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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reative

노을 아래서

admin 2024.01.11 21:04 read.32

어느 날, 어떤 순간. 세상이 눈부시도록 아름다울 때가 있습니다. 마치 운명처럼 마주하는 풍광은 경이롭고, 오랜 역사가 칭송하는 그 모든 예술 작품이 그저 전경을 보이는 대로 묘사했을 뿐임을 알아차릴 때. 모네의 그림을 마주하고 세잔의 작품을 목도하는 찰나의 기적 속에서 사람은 무엇을 떠올릴까요? 클라비스님, 저는 당신을 떠올렸습니다. 하하, 조금 우습지 않나요?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고, 말을 섞은 기간도 길지 않은 당신을 떠올리다니. 그럼에도, 당신을 생각했어요. 짧을지라도 제가 꺼내는 말에는 언제나 대답을 돌려주던 그 목소리를, 빛을 받으면 보라색으로 투명하게 물드는 눈동자가 저를 내려다보던 순간을, 당신에게 건네던 우유 컵의 온기를 머릿속에 그렸어요. 세계는 텅 비어 투명한 아름다움으로 가득하고, 차가운 공기가 폐부를 가득 채우며, 체온은 허공으로 흩어지는 와중, 저 너머까지 닿은 듯한 청량함이 경이로워 개인의 하찮음을 깨닫는데, 홀로 서서 노을을 마주하는 그 아름다움 속에서…….

 

당신이 제 곁에 없다는 사실에 슬퍼졌다면 믿으시겠나요?

 

말과 사진으로는 전할 수 없는 어느 순간을 당신과 공유할 수 없다는 사실이, 무슨 짓을 해도 이 기쁨을 당신에게 전할 수 없다는 사실이, 감정을 나누기 위해서 당신을 만나러 달릴 수 없다는 사실에 조금 슬퍼졌다면, 저를 비웃으실 건가요?

 

 

 

 

 

비공도시를 산책하던 밤, 만월이 떠오른 날이었다. 클라비스보다 몇 걸음 앞에서 걷던 루카는 문득 그런 이야기를 꺼냈다. 클라비스는 달빛 아래서 동그랗게 윤곽을 드러내는 루카의 머리를 시선만 움직여 내려다보았다. 표정을 읽을 수 없는, 그저 목소리가 흘러나올 뿐인 구. 저 작은 머릿속에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어떤 삶을 살아서 왜 이런 말을 하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사람. 너와 있을 땐 언제나 혼란스러운 일이 가득할 따름인데, 나는 왜 너를 밀어내지 못하는가. 클라비스는 침묵으로 몇 걸음을 더 걷는다.

 

 

 

 

 

, 나를 떠올렸느냐?”

 

 

 

 

 

문득 어둠 속으로 녹아드는 목소리. 클라비스는 다음 걸음이 땅에 닿을 때, 그것이 제 입에서 나왔음을 알아차린다. 그는 다음 걸음을 떼지 못하고 멈추어 선다. 발이 허공을 젓는 그 잠시의 공허도 견디지 못하고 붙박여 선다. 정지를 알아차리지 못한 루카는 저 홀로 앞서가고, 몇 초의 간극이 벌어진 이후에야 놀란 표정으로 뒤를 돌아본다. 동그란 눈은 달빛 아래서도 색이 선명하다. 평소에도 표정이 자주 변치 않는 루카는 지금도 감정의 징후를 읽기 어려운 얼굴로 그를 올려다본다. 그보다 머리 두 개는 작은 키. 너는 그리 작은 몸을 하고도 어찌 세상에 짓눌리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지.

 

 

 

 

 

글쎄요?”

 

 

 

 

 

루카는 볼을 긁으며 그에게 다가온다. 온기를 느낄 수 없고, 그를 올려다보기엔 불편한 거리. 루카는 늘 그렇게 애매한 거리감으로 그의 곁에 선다. 클라비스가 팔을 조금만 들어 올려도 손목을 붙잡을 수 있을, 그런 곳에.

 

 

 

 

 

잘 모르겠어요. 정말로 문득 떠올랐으니까. 그냥, 당신의 목소리가 귓가를 스친 듯한 기분이 들었거든요.”

