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루시, 그러니까 루시라고 하자. 내 본명은 따로 있지만 어찌되었든 온 사방에서 그렇게 불러대니 내 이름도 그렇다고 하는 것이 편할 것이다. 루시는 방바닥에 드러누워 창밖으로 보이는 푸른 하늘을 일 없이 올려다보고 있었다. 구름 하나 없이 푸른 하늘이 저물어가는 모습을 바라보며, 바닥의 얼룩이라도 된 양 꼼짝도 하지 않는 것이다. 푸른 하늘이 저물고, 노을빛 세계가 검게 물드는 그 긴 시간 동안 누워있다는 것은 노동해도 되지 않는다는 특권에 대한 증명이며, 동시에 그의 부자유를 증명하고 있었다. 이러니저러니 이야기해도, 이곳은 마피아의 본거지. 외부인인 그가 함부로 돌아다닐 수는 없는 일이다.
2 그쯤에서 루시는 3일간 굶은 상태였다. 나름의 시위였으나 기실 하루가 지나고 나서는 무언가를 먹고 소화시키는 과정이 귀찮아 진 것도 사실이다. 지금도 옆에는 제 먹으라고 둔 음식이 있었으나 귀찮았다. 그는 무거운 몸을 이끌고 기어서 침대에 올라 몸을 푹 하고 던졌다. 아마 그게 할 수 있는 최선의 행동이었다. 그 이상 무언가 행동하기에는 힘이 없었고, 귀찮았다.
3 결국 마피아의 No.2쯤 되는 친구가 직접 음식을 가져다 주기에 우물거리며 죽을 삼킨 게 아마 5일째 되던 날이었을 것이다.
4 자, 이제 간단한 이야기를 하자.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나서는 사람은 '루시'라고 제 이름을 댔다. 본명은 당연히 따로 있다. 유학 시절 사용했던 이름일 뿐이다. 이 이야기는 아마, 세상에는 별 이상한 새끼가 다 있고, 재앙처럼 찾아드는 이상한 새끼는 처리할 방법도 많지 않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는 하나의 사례가 될 것이다.
5 간단하게 이야기하자면, 루시는 유학 시절에 남자친구를 사귀었다. 사귀었나? 사실 정확하게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러게, 왜 기억이 안 난담. 그는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며 그 때를 회상했다. 아마 술집에서 만났던 것 같다. 루시는 술에 취해 있었고, 남자는 느른하고 귀찮은 듯 나른한 목소리를 냈다. 루시는 온 몸에서 여유를 흘리는 남자의 눈이 냉정하게 얼어있다는 사실이 퍽 즐거웠던 것 같다.
6 기억이 애매한 이유가 술 탓인지, 그 날을 기억하고 싶지 않은 것인지, 성격 탓인지는 잘 모른다. 루시는 태평하게 드러누워서,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그 날의 자신을 좀 욕했다. 하필 그 바를 간게 문제인지, 아니면 재미있어 보이면 무조건 달려들어서 장난을 쳐대는 제 성격이 문제인지 모르겠다. 그래, 처음에는 남자와 술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그는 술에 대해서 박식한 듯 보였고, 그런 것을 당연하게 이야기하는 게 즐거웠다. 원래 아는 척 하는 남자만큼 꼴사나운 게 없지 않은가? 그러지 않는다는 점이 즐거웠지. 이야기는 통하지만 아는 척하지 않는 남자. 한참 대화하다가 이야기는 홍차에 대한 주제로 튀었고, 그제야 남자의 눈이 조금 일렁이는 것이 즐거웠다.
7 그쯤에서 너는 사람의 선을 들쑤시고 안으로 들어가 보려고 발악하는 버릇을 고쳐야한다는 친구의 말을 떠올려야했다. 아니, 고치긴 고쳤어. 단지 그 때는 술에 취해서 이성을 잃었을 뿐이지.
