다, 로지.” 하고 대답하는 게 루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23주차
8월 6일 : 루카와 마주친 안젤리크는 기운이 없는 얼굴로, 로잘리아에게 미움받은 것 같다고 말했다. 마주쳐도 말을 길게 섞지 않고, 요즈음은 육성 대신 방해로 안젤리크가 여왕시험의 목적으로 육성하는 대륙인 엘류시온에서 서크리어를 줄여버리기 일쑤. 이전처럼 얼굴을 마주하면 모진 말을 해오지는 않지만, 대화도 짧아졌고 말에서는 미묘하게 가시가 있다고. 로잘리아가 사과를 받아주지도 않는다는 말에 루카는 로잘리아가 열등감이나 자기혐오를 극복하지 못했음을 짐작해낸다. 루카는 안젤리크를 달래주며, 제가 로잘리아에게 한번 말해보겠다고 이야기했다. 안젤리크는 몇 번이고, 로잘리아에게 잘못한 게 있으면 사과하고 싶다고 말했다. 루카는 사실, 사과할 수 없는 일이 문제라고 생각했지만, 굳이 말하지는 않았다. 아마 안젤리크도 짐작하고 있을 것이므로.
8월 9일 : 루카는 아무래도 로잘리아가 자신도 피하고 있는 것 같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웬만해서는 한 번 마주칠 법도 한데,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다면 답은 하나밖에 없다. 이거 어색한데, 하고 머리를 긁적이는 밤. 루카는 별로 내키지는 않지만 밤에 특별 기숙사로 밀고 들어가야 하는지 고민했다. 그런 방식으로 좋은 결과를 낼 수 없다는 사실은 안다. 더 기다려야 하나. 머리를 긁적이며 특별 기숙사 주위를 서성이던 루카는 로잘리아가 기숙사 밖으로 나서는 모습을 본다. 달이 중천에 뜬 심야. 언제나 모범생이던 로잘리아가 저런 짓을 하는 건 처음이다. 루카는 모종의 충동에 이끌려 로잘리아의 뒤를 쫓는다. 달밤의 미행. 지금이라도 로잘리아를 불러 세울지, 아니면 돌아가 다음을 기약할지 고민하는 매 걸음. 깊은 숲을 지나며 고민하는 동안, 로잘리아는 어둠 너머로 사라졌다. 진짜 망했네, 돌아갈까. 루카는 달도 비치지 않는 밤의 숲에 가만히 서서 고민하다가, 일전에 느낀 적 있던 감각에 사로잡힌다. ‘누군가 자신을 부르는 듯한’ 감각. 루카는 로잘리아가 저를 부르고 있다는, 제가 그에게 필요하단 확신에 차서 발을 옮기고, 이내 숲의 폭포 앞에 망연하게 선 로잘리아의 뒷모습을 발견한다. “로지.” 루카는 조심스럽게 로잘리아를 부른다. 뒤를 돌아보는 로잘리아는 입술을 앙다물고 있었고, 루카는 어딘지 그런 로잘리아의 얼굴이 우는 것처럼 보여서, 무엇도 말할 수 없었다. 루카는 반사적으로 로잘리아를 끌어안으러 팔을 뻗었고, 로잘리아는 그 손을 모질게 내쳤다. 제가 뿌리치고도 제가 놀란 표정. 루카가 사과하기 전에 먼저 로잘리아는, “당신에게는 위로받고 싶지 않아요.” 하고 말했다. 루카는 이유도 모르고 “미안해.” 하고 사과했고, 로잘리아는 일그러진 표정으로, “그러니까 당신이 싫어요. 무엇도 생각하지 않고 내 편을 들어서, 내가 동생이라도 된 것처럼 굴어요. 당신에게 인정받고 싶었는데, 그렇게 아이 취급하는 걸로 제 노력을 물거품으로 만들잖아요!” 루카는 로잘리아의 어깨가 드물게도 크게 오르내리는 걸 보다가, 조금 자신감 없는 목소리로, “…그렇지만 로지, 난 언제나 네가 대단하다고 생각했어.” 하고 변명했다. 