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명한 의사 클라비스와 평범한 대학생인 루카. 어느 날, 루카가 조별 과제를 위해서 (술 먹고) 클라비스에게 인터뷰를 요청하는 이메일을 보내며 두 사람의 긴 인연이 시작되었다. 당시의 클라비스는 ‘유명’한, 일명 셀럽에 가까운 위치에 있는 의사였으니 당연히 인터뷰 요청을 받아주리라 생각하지 않았다. 다만, 술을 먹고 되는대로 휘갈겨 쓴 루카의 글은 사람을 설득하는 면이 있었고, 마침 한국에 와 있던 클라비스가 그러면 호텔로 와서 하루쯤은 인터뷰를 받아주겠다고 이야기한다. 절대 엮일 일 없던 사람이 엮이기 시작할 때, 운명의 수레바퀴는 육중한 소리를 내며 구르기 시작한다.
- 인물 정리
클라비스 엘 샬카위 : 첫 만남 기준 (한국 나이) 27세. 롬족(집시) 출신으로 어린 나이에 부모와 헤어져 이집트에 정착. 복잡한 과거사 끝에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유명하고, 유망하며, 명성을 떨치는 의사가 되었다. 뇌외과 의학의 권위. 다만 자신의 삶을 비롯하여 태반의 것에 집착도 관심도 없고, 무기력하며, 염세적이다. 일 이외에는 아무런 감흥을 느끼지 못하며, 자신에게 의술 이외의 가치가 없다고 생각한다. 만사를 잘 기억하지 않으며 해야 할 일만 할 뿐 명성에도 재산에도 관심이 없다. 주변의 평가를 빌려 ‘삶에 지치고 질려서 어느 순간 손을 놓아버려도 이상하지 않은 사람.’ 나이에 비해 많고 격렬한 경험이 그에게 일종의 탈속적인, 신에 가까운 시선을 주었다. 미래를 예견하는 감이 있고, 타로에 능하다. 의사라기엔 아이러닉한 특징. 감정적이고 감성적인 인간으로, 살아있어서 앞으로 좋은 일이 없다고 확신할 수 있는데, 살아갈 이유가 있는가? 라는 생각으로 짐작할 수 있듯, 그는 언제나 삶의 이유와 가치를 찾는다.
쥴리어스 래드포드 : 첫 만남 기준 (한국 나이) 27세. 미국 보스턴 출신의 정치가. 정치가 가문에서 내세운 젊은 차세대로, 강한 신념을 가지고 자신이 믿는 길을 나아간다. 간단하게 말해서 꼰대. 위의 클라비스와는 그가 의대에 입학한 이후 (약 1n년 전)부터 아는 사이. 오래된 지인임에도 클라비스의 허무주의적 태도를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느끼는 중. 기본적으로 정장을 입고 다니며, 가벼운 옷을 입은 모습을 보이는 일이 적다. 엄격한 성장환경의 영향으로 인간 대 인간의 관계에서 서투른 모습을 보이는 일이 잦으며, 한 번 정한 일은 자신이 받아들일 수 있는 이유가 없으면 바꾸지 않는 성격.
루카 솔르 (류 현) : 첫 만남 기준 (한국 나이) 20세, 대학생. 여러 이유로 자신과 타인의 감정에 둔하고, 타인을 이해함에 어려움이 있다. 이를 감출 수 있을 만큼 사회적으로 굴 수 있고, 개인이 아닌 보편적 의미에서 타인을 이해했다. 다만 이를 ‘인간’을 이해했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점에서 짐작할 수 있듯, 자신이 인간이 아니라고 느낀다. 이는 고독, 소외감, 이질감의 발현. 과거에 우울증을 겪은 적 있으나 극복하였고, 이 과정에서 타고나길 강했던 정신력이 다듬어졌으나 과거의 기억을 대부분 잃었다. 기본적으로 쾌활하고, 유능하며, 자신만만하다. 가족에게 사랑받고 자랐으며, 건강하지만 완벽하게 조형된 ‘이상적 인간’을 추구하는 모습이 사람의 모조품이란 느낌을 준다. 기본적으로 타인에게 자신의 온전한 자아, ‘나’를 드러내지 않으려고 구는 성향이 있으며 언제나 자기 자신을 경계하며 살고 있다. 사람을 좋아하고 쉽게 정을 주며 다정한 성격. 동시에 사람에게 쉽게 정을 떼고 미련을 남기지 않으며 감정을 느끼는 일조차 ‘가치’와 ‘당위’를 따지는 인간으로, 이 모순이야말로 그의 본질이다.
