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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기, 습기, 거부, 비참함.

admin 2021.11.26 23:59 read.69

  더없이 사랑했던 것이 두려움의 대상으로 전락하는 것. 인생을 걸어도 좋다고 생각했던 열정이 비참한 잿더미가 되어버리는 것. 패배를 인정하고 어리석음을 돌아보는 것. 과오와 함께 해결하지 못한 일을 버려두고 길을 떠나는 것. 무엇 하나 괴롭지 않은 것이 없건만, 당신을 바라보고 가장 먼저 느끼게 되는 감정이 막연함이란 사실이, 나를 가장 초라하게 만든다.

 

  클라비스 엘 샬카위, 제발.

 

 

 

 

 

  ‘는 주변의 소문에 귀를 기울이는 종류의 사람은 아니다. 첫 연애를 범상치 않은 사람과 하고, 그대로 헤어진 이후로 더욱 그랬다. 그는 언제나 소문의 중심에 섰고, 어릴 적부터 이어진 그런상황은 언제나 그의 정신에 견디기 힘든 압박을 가했다. 그러니 는 그냥 사람들이 하는 말을 듣지 않는 쪽으로 발전했다. 간단한 방식이고, 딱히 부작용도 많진 않았다. ‘는 기본적인 인간관계도 그럭저럭 무난하게 해낼 수 있었고, 몇 년간의 처절한 실패 끝에 꽤 사람처럼보이는 방식으로 굴 수 있었다. 최소한, 예전처럼 인간의 마음도 모르는 새끼라는 비난은 피할 수 있었다는 뜻이다. 이가 뜻하는 바는 간단하다. ‘는 삶의 방식을 확립했고, 최소한 근시일 내에는 이를 바꿀 예정이 없었다. 그래, 없었다.

 

   먼저 에 대해서 설명하자. ‘는 나다. 화자. 굳이 본명을 밝히지 않을 예정인 대학생. 이제 곧 3학년에 올라갈 예정이고, 공대에 재학 중이다. 이는 내 성격을 설명하는 단서가 되기도 하는데, 나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스테레오 타입의 마음이 차가운 공대생에 가깝다. 어디까지나 타칭이니 나는 잘 모르겠다만, 확실한 인풋이 있는 쪽이 아웃풋을 내놓기 좋다는 점은 인정하고 있다. 덧붙여서 20세 초반에 대학에 진학하고 얼마 안 되어 사귄 남자친구가 있었는데, 그와 헤어진 지 좀 되었다. 사실, 헤어지면서 다시는 만날 일이 없으리라 생각해서 볼품없는 꼴을 보였다. 그렇게 첫 연애를 끝냈다.

 

  2학기는 정신없이 보냈다. 남자친구와 헤어지고 보내는 학기는 처음이다. 감상에 젖을 새도 없이 과제다 시험이다 집중하고 있으면 시간은 훌쩍 간다. 당신과 비슷한 뒷모습만 보여도 설레는 건 사실이지만, 당신은 뒷모습이 닮을 법한 사람도 많지 않더라. 그렇게 잊으면 끝이라고 생각했다. 아마 당신과 할 수 없어서 남은 아쉬움은 평생 기억하고, 아주 오랫동안 미련으로 남겠지만 그래도 끝낼 수 있을 거라고. 잘하면 몇 년 뒤에 마주칠 수도 있겠지만, 그때는 아무렇지 않게 굴 수 있으리라 믿었다. 그럴 수 있기를 빌었고, 당신을 책임질 사람이 나타나 그렇게 만들어 주기를 원했다. 그래, 무책임한 생각이지만, 분명 그랬다. 나는 당신을 감당할 수 없어서, 망가뜨리기만 할 뿐이라서.

 

소설이나 드라마, 인디 영화에서 자주 나올법한 감성이다. 그 정도 자각은 있다. 사랑에 눈이 멀었어도, 내가 앞을 보지 못한다는 사실 정도는 알아차릴 판단력을 남겼다. 그러니 끝낼 수 있었겠지. 아니었다면, 글쎄. 바닥까지 처박아봐야 끝낼 결심을 세울 수 있었으리라. 그 또한 하나의 결말이겠지만, 나는 아직 당신보다 내가 중요했다. 당신을 책임지기 위해서 인생을 조금 더 투자할 이유를 찾지 못했다. 알다시피, 나는 냉정하기 짝이 없어서. 가망 없는 곳에 감정과 시간을 투자할 이유를 찾지 못했다. 당신에게 애원할 용기도 없었다는 사실이 오랫동안 미련과 흉터로 남겠지만, 살아가겠지. 확신이 있었다. 나는 지금 여기서 손을 떼어도, 정신을 차리고 다시 내 삶을 살아갈 수 있다는 확신이. 그래서인가.

 

  서러울 정도로 차갑게 비가 쏟아지던 날, 당신이 우산도 없이 서 있다는 말을 듣고 정신없이 뛰어나갔던 건, 분명 그래서겠지.

 

 

 

 

  하늘이 어두워서 낮인지 저녁인지 구별조차 할 수 없는 시간이었다. 유리엔 김이 서릴 정도로 추웠지만, 아직 겨울은 아닌 시기. 비를 맞고 섰다가는 내일의 건강을 장담할 수 없는 계절이었다. 강의가 이르게 끝나 자취방에 돌아와서는, 오늘은 밖에 나가지 않으리라 맹세했던 날이었다. 저녁으로 먹을 음식을 고민하고 있을 때, 친구에게서 연락이 왔다. 지금 생각하면, 아마 그쪽에 네 전남친이 있으니까 나가지 말라고 알려주는 연락이 아니었을까? 회상할 때 진의를 깨달아도 어차피 늦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우산을 쥐고 문을 열고 있었고, 카톡을 확인하며 당신을 찾고 있었으니까.