8 어쨌든 루시는 남자와 퍽 즐겁게 이야기 했고, 딱히 별 생각 없이 연락처를 남겼고, 필름이 끊겼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와인이니 위스키니 마셔댔으니 당연한 일이다. 그것도 약한 건 싫다고 포트와인을 마셨지 미친 새끼……. 어떻게 제대로 집에 기어 들어간 것은 천운이다. 아닌가? 그 사람이 데려다 줬던가? 모르겠다. 제기랄, 어쨌든 사랑은 사랑이었다. 사람이 좋아서 감정만 남고 뭘 했는지 기억 안 나는 게 말이나 돼?
9 아마 첫눈에 반했을 것이다. 아까부터 가정으로 말하고 있는 이유는 첫사랑이고, 첫 연애고, 아마 마지막일 것이기 때문이다. 사랑은 더 할지 모르겠지만 연애는 할 생각이 별로 없다. 어쨌든, 내 사랑에 대한 건 별로 중요하지 않으니까 넘어가자면. 그렇게 바에서 가끔 만나고, 그러다가 친해지고, 어느 날 친구와 연인 동반 무언가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마침 바에서 만난 그와 그런 이야기를 하고, 한 번 쯤 해 보고 싶다는 이야기를 하다가. 아마.
10 같이 가고 싶으니까 사귀어 주겠냐고 고백했을 것이다.
11 꽤 오랫동안 생각한 말이 아무렇지 않게 나온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아마 좋아한다고 고백하고 싶었을 것이다. 지금 생각하자면 연애에 대한 동경도 있었을 것이고, 한 번쯤 타인에게 고백해보고 싶다는 마음도 있었을 것이다. 이런 저런 생각을 머릿속에서 굴리고 있으면, 그 순간의 자신이 타인의 시선에서 보듯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12 어색하게 아무렇지 않은 척 하는 얼굴, 긴장을 숨기려고 탁자 아래로 내려서 꽉 쥔 손. 웃고 있는 표정이 상기되어 있고, 거절을 생각하면서 무슨 말로 대답해야 할지, 앞으로 이곳에는 오지 말아야할지 고민하면서, 이 사람을 잃어버리면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할지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다. 저질러버렸다는 낭패와 지금이라도 장난이라고 이야기할까 고민하는 눈. 어딜 어떻게 봐도 미숙하고 어리숙한 태도.
13 그러니까 그가 받아 줬을 때는, 못 믿었겠지.
14 담백한 태도였다. 아니, 사실 긍정이라는 사실도 믿지 못했다. 그는 귀찮은 일은 싫지만 귀찮지 않다면 기꺼이. 라고 대답했던 것 같다. 나는 아마 당신에게 귀찮게 굴 일은 없다고 이야기했을 것이다. 내 성격이면 그러고도 남았고, 실제로도 그 뒤로 그에게 적극적으로 다가서지 못했던 건 그 말이 걸려서 그랬으니까. 늘 귀찮아하는 사람이 곁에 자리를 뒀다는 사실 하나로 기뻐할 수 있었다.
15 사실 그 뒤로도 딱히 무언가 크게 달라지지는 않았다. 바꿔야한다는 의식도 희미했다. 기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나는 연애에 대해서 아는 것이 없었고, 의욕도 없었으며, 그냥 호의를 상대방이 받아 줬다는 사실에 기뻐하고 있을 따름이었다. 이름을 들은 것도 사귀자는 말을 하고나서 꽤 지난 이후였고, 그 날이 되어서야 내가 이름도 모르고 그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러니까, 맹목이었다. 눈이 멀고 귀가 닫혀버린게 틀림없었다.
16 이제 와서 고백하자면 나는 그 때 그가 나를 사랑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크게 상관은 없었다. 어차피 나는 사랑받아도 서로 사랑한다는 느낌은 받지 못했을 거라고 생각하니까.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것과 당신이 내게 품는 감정은 전혀 다른 범주에 속하니까. 그건 지금도 그렇다. 나는 당신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리 크게 신경 쓰고 있지 않을 것이다.