- 사건 정리
대학교 조별 과제로 ‘유명인을 인터뷰하여 발표’하는 일을 수행하게 된 루카. 그는 대학 신입생 특유의 패기와 무지로 하여금 터무니없는 짓을 저지르게 된다. 이는 한참 뉴스의 화두가 되고 있던 뇌외과 부문의 권위, 세계 단위로 ‘유명한 의사’인 클라비스 엘 샬카위에게 인터뷰 요청 메일을 보낸 것. 술에 취해 충동적으로 저지른 일이었고, 이가 받아들여지리라 생각한 적 없었다. 다만 무슨 변덕인지 클라비스는 대학 신입생의 인터뷰 요청을 받아들였고, 이는 메일도 아니라 대면 취재였다. 마침 그가 한국에 들러 호텔에 머물고 있던 시기라 가능한 행운으로, 루카는 급하게 약속을 잡았다.
루카가 내보인 놀라운 성취와 별개로, 루카는 조별 과제의 조원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는 데 실패했다. ‘평범’을 모르기에 제멋대로 날뛰는 루카와 이를 방치하는 조원들. 이는 루카를 막지 않은 것이 아니라, 그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몰랐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의욕 없는 태도. 각자 하나씩 인터뷰를 해 오기로 했음에도 불구하고 실질적으로 결과를 낸 사람은 루카뿐이었다. 더군다나 은근히 루카를 무시하던 4학년 남자 복학생이 이를 숨기지 않으니 루카는 술김에 클라비스에게 메일을 보내고 인터뷰 약속을 잡았고, 이를 듣게 된 조원들은 상식을 아득히 벗어나는 현실에 의욕을 완전히 잃었다. 경악, 너무 과한 일을 하고 있지 않냐는 우려, 그들이 감당하기엔 너무 큰 일이라는 부담감. 다만 루카는 ‘그런’ 종류의 일에 둔감하고, 타인이 자신의 능력을 의심한다 느꼈으며, 나아가 평생을 반복된 상황 속에서 ‘내가 또 타인의 기준을 모르고 보편에서 벗어나는 실수를 저질렀다’고 느꼈다. 이는 방어기제를 불러일으키고, 루카는 다소 신경질적인 반응으로 ‘이건 제가 알아서 할게요.’ 라 선언했다.
당연히 후회하고 있었으나, 이미 저지른 말을 되감기엔 자존심이 상했다. 겨우 고등학교를 졸업한 대학 신입생. 루카는 어렸고, 제가 내뱉은 말에 책임을 지기 위해서 노력했다.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서는 차라리 밤을 새우고, 불가능에 도전하는 일이 편했다. 남에게 얕보이고 싶지 않았다.
인터뷰 당일, 루카는 표정 없는 클라비스 앞에서 자신을 ‘루카 솔르’라 소개했다. 당연히 본명은 아니었으나, 한 번으로 끝날 인터뷰에서 굳이 발음하기도 어려운 본명을 말할 필요는 없었다. 루카는 제대로 반응하지 않는 클라비스의 우울한, 혹은 비어버린 눈을 보며 반쯤은 반사적으로 ‘아, 완전히 망가진 사람이다.’라 생각했다. 본질과 상태를 한눈에 파악하는 것은 루카의 재능이며, 그가 평생 짊어진 배척의 이유기도 했다. 한두 마디 말을 섞고, 어조와 기색, 단어 선택과 기저를 읽어 과거의 일과 현재의 사고를 추측하는 능력. 루카는 인터뷰에 앞서 두어 마디 분위기를 푸는 말로 클라비스가 제게 특출나게 무심한 게 아니라 그저 살아갈 힘을 잃었음을 짐작했다. ‘용케 아직 안 죽었네. 루카는 일종의 무심함, 타인이기에 가질 수 있는 건조함을 유지하며 인터뷰를 시작했다.
루카는 저도 모르게 인터뷰를 선문답처럼 진행했다. 클라비스의 기색을 읽어 의사와 생각을 사실에 가깝게 추측하고, 대답을 예상하며, 이를 확인하고 보조적인 정보를 알아내기 위한 질문을 늘어놓는다. 이는 클라비스가 지적이라도 했다면 나아질 수 있었겠지만, 클라비스는 굳이 지적하는 대신 성실하게 대답했을 뿐이다. 루카의 경험 부족과 미숙함은 그가 이 순간을 당연하게 여기도록 만들었고, 클라비스의 무심하기에 성실한 대답 속에서 거리와 선을 재는 법마저 잊었다. 가벼운 잡담을 하려다가 사람의 역린을, 숨기고 싶었던 기억을, 타인 앞에서 쉽게 드러내놓지 않는 감정을 찌르고 헤집는 대화의 연속.