 

  사실, 공들여 찾을 필요도 없었다. 당신은 보기 드물 정도로 키도 체격도 거대한 사람이었고, 대충 비슷하고 고만고만한 대학가에서 그런 사람은 언제나 멀리서도 눈에 띄기 마련이다. 가까이 가지 않아도, 당신이라는 사실 정도는 확신할 수 있다. 사랑이나, 함께한 시간이나, 인연이나, 운명 같은 우스운 말을 덧붙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그런 키에 체격을 가진 사람이 얼마나 있으며, 그 안에서 머리카락을 길게 길러서 늘어뜨릴 사람은 또 얼마나 있겠는가? ‘, 나는, 당신과 헤어지고 나서는 입에 담을 필요도 없던 이름을 떠올린다. 혓바닥에 올려 놓는 게 즐거웠던, 이유 없이 불러대던 이름. 빗물 젖은 바닥 위로 질퍽하게 울리는 발소리가 당신과 가까워질 때, 나는 일종의 포기와 닮은 기분으로 단어를 입에 담는다. 발성하고, 혓바닥으로 다듬어 입술 바깥으로 내어놓는다.

 

 

 

 

  “……샬카위.”

 

 

 

 

  이름도 아닌 성이지만, 나는 당신의 성이 혓바닥 위에서 구르는 느낌을 퍽 좋아했다.

 

 

 

 

  “여기서 우산도 없이 왜 그러고 있어요.”

  “…….”

  “안 추워요?”

 

 

 

 

  두서없이 쏟아내는, 단어 그대로 쏟아내고 있는 말.

 

   기실, 거짓 하나 없이 실토하자면, 나는 당신이 나를 쳐다보는 순간이 두려웠다. 아니, 나는. 볕 아래에서는 자수정보다 깊은 색으로 빛나서 숨 막히게 아름다웠던 눈동자가 어떤 색으로 변했는지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당신의 눈은 검게 물들어서, 구름 아래서 무저갱과 같은 색으로 음울하게 침잠했다. 텅 비어버린 눈에선 무엇도 보이지 않는다. 애정도, 연민도, 경멸도, 집착도, 아쉬움도, 심지어, 당신이 바라보고 있을 나조차도. 어쩌면, 그게 당신의 본질일지도 모른다. 바닥 깊숙한 곳에 달라붙은 심연이 그대로 드러나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나는 어리석고 경솔하게도 당신의 심연을 채우고 싶어 뛰어들었으나 이제는 안다. 나는 당신을 채울 수 없었다. 이를 실감한 이후로 당신의 심연은 오직 두렵기만 했다. 당신을 가장 사랑하던 시절부터 지금까지, 당신은, 어쩌면.

 

   나를 전혀 보지 않고 있을지도 모르는데.

 

 

 

 

  “다 젖었어요.”

 

 

 

 

  이제 나는 당신이 버릇처럼, 관성처럼 나를 빤히 바라볼 때 그저 두려움을 느낀다. 사랑이 당신을 바꿀 수 있다고 믿었다. 아니었다. 당신은, 그저, 다시 망가졌을 뿐이다. 어쩌면 더욱 심각한 꼴이 되었다. 나아지려 뻗었던 손을 놓고 더 깊은 곳으로 가라앉았다. 나는 그 심연이 언제나 두려웠다. 당신을 집어삼키고 내가 사랑했던 모든 순간을 지워버리고야 말, 무저갱보다 깊고 당신 스스로 빠져나올 의지가 없는 절망의 심연이 두려울 따름이다. 다만, 내게는, 당신에게 손을 뻗어서 망쳐버린 책임이 있어서.

 

 

 

 

  “손도 차갑게 얼었고.”

 

 

 

 

  습기에, 냉기 위로 맺힌 이슬에, 빗물에 차갑게 얼어버린 손은 이미 사람의 온도가 느껴지지 않는다. 당신은 원래도 신체 말단이 따뜻하거나 체온이 높은 사람이 아니었지만, 도대체 얼마나 비를 맞은 건지. 푹 젖어서 볼품없을 정도로 선명하게 드러난 신체 윤곽을 바라보며, 나는 당신이 감기에 걸렸다가는 도대체 당신의 비서에게 뭐라고 말해야 할지 걱정한다. 이런 꼴이 되었으리라 생각지 못한 건 아니었다. 단지, 이토록 비가 내리는 날에는 손난로를 챙겨도 의미가 없을 뿐이다. 그렇다고 뜨거운 음료를 챙겨와도 당신의 얼어버린 손에는 오직 뜨겁고, 고통스럽게 느껴질 터라서, 제 몸도 떠받치지 못해 무게가 고스란히 느껴지는 당신의 손을 잡아서 가져다 댈 수 있었던 건 결국 피부가 그대로 드러난 내 목덜미였다. 차갑게 젖은 손이 온기를 빼앗고, 소름 돋을 정도로 넓은 범위를 덮는 게 느껴진다. 묵직하게 내려앉는 팔과 손의 무게. 인형처럼 무엇도 비치지 않던 당신의 얼굴에 희미한 표정이 비치기 시작한 것도, 온기가 닿은 순간이다. 짜증이나, 불쾌함을 닮은 모양으로 일그러진 표정.

 

 

 

 

  “어째서…….”

  “당신이 여기 있다고 들었으니까요.”

  “……그게 네가 여기까지 올 이유가 되진 않을 테다.”

  “샬카위. 저도 걱정 정도는 해요.”

  “…….”

 

 

 

 

  일그러진 표정과 그 사이로 음울하게 반짝이는 눈은, ‘노려본다고 표현해야겠지. 당신의 그런 태도에 하나하나 겁먹기엔, 당신의 모든 것이 내게 위협적으로 다가오지 않은 게 좀 되었다.

