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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중진담

admin 2022.01.31 00:04 read.40

  클라비스. 데리러 오셨나요?

  꽤 마셨구나.

  하하, 오랜만에 마셨더니 그만.

  …태평한 일이군.

  뭐, 아무래도 좋잖아요? 봐요, 클라비스. 별이 떴어요.

  ……내 눈에는 건물의 창에서 새어 나온 빛이 저마다 제 주장을 펼치며 눈을 따갑게 만드는 모습밖에 보이지 않는다만.

  그렇게 말씀하지 마시고요. 비록 하늘의 별은 아니지만, 도시의 별이잖아요. 반짝이고, 아름다우며, 해가 뜨면 보이지 않는 빛. 별이라고 부를 수 있지 않나요? 무엇보다, 당신과 내가 보고 있는데.

  ……그런가. 그럴지도 모르지. 네가 말한다면.

  납득할 수 없다는 얼굴이네요. 하지만 당신의 말을 빌리자면, ‘아무래도 좋아. 이토록 아름다운 밤이잖아요? 그냥 돌아가긴 아쉬운 날인데, 산책이라도 해요.

  가고 싶은 곳이라도 있나?

  아뇨. 하지만 당신과 함께라면 그 어떤 어둠도 문제가 되지 않으니, 어디라도 좋아요. 데려다주시겠어요? 당신이 가고 싶은 곳으로.

  …후우. 제멋대로구나.

  연인의 특권이죠. 그렇잖아요?

  ……그렇구나.

  하하, 역시. 들어주시는구나. 저 있잖아요, 당신이 절 데리러 온 걸 보고서, 당신을 만나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어요. 당신을 만나서 평생 닿을 일 없고 만날 일 없으리라 생각했던 모든 것들이 제 인생의 일부가 된 것이, 즐겁다고. 그러니까, 클라비스 엘 샬카위, 제가 하고 싶은 말은.

  …….

  감사해요. 앞으로도 잘 부탁해요.

  …취한 사람의 헛소리치곤, 우스울 정도로 달콤하군.

 

 

 

 

 

  아, 우리는 그런 이야기를 나눈 적도 있었다.

 

 

 

 

 

  내가 술에 약하다고 생각한 적은 없지만, 남 앞에서 술을 마시면 안 된다고 생각한 적은 있다. 언제였더라? 술에 취해서 남의 무릎을 베고 누웠을 때 그리 생각했다. , 나 취하면 사고를 치는구나. 평소엔 생각만 하고 실행하지 않는 일을 술기운에 그대로 실행에 옮겨버리는 인간이구나. 일단 일어나진 않았지만 그대로 베고 누워서 뒹굴었다는 점에서 나는 글러 먹었다고 확인했다.친하지 않은 사람이 있는 자리에서 술을 마시면 안된다고 생각하긴 했다. 그리고 그 생각은 꽤 오랫동안 이어져서, 나는 술을 먹이는 방법을 터득했다.

 

  대충 사이다만 마시면서 분위기에 어울리는 방법이라던가, 내게 오는 술잔을 남에게 돌리는 법, 애초에 술잔을 받을 상황을 만들지 않는 법 같은 거. 그래도 안 되면 뭐, 한약을 먹는 중이라고 말을 돌리고. 그것도 안 되면 그냥 분위기를 파투 냈다. 사실 평소에는 괴짜라는 이미지가 강했으니, 남이 술을 권해도 남이 만류하긴 한다. ‘쟤는 양주밖에 안 먹어.’ 같은 이야기로. 물론 진짜 양주만 마시기는 한다. 아무래도 소주랑 맥주는 숙취가 심해서.

 

   생각이 뚝뚝 끊기네. 술 마시면 언제나 이런다. 아무렇지 않은 기분으로, 멀쩡한 생각이 불가능하다. 술이 깼다고 생각했더니 여전히 머리가 둔하고, 머리가 빠르게 돌아간다고 생각하면 어처구니없는 짓을 하질 않나. 그래서 술을 자주 마시지 않기도 하지만, 사람이 언제나 술이 끌리는 날은 있기 마련이다. 자주 마시지 않으니 한 번 마시면 제대로 마시자는 기분으로 독주를 여럿 골라서 되는대로 들이키는 일의 반복. 한 잔을 마셔도 열 잔을 마셔도 취하는 정도가 변하지 않으니 그냥 기분 따르는 대로 잔을 들이켜고, 안주를 씹고, 웃고, 떠들고.