루카는 느릿하게 제가 할 수 없는 노력을 해내는 로잘리아를, 그 긍지를 대단하다 여겼고, 그렇기에 네가 상처받는 걸 보고 싶지 않았다고 말한다. “내가 참견하는 게 널 괴롭게 했다면, 이젠 그러지 않을게. 하지만 로지, 마지막으로 한마디만 들어줘. 나는 널 알아. 너도 날 알겠지. 우리 같은 인종은, 스스로 인정할 수 없는 방법으로 이긴다고 한들, 오래도록 후회하고, 이윽고 승리마저도 패배처럼 받아들이게 되잖아. 네가 만족할 방법으로, 스스로 후회가 남지 않을 방법으로 임해.” “제게 패배하라고 말씀하시는 건가요?!” 로잘리아가 비명처럼 내지르는 소리에, 루카는 기어코 다가서서 로잘리아를 끌어안았다. “아니, 어느 방향이든 네가 만족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길을 가라는 뜻이야. 긍지 높은 로잘리아, 네게 걸맞게.” 로잘리아는 “…비겁한 방식으로 말씀하시네요.” 하고 말한 뒤 입을 다물었고, 루카는 젖어 드는 어깨를 무시하며 최대한 로잘리아를 몸으로 가렸다. 이 도도한 아가씨가 절대 보이고 싶지 않은 얼굴을, 달의 눈에서도 가려보려고.
¶24주째
8월 12일 : 숲의 초입에서 발을 동동거리며 루카를 기다리던 안젤리크는, 루카를 마주치기 무섭게 환한 얼굴로 로잘리아와 화해했다고 말했다. 로잘리아가 지금까지 모질게 대한 것을 사과한다고 말해서 그럴 필요 없다고 대답한 뒤 같이 차를 마셨다고. 언니가 도와준 덕분이라고 환하게 웃었던 안젤리크는 다음에 같이 차를 마시자는 약속을 남기고 빠르게 뛰어 사라졌다. 루카는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로잘리아가 어려운 길을 택하기로 한 모양이라 생각한다.
8월 15일 : 클라비스는 출장을 떠나 주인 없는 침실에 누워있던 밤, 루카는 문득 ‘밖으로 나가고싶다’는 충동에 휩싸인다. 누군가 부르는 건 아니다, 하지만 가야 한다. 온 비공도시의 공기가, 우주가 환희에 물결치는 순간. 루카는 다급하게 창문을 뛰어내리듯 넘어서 비공도시로 뛰쳐나갔다. 마침 출장에서 돌아오던 클라비스를 마주친 루카는 그의 손목을 당기며 별을 보러 가자고 종용한다. 클라비스는 당혹스러운 기색을 내비쳤으나 루카가 가자는 대로 순순히 발을 옮겼고, 루카는 클라비스의 손을 잡은 채로 끌어당기며 숲의 호수에 도착했다. 별이 쏟아지기 시작한다. 루카는 제가 클라비스의 손목을 잡고 있다는 것도 잊고 순수하게, 아름다운 광경이 주는 환희에 젖어 든다. 넋을 잃을 정도로 화려한 별들의 춤. 클라비스는 문득 루카에게 “너는…… 이 광경이 아름답다고 생각하나…? 별이 죽어 흩어지는 광경을……?” 하고 묻고, 루카는 클라비스를 올려다보았다. 고양이 주는 기이한 통찰이 클라비스가 루카에게 긍정을 갈구하고 있음을 알게 하였다. 루카는 클라비스가 무엇을 원하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면서도, 본능적인 판단으로, 그의 존재를 애정으로써 긍정하였다. “예, 아름다워요.” 하고 시작한 말을 "그러니, 저는 안식을 맞이한 그들의 삶에 찬사를 보낼 거에요. 동시에, 이 찬사는 당신의 것입니다. 이 우주의 모든 안식은 당신에게서 비롯되기에." 하고 마무리 지었다. 클라비스는 수십 개의 별이 떨어질 동안 침묵하였다. 그저 루카의 눈을 들여다보던 클라비스는, 한숨처럼 “……그런가.” 하고 중얼거렸다. “…그래, 네 말대로…. 아름다운 광경이다…….” 루카는 그리 중얼거리는 클라비스의 얼굴이, 어딘가 달관한 사람을 닮았다고 생각한다.