 

 

 

 

  “날이 추워요. 그렇게 우산도 쓰지 않고 서 있다가 열이라도 오르면 어쩌려고 그러시는 거예요.”

  “……너와는 관계없다.”

  “예에, 그러시겠지만. 신경 쓰이잖아요.”

  “…….”

 

 

 

 

  목에 닿은 손이 더는 차갑다 느껴지지 않을 때까지,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을 시간을 그렇게 서 있었다. 많은 생각이 머리를 빠르게 스친다. 이대로 재결합했다고 소문나면 볼만하겠네, 애초에 헤어졌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도 많지 않겠지만, 제기랄, 친구들이 들으면 또 사흘 밤낮을 멸치처럼 들들 볶이겠지. 싫다. 이 사람은 도대체 왜, 왜 자꾸 한국까지 오는 거야. 올 필요도 없고, 이 주변에 당신이 들를만한 병원도 없을 텐데. 긴 생각은 결국 한숨으로 이어진다. 관성이라면 내 잘못이고, 화풀이로 이러고 있다면, 그 또한 내가 받아줘야 할 책임이 있다. 당신은 예민한 사람이라서 앞에서 한숨을 내쉬면 또 반응하겠지. 내가 이토록 감정을 자제하게 만드는 사람도, 아마 당신이 전부다. 도대체 왜, 헤어지고 나서도 이러는 거야.

 

 

 

 

  “…….”

  “클라비스.”

  “…….”

  “일단, 제 자취방이라도 가요. 여기서 계속 비를 맞고 있다간 정말로 감기에 걸려요. 저도, 당신도.”

  “어째서, 너는…….”

  “이렇게까지 하는 감정적이지 않은 이유를 들자면, 당신이 한국에 왔다가 감기라도 걸리면 제일 먼저 누굴 탓할 것 같아요?”

 

 

 

 

  당신의 시선엔, 존재하지 않을 터인 무게가 느껴진다. 이는, 당신이 느끼는 인생의 중압감과 크게 다르지 않으리라 짐작한다. 육중하고, 거대하며, 숨통을 죄어 매는 감각. 목구멍이 아프고, 숨은 삼키기에 너무 크며, 산소는 제대로 흡수되지 않는 느낌이다. 나는 당신에게서 부담감을 느끼지만, 당신은 아마, 그러게. 당신은 내게서 무엇을 느낄까. 나는 언제나 당신의 감각을 짐작할 수 없다. 인간은 누구나 타인이기에 상대방을 이해할 수 없다고, 당신은 즐겨 말했지만, 클라비스 엘 샬카위. 당신과 나는 아예 다른 종족 같았다. 지금도, 지금도 그렇다. 표정을 만들어 씌우지 않은 무표정을, 당신은 무슨 심정으로 보고 있을까.

 

 

 

 

  “나는 너를 이해할 수 없다.”

  “, 그러실 거예요.”

  “너는 어째서나를 내버려 두지 않지?”

 

 

 

 

  저를 걱정해서 달려온 사람의 행동에서 호의를 찾는 것이 아니라 이유를 갈구하는 당신을, 나는 영원히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

  “…….”

 

 

 

 

  글쎄, 사귈 때도 많은 말을 하는 사이는 아니었다. 언제나 일방적으로 떠드는 사람은 나였고, 당신은 듣기만 하는 존재였으니, 새삼 침묵이 버겁지 않다. 다만, 나는 버릇처럼 무언가 말을 꺼내 당신의 침묵을, 멈춰버린 세계를 찢어야 하는가 고민한다. 그 사실이 우스울 따름이다. 화가 나야 하는 상황이라고, 생각하는데. 감정의 단초를 쥐어뜯어도 찾을 수 있는 것은, 참담함과 두려움이라.

 

 

 

 

  “여러 번 말했을 터이지만, 네가 내게 보이는 것이 단순한 동정이나 자비에서 비롯된 이타심이라면, 그만둬라. ……나를 내버려 둬.”

  “……. 일단, 집에 가서 이야기해요, 샬카위.”

 

 

 

 

  여전히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가을 길.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이 내리꽂히고 있다. 당신과 내가 영어로 대화하고 있다는 사실이 이토록 감사한 순간이 얼마나 될까. 대화 내용까지 남들이 모두 들을 수 있었다면, 나는 아마 수치심에 혀를 깨물었겠지. 쓸모도 없을 만큼 정직하게 영화 같은 장면은, 이걸로 족하다. 충무로에서 유행하는 구질구질한 청춘 영화든, 대학가에서 만들어서 영화제를 노리든 인디 영화든 과할 정도로 넘치는 설정이다.

 

  유망하지만 삶의 의미를 느끼지 못하는 의사인 당신. 치기 어린 마음과 호기 섞인 도전으로 남에게 삶의 이유를 선물하겠다고 떠들어댈 만큼 세상 물정을 모르고, 실패한 적 없는 대학생인 ’. 2년에 걸쳐서 많은 것을 선물하고, 선물 받고, 코웃음을 칠 정도로 유치한 대화와 터무니없는 사랑의 속삭임을 일방적으로 쏟아낸 끝에, 당신을 바꿀 수 없다고 확신하게 되어, 사랑한 것을 사과하게 해달라는 말로 이별을 고했다. 그대로 끝날 관계라고 생각했다. 내게는 끝난 관계였건만, 당신에게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체온이 옮겨붙어 미지근하게 변한 당신의 손을 목에서 떼어낸다. 내 손으로는 겨우 손가락 몇 개를 쥘 수 있는 당신의 손은 언제나 나하고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해서, 당신은 나와 같은 종족일 수 없음을 깨닫는다. 뼈의 구성과, 뼈 위로 붙은 근육의 양과, 그 위를 덮은 피부의 질감까지. 당신은 나와 닮은 구석을 하나도 찾아볼 수 없다. 체온도 몇 도쯤 달랐으니, 정말로 나와 당신이 공유하는 건 온기와 사회의 규칙을 따라 한 언어가 전부겠지. 같은 광경을 봐도 같은 것을 느낄 수 없는 사이라는 건, 헤어지고 나서 실감했다. 내가 당신에게 보여주는 모든 제스쳐는 당신에게 가닿지 않고, 당신이 보여주는 모든 몸짓은 내게 이해할 수 없는 광경으로 보일 뿐이다. 깊게 펼쳐진 심연과 무저갱만이 당신의 검게 보일 정도로 음울하게 가라앉은 눈 속에서 선명해서, 제기랄.