17 연애 하던 시절? 혹은 우리가 서로를 연인이라고 생각이라도 했던 시기? 어쨌든 내가 당신에게 ‘남자친구’라는 태그를 붙이고 있던 시절은 담백했다. 당신은 언제나 바빴고, 나는 굳이 당신에게 시간을 내어달라 청하지 않았다. 그냥, 대화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족했다.
18 이런 식으로 서술하고 있으면 그는 무심하고 나는 헌신적으로 보이지만 실제로 무심한건 내 쪽이었다. 알고자 하지도 않았고, 알려 달라 신호를 보내지도 않았으며, 그냥 있는 그대로 족하다고 겉모습에 만족했다. 아, 외모를 사랑했다는 말은 아니다. 그는 빈말로도 옷을 잘 입는다고 할 수 없는 남자였고, 얼굴은 어쨌든 난잡하게 자란 머리카락은 늘 빗어서 묶어주고 싶었으니까.
19 적당히 같은 곳에서 시간을 보내고, 가끔 밖에서 만나고, 선물을 받으면 거절하거나 적당히 받고 그에게 어울릴만한 것을 찾아 선물하고. 정말 딱 그 정도의 사이였다. 나는 그 정도로도 넘치게 행복했고, 즐거웠고, 아마 그것보다 덜해도 즐거웠을 것이다. 사랑이었다니까, 정말.
20 상대방에게 소홀해지기 시작한건 그가 바빠지고, 나도 바빠졌을 때였다. 시험 준비를 할 무렵이었지. 그를 사랑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감정일 뿐이고, 그도 나도 당연하다는 듯 깊고 심각한 사이를 원하지 않았다. 아니, 그는 모르겠지만 나는 그랬다. 한 순간의 사랑과 바에서 만난 매력적인 남자친구를 일상으로 끌어들이고 싶지 않았다.
21 연락이 오랫동안 이어지지 않는 기간, 간간히 보내는 안부인사와 돌아오는 대답. 루시는 제 친구들과 과제에 잠겨들었고, 온 사방에서 치안이 흉흉해졌다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뉴스에서 발견한 남자친구의 얼굴, 마피아의 보스라는 안내와 주변에서 친구가 소리죽여 불평하는 소리.
22 문득, 당연하게도 납득하고 있었던 내가 이상해지는 순간이 온다.
23 그래도 나는 어딘가 납득하고 있었다. 아, 위험한 느낌이 오더니 그런 사람이었구나. 역시, 바쁘겠네. 같은 생각들. 신고하면 어떻게 될까? 당신이 쫓기고 있으니까 늘 조심하라는 말을 해야 하나? 고요한 혼란 속에서 나는 이상하게도 침착하게, 이별을 고하는 말을 쓰고 있었다.
24 침착하다고 생각했지만 분명 패닉에 빠져 있었겠지. 타자를 치던 손가락이 떨리던 모습을 기억한다. 정신없이 채운 이별의 말, 구구절절한 말을 이것저것 써 두었다가, 문득 자각했다. 결국 도망치고 있으면서 이런 말을 하는 것도 우습다고. 긴 텍스트를 모두 지운 자리를 채운 것은 헤어지자는 이별 통보 하나였다.
25 지금 생각하면 그가 마피아 보스라고 믿어버린 이유가 궁금하다. 아닐 수도 있었고, 물어볼 수도 있었는데. 그럼 그는 뭐라고 대답했을까? 어쩌면 그 때 나는 도망칠 구실을 찾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너를 너무 사랑한다는 현실이 싫어서, 누군가를 사랑하고 그곳에 매달려 있는 내가 두려워서 도망칠 구실을 찾았겠지.