클라비스는 굳이 자신을 가리거나 루카를 밀어낼 이유조차 느끼지 못해 질문에 대답하고, 깊이 들어오는 일을 막지 않았으나, 제가 무슨 짓을 하는 줄도 모르고 그에게 달려드는 루카를 ’미숙한 인재‘라고 평가했다. 강한 압박감 속에서 날카롭게 벼려져 날이 서고 판단력이 흐려졌음에도 빛나는 인간. 저것은 재능의 씨앗이며, 어떤 방식으로든 큰 영향을 미치는 사람이 되리라. 또한 클라비스는 루카가 분명히 한계에 가까운 상황임에도 제가 할 일이나 책임을 포기하려는 생각조차 없고, 심지어 그와 대화하며 즐거워하고 있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그는 분명 그와 비슷하게 세계의 무게나 운명, 타고난 한계나 상황 따위에 짓눌렸음이 분명함에도 전혀 다른 형태로 벼려져 반짝이는 인간을 보았다. 평가했다. 이는 일 이외의 무엇에도 관심을, 감정의 동요를 느끼지 않는 그의 늪 같은 인생에서 몇 없는 흥미였다. 그러니 평소와 다르게 신중한 말과 선별된 언어로 질문에 응했고, 딱히 언변이 좋다고 할 수 없는 그와 함께하면서도 원활한, 즐겁기까지 한 대화를 이끄는 루카에게 일종의 호감을 느꼈다. 이는 인간 대 인간의 호감보다는, 거대한 원석을 알아볼 수 있는 사람이 보이는 흥미나, 세계에 이름을 떨치는 거대한 자선 단체의 일원으로서 투자할 가치가 있는 사람을 보았다는 감흥에 가까웠으나, 앞서 말한 대로 늪과 같아 동요가 없는 클라비스의 인생에서는 더없이 드문 일이었다.
인터뷰는 좋은 분위기로 끝났다. 루카는 제가 영어로 대화하는 일이 많지 않음에도 그럭저럭 더듬지 않았다며 만족스럽게 집으로 돌아왔고, 제가 저질러놓은 행태를 보고 머리를 싸맸다. 그리고 오랜 시간이 지나서 회고하건대, 어차피 어떻게 인터뷰했어도 결과가 좋지는 않았으리라. 조별 과제에서 조 편성이 망했는데 혼자 열심히 해봤자 뭐 얼마나 좋은 결과가 나오려고?
다 같이 비슷한 일을 해야 하는 조별 과제에서, 한사람이 특출나게 뛰어난 일을 해내면 맞이하는 결과는 언제나 비슷하다. 표면으로 드러나지 않을 뿐인 불쾌함, 불편함. 루카를 무시하던 선배는 그의 성과를 제가 한 것으로 발표하고 싶다고 말했다. 취직이 비슷한 자기에게 양보하라나? 밥을 사겠다는 말로 저를 달래는 소리에 루카는 그대로 자리를 파투 냈다. 교수를 찾아가 ‘조별 과제’가 아니라 홀로 발표하게 해달라고 부탁하고, 조원과 싸우고, 이상한 놈으로 몰아세우는 놈과 다시 싸웠다. 애초에 학교생활이나 사람과 부대끼는 일에 익숙하지도 않으니 짜증은 쌓이기만 한다. ‘제기랄, 지가 잘하던가? 왜 나한테 난리야?’ 앞에서 하지 않았을 뿐, 몇 번이고 홀로 반복한 말이 가시처럼 머리를 찔렀다.
이미 정신력은 경각에 달했다. 이러다가 제대로 사고를 치겠다는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는다. 제기랄. 이대로 버텨서는 답이 나오지 않겠다고 판단했다. 루카는 결국 술이라도 마시자고 자신을 달랬다. 일탈을 겸해서 호텔 바에 구경이나 가면 되겠지. 주변의 좋은 호텔에 당당하게 들어서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그리고 다른 층에서 문이 열렸을 때, 루카는 제 일진이 더럽다고 생각했다. 꽤 넓은 공간이 좁게 느껴지는 거구. 검고 커다란 사람은 누가 봐도 상태가 좋지 않은 클라비스였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루카는 상태가 좋지 않을 때 사람을 상대하는 일을 좋아하지 않는다. 루카에게 ‘타인’을 상대하는 일은 언제나 고도의 정신력을 요구했다. 타인의 분위기도, 표정도, 감정도 제대로 읽을 수 없는 사람. 그는 사회적으로 합의된, 타인이 무의식적으로 읽을 수 있는 관계의 제스쳐를 무엇도 읽지 못했고, 말이 주는 함의를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러니 맥락과 타인의 사고, 기색과 행동의 기저에 깔린 가장 단순한 욕망을 읽어 상황을 역산해야 한다. 이는 고도의 집중력을, 정신력을 요구한다. 지쳤을 때 하고 싶은 작업은 아니다. 제기랄, 다른 장소에서 마주쳤다면 모르는 사람으로 치부하고 무시했겠지. 제길. 그냥 무시하려면 할 수는 있지만……. 루카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까닥, 묵례한 자신을 저주하며 가벼운 대화를 시작했다. 어색한 침묵보단 나았다. 클라비스가 대답하지 않아 저 혼자 떠드는 꼴이었지만, 뭐, 대답은 애초에 기대도 안 했으니까.