 

 

 

 

  “샬카위, 나는 사람을 동정하지 않아요, 경멸과 같은 의미로 사용하지 않는 이상은. 당신을 동정한 적은 한 번도 없어요. 그리고, 제가. 그 정도로 멍청하고 사람 좋아 보였던가요? 이타심과 자비로 집에, 혼자서는 제압할 수도 없을 만큼 거대한 남성을 들일만큼?”

 

 

 

 

  그러니까 그 인간에게 먹이를 주지 마! 하고 소리치던 친구의 목소리가 귓가를 스친다. 당신의 눈에 음울하고 번들거리는 희망이 스칠 때, 나는 언제나 그 말을 떠올린다. 이게 당신을 망가뜨리는 길일까? 진실로 그렇다면, 나는 아마 최악의 인간이겠지. 하지만 클라비스 엘 샬카위, 나는 당신이 실낱같은 희망에 매달려서라도 살아갔으면 한다. 내가 당신을 구할 수 없다고 해서, 그 누구도 당신을 구할 수 없을 리 없다. 나는 한숨과 닮은 단어들을 빗소리 울리는 작은 우산 속에서 중얼댄다. 작은 비닐우산은 당신과 나를 모두 덮기엔 모자라서 당신과 나 모두 젖고 있다. 가을비가 얼음장처럼 차갑다. 속옷까지 스며든 빗물 덕에 옷은 이미, 제 기능을 잃었다.

 

 

 

 

  “그러면, 어째서냐?”

 

 

 

 

  저승의 망자와 대화한다면, 이런 기분이 들까? 터무니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떠올리지 않고는 버틸 수 없다. 당신의 목소리에선 언제나 절망의 편린과, 짜증과, 날선 기색이 느껴진다. 당신은 나를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러면 당신이 보이는 모든 말은, 이해할 수 없음에도 나를 향해서 쏟아져 내린 화풀이나, , 그쯤 되겠지. 그러니 나는 그 화풀이를 받아내야 할 책임감을 느낀다. 최선을 다하지 않고 자신의 안위를 위해서 당신을 손에서 놓아 버렸을 때, 내게 당신은 지울 수 없는 상흔이나 아주 오랫동안 남을 부채감이 되었다. 멍청하다는 말을 들어도, 잔인하다고 비난받아도, 내게는 책임이 있다.

 

 

 

 

  “가장 비슷한 말을 고르면 책임이겠죠. 나와 만나지 않았더라면 당신이 한국까지 와서 비를 맞고 있을 이유가 없으니, 당신이 빗속에서 몸이 축나기라도 한다면 그건 제 책임이잖아요.”

 

 

 

 

  아니, 내가 당신을 놓지 않았다면, 당신이 여기서 비를 맞고 서 있을 이유는 없을 테니까.

 

 

 

 

  “그러니까, 제발. 일단 들어가기라도 해요.”

  “…….”

 

 

 

  당신은 대답하지 않고 나를 응시한다. 나는 침묵으로 답하며 우산을 받지 않을 당신의 손을 잡아당긴다. 아무리 몸을 덥히려 노력해도, 냉기로 가득 찬 곳에 있으면 사람은 얼어가기 마련이다. 내 모든 노력은 결말을 유예하는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그래도 내가 배운 것이 있다면, 얼어가는 몸을 끌어안고 슬퍼하는 것보단 따뜻한 곳으로 움직이는 쪽이 효율적이라는 사실. 누군가 죽어가고 있다면, 어르고 달래서라도 데리고 떠나가야 한다는 것.

 

  잡아끄는 손끝에서 느껴지는 저항감은 길지 않았다. 당신은 버티는 대신 나를 따라왔고, 나는 도대체 몇 번을 함께 걷고 있는지 모를 길을 다시 터벅터벅 걸어간다. 신발은 축축하게 젖어서 기분 나쁘다. 손이 얼었다. 손끝이 곱아드는 것이 느껴진다. 당신의 손을 잡아끌고 싶었지만, 내 손으로는 언제나 역부족이다. 손가락 몇 개를 잡아놓고도 대단한 듯 끌고 나가는 자신이, 제기랄. 당신하고 있으면 언제나 이렇다. 자신만만하고 당당하게 굴 수 없다. 어차피 이런 생각을 해서 바꿀 수 있는 게 없다면, 하지 않는 게 제일인데. 소리라도 내지르고 싶다. 아니, 그냥. 아아,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아.

 

 

 

 

  “잠시 기다려봐요.”