 

 

 

 

 

  이제는 데려다줄 사람이 없다고 자각한 건, 차가운 밤바람이 뺨을 때린 직후였다.

 

 

 

 

 

  적당한 편의점에 들어가서 이온 음료와 아이스크림을 사고, 얼음 컵과 우유도 샀다. 첫 번째는 이론적인 숙취 방지, 두 번째는 그냥 입이 써서, 세 번째와 네 번째는 가족의 신신당부를 떠올려서다. 종이 곽에 든 음료를 봉투에 적당히 쑤셔 넣고 아이스크림을 물고 밝은 길을 터벅터벅 걸어가는 순간. 데려다 주겠다던 친구의 말을 무시할 이유도 없었는데, 그냥 버릇처럼 혼자 걸었다. 예전엔 남자친구와 친구가 마주치는 일이 부담스러워서 그랬지만, 지금은 그냥 버릇이 들어버린 모양이다. 술에 취하면 혼자 걷는 일, 오지도 않을 누군가의 커다란 그림자를 떠올리며, 아이스크림을 우물거리는 일.

 

   2년이 얼마나 된다고 이러고 있냐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겨우 연애 한 번, 그것도 뭣도 모르고 달려들었다가 데이고 도망친 일. 대단하지도 않은 일인데. 당장 잊어도 되고, 적당히 새 사람을 찾아도 된다. 아니면 그냥 그래. 현실을 받아들이거나.

 

   그래도, 먼저 고백한 주제에 남자친구가 부담스러워서 도망쳤고, 그게 어색해서 심란함을 수습하지 못하는 사람이란 호칭은 너무 부담스럽지 않은가.

 

   튜브에 든 아이스크림은 녹지도 않았는데, 입이 심심해서 이빨을 몇 번이고 박는다. 우물우물 씹는다고 나오지도 않는데, 그냥. 뭐라도 물어뜯고 싶어서. 가로등 아래는 시끄러운 사람들이 잔뜩이고, 술집에는 여전히 동기나, 선배거나, 후배일 사람들이 술을 마시며 떠든다. 나는 이대로 쭉 걸어서, 버스를 타고, 본가로 돌아갈 예정이다. 마지막 차를 기다려도 되지만, 그냥 그러기 싫어서 중간에 나왔다. 이온 음료는 집에 가서 마실 거고, 차에선 우유를 마실 셈이다. 그러니까 아이스크림은 차에 타기 전에 다 먹고 버려야겠지.

 

  빨리 녹아버리면 좋은데.

 

 

 

 

  학교에서 멀어지면 사위는 점점 조용해진다. 원룸 가로 들어서면 떠드는 사람은 없어지고, 가로등과 창문의 빛이 거리를 밝힌다. 소음에 익숙했던 귀가 정적을 듣고,’ 신체의 긴장이 풀리면 내가 소음에 몸을 굳혔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즐겁지만, 술자리는 지친다. 좋아하지만, 체력 소모가 심하다. 그래도 뭐, 내일부턴 주말이니까. 집에 가서 늘어지게 자면 되겠지. 슬슬 녹기 시작하는 아이스크림은 혀가 녹을 정도로 달다.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아이스크림을 사면 언제나 초콜릿 맛을 고른다. 제법 씹어서 너덜거리는 튜브와, 그 안에서 슬러시가 되어서 새어 나오는 내용물은 익숙한 맛이다.

 

  익숙한 맛, 익숙한 것, 익숙한 길. 변화보단 정체가 안심된다. 이를 모르진 않는다. 그래, 그랬을 수도 있겠네. 몇 년간 그 사람에 관한 생각을 반복했더니, 헤어지고도 문득 떠오를 때가 있다. 그렇게나 노력해도 바뀌려고 생각하지 않았던 이유는 무엇일까? 내 애정이, 헌신이 당신에겐 당연하고 아무런 가치도 없었던가? 근데 오늘 생각하니, 그냥. 당신도 익숙해졌던 모양이지. 그래, 연애가 마냥 새로울 순 없으니까, 그럴 수 있지. 조용한 사위와, 어두운 길과, 무대의 조명처럼 내리쬐는 가로등을 보고 있으니 납득할 수 있었다. 여전히 이해할 순 없지만, 이젠 당신의 인생이니까.