클라비스는 그 나름대로 힘겨운 시간을 보내던 참이었다. 고민을 의식 아래에 묻어놓고 흘러가는 대로 살던 삶. 가라앉아 평소에는 수면 위로 올라오지 않을 생각을 루카가 헤집어 흐렸다. 무력감, 탈력감, 염세적이고 퇴폐적으로 흘러가는 사고. 흙이 가라앉은 물을 휘저어 흐렸으니 클라비스의 정신세계에서는 절망과 자조가 끊이질 않았다. 다만 그는 절망하는 일에도 지쳤고, 삶에도 질렸기에, 감정에 집중할 기력조차 없었다.
우습게도 클라비스의 고민의 이유도 루카였다. 모든 것을 의식 아래에 묻어놓고 흘러가는 대로 살던 클라비스의 삶을 루카가 휘저어 놓았다. 묻어두었던 무력함, 탈력감, 염세적이고 퇴폐적으로 흘러가는 사고. 흙이 가라앉은 흙탕물을 휘저은 듯 클라비스의 정신세계에서 휘몰아치는 건 절망뿐이었다. 다만 그는 절망하는 일에도 지쳤고, 살아가는 일에도 질려 감정에 집중할 힘조차 없었을 뿐이다. 그러니 제 앞에서 떠드는 사람에게 기울일 여력은 더더욱 없었다. 그는 침묵했고, 이는 무시였다.
옆에 있는 사람의 숨통을 죄어버릴 분위기 속에서 두 사람은 목적지에 도착했고, 자연스럽게 일행으로 오해받았으며, 한 테이블로 안내받았다. 둘 다 혼자 왔고, 남녀. 일행으로 오해받아도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으나, 루카는 귀찮았다. 굳이 정정하고 새로운 자리를 안내받으며, 과정에서 사과받고 이에 걸맞은 반응을 내어주어야 한다는 사실이 끔찍하게도 귀찮았다. 결국 그는 적당히 반응을 뭉개버렸다. 클라비스가 거북해하면 자리를 뜰 생각이었으나, 클라비스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으니 그냥 마주 앉아서 무시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클라비스는, 이 상황에도 관심이 없었다.
이쯤에서 두 사람이 서로에게 느끼고 있을 감정이라고 해봤자, 좋은 소리는 나오지 않는다. 클라비스는 루카가 제 눈앞에 존재함을 인지했으나 그뿐이다. 우연히 재회한 상대. 그는 저 자가 저와 인터뷰했던 사람이라는 사실은 기억했으나, 이름을 떠올리는 데 조금 시간이 걸렸다. 이도 루카가 드물게 그에게 감흥을 남겼던 인간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클라비스는 루카의 존재가 거슬렸으나, 굳이 제가 무슨 행동을 하여 상대방을 밀어낼 정도로 격렬한 감정은 아니었다. 사실 부모의 원수쯤 되지 않는 이상 그가 반응할 일도 없었다. 그는 불쾌함을 희미하게 드러냈으나 그뿐. 제가 무엇을 느끼는지 들여다보지도 않은 채 흐름에 몸을 맡기고 눈을 감았다. 그는 깊이 생각하거나 고르지 않은, 그저 단락적인 음소에 불과한 반응으로 대화를 갈음했다.
루카 또한 희미한 짜증에 가까운 감각으로 클라비스를 상대했다. 루카는 클라비스와 달라 ‘감정’이라고 할 것을 제대로 느끼지 못하고 강렬한 신체적 감각, 이른바 희로애락이나 짜증 정도만 명확하게 구별할 수 있는 인간이지만, 지금 제가 이 상황을 불쾌하게 여기고 있다는 사실은 확실하게 알았다. 더군다나 클라비스에게 투자할 감정적 리소스가 풍부하게 남지도 않았다. 그러니 루카 또한 최소한의 반응을 내보인다. 사회적으로 반응하기 위한 페르소나를 뒤집어쓰지 않고, 타인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가공된 자신의 심정을 언어적, 비언어적 표현으로 내보이지 않으며, 사회적 합의에 맞게 가공한 반응을 신경 쓰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이는 감정적 반응보단 이성적인 판단에 가까웠으나, 루카에겐 이 상태가 제일 편했다. 인간이라는 틀 안에서 사회성을 연기함을 포기하면 드러나는 것은 기이할 정도로 사람을 닮은 존재. 루카는 클라비스의 시선을 무시하며 제게 간섭하거나, 입을 대는 일을 허락하지 않겠다는 완고한 태도를 보였다.