26 핸드폰을 해약하고 가장 빠른 비행기를 잡아 귀국하던 순간에는 나도 내가 왜 이러는지 알 수 없었다. 아니, 그 시기의 기억은 다 애매하니까 잘 모르겠다. 뭐, 스트레스가 심했던 모양이지. 루시는 가볍게 넘겨버렸다. 어쨌든 끝낼 생각이었다. 어차피 시험도 과제도 모두 끝나가던 참이었고, 돌아갈 절차는 모두 밟아 둔 상태였으니까. 적당히 돌아갈 시기를 앞당겼을 뿐이다.
27 집에서 가족을 만났을 때는 울었고, 좀 더 시간이 지나고 나서는 당신이 무엇을 하고 있을지 궁금하다고 생각했으며, 그보다 더 시간이 지나고 나서는 내가 아직 당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나는 아무래도 한 번 좋아하기 시작한 걸 싫어하지 못하는 성정이니까, 도망치는 게 마지노선이었다.
28 그리고, 좀 더 시간을 보내면서, 나는 무작정 여행을 떠났다. 이곳저곳 발이 이끌리는 대로 움직이고, 아름다운 것을 보고, 하고 싶던 것을 해대면서 정신없이 무언가를 채워 넣었다. 그래도 당신이 그리워지는 순간이면 발신인의 이름과 수신인의 이름만 존재하는 엽서를 써서 우체통에 밀어 넣었다. 호수가 예쁘고, 바람이 청명하고, 꽃이 아름답다는 말을 써서 저 멀리 떠나보냈다.
29 도망쳤다는 구멍이 채워지기를 오랫동안 기다렸고, 정말 채워진 듯 한 느낌도 들었다. 어쨌든 시간은 무정하게 흘러가기 마련이고 회복이 빨랐으며, 당신은 다시는 내 인생에 들일 일 없는 사람이니까. 여행에서 돌아오고 나서는 학업에 돌아왔고, 학업에 돌아오고 나서는 충실하게 삶을 살았다. 그리고, 소개팅이나 받아볼까~ 하는 가벼운 마음으로 약속을 잡았다.
30 그리고 인생이 꼬이기 시작했지.
31 그 날은 이상하게도 일진이 더러웠다. 같은 사람과 여러 번 마주치는 듯한 착각, 외국인이 많이 보이는 거리, 왠지 모르게 저 멀리서 보이는 유학시절의 친구 같은 누군가. 더럽게도 불길한 하늘.
32 약속장소를 향해서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으면 따라붙는 사람이 있다는 확신. 욕설을 짓씹으며 큰 길로 가고 있지만 골목으로 몰리고 있다는 경악. 그리고, 못 알아보기도 어려운 엘리엇의 얼굴.
33 엘리엇의 얼굴을 확인한 순간 골목으로 몸을 날렸다. 그가 나를 봤을지 어떨지는 모르겠다마는 일단 도망쳐야 한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그들이 있다면 나한테 해를 가할 사람은 없다는 기이한 확신도 한 몫 했다. 엘리엇은 좋은 친구였고, 그가 나를 찾으러 왔다면 도망가고 싶었지만, 어쨌든 죽이거나 해를 입히지는 않을 테니까.
34 골목을 한참 걷다가 포위 됐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전력을 다해서 벽을 타고 –이 부분은 정말 미친 짓이라고 생각하지만.― 도망치려고 발악은 해 봤다. 그래, 발악은 해 봤다.
35 내 앞에 구 남친, 현 마피아 보스, 블러드 듀프레가 나타나지 않았으면 그 발악은 성공했을 것이다.
36 “어딜 가는 걸까, 아가씨.” 기억 속의 그 목소리와 조금도 다르지 않은 느른한 어조가 발목을 잡았다. 귀찮고 지루한 듯한, 여유로운 태도. 쿵, 하고 심장이 내려앉았다. 죄책감, 사랑, 긴장감, 무엇이라고 형용할 수 없이 죄어드는 속. 천천히, 천천히, 심호흡을 하면서 마음을 가라앉혔다.