 

 

 

 

  집에 도착해서는 당신을 현관에 세워놓고 버리는 것을 까먹은 진짜로 까먹었다. 이별을 고한 남자친구의 옷을 가져다 놓고 추억에 젖는 기분 나쁜 짓을 하는 취미는 없다. 190cm의 건장한 남자 옷을 어디 버릴 곳이 마땅찮아서 본가에 가는 길에 버리려고 미뤘다가 까먹었을 뿐이다.당신의 옷을 꺼내 젖지 않도록 욕실의 선반에 올려놓았다. 당신은 움직이지도 않고 현관에 서서 물을 뚝뚝 흘리며, 내 움직임을 눈을 굴려 좇았다. 누군가는 기분 나쁘다고 하겠으나, 내게는 이미 익숙해진 일이다. 당신은 시선을 따라붙게 하는 것으로 애정을 표현하곤 했으니까. 매우 알아보기 힘들고, 사실 애정 표현이라고 해도 기분 나쁠 수 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지만, 최소한 나는 기뻐했다. 눈을 굴리고 타인의 움직임을 받아들일 정도로는 삶에 집중하고 있다는 뜻으로 알아듣기로 했다. 당신은 그래, 몇 번 정도 낙관적이기 짝이 없는 시선이라고 말했지만, 알 바인가. 내 삶을 보는 방식은 내가 정한다. 하지만 설명하려고 보니 그 말은 너무 영화나 소설의 주인공 같아서, 나는 그저 둘 중 하나는 긍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어야 균형이 맞지 않겠어요?’ 하고 말았다.

 

  그래, 생각해 보면 나는 언제나 당신에게 하지 않은 말을 쌓아두고 있었다. 딱히 이에 무슨 감정을 느끼진 않는다. 사람이 어떻게 모든 말을 쏟아놓고 살 수 있겠는가? 당신이 하던 말 그대로, 우리는 다른 영혼을 가진 타인이다. 내 방식을 당신이 이해할 수 없고, 당신의 방식은 내가 이해할 수 없다. 그러니, 가장 객관적인 사실을 지표 삼아서 나는 당신에게 나를 내보인다.

 

 

 

 

  “, 안에 넣어 뒀으니까 갈아입으세요. 수건은 안에 당신 쓰던 거 남아 있으니까 머리 말리시고. 따뜻한 물로 샤워하라고 말해도 하지 않으실 거잖아요? 그러면 몸 더 식기 전에 옷이라도 갈아입어요.”

 

 

 

 

  나는 당신의 반응을 보지 않고 몸을 돌려 냉장고를 살핀다. 다행히 재료가 남아 있다. 귀찮으니까 저녁은 적당히 라면이라도 끓여 먹을 생각이었는데, 아무래도 제대로 요리를 해야 할 판이다. 열 시간이 넘게 비행기를 타고 왔을 인간이 비까지 맞았는데, 대충 먹여서 보낼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어차피 평소에도 식사에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이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라고 하지만, 저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도 관심이 없다. 그대로 방치했다가는 건강을 망치고야 말겠지. 그야말로 비극이다. 저 인간이 하고 다니는 의료 봉사의 규모를 생각하면 더 그렇다. 안 그래도 험지와 오지를 전전하며 제 가진 바 기술을 펼치는 사람인데, 그런 인간이 겨우 연애 때문에 몸이 축나서 규모를 줄이거나 가서 쓰러지기라도 했다가는. . 나도 위가 아파서 쓰러지겠지. 그리고 저 새끼 전 남친이 찾아오는 걸 못 견뎌서 쓰러졌다는 헛소문이 내 주변인을 강타하리라. . 벌써 속 아파.

 

  그런 고로 오늘 저녁은 국물 요리라도 해 볼 생각이다. 몸이 식었고, 딱히 음식을 먹지 않는 인간에게 어울릴 법한 음식. 최고의 선택은 수프 종류겠지만, 슬프게도 나는 수프를 먹지 않는다. 만들려고 작정하면 만들지 못할 건 없지만, 맛도 장담하지 못할 음식을 이 비 오는 날에 축축한 신발을 신고 나가서 재료까지 사 올 생각은 없다. 그만큼 해 줘야 할 이유도 없고. 아니, 그냥 저 인간을 자취 방에 혼자 내버려두고 나가고 싶지 않다. 급해서 데리고 들어왔다고는 하지만, 이미 헤어진 사이에 그렇게 할 수는 없다.

 

  결국 나는 가지고 있는 티백 몇 개를 뒤져서 허브차를 찾아내고, 이 역시 나는 마시지 않으니 당신과 사귀던 시절의 흔적이다. 내 입맛에 허브차는 향을 첨가한 끓인 물이다. 먹으면 기분이 그리 좋진 않다. 처리해야 한다고 생각은 했는데, 제기랄. 미뤄 뒀더니 이렇게 쓸 일이 생기네.커다란 머그잔에 담는다. 이 머그잔도 당신 손에 들어가면 그냥 컵이 되겠지만, 일단 내가 가지고 있는 물건 중에는 제일 크다. 하아. 내가 왜 이러고 있지.

 

 

 

 

  “다 갈아입었으면 일단 급한 대로 이거라도 마셔라고 하려고 했는데.”

 

 

 

 

  옷을 다 갈아입긴 했네. 나는 어린아이의 성취를 평가하는 기분으로 그나마 좋은 점 한 가지를 찾아낸다. 다행히 체격이 바뀌지는 않은 모양이다. 제발 나랑 있을 때라도 편한 옷을 입으라고 몇 날 며칠을 부탁해서 산 캐주얼한 생활복은 그에게 여전히 잘 맞는다. 물론 저기서 더 키가 자라기라도 했다간 자취방에 고개를 숙이고 들어오는 정도가 아니라 기어서 들어와야겠지만, 방이 그래도 좁은 편은 아닌데, 당신이 들어오니 고시원이 됐다. 그래, 내가 앓느니 죽어야지, 죽어.

 

 

 

 

   이거 받아요, 머리 안 말려요?”

  “…….”