※ 클라비스는 루카가 제 손목을 잡아당기는 것을 의아하게 생각하였다. 만난 지 오랜 시간이 지나도 이 아이는 그에게 일정 거리 이상 가까이 다가온 적이 없으므로. 하지만 오늘의 루카는 어딘지 들떠 환희 그 자체가 되기라도 한 듯 찬란한 구석이 있었고, 클라비스는 루카가 기어코 그의 선을 짓밟고 어둠에 불을 지르고야 마는 순간을, 그 빛에 이끌려 받아들인다. 숲의 호수. 잔잔한 수면 위로 별이 비처럼 내린다. 유성우가 쏟아지는 모습을 바라보는 루카는 클라비스의 손목을 잡았다는 사실도 잊고, 그 손에 힘을 주며 매달린다. 클라비스는, 손목을 덮은 천 너머로 느껴지는 살갗의 온기가, 데일 정도로 따뜻하다고 느낀다. 사람의 온기를 느끼는 것은 얼마 만인가. 저 너머에서 전해져오는 선명한 기쁨은, 또 얼마 만에 실감하는 것인가. 언제나 희미하던 현실감은 기이할 정도로 아름다운 풍경과 함께 역설적으로, 지금이 현실이라 실감하게 만든다. 그러니 그는 충동적으로 질문했고, 루카는 그를 올려다보며 웃었다. 어슴푸레한 빛을 받은 루카의 양 눈은 금빛의 달과 같고, 태양처럼 희었다. 밝고 반짝이는 세계의 상징을 모두 담고, 루카는 클라비스를 긍정하였다. 그의 존재가 필요하다고 말하고, 그의 세계가 아름다우며, 그와 함께 있기에 기쁘다고 을러주었다. 루카가 손을 놓고 호수 쪽으로 나아갈 때, 그는 제가 아쉬움을 느낌을 안다. 호수를 등지고 그를 돌아보며 당신과 지금을 함께하기에 기쁘다고 말하는 루카를 보며, 클라비스는 긍정했다. “…그래, 네 말대로…. 아름다운 광경이다…….” 별을 등지고 선 루카는, 저항할 수 없을 정도로 사랑스럽다. 그는 비공도시의 시험이 끝나면 다시는 볼 수 없을, 이 제멋대로인 침입자를, 그가 사랑하고 있음을 받아들인다. 오래도록 부정하였으나 이제는 외면할 수 없었다. 그는 제 여생이 모두 어둠 속에 처박힌 이 숲의 호수에서, 다시금 제가 파멸의 운명 앞에 섰음을 안다. 루카는 떠나고, 그는 희미한 빛도 보지 못한 채 괴로운 여생을 버텨나가겠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 운명을 받아들이기로 마음먹는다. 아, 사랑은 이토록 어리석은 일이다.
8월 17일 : 비공도시에 다시 유성우가 내린다. 루카는 클라비스 옆에서 그의 수정구를 통해 두 여왕 후보를 우주가 축복하는 모습을 본다. 루카는 클라비스에게 “여왕시험이라는 것도 곧 끝나겠네요?” 하고 물었고, 클라비스는 드물게도 온화하게 “그렇다.” 하고 대답해 주었다.