술을 한두 잔 놓아두고, 당사자들은 개의치 않지만 듣는 사람에겐 숨이 막힐 정도로 무거운 대화가 이어졌다. 그리고 우습게도, 이 순간이 평소라면 절대 민낯을 드러내지 않을 두 사람이 그 어떤 가면이나 안전장치도 쓰지 않고 서로를 마주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시간이었다.
무엇도 가리지 않았다는 사실은 의외로 부담 없는 교류를 가능케 만든다. 그러니 그들은 자유롭게 의견을 나누었고, 확실하게 알게 된 사실이 있다. 클라비스와 루카는 진실로 양 극점에 서 있는 인간이다. 클라비스가 삶의 의미를 이야기하면 루카는 ‘그런 걸 생각하니까 우울해진다.’는 말로 일축했다. 많은 생각과 깊은 의미 부여가 삶의 질 향상에 이바지하는 바가 얼마나 있던가? 당신은 뇌외과 의사이니 ‘그런’ 일을 나보다 더 잘 알지 않나? 루카는 제법 냉소적인 어조로 쏘아붙였으나, 클라비스는 그 속에 가시가 존재하지 않음을 알아차렸다. 그러니 루카의 저 말은 진실로 클라비스를 염려하는 충고였다.
이에 이끌려 그가 평소라면 남에게 하지 않을 말, ‘영원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논조의 말 따위를 꺼내면 루카는 ‘그렇기에 지금에 충실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이어갔다. 불변하는 것이 존재하지 않기에, 그 어떤 고통도 영원히 이어질 수 없으니 행운이지 않냐는 웃음. 그리고 술에 이끌려 결국 튀어나오고야 만 클라비스의 굴레, 제정신이라면 절대 남에게 내어놓지 않을 치부. ‘앞으로 그 어떤 좋은 일이 없으리란 예감에도 살아가야 하냐’는 물음 앞에서는 잠시 침묵했다. 루카는 이 말을 해도 되는가 고민했으나, 결국 술기운을 이기지 못하고 웃음으로 이야기했다. ‘그런 걸 제게 물어보는 시점에서, 삶의 이유를 찾고 계신 게 아닌가요? 당신은, 살고 싶으신 거잖아요. 좋은 일을 찾으며, 연명할 이유를 찾으며.’ 루카는 여상스러운 어조로 말을 이었다. ‘사람은 태어났으니 사는 거죠, 깊이 생각할 필요가 있나요? 살기 싫으면 죽는 거고, 살 거면 제대로 살아야죠.’
이윽고 침묵이 이어지며, 독주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양주가 몇 잔이나 채워지고 비었다.
루카는 상대방이 제 모든 행동에 별다른 반응이나 감흥을 내보이지 않음을 만족스럽게 여겼다. 눈치를 보거나, 반응을 잴 필요 없다는 사실이 그를 들뜨게 했다. 술은 맛있었고, 적당히 분위기가 좋은 공간은 언제나 사람이 하지 않으려는 말을 끌어낸다. 루카는 클라비스의 침묵 앞에서 문득 호기로운 웃음으로, 말했다. “당신께서 찾던 삶의 이유, 만들어 드릴까요?” 뜬금없는 말, 당돌할 정도로 당당한 웃음. 이야기의 주인공을 떠올리게 하는 어조와 모습으로, 루카는 흔들림 없는 어조로, 타인은 들을 수 없으나 클라비스에겐 확실하게 들릴 음량으로 단어를 이었다. “어차피 그런 이야기를 자주 하실 분도 아니잖아요, 그렇죠? 하지만 제게는 말씀해 주셨다면, 저도 신의를 보여야 하잖아요.” 클라비스는 루카가 자신을 들어 무대 위로 올려놓았다고 느낀다. “좋은 일이라면, 되어 드릴게요. 삶의 의미라면, 만들어 드릴게요. 사람은 사랑받는 것으로 삶을 실감하고, 내일을 꿈꾼다고들 하잖아요. 당신께서 지금 승낙만 하신다면, 제가 당신을, 온 마음을 다해서 사랑할게요.” 진실로, 이상한 말이었다. “연인이라고 불러도 좋아요. 뭐, 어떤 말을 덧붙이신다고 해도 개의치 않아요. 당신께서 삶을 실감하고, 사랑받는단 느낌을 받을 수 있도록, 제가 당신을, 진심으로 사랑하도록 할게요.”