  “옷도 젖잖아요.”

  “내버려 두면 마른다.”

  “다음 생 즈음에요?”

 

 

 

 

  바닥에 물이 뚝뚝 떨어지는 꼴을 보고 그냥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숨겨도 기색으로 다 드러나겠지. 분명 무언가 의도가 있고, 생각이 있겠지만, 내게는 삐진 아이로 느껴진다. 아니, 예전부터 당신을 그렇게 취급하긴 했다마는. 나도 그냥 생각을 포기하는 게 낫겠다.

 

 

 

 

  “이거 받으세요.”

 

 

 

 

  나는 그냥 머그잔을 당신에게 넘겨주고, 머리에 손도 대지 않고 올려놓은 수건을 쥐었다. 말로 설득해서 당신이 직접 머리를 말리게 하는 일보다, 이쪽이 빠르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머리카락은, 처음 만났을 때부터 이런 길이였다. 2년간 만나면서 따로 손질하는 모습을 본 적 없으니, 앞으로 더 길어지든지 그가 귀찮아져서 완전히 짧아지든지 하겠지. 머리카락을 자르면 아쉬울 것 같다고 생각한다. 당신과 내 사이엔 무언가 관계라고 부를 것이 남아 있지 않지만, 그러니 입 밖으로 내진 않겠지만, 나는 당신의 긴 머리카락을 좋아했다. 길게 늘어져 움직일 때 무겁게 출렁이는 모습도, 당신이 무언가를 생각하거나 손에 쥘 것이 없으면 만지작거리는 순간도,

 

  물을 머금어 무거운 머리카락을, 두껍고 커다란, 내 몸만 한 수건으로 닦아내고 있으면, 잡념이 사라진다. 단순 반복 육체노동을 하면서 할 발언이고 전 남친의 머리카락을 말려주면서 할 생각이 아니라는 생각이 퍼뜩 들었을 땐, 머리 뿌리까지 말리고 있었다. . 최소한 물은 안 떨어지겠네!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한다. 당신의 눈이 한층 음울해진 기분이 들지만, 어쩌겠는가. 슬슬 아무래도 좋다는 생각이 들고 있다. 나는 당신과 달라서 오랫동안 우울함을 간직하지 못하는 편이다. 감정은 언제나 그 가치를 따져 느낄 필요가 있는지 천칭에 걸고, 우울함이나 괴로움은 언제나 부적합 판정을 받는다. 충동이 가신 자리에 남는 건 익숙함이 안겨주는 버릇과, 합리.

 

 

 

 

  “몸이 좀 녹았으면, 침대에서라도 쉬고 있으세요. 저녁 준비해 드릴 테니까.”

 

 

 

 

  대충 뭐라도 먹이면 정신을 차리겠지. 마음 같으면 허브차에도 설탕을 조금 타서 정신을 차리게 만들고 싶었는데, 아무래도 그건 맛이 끔찍해질 것 같아서 그만두었다. 사람의 우울과 충동은 대부분 당이 모자라고, 잠을 제대로 자지 않고, 영양소를 맞추지 못해서 체력이 부족해져서 생긴다. 최소한 내 경험상으로는 그렇다. 그런데 비도 오고, 날도 추우면 더 감정적으로 변하겠지. 몸을 데우고, 밥을 먹고, 당을 보충하면 좀 정신이 들어서 제가 어떤 꼴인지 자각하겠지.

 

   냉장고를 뒤져서 골라낸 신선한 재료들을 탁탁 다지는 소리가 넓지 않은 방에 울린다. 혼자 지내면 모자라긴 해도 괴로울 정도로 좁지는 않은 방인데, 당신이 있으면 터무니없을 정도로 작다. 체중이 거의 두 배는 차이 나니까 당연한가. 체격의 차이를 따져보면 당연한 일인데, 이상하게도 의식하게 되는 날이다. 아니, 이상하진 않겠지. 이미 헤어진, 그것도 스스로 이별을 고한 남자친구를 방에 들여놓고 있다는 시점에서 이상하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아까부터 불안하긴 했다. 저 인간을 방에 들였다는 사실을 친구들이 알면 쉽게는 안 끝나겠지. 도대체 얼마나 들들 볶을지 생각하면 머리가 아프다. 왜 그대로 보내지 못하냐고 소리를 질러댈 것이 명백했고, 더욱 심하면 우리 집에 연락해서 내가 방학 때 핸드폰을 해지하는 꼴을 봐야겠다고 식식대겠지만, 오래된 버릇은 쉽게 고쳐지지 않는다. 나는 내가 정한 규칙을 다하는 것으로 를 유지한다. 그리고 당신에게 책임을 지는 것은, 내게 규칙이 되었다.

 

   멍청한 인간이야.

 

   융통성도, 유도리도, 적당한 합의도 통하지 않는 인간. 궁지에 몰릴수록 스스로 만든 규칙 속에 자신을 끼워 넣어 얄팍하고 부족한 자아를 유지하는 사람. 제기랄. 자학하는 버릇은 가진 적 없고, 앞으로도 가질 예정이 없었는데. 당신은 언제나 내가 공들여서 쌓아놓은 규칙을 엉망으로 휘젓는다. ‘사랑이라는 명목으로 규율과, 규칙과, 기준을 무시하고 당신 좋을 대로 휘두르고 다닌다. 당신은 언제나 내가 당신을 휘두른다고 말했지만, 당신도 만만찮게 나를 망쳐놓고 있다.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하게 만들고, 귀찮은 책임을 떠안도록 강요하고, 하지 않아도 될 변명과 아쉬운 소리를 생각해야 할 상황으로 몰아넣는다. 정말로, 쫓아내야 할 텐데.