¶25주째
8월 20일 : 평소와 같이 클라비스의 방에서 수다를 떨던 루카는, 어느 순간, 클라비스의 목소리가 전례 없이 부드러움을 깨닫는다. 제가 요란스러운 몸짓을 보여도 쫓아오는 시선이며, 잦지 않아도 더없이 다정한 추임새. 마치, 애정을 담은 듯한 행동들. 루카는 당혹스러운 심정에 입을 다문다. “…루카?” 클라비스는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루카를 부르고, 루카는 클라비스의 눈이 촛불의 빛에 보라색으로 반짝이는 모습을 본다. 제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는 심장을 쥐는 듯 다정해서, 루카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클라비스와 만나 함께 시간을 보낸 지 오래되었다. 이제 그들은 남이라고 부를 수 없다. 저 이는 내게 애정을 품을 만큼 변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하고 대답은 하였지만, 루카는 차마 내지를 수 없었던 비명을 조용히 삼켰다. 저 치가 제게 애정을 품은 만큼, 아니면 그보다 더, 제가 클라비스를 좋아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으므로.
※ 클라비스는 루카가 제 애정을 어렴풋이나마 눈치챘음을 알았다. 하지만 지금 알아서 무엇이 바뀐단 말인가? 여왕시험은 막바지에 접어들었고, 이는 그들이 만날 수 있는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러니 클라비스는 루카가 상황을 여상스레 넘겨버리려는 행동에 동조했다. 고통을 끌어안고 어둠에 잠겨 드는 것은 클라비스 한 사람으로 충분하다. 루카는 원래 감정에 둔감한 구석이 있으니, 깊이 생각하지 않도록 둔다면, 이후 헤어진다고 하여도 괴로워하지 않을 테다.
8월 24일 : 6차 정기 심사
¶26주째
8월 27일 : 루카는 강변에 앉아 흥얼거리며, 노래를 부르면 동물이 제게 다가온다는 판타지 같은 순간을 마음껏 즐기는 중이었다. 수풀이 흔들리더니 말과 그 위에 올라탄 오스카가 나타났다. 루카는 숲에 말이 들어왔다는 사실에 당황하였으나, 이내 말에게 관심을 빼앗긴다. 한참 그의 말을 쓰다듬다가, 말 주인인 오스카를 너무 방치해두었나 싶어서 눈치를 보았을 무렵, 오스카는 루카를 들어 말 위로 올리고는, 산책을 시작한다. 당황했던 루카는 이내 제가 안전한 곳에서 안전을 보장해 줄 수 있는 사람과 말을 타고 있음을 깨닫고, 빠르게 달려달라고 오스카를 종용한다. 오스카는 루카의 부탁을 들어주었고, 루카는 비공도시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절벽 위쪽까지 저를 데리고 온 오스카에게 감사를 표했다. 돌아가는 길도 오스카가 앞에 태워 주었으나, 결국 다음 날은 근육통으로 고생하였다.
※ 오스카는 숲속의 루카를 보고 어울리지 않게도 ‘요정’이 아닌가 의심했다. 원래도 존재감이 사람이라 보기 어려울 정도로 옅던 루카는, 노랫소리와 함께 새들 사이에 파묻혀 있으니 정말 사람이 아닌 양 보였다. 루카는 오스카의 말, 비세테에게 큰 관심을 보였고, 이내 친근한 표정과 어조로 비세테에게 말을 걸었다. 검술 수련 시간에도, 함께 어울려 돌아다니던 순간에도 볼 수 없었던 표정. 긴장을 풀고 기뻐하는 얼굴. 오스카는 되먹지 못하게 질투하는 자신을 본다. 루카가 비세테에게 보이는 애정의 근간은 ‘오스카의 말’이기에 그렇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오스카는 루카가 내보이는 애정을 탐냈다. 그는 제가 그런 모습을 보이는 건 어울리지 않음을 안다. 루카의 기쁨이 기꺼워 장단을 맞추던 것을 그만두고, 주도권을 돌려받으려 조금 강제적인 방식으로 말에 태웠다. 하지만 루카는 당황하다 이내 오스카를 믿고, 순수한 즐거움으로 웃었다. 찬탄, 그가 세상에서 가장 대단한 사람이라도 되는 듯 감탄하는 목소리. 오스카는 결국 그가 ‘다른 사람을 대하듯이’ 루카를 가볍게 대할 수 없음을, 루카는 그가 겪어온 그 어떤 사람과도 달라서 오스카도 지금껏 하던 대로 가벼운 감정으로 흘려보낼 수 없음을 인정한다.