클라비스는 그 순간, 희미하게 느껴지던 루카의 ‘이상함’을 확실한 형태로 바라보고, 그것이 무엇인지 인지했다. 보편과 상식의 범위를 이해할 수 없는 존재. 최선을 다 해도 그 안에 완전히 몸을 끼울 수 없는 생물. 너무나 멀리 있지만 무시하기엔 너무 거대하고 찬란한, 별과 같은 사람. 클라비스는 언젠가 거대하게 자랄 씨앗이거나 갓 개화한 새싹에 불과하다 생각했던 사람이 그의 예상과 다름을 발견한다. 땅 아래로 거대한 뿌리를 뻗어내린 나무가, 땅 위로 틔워 올린 새순. 그의 앞에서 ‘사랑’을 이야기하는 존재는 분명. 클라비스는 체인질링의 전설을 떠올린다. 요정의 아이가 거대한 사랑 속에서 원본을 흉내 내기로 마음먹고, 어른이 된다면 저럴까. 그는 루카가 그의 본질을 꿰뚫어 보았듯이, 루카를 이해했습니다. 그럼에도 클라비스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루카는 사랑을 ‘흉내’ 내고 자신의 방식으로 이해하여 모방하지만, 분명 그 질량과 크기는 거대했습니다. 모조품에 불과하더라도 당사자에겐 진실인, 크기를 짐작하기 어려운 감정.
진심이 아니니까, 부담되지 않으리라 여겼다. 그 전에 술을 마셔서 판단력이 흐려졌다고 생각했다. 그보다 더욱 깊은 곳에서, 클라비스는 누구든 좋으니까 자신을 구원하길 바라고 있었다. 살아가라고 이야기할 사람을, 같이 살아 줄 사람을, 그의 기술이 아닌 그에게서 가치를 찾아낼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분명 그는 누군가를 기다리는 줄도 모르고 우두커니 서 있었으나 이는 기다림이었고, 그는 그가 오랫동안 바라던 것의 끄트머리가 손끝에 스치고 나서야 그 정체의 시간이 고도를 기다리던 사람들과 다르지 않음을 알았다. 루카의 빛은 그의 정체된 삶에서 너무나 유혹적이고, 거대하며, 생생하게 살아있는 존재였다. 도무지, 파멸임을 알고도 손을 뻗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을 만큼.
그렇게 정반대의 극점에 서 있던 두 사람이 서로의 인생에 손을 뻗기 시작했다.
- 루트 분기
4월의 고백. 8개월의 교제 후, 클라비스는 제가 소속되어 있던 자선 단체의 파티에서 단체의 일원에게 루카를 소개한다. 이 과정에서 루카는 쥴리어스와 처음 만나게 된다. 쥴리어스는 루카와 대화를 나누며 호감을 가지게 되었지만, 애초에 클라비스가 루카를 소개하는 자리. 호감을 가진 채로 클라비스의 연인이라고 선을 그어버린다. 이는 이후 어떻게 루트가 갈라져도 이어지는 관계의 기초가 된다.
이후 클라비스는 이 자선 단체의 프로그램을 이용하여 루카를 인턴십의 대상자로 지정하여 미국에서 동거하게 된다. 루카 입장에서는 이런 일은 비리가 아닌가 의심했으나, 루카 자신의 능력이 출중했기에 클라비스와의 관계는 어디까지나 그가 후견인으로서 추천하는 정도로 작용했고 선정 자체는 루카의 능력이 맞았다. 물론 클라비스의 소개로 파티에서 안면을 쌓은 단체의 중역들이 영향을 주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 그냥 감성이 다르겠거니 하고 납득했다.