 

  적당히 우러난 국물에 숟가락을 넣어서 간을 확인하고, 그 숟가락은 그대로 개수대에 던져 넣는다. 이 역시 혼자 먹겠다고 요리 할 때면 신경 쓰지 않는 점이다.

 

 

 

 

  식탁을 사 둬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냄비 받침을 두고 냄비째로 옮겨서, 국자로 그릇에 덜어주는 내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이 모든 장면이 끔찍하다. 소설이나 영화였다면 즐겁지만, 그 당사자가 되었더니 비명밖에 지를 게 없다. 바닥에 앉아서 상에 놓고 먹어야 했다면, 나는 그냥 포기하고 당신하고 적당한 곳에 가서 밥을 사 먹였을 것이다. 당신의 체격에 맞는 상도 없을 테고, 사실 이 식탁도 좀 낮아 보인다. 어쩔 수 없다. 당신에게 맞춰서 살 수 있을 리가 없지 않나. 내 자취방은 넓지 않다.그 맞지 않는 상에 놓인 음식을 한국식 식기로 먹고 있다고 생각하면 그냥 혀 깨물고 죽어버리겠다. 제기랄, 진짜 다행이다. 역시 뭐든지 준비해둬서 부족할 일은 없구나.

 

  음식은, 내가 생각해도 잘 됐다. 당신이 앞에 있지 않았다면 핸드폰을 들고 사진을 찍어서, 친구들과 가족에게 잔뜩 자랑했겠지. 다음에 집에 놀러 오면 직접 만들어 주겠다는 말도 몇 마디 덧붙여서 호들갑을 떨겠지만, 지금은 그냥 망하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이게 망했으면 역시 혀 깨물고 쓰러졌다. 게다가 그럭저럭인 맛이라면 지금 숟가락을 드는게 아니라 조용히 편의점에 가서 소화제를 사왔겠지. 사실 지금도 집에 소화제가 있었던지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다. 없으면 어쩌지. 저 인간 가고 나서 사 오든가 토하든가 해야지.

 

  당신도 느릿하게나마 수저를 움직인다. 반찬으로 삼을 게 많지 않은 것은 내 입맛 탓이지만, 일일이 챙겨 줄 의리도 없다. 맛이 없나? 하는 생각은 했지만, 이걸 물어보면 너무 친밀해 보이지 않겠나. 생각 같으면 그냥 물어보고 말겠지만, 당신의 이야기를 할 때마다 게거품을 물고 화를 내던 친구들을 떠올려서 그냥 입 다물기로 했다. 너는 제발! 먹이를 주지 마! 소리를 지르던 친구의 목소리가 다시 귓가에 어른댄다. 사실 좀 많이 찔린다. 근데, 저 인간을 놓아두면 다음엔 무슨 짓을 할 줄 알고 방치한단 말인가.

 

  비가 오는 날 데리러 나가지 않는다면 다음엔 더한 꼴로 내게 화풀이하리라고 생각했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비를 맞고 서서 집에 따라오지 않겠다고 생각하는 것도 모두 내게 화풀이한다고 여기고 있다. 사실 열 몇 시간을 날아와서 한다는 게 고작 화풀이라는 사실을 이해할 수 없지만, 당신은 언제나 나랑 다른 기준으로 다른 벡터를 가지고 움직였으니 그 정도는 할 수 있지 않은가 여기기로 했다.

 

   그릇 달그락거리는 소리도 나지 않는 조용한 식사 시간. 때때로 당신은 수저를 멈추고 나를 빤히 보거나, 방의 어딘가에 시선을 두거나, 그릇을 멍하니 바라보거나 했지만, 그 생각을 짐작하는 일은 그만두기로 했다. 딱히 볼만한 것도 없을 테고, 그가 그렇게 보는 것이 통상적인 관념에서 실례라는 생각도 했지만, 말하기도 귀찮아서 침묵했다. 다만, 당신이 움직일 때마다 여전히 폭포수처럼 쏟아지거나, 울렁이는 머리카락이,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심흑이나 칠흑이라는 표현이 어울릴 만큼 검은, 나와는 달리 볕 아래서 색이 변하지 않는 머리카락. 나는 볕 아래서 머리카락의 색이 변했지만, 당신은 눈 색이 변했다. 아래가 아니라 위를 바라볼 때면 언제나 투명하게 반짝이는 보라색 눈이었다.

 

  헤어지고 나서는 떠올린들 하등 의미 없는 기억이다.

 

 

 

  음식을 다 먹고 나서는, 말없이 그릇을 정리했다. 당신은 손을 뻗지도 않고 그냥 가만히 앉아 있었고, 나는 남은 음식을 버리고 그릇과 수저를 개수대에 담갔다. 바깥에는 여전히 비가 내린다. 제법 강해진 빗줄기가 쏴아아 소리를 낸다. 꼭 와도 이런 날.

 

   그는 헤어지고 나서도 제법 일정한 주기를 가지고 내 주변에 들렀다. 도대체 왜 오는지 모르겠지만 아마 관성적인 움직임이라 짐작한다.꼭 와서는 사람을 부르지도 않고, 그렇다고 제 할 일을 하지도 않은 채 어딘가에 멍하니 서 있다. 그는 어디에 있어도 눈에 띄는 사람이고, 별로 새로운 얼굴을 볼 일이 없는 대학가에선 더욱 그렇다. 더군다나, 유명인이라면 두 배는 눈에 띈다. 그러면 결국 연락은 내게 들어온다. 어디에 있더라, 하는 친하지 않은 사람들의 연락이나, 소문이나, 뭐 그런 것들. 친한 친구들이 그쪽으로 가지 말라고 연락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나는 결국 당신을 주우러 갔다. 선물을 들고 있어서, 길을 잃은 것 같아서, 비를 맞고 있어서. 멍청하다고 생각하고 있어도, 결국 볼 것도 없는 여기까지 당신이 왔을 이유는 단 하나라서, 멍하니 시간을 보내도록 둘 수 없었다. 만나서, 밥을 먹여서, 정신을 챙겨서, 비행기를 타고 돌아갈 수 있도록 언제나 말을 걸었다.