37 “도망칠 생각인데, 보내줄래요?” “설마, 다 잡은 사냥감을 보내주는 것도 즐거울 것 같다만……. 우리 사이에는 할 말이 있지 않은가?” “헤어진 연인 사이에서 할 말이 뭐가 있어요, 아니, 뭐 사귀지 않은 것 같기도 하지만.” “멋대로 고백하고 멋대로 도망치면 끝이라고 생각했나, 아가씨?”
38 그 말을 듣고 나서야 뒤돌아 볼 용기가 생겼다. 줄곧 등지고 있던 전 남친을 마주할 용기가. 물론 뒤돌고 나서 바로 후회했다. 그는 여전히 아름다웠고, 내가 사랑했던 그대로였으며, 지루해 보였다. 모든 게 귀찮고 하기 싫다는 태도는 한 점의 변함도 없었다.
39 “오랜만이구나, 루시. 아니면……. ──라고 불러야 할까.” 그는 느른하게 내 본명을 불렀고, 나는 그쯤에서 도주를 포기했다. 본명을 알았다는 건 알만큼 알아봤다는 소리겠지.
40 “그냥 루시라고 불러줘요, 블러드. 헤어진 사이에 멋없이 차인 이유를 물어보러 온건 아닐 테고, 절 죽이러 왔나요?” 내가 그 순간에 생각할 수 있는 이유는 그 정도였다. 제가 알고 있는 블러드 듀프레는 무언가에 집착하는 사람이 아니었고 – 물론 홍차와 술을 제외한 이야기다만- 더군다나 그의 자존심에 상처를 내고 도망친 내게 남아있는 말로라고 해봤자 처참한 죽음뿐이었다.
41 “죽일 거라면 최소한 총으로 한 방에 보내줄 수 없을까요?” “재미있는 말을 하는군. 네 표현을 빌려 ‘여자친구’를 맞이하러 온 ‘남자친구’에게 매정한 태도가 아닌가?” “……예?”
42 맹세하겠는데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을 이해하지 못한 것은 내 이해력이나 사고속도의 문제가 아니다. 아니, 누구라도 이 상황에서는 말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헤어진 지 몇 년은 된 연인이 갑자기 나타나서 길을 틀어막고 협박에 가까운 태도로 이야기하는 게, 저런 말이라고?
43 “저기, 그, 우리 헤어지지 않았습니까?” 그런 말을 내뱉은 것은 맹세코 불가항력이다. 어떻게 지적하지 않고 버틸 수 있단 말인가? 아무리 일방적인 통보라지만, 우리가 헤어진지가 벌써 몇 년인데. 질척거리는 남자는 인기 없습니다? 버릇처럼 튀어나오는 말을 씹어 삼킨 게 내 최선이었다. 굿 루시, 굿 루시.
44 “박정한 말이구나.” “아니 아니, 박정이고 뭐고, 사실이잖아요.” “내가 그 제멋대로인 이별통보를 받아들일 거라고 생각했나? 이유도 모르는 이별을?” “아.”
45 잘 생각해 보면 나는 그에게 헤어지자, 미안해. 일곱 글자만 보내놓고 휴대폰을 해약하고 도망쳤다. 소위 말해서 튄 것이다. 그러니 그는 갑자기 잘 사귀던 –사귀었던 건지는 모르겠다마는- 여자 친구에게 차이고 이유도 모른 채 여자 친구가 사라진 사람이 되었고, 나는 그에게 내 일상에 대해서 이야기한 것이 많지 않으며, 어느 나라 사람인지도 말하지 않은 것이다.
46 “어, 음, 미안해요?” “아아, 정말이다. 참으로 무정한 연인이 아닌가, 이유도 없이 이별을 통보하고 사라질 줄이야. 뜨거웠던 시간은 모두 거짓이었나?” 별로 뜨겁진 않았는데. 굳이 따지자면 좀 미지근했지? 아니다 한 여름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다 녹고 그러고도 세 시간쯤 방치된 듯 한 미지근함이었다. 좀 차갑기까지 했다고. 반사적으로 튀어나오는 말을 다시 삼켰다. 인간은 이성이 있어서 지금까지 살아남은거지.