이 동거를 거치며 루카는 자신이 클라비스의 ‘삶의 이유’가 될 수 없음을 확신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이유가 될 수는 있으나, 이러한 방식이라면 클라비스를 망치게 된다는 확신을 품었다. 클라비스는 나아지고자 하는 의지를 보이지 않고, 그저 현재에 안주할 뿐이다. 루카가 내보이는 애정은 그의 양분이 될 수 있지만, 뿌리가 제 역할을 하지 않는 상황에서 양분이 많은들 뿌리가 썩을 뿐이다. 루카는 고뇌 끝에, 자신이 클라비스의 인생에서 물러나는 것이 그에게 도움이 되리란 결론을 내린다. 다만 루카는 클라비스를 ‘사랑’하게 되었고, 이는 애당초 시작할 때 품었던 감정과 달리 진심이 되었으며, 루카는 이 감정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다만 사랑의 기저가 되는 확신, 제가 클라비스를 사랑하는 것이 그에게 도움이 된다는 생각이 흔들렸다는 점이 치명적이었다. 더없이 사랑하지만, 자신을 사랑한다고는 생각할 수 없는 연인. 시간이 지나도 저를 제대로 바라보지 않는 사람. 루카는 감정을 쏟아내는 1인극에 지쳤다. 클라비스의 인생에서, 저는 배우가 아니라 무대 장치에 불과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그래, 루카가 말한 대로 클라비스는 ‘살아남고’ 싶었고, 자신을 긍정하고 가치를 찾을 필요가 있었기에, 타인에게 사랑받는 자신에게서 가치를 찾지 않았나. 그렇다면 꼭 클라비스의 연인이 루카일 필요가 있는가? 내가 아니라 그 누구라도 좋다면, 나 말고 적임자가 있지 않을까?
루카는 제가 여기서 손을 놓았다간 클라비스가 희미하게나마 잡은 희망을 놓아버리고, 빛을 등지고 어둠 속으로 영원히 침잠하고야 마리라는 사실을 안다. 동시에, 이 관계를 이어간들 제 사랑과 감정이 허공에 낭비될 뿐임을 안다. 이제 루카의 정신력도 한계에 가까웠다. 굳이 내가 아니어도 될 일을, 영혼을 깎아내며 할 필요가 있던가? 고심하는 사이 시간은 흐르고, 미국에서 진행되던 인턴십이 끝나 루카는 한국으로 돌아오게 된다. 클라비스와 벌어진 물리적 거리. 거리가 주는 시간적 여유로 얻게 된 생각할 수 있는 시간.
마음속에서 내린 결론을 부정할지, 받아들일지 선택함으로써 루카의 미래가 이별과 이혼으로 갈린다. 청혼으로 승부수를 띄워 루카가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써 볼지, 자기 자신의 안위를 위해서 클라비스와 하였던 약속을 저버리는 선택을 할지의 차이다. 다만 두 사람의 관계가 한 번도 끝나지 않는 선택지는 없다. 한사람이 일방적으로 감정적 이득을 취하는 관계는 결코 영원할 수 없기에.
- 이별 루트
루카는 여전히 클라비스를 사랑하지만, 이 사랑이 자신을 갉아먹고 수없이 남아있을 미래의 가능성을 망치도록 놓아둘 수는 없다고 결론짓는다. 이는 루카의 길지 않은 인생에서 처음으로, 타인보다 자신의 안위를 우선시한 결정이다. 루카는 그 정신적 강함과 별개로 자아가 한 번 재구축된 인간이고, 경험의 미숙함이 두드러진다. 자신의 한계에 섰을 때, 루카는 고통스럽게, 확신을 가지지 못한 채로, 관계의 끝을 고한다.
이미 클라비스와 지내던 시기, 인턴십을 진행하던 11월부터 이별해야 함은 알고 있었다. 다만 그에게 이별을 고할 자신이 없었기에 지금까지 미루었을 뿐이다. 다만 ‘해야만 하는 일’을 하지 않을 수 없기에, 루카는 1월에 귀국하고는 한국 핸드폰 번호를 모두 바꿔버렸다. 클라비스, 그를 위시한 ‘그가 소개한 인맥’과 연락하는 쪽은 미국에서 새로 개통한 핸드폰이었기에 별문제는 없었다. 허나 번호를 바꾸고도 남은 미련이 오랫동안 남아서, 루카는 3월이 되어 학교로 돌아가고 나서야 클라비스에게 말을 전했다.
‘당신을 사랑했다는 사실을 사과하게 해 주세요.’ 말하는 사람의 참담함보다 듣는 사람의 상처가 더 잔혹한 말로 시작하여, 루카는 구질구질하고 비참하게, 확신 없는 괴로움으로 이별을 선언했다.
“내 인생에 당신 같은 사람은 다시 없을 텐데 당신은, 당신은 절 잊어버리시겠죠. 분해요. 하지만, 당신이 저를 잊을 수 있기를 바라고 있어요.” 울음이 선명하게 드러난 목소리는, 전화기 너머이기에 표정을 걱정하지 않고 마음껏 울 수 있었다. 그렇기에 목소리엔 선명한 고통이 드러났다. “결국 제 최선은, 당신에게 모자랐겠죠. 저는 그저 치기 어린 말로 당신의 인생을 헤집어놓았을 뿐이에요.” 루카는 제 감정을 제대로 느낄 수 없는 사람이라서, 제가 이렇게 우는 것이 단순한 격정인 줄 알았다. 며칠이 지나면 잊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으며, 그렇기에 머뭇거림이나 망설임 없이 끝을 말했다. 제 ‘감정적인’ 상처와 동요를 모르기에, 제가 상처 입어도 모르는 사람이 할 수 있는 담담함으로. “정말 분하고, 이런 실패는 처음이지만, 그래도, 그래도 살아가게 될 테니까, 젠장, 헤어지면서 이런 말 하는 게 정말 최악인 거 아는데.” 하지 않았으면 좋을 말. “행복하셔야 해요.”