 

 

 

 

 

신기하죠? 루카는 희미하게 웃었다. 이내 미소짓는 것이 어색하다는 듯 손을 들어 입가를 문지른다. 네 손가락 아래서 뺨은 조금 들어가 윤곽이 흐트러지고, 손을 움직이면 부드럽게 밀려나고 제자리로 돌아가길 반복한다. 클라비스는 문득 제 손가락 아래서도 저 윤곽이 뭉그러질지 의문이 들어, 루카의 얼굴에서 시선을 돌렸다.

 

 

 

 

 

……그런가.”

……. 사실, 이유 같은 건 생각도 안 하니까요.”

 

 

 

 

 

그리고 침묵이 흐른다. 루카는 누군가의 얼굴을 오래 쳐다보지 않는 사람이다. 그러니 루카의 시선은 어느 한곳에 머무르지 않고 이리저리 방황한다. 그의 어깨너머를, 이마의 자수정을, 발치를, 이윽고 어딘가 나뭇잎이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따라 저 먼 곳을. 평소라면 그가 몸을 두었을 법한 나무 그늘. 클라비스는 루카가 그늘을 바라보며 멈추어 선 것을, 이상함을 느끼기에 충분할 정도로 오래 바라보는 모습에 문득 익숙하게 치솟는 불안을 알아차린다. 루카는 언제 어디로 훌쩍 떠나도 이상하지 않을 사람이라, 그를 두고 저 그늘 속으로 걸어가 저 멀리, 어둠 너머로 사라질 것 같아서.

 

나오지 않는 목소리를 억지로 끌어올려 이름을 부르려 했을 때.

 

 

 

 

 

맞아, 산책을 할 때도 당신을 떠올렸어요.”

 

 

 

 

 

눈이 마주쳤다.

 

 

 

 

 

만월이 뜬 밤에, 금빛으로 빛나는 달이 칠흑 같은 어둠을 가르고 홀로 뜬 모습에, 문득 당신의 얼굴을 떠올렸어요.”

 

 

 

 

 

루카는 시선을 돌리지 않는다. 그의 시선을 부담스럽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감정도 판단도 느껴지지 않는 말간 눈동자. 무엇도 담기지 않은 눈은 거울과 같다. 클라비스는 눈 속에 맺힌 상을 볼 수 없는 거리임에도, 자신을 본다. 루카의 눈은 수정구를 닮았다. 변덕스럽게, 때로는 그가 보고 싶지 않았던, 그도 모르던 저 깊은 곳의 욕구를 그가 마주하도록 만든다.

 

 

 

 

 

할 말을 떠올리지도 못했는데, 당신은 만월이 부담스럽다고 말씀하셨는데, 저는 만월에서 당신을 찾은 거예요. 이상하죠. 그 경험 탓인지 이젠 어떤 달을 보아도 당신을 생각해요. 당신과 만나지 않은 날에도 홀로 밤 산책을 나가면 그냥, 당신도 달을 보시는지, 달빛을 받으려 창문을 연 건 아닌지, 또 희미한 달빛에 의지해서 타로점을 치고 계신 건 아닌지, 그런 생각을.”

 

 

 

 

 

클라비스는 기쁨과 함께 밀려오는 두려움에 입술을 꾹 다물었다. 네게 나는 달이 되었구나. 무엇이든 관심을 기울이는 주제에 그 누구에게나 무심한 네게, 나는 달이 되어서 자리를 얻었구나. 그는 노도와 같이 밀려오는 기쁨에 쓸려가지 않으려 눈을 느릿하게 깜빡였다. 오래전에 죽어버렸을 감정은 너와 함께 있을 때 때때로 이리 무덤 속에서 기어 나온다. 그는 누군가 관을 열고 빛에 내던져버린 시체처럼, 빛을 기뻐해야 할지 두려워해야 할지 모르는 망자처럼, 이 감정을 어떻게 다뤄야 할지 헤맨다. 너를 밀어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아니면 쏟아지는 빛에 몸을 맡기고, 하이얗게 번져 앞이 보이지 않는 길로 걸음을 떼야 하는가. 발치를 적시는 어둠은 너무나 익숙하여 안식을 약속하건만, 네가 여기 잠기는 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죄악으로 느껴진다. 루카. 빛을 이름으로 두는, 그를 두려워하지 않는 소녀. 그를, 저 멀리서 부르며 언제나, 움직이기를 채근하는…….

 

 

 

 

 

이상하지 않나요? 저는 가족조차 자주 생각하지 않는데, 오래 만나지도 않은 당신을 이렇게 자주 떠올린다는 게.”