47 “그래도, 우리 지금 연인은 아니지 않나요?” 단지 주댕이는 가끔 이성을 배반한다는 게 문제다.
48 “갑자기 일방적으로 통보한 건 미안해요, 저는, 그, 혼란스러웠던지라. 다시 만나게 될 줄도 몰랐고. 하지만 이렇게 만나게 된 김에 다시 이야기할게요. 헤어져요, 블러드.” 숨도 쉬지 않고 뱉어낸 말. 나는 어쩌면 이 상황이 곱게 끝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고도 이런 말을 내뱉은 것은 분명 오기였겠지. 단지, 상대는 오기가 먹히지 않는 사람이었다.
49 “내가 그걸 인정할 것이라고 생각하기라도?” 그는 어딘가 빈정거리는, 평소의 어조로 이야기했다. 단지 등골이 오싹할 정도로 냉정한 무언가가 담겨 있었다. 사람을 본능적으로 두렵게 만드는 것, 맹수 앞에 섰을 때와 닮아있는 감각.
50 “나는 지금 화내고 있는 것이다, 루시. 그 경어는 그만두도록 해. 어울리지도 않는 짓을 해서 무슨 득이 있지?” “어울리지 않는다고 말해도 곤란한데요. 저는 원래 이게 기본적인 말투예요.” “그러면 더욱 그만둬야겠군. 연인을 타인처럼 대할 생각인가?” “저희, 연인이 아니잖아요.”
51 그러나 두려움 앞에서 굴하지 않는 것은 나의 장점이며 동시에 단점이었다. 모자 아래 가려져 그늘진 눈을 올려다보며, 나는 덤덤하게, 거칠어졌던 숨도 완전히 가라앉은 채로 고했다. “블러드, 저는 우리가 헤어졌다고 생각했어요. 당신을 여전히 사랑하지만, 그건 다시 사귈 이유가 되지 않잖아요.”
52 차라리 죽여 달라고 말하지 않은 건, 이대로 사태가 정리될지도 모른다는 일말의 희망이었을까. 아니면 그냥, 그런 말을 했다가는 더욱 걷잡을 수 없는 국면을 향해서 사태가 치닫는다는 사실을 알아서 그랬을까. 나는 그의 눈을 마주보았고, 문득, 무슨 짓을 해도 안 된다는 확신을 얻었다.
53 “네가 그런 말을 하는 건 그 녀석 탓인가?” “예?”
54 아까부터 그는 이해할 수 없는 말을 반복하고 있다. 아니, 애초에 여기 나왔다는 사실부터 이해할 수 없지만 그 중에서도 대화가 전혀 맞물리지 않고 있다. 그는 뭔가 중요한 것을 착각하고 있는 것 같았고, 내가 하는 말을 전혀 들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55 “네가 나가려던 자리에 출석할 예정인 남자라면 벌써 내 수하들이 처리했을 것이다. 너는 나를 버리고, 적당하게 새 남자를 찾아서, 연인 놀음을 즐길 생각인가? 너무한 여자로구나, 루시.” “아니, 그게 무슨, 애초에 나는 그냥 친구나 사귀려고 나간─” “나와 처음 친교를 맺었을 때도 그런 말을 하지 않았나? 친구가 되어 달라고?” “아, 내가 그런 88년대 멘트를 쳤었나.” “이야기 했다고? 정중하게, 한 순간 구애당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취했던 거겠지, 나쁜 버릇이었거든.”
56 아. 자연스럽게 말을 놓고 나서 깨달은 것은 틈을 보였다는 당혹감. 아직 친근감을 품고 있었다는 사실을 적나라하게 까발렸다는 부끄러움. 이러다가 돌이킬 수 없어진다는 위기감. 그는 한 순간의 당혹을 놓치지 않고, 공기는 싸늘하게 얼어붙는다.