기실 클라비스는, 무엇도 느껴지지 않아 그저 핸드폰을 들고 있을 따름이다. 이 모든 순간이 지독하게 현실감 없는 연극으로밖에 느껴지지 않는다. 어제까지 그토록, 아니, 이 전화가 오기 전까지만 해도. 루카는 살아가겠다고, 그에게 살아가라고 말했으나 클라비스는 지금 여기서 그의 삶이 멈추리라 직감한다. 그러니 그는, 루카에게, ‘행복’해 본 적이 없는데 어떻게 그러라고 말하는거냐 빈정거리지 않는 것으로 연인에게 보이는 예의를 갈음한다. 아니, 그는, 그런 말을 떠올리지 못했다. 이 순간을 모두 지워버리고 싶었다.
일방적인 통화가 끝나고, 루카가 전화를 끊어버렸을 때야 그는 현실로 돌아왔다. 다만 아무리 전화를 걸어도 루카의 전화기는 꺼져 있을 따름이었고, 다른 번호로는 전화를 걸어도 다른 사람이 받았다. 그래. 클라비스는 루카가 그에게 ‘루카’의 인생에서 영영 사라지기를 명령했단 사실을 마주했다.
3월의 이별. 그리고 루카는 4월의 끄트머리에 있는 제 생일, 선물과 함께 한국에 나타난 클라비스 엘 샬카위를 마주하게 된다.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사람이 보이는 미련. 루카는 당연하게도 클라비스가 ‘사랑’이 아쉬워서 저런다고 생각한다. 그는 고독한 사람이니, 혹은 삶의 이유와 자신의 가치를 갈구하는 사람이니 이를 잃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으리라고. 그리 생각하면서도 루카는 클라비스에게 모질게 굴 수 없었다.
본디 루카는 관계에서 책임을 남기지 않는 사람이다. 완벽한 면책권을 얻어 일방적인 단교 선언을 해도 괜찮은 상태를 유지하는 결벽적임이 루카의 성격이었다. 다만 클라비스에게 그러지 못했음이 루카의 발목을 잡았다. 그가 망가지리란 사실을 알면서도, 더 쓸 수 있는 수단을 사용하지 않은 채 자신의 안위를 위해서 일방적으로 관계를 끊었다는 사실이, 그 이후로 소통의 의지를 보이지 않고 도망쳤던 시간이 있다는 점이 루카의 입을 막았다. 비록 핸드폰을 끄고 삼 일이 지난 이후엔, 그 존재 자체를 잊어서 켜는 일을 까먹었다고는 하지만, 우선 루카의 잘못이지 않던가.
루카는 ‘사랑하는’ 상대에게 모질 수 없는 사람이다. 그 이전에, 자신이 한 약속을 지키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는 사람이다. 클라비스에게 ‘삶의 이유를 주겠다’고 약속했다. 이를 지키지 않고서야, 자신을 유지할 수 없다. 그 이전에 클라비스를 사랑하고, 가족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니 루카는 클라비스를 밀어내지 못한 채, 이따금 찾아오는 그에게 시간을 내어주고, 돌아가기를 종용했다. 그렇게 돌려보낼 때는 언제나 다시 오지 말라는 말을 하였으나, 다시 오면 만나지 않겠다는 말은 하지 못했다.
애매한 관계, 끊어져야 하지만 한 사람의 고집으로 이어지는 순간들. 다만 루카는 강한 사람이기에 언젠가는 자신이 내렸던 판단의 책임을 온전히 짊어질 수 있게 되고, 클라비스의 행위를 ‘받아주는’ 것으로 제 책임의 무게를 줄인다. 그렇게 시간이 지난다면 루카는 결국 클라비스에게 ‘완전한’ 퇴거를 명하게 될 것이다. 우스운 관계다.
3 | 타임라인 (Special/Duet) | admin | 2023.06.04 | 89 |
> | 현대 AU (클라비스 X 루카) | admin | 2021.11.12 | 58 |
1 | 드림 서사 문답 (클라비스 x 루카) | admin | 2021.09.22 | 6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