 

 

 

 

 

그리고 네가 웃었다. 나와 눈을 마주하고, 수정처럼 투명한 눈에, 그 작은 몸에 어색한 기쁨을 가득 채운 채. 그는 그 기쁨에 홀려 입을 열었다.

 

 

 

 

 

그건…….”

 

 

 

 

 

제가 무슨 말을 하는 줄도 모르고 흐르는 단어. 어둠 속에 녹아 흩어지면 좋을 것을, 달빛 아래서 원치 않을 정도로 선명하게 번지는 문장.

 

 

 

 

 

내가, 너를 생각하는 탓이겠지. ……루카, 나도 너와 같다. 달을 볼 때면, 너를 그린다.”

……?”

 

 

 

 

 

그는 문장 끝에 딸려 나온 루카의 반문에 현실로 끌려 나온다.

 

달빛은 부담스러울 정도로 그의 윤곽을 선명하게 밝힌다. 그가 삶을 살아가야 함을 상기시키며, 그의 존재감을 공간에 무겁게 새긴다. , 저는 무엇을 원하고 이런 말을 지껄였나. 그는 조심성 없는 말이 주는 피로에 짓눌린다. 짓눌린다. 숨을 쉬는 것이 버겁고, 제 몸의 무게조차 짜증스러울 정도로 무거운, 익숙한 피로가…….

 

 

 

 

 

……. 뭔가…… 기쁘네요, 그건.”

 

 

 

 

 

그리고 그는 반쯤 내렸던 시선을 다시 루카의 얼굴로 고정한다.

 

 

 

 

 

저만 그런게 아니라 당신께서도 제 생각을 해주신다니, , 상상도 못 하긴 했지만……. 기쁘네요, 감사해요. 적어도 저를 방에 밀고 들어온 귀찮은 존재로 여기지는 않으신 거잖아요?”

 

 

 

 

 

루카의 목소리는 그의 위로 두껍게 드리워진 권태와 무기력의 사슬을 걷어낸다. 너는 내가 하는 모든 말을 진지하게 들어, 모든 말에 성실하게 답변을 내어놓는다. 오직 네 시선이 나를 이곳에 붙들어 놓는다. 삶인지 꿈인지 의심스러운 매 순간을 네가 경이로 물들인다. 네가, 루카, 오직 네가.

 

 

 

 

 

……별난 말을…….”

하지만 진실이잖아요?”

…… 소란스럽기는 하다만, 불쾌할 정도는 아니다. 네게 좋을 대로 굴라고 말한 건 겉치레가 아냐. 기분 내키는 대로 굴거라, 루카. 네가 만드는 소리는 신기할 정도로 듣기 좋아…….”

하하, 그래도 너무 시끄럽게 굴지는 않을 게요.”

 

 

 

 

 

루카는 웃음과 함께 그들 사이에 놓였던 마지막 한 걸음의 거리를 좁힌다. 언제나 따스한 성지도 밤공기는 차갑다. 그 차가운 공기에 어울리지 않는 온기. 기억조차 나지 않을 정도로 오래 전 얼어붙어 깨진 감정을, 그의 마음을 녹일 듯이 다가서는 체온.

 

 

 

 

 

괜찮죠?”

 

 

 

 

 

클라비스는 루카의 뺨을 쓸지 않으려 손가락을 조금 굽힌다. 네 눈에 비치는 나는 어떤 표정일까. 루카, 너는 내게서 무엇을 보느냐?

 

 

 

 

 

……좋을 대로 하거라.”

 

 

 

 

 

 

, 하고 대답하는 목소리가 공기를 울린다. 멀리 퍼지는 소리는 어둠을 흩고, 오랫동안 그를 짓누르던 무음의 세계를, 정적의 안식을 밟아 부순다. 허나 그는 신기할 정도로 거부감 없이 이를 받아들인다. 루카는 등을 돌려 다시 걸어가고, 클라비스는 느릿하게 루카의 발자국을 따른다.

 

 

 

어둠 속에서도 선명하게 반짝이는 네 궤적을 따라 걷다 보면, 그는 어디로 가닿게 되는가. 클라비스는 그곳이 어디인들 너와 함께 걸어 도착한 곳이라면 개의치 않을 자신을 안다. 그러니 그는 오랜 부동을 깨고 걸어도 좋다. 언제나 네가 앞에서 걸어 준다면, 그는 나아갈 길을 잃어버리지 않을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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