¶27주째
9월 2일 : 2학기 개강
9월 6일 : 루카는 산책하던 중, 거대하고 하안 새를 본다. 긴 꽁지깃이 아름다운 새는 무엇보다 신성해 보였고, 루카는 모종의 감각으로, 저 새는 살아있는 것이 아니라고 직감한다. 새의 형상을 했을 뿐인 ‘무언가.’ 해를 끼칠 의도는 없어 보이니 루카는 조용히 새의 눈에 띄지 않게 지나간다. “끝나려는 모양이네.” 저도 모르게 입 밖으로 튀어나온 말. 루카는 제가 왜 이런 이야기를 했는지 고민했지만, 결국 ‘새가 그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서 모습을 드러낸 것.’이라고 결론 짓고 산책을 마무리했다. 왠지 누구에게 말할 기분도 들지 않아서 클라비스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 루카가 본 것은 우주의 의지. 본디 여왕과 여왕 후보가 아니면 눈으로 볼 수 없는 존재이다. 루카가 이해한 대로, 새로운 여왕이 결정되는 날이 얼마 남지 않았기에 등장한 것은 맞다. 다만 루카도 모르는 목적이 있었다면, 우주의 의지는 루카를 한 번 살펴보고자 했다. 저와 완전히 다른 세계에서 온, 유유히 새로운 터가 될 우주를 휘젓고 다니는 이방인을.
¶28주째
9월 11일 : 평소처럼 클라비스가 준비해 준 간이침대에 누운 루카, 그는 문득 온 공간이 뒤집히는 느낌에 놀라 일어선다. 무언가, 무언가 아주 거대한 일이 일어난다. 루카는 본능적으로 오늘 ‘여왕시험’이 끝난다는 사실을 알았다. 승자가 로잘리아일 리 없다. 루카는 모종의 충동으로 창문을 넘어 정신없이 특별 기숙사로 내달렸다. 역시 잠에서 깨어난 로잘리아가 기숙사 밖으로 나오던 참이었다. 황망한 얼굴. 상황을 파악한 로잘리아의 얼굴에선 각오한 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의 비장함과, 참담함이 그대로 드러났다. 루카는 다급하게 로잘리아의 손목을 붙잡고, “로지, 후회할 일을 남기지 마!” 하고 소리쳤다. “마지막까지, 달려봐, 이걸로 끝이 아니라는 건 알잖아! 네가 하고 싶은 일을 해!” 루카는 제 입에서 나오는 말이 스스로도 엉망이라 느꼈다. “…가도 비참해지기만 할 뿐이에요.” 하는 대답. 루카는 거의 울먹이는 목소리로, “아니야!” 하고 부정했다. “분명, 여왕으로서 가져야 할 몸가짐도, 생각도, 무얼 어떻게 해야 하는지 더 잘 아는 사람도 너야, 로지. 가서 도와줘. 패자의 태도라니 뭐니 하는 생각은 내다 버리고, 네가 하고 싶은 일을 해.” 루카는 반쯤 끌고 가는 형식으로 로잘리아를 공원으로 데려간다. 이유는 모른다. 그곳으로 가야만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로잘리아는 놓아달라는 말을 몇 번 하다가 이내 포기했고, 곧 각오에 가득 찬 표정이 되었다. “좋아요, 그 아이는 분명 당황하고 있을 테니까, 제가 가서 ‘여왕다움’이 무엇인지 알려주도록 하겠어요.” 로잘리아가 그리 말했을 때, 루카는 환히 웃었다. “응. 나는 언제나 네 편이야, 로지.” 로잘리아가 공원 안으로 사라지고, 공간을 가득 채우는 기이한 환희가 절정에 달했을 때, 밤하늘을 수많은 별이 가로지른다. 별들의 대이동. 루카는 본능적으로 무엇인지 모를 ‘여왕시험’이 이 순간을 위해 치러졌음을 깨닫는다. 아름다운, 끔찍이도 아름다운 광경. 여왕시험이 끝났다.