 

   당신은 매번 음울한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며, 왜 당신을 내버려 두지 않느냐고 이야기했지만, 나야말로 묻고 싶었다. 왜 당신은, 올 이유도 없는 곳에 와서 내게 그런 말을 하는가? 언제나, 언제나 묻고 싶었다. 도대체 내가 무엇을 해주길 원해서 그렇게 찾아오고 있냐고.

 

 

 

 

  호텔은, 예약하셨어요?”

  “……아니.”

  “근처엔 괜찮은 곳이 없을 테니, 택시라도 잡아서 공항 주변의 호텔을 잡는 게 좋을 거예요. , 당신이 매번 묵는 곳이 있겠지만…….”

 

 

 

 

  이어갈 말이 없어 침묵한다. 단어를 덧붙이는 것도 과한 참견이 되겠지. 얼었다 녹은 몸과, 해야 할 일을 다 했다는 안도감과, 정신에 가해진 압박이 더해져서 수마가 몰려온다. 느릿하게 눈을 깜빡여도, 침잠하는 의식과 떨어진 사고력, 둔해진 판단력이 돌아오진 않는다. 안 그래도 이성적이지 못한 판단만 하고 있는데, 심해지겠네. 마른 세수를 두어 번 반복한다.

 

 

 

 

  “비 심해지기 전에 가세요, 비가 더 심해지면 움직이기도 힘들 것 아니에요. 옷은 저기, 챙겨 뒀으니까. 저는 정장은 잘 모르니 따로 손대는 것보다 당신이 알아서 하시는 게 낫겠죠.”

 

 

 

 

  해야 할 일은 다 했다.

 

 

 

 

  가세요, 샬카위. 제 방은 좁고, 당신이 머물만한 곳도 없어요. 침대라고 있어봤자, 당신이 올라가면 불편하거나, 몸을 구겨야겠죠. 당신을 바닥에서 재웠다가는 제가 자다 말고 방을 나갈 테고. 그러니 가세요.”

  “…….”

 

 

 

 

  당신은 대답하지 않는다. 그저, 오늘 빗속에서 마주쳤을 때와 다르지 않게, 머리카락을 아래로 드리우고 음울한 시선으로 나를 응시한다. 볕 아래서 아름답고 투명하게 반짝이던 보라색 눈동자는 이제 검은색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다시 보라색으로 반짝이는 순간이 온다고 해도, 그건 내 덕분이 아닐 것이고, 내가 볼 권리도 없다. 당신에게서 손을 뗀다는 건 그런 의미였다.

 

 

 

 

  “, 여기. 가면서 젖지는 않을 겁니다.”

 

 

 

 

  분명 다른 방법도 있었겠지. 승부수를 띄운다는 선택지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를 고르지 않았다. 당신에게 모든 것을 투자하지 않겠다고 선택했다. 그럴 가치가 없다고 판단했고, 당신의 인생에서 퇴각하며, 동시에 내 인생에서도 퇴거하라 요구했다.

 

 

 

 

  우산, 없으실 테니까 이거 들고 가세요. 저는 비 그치고 새로 살 테니까 돌려주러 오실 필요 없습니다. 그럴 만큼 가치가 있는 물건도 아니고. 비행기 타기 전에 비가 그치면 대충 버려도 됩니다. , 가실 나라에 비가 오려나. 그래도 당신에게 어울릴 물건은 아니에요.”

 

 

 

 

  다만 내가 당신에게 책임을 다하는 이유는, 그저 당신이 퇴거를 대비할 시간을 주지 않고 일방적으로 선언했기 때문이다. 당신의 연인이 되고, 삶의 이유가 되고, 삶의 의지를 다지도록 돕겠다고 선언했던 날도 나는 합의 없는 일방적임으로 갈음했다. 나는 당신에게 폭거를 저질렀고, 이는 분명 다른 방식이 있음에도 편함을 선택하고, 들뜬 감정을 제어하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저지른 실책이었다. 숙고하지 않은 채 감정에 휩쓸려 내린 결론이었다.

 

 

 

 

  “잘 가요, 엘 샬카위.”

  “…….”

 

 

 

 

  당신은 대답하지 않는다. 작별 인사를 고하지도 않고, 움직이지도 않는다. 내가 내보이는 모든 몸짓을, 의미를 받아들이기를 거부한다. 우스운 일이다. 당신은, 사귈 때는 내가 당신과 사귄다는 사실을, 내게 특별한 지위를 부여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한 상태로 시간을 보냈다. 그저 나 혼자서 당신의 불행한 인생을 장식하는 무대 장치가 되어서 날뛰었을 뿐이다. 그래서 나는 당신을 떠났다. 당신이 바뀔 수 있다면 무대 장치가 되어도 좋았지만, 당신은 내가 만든 빛에 젖어서 더욱 망가지고, 움직이기를 포기하고, 침잠했다. 나는 당신을 망쳤다. 그 무엇도 바꾸지 못했다.

 

 

 

 

  제발.”

 

 

 

 

  그래서인가? 당신은 이제 내가 주장하는 이별조차 받아들이지 않는다. 무저갱과 같이 텅 비어버린 눈으로, 연인에게 대하던 시절과 크게 다르지 않은 태도를 취한다. 당신은 온몸으로 내가 주장하는 이별을 거부한다.

 

 

 

  빗줄기가, 거세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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