 

  전형적인 주취자다. 두서없이 흐르는 생각이며, 상식적이지 못한 도치며, 모르는 사람이 봐도 취했다고 혀를 쯧쯧 차댈 수준이다. 그래도 뭐 어쩌겠나, 진짜로 취했는데. 무대의 뒤안길 같은 거리를 타박타박, 제 발소리만 들으며 걷고 있으면 많은 생각을 할 수 있다. 당신에게 고백할 때도 나는 취해 있었고, 당신과 만나서 다행이란 말을 할 때도 취해 있었으며, 사랑한다는 말도 대부분 술기운이나 분위기에 취해서 내뱉었다. 그래, 생각하면 나는 제정신인 시간이 적었다. 원래 대학교 올라와서 하는 첫 연애가 다 그렇다지만, 나는 제법 유난스러웠지. 평범하지 않은 삶을 당연하게 살아왔어도, 돌아보면 어색하다. 그래, 뭘 믿고 그렇게 달려들었더라.

 

 

 

 

  아이스크림을 전부 먹고, 주변의 쓰레기 위에 버렸다. 원래는 이렇게 빨리 녹지 않았는데, 아까 입이 심심하다고 잘근댔던 탓인지 빠르게 녹아버렸다. 뭐든지 자꾸 건드려대면 빠르게 녹긴 하니까.

 

  , 사고가 옮았어.

 

  만사에 의미를 부여해 대는 건 당신의 삶이지 내 방식이 아니었다. 하늘은 하늘이고, 별은 별이며, 상황은 상황이었다. 고통에 큰 의미는 없고, 세상만사 우연에 불과하며, 불변하는 가치란 존재하지 않는다. 간단하게 생각하며 간단하게 흘려보내는 일이 내 삶이건만, 겨우 2년을 사귀었다고 사고방식이 옮을 줄이야. , 제길. 제기랄. 나는 불빛 너머의 커다란 그림자를 발견하곤 그대로 발을 멈췄다. 아니겠지.

 

  남자친구와 헤어지고도 자꾸 찾아온단 사실은, 사실 어디에다가 말하면 신고하라는 소리 듣기 딱 좋았다. 주변에서 시끄러울 정도로 말려서 오지 말라고 이야기는 하고 있다. 아니, 이렇게 말하면 애들이 말리지 않으면 막지 않았을 거란 말 같은데, 그렇진 않다. 언제고 끊어내야 한다는 자각은 충분히 있다. 당연하지 않은가. 헤어지자고 선고한 건 나다. 내가 한 말엔 책임져야 한다. 그래도, 당신에게 모질게 굴지 못하는 이유는, 사랑보다는 책임일까. 일방적으로 내 인생에서 사라지라고 쫓아냈다는 죄책감.

 

 

 

 

 

  “…….”

  “…….”

 

 

 

 

 

  그러니 나는 빛 아래에, 당신은 그 빛의 경계에 선 채로 거리를 좁히지 못하며, 침묵으로 대화를 갈음하게 되었겠지. 다만 나는, 익숙함을 좋아하는 사람이라서, 문득 복잡한 심경으로 웃는다. 드물게 술을 마시면 당신은 어떻게 알았는지 언제나 나를 데리러 왔던 기억이 나서. 이제는 그러지 않아야 하는 사람인데, 나는 당신의 자리를 비워두는 일에 익숙해서 그냥 위험을 감수하고 홀로 타박타박 걸었다는 사실이 우스워서, 그래, 어쩌면 나는 당신이 데리러 오리란 사실을 알면서 딴 길로 돌아가지 않고 걸어왔을지도 몰라서, 나는 침묵 속에서 웃었다. 나는 당신을 볼 수 없고, 당신은 나를 볼 수 있는 경계. ‘나의 인생이라는 무대 위에서 여전히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연기하고, 나아가야 하는데, 결국 무대 너머의 어둠에 눈을 돌리고야 마는 현재.

 

 

 

 

 

 

  “클라비스.”

 

 

 

 

 

  나는 이러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예전과 다름없이, 그래, 오늘 떠올렸던 그 날 밤과 다름없이 당신의 이름을 부른다.

 

 

 

 

 

 

  “, 어쩌면 당신을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요.”