※ 로잘리아는 공원의 정자에서 안젤리크를 만났다. 안젤리크는 제가 여왕이 되었다는 상황을 받아들였지만, 마음 깊숙한 곳에 남아있던 불안과 당황을 미처 모두 지워내지 못했다. 이를 위로하듯이, 로잘리아는 안젤리크의 손을 잡아주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여왕다운 사람은 로잘리아 데 카타르헤나, 자신이니까. 안젤리크의 옆에서 앞으로도 ‘여왕다운 여왕’이 되도록 도와줄 수 있는 것은 자신뿐이다. 로잘리아는 그렇게 여왕보좌관의 직위를 받아들이고, 결심한다.
9월 12일 : 새벽에 들어온 탓에 늦잠을 자던 루카는 클라비스에게 여왕이 안젤리크로 결정되었음을 전해 들었다. 여왕시험 192일차의 일이었다. “…길었네요.” 루카는 그리 대답하고 졸음이 선명한 얼굴로 클라비스의 방을 나갔다. 다시 문을 열면 아무도 없는 제 방. 루카는 어딘지, 길고 비현실적인 여행을 끝낸 기분으로 다시 침대에 누웠다. 오늘은 추석 연휴의 시작이니까,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잘 예정이다.
9월 15일 : 추석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다음 날. 루카는 클라비스가 성지로 돌아 가야 한다는 말을 듣는다. 깊게 생각해 본 적 없었으나, 루카는 ‘공간’에 묶여있으니 클라비스가 ‘성지’라는 곳으로 돌아가면 다시 만날 수 없게 된다. “…너와의 만남에 감사한다. 우연과, …운명이라는 녀석에.” 클라비스는 감정을 읽을 수 없는 목소리로 그리 말했다. 루카는 어쩐지, 오늘 이 이별이 영원한 이별이 되지 않으리라 직감했지만, 클라비스의 판단이 제 것보다 나으리란 생각에 제가 틀렸다고 규정했다. “저도, 만나서 기뻤어요. 클라비스님, 그곳에서도 부디 건강히 지내세요. 식사 같은 거 거르지 마시고.” 루카는 무슨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모르겠다고 생각한다. 웃어야 하는가? 아니면 울어야 하던가? 루카는 제 얼굴을 볼 수 없으니 무슨 표정을 하는지도 모른다. 그저 고개를 숙이고, “잘 지내세요.” 하고 반복했을 뿐이다. 그렇게 두 사람은 작별했다. 루카는 자고, 일어나서, 제 방으로 돌아갔다.
¶29주째
9월 16일 : 해가 져도 방문 너머는 제 방이었다. 루카는 문득, 앞으로도 제가 저 알 수 없는 곳으로 넘어가는 일은 없으리라 생각한다. 아닌가? 잘 모르겠다. 그는 그냥 새 학기에 적응하여 일상으로 복귀하였다. 사람을 신경 쓰지 않는 건 좋았다. 산책할 수 있는 곳이 줄어든 건 힘들었다. 그 정도 감각으로 이상한 만남은 끝난다.
¶30주째
클라비스의 방에 갈 수 없었다. 가지 않았다.
¶31주째
10월 4일 : 밤. 얼마 없는 수업을 듣고 귀가한 루카는 피곤한 몸을 이끌고 방문을 열었다. 그리고 보이는 건, 2주 지냈다고 당연해진 ‘내 방’이 아니라 반년도 넘게 지냈던 ‘클라비스의 침실.’ 편안하게 수정구를 들여다보던 클라비스와 눈이 마주친 루카는, “저번에 완전히 헤어지는 게 아닐 것 같았다니까.” 하고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그래. 루카의 감이 옳았다. 잠시 멀쩡해졌던 공간은 다시 비틀렸고, 루카는 또, 제 방을 잃었다. 반가운 우연이었다.
> | 타임라인 (Special/Duet) | admin | 2023.06.04 | 89 |
2 | 현대 AU (클라비스 X 루카) | admin | 2021.11.12 | 58 |
1 | 드림 서사 문답 (클라비스 x 루카) | admin | 2021.09.22 | 6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