 

 

 

 

 

  호텔의 화려한 연회장과 샹들리에는 이제 다시 내 삶에서 사라졌다. 당신과 헤어진 이후로 그런일이 내 삶의 일부가 되지는 않으리라. 나는 당신과 같은 사람을 내 가족으로 받아들여 삶으로 삼을 수 없다 고통스럽게 인정했고, 당신의 소개로 만났던 사람들은 결국 거리감 있는 친구로 남았으니까. 그러니 익숙하지 않은 드레스와 구두에 발이 아파 풀숲 벤치에 앉을 일도, 연회의 불빛을 별이라고 부를 일도, 사람 없는 곳을 찾아서 정원을 걸어 다닐 일도 없다.

 

  당신을 사랑했기에 찬란했던 시간이 빛바래고, 당신과 함께하는 일이 오롯이 기쁨이었던 순간을 부정해야 하고, 애정을 의심하며 행동의 정당성을 재평가하고 색채 없는 현재가 나의 실패를 증명할 때, 사람은 의기소침하게 변한다. 최소한 나는 그러고 있다. 첫 실패와 첫 실연에 몸을 비틀며, 견뎌내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다.

 

  당신도 그러한 경험을 겪었고, 어쩌면, 반복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 어쩌면,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중일지도 몰라요. 그냥, 문득 그렇게 생각했거든요. 내가 당신과 헤어지고 인생에 남아버린 빈자리에 냉기를 느낄 때, 당신도 이런 기분이었나? 하고.”

  “……무슨 말이 하고 싶나.”

  “글쎄요, 당신도 아시다시피, 저는 깊이 생각하고 말하는 사람은 아니니까. 그냥, 말하고 싶었어요.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고. 물론 저는, 여기서 멈추지 않겠지만. 사랑 앞에 고꾸라지기 위해서 이토록 노력하고 발버둥 치며 살아오지 않았으니, 이 또한 지나가리라 확신할 수 있지만……. 그러게요.”

 

 

 

 

 

  나는 이제 시선을 조금 올리기만 해도 당신의 얼굴을 바라볼 수 있는 먼 거리에서 당신과 대화한다. 이전과 같이 목이 아플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 들어서지 않는다. 그래도 버릇처럼 남아버린 파편들. 시선을 얼굴로 향하고,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당신에게 집중하고 있으며 해를 끼칠 의도가 없다고 호소하던 몸짓이 버릇으로 남았다. 남아있는 버릇을 들키고 싶지 않아서 나는 웃음을 뒤집어쓴다.

 

 

 

 

 

   “당신께서도 그냥 저와 함께했던 기억을 놓아버리시라 말하고 싶었나 봐요. 억지로 붙잡지 않으면 세월 속에 흘러 사라질 추억이니, 그냥, 놓아주라고. 흐름을 거스르는 일은 괴롭고, 당신은 이미 떠나간 것으로 충분히 괴로워했으니, 그 고통 위에 날 얹을 필요는 없다고.”

 

 

 

 

 

  아. 우연인가. 당신의 얼굴 위로 희미한 빛이 드리워져 당신의 표정이 드러난다. 당신은 그렇게 희미한 윤곽과 알아볼 수 없는 거대한 형체로 나의 삶에 잠시 끼어든다. 당신이 원했던 대로, 혹은, 내가 원했던 대로. 우리는 서로 제멋대로 굴지만, 그건 자신의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이 제 무대 위에서 할 수 있는 마땅한 권리기에.

 

 

  그게, 당신을 사랑했던 사람으로서 할 수 있는 마지막 예우인 것 같아서.”

 

 

 

 

 

 

  나는 웃음으로 나의 역할을, 내가 연기해야 할 막을 종료한다. 그러니 이제는 당신의 이야기가 시작되어야 한다. 한데 당신은 왜 아무런 말도 하지 않나요? 여전히 인생의 주역을 내게 양보한 사람처럼, 그저 관객처럼 침묵하고 있나요? 나는 술기운에 올라와, 희미한 이성으로도 내뱉으면 안 됨을 아는 질문을 입에 남아 불쾌하게 만드는 초콜릿의 단 향과 뒷맛에 섞어 삼켜버린다.

 

 

  클라비스 엘 샬카위, 그런데 당신은 왜 그토록 고통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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