57 “그래서? 다시 술을 마시고, 친구가 되고, 나쁜 버릇이 도졌다며 구애할 생각이었나? 대단한 바람둥이로구나. 나는 도무지 따라갈 수 없어.” “…….” “무언가 변명이라도 해 보는 게 어때.” “……나는.”
58 결국 나는 참패를 인정해야 했다.
59 “나는 두려웠어요, 블러드.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는 것이 그토록 두려울 수 없었어요.” 참담하게, 비참함을 숨기지 못하는 목소리가 벽돌 벽에 부딪혀 산산조각난다.
60 “나는 그때, 정말 당신을 사랑해서, 내가 나를 제어하지 못하고 사고를 칠 것이 두려웠어. 그래, 막연한 상상이라는 건 인정해. 하지만 두려웠는걸. 그 때 마침 뉴스에서 당신과 똑같은 얼굴의 마피아 보스가 나왔고, 나는 그게 문득 당신이라는 환상에 사로잡힌 거야. 그래, 바보 같다는 건 인정해. 도망칠 핑계가 필요했던 거겠지. 하지만 블러드, 나는 여전히 도망치고 싶어. 당신 앞에서 두렵고, 내가 사고를 칠 것을 무서워해. 그러니까, 다시 말할게. 해어지자.”
61 긴 말을 단번에 내뱉고 귓가에 남은 내 목소리가 상대적인 정적을 빚어내는 순간. 찰나의 정적이 끔찍하게도 길게 느껴질 때. 나는 문득 고개를 들어 당신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느른하고, 여유롭고, 살기 넘치는 모습. 어딘가 짜증스러워 보였고, 눈동자의 깊은 곳에서 무언가 일렁이는 것 같았으며, 아. 나는 그제야 저 사람이 이곳에 오는 순간부터 그토록 격하게 화내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62 “그리고?” “그리고는 없어요.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이게 다니까.” “내가 마피아 보스라고 생각한 점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는 건가.” “어, 음. 바보 같은 생각이라는 자각은 있어요.” “그건 아니군. 너는 똑똑한 사람이었다, 루시. 네 생각대로 나는 마피아의 보스야.” “예?”
63 아까부터 똑같은 말로 놀라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지만, 그만큼 상식 밖의 말이다. 놀랄 수밖에 없다. 그야, 사람이 살면서 마피아 보스를 만날 일이 얼마나 되겠는가? 더군다나 이런 쬐끄만 나라에서 법을 준수하며 사는 사람이, 보스를? 서서히 머리가 굳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희미하게 자각하면서, 나는 어색하고 머뭇거리는 어조로 물을 수밖에 없었다.
64 “그러니까, 내 망상이, 망상이 아니었다고요?” “그렇고말고. 너는 내 정체를 간파한 거다. 축하하지, 아가씨. 그리고 이쯤 왔다면 슬슬 자신의 처지를 자각하는 게 좋아.” “처지요?” “그래.”
65 블러드는 성큼 다가와, 손목을 잡아챘다. 한 순간 신음을 억누르지 못할 정도로 거센 손아귀, 꾸우욱 하고 눌러오는 악력은 현실적인 공포를 불러일으킨다. 이대로 손목이 부러진다면? 저 치의 말대로 마피아라면, 나는 여기서 고깃덩이가 될 운명일지도 모른다.
66 “마피아 보스와 깊게 엮여버렸던 것이다, 아가씨. 그대로 포기하는 게 좋아. 나는 하고 싶은 때에 하고 싶은 일을 한다. 기분이 내킨다면 네 말에 귀를 기울여도 좋겠지만, 지금은 그럴 기분이 아니야.”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겁니까. 자존심을 구긴 죄를 물어서 저를 처참하게 죽이겠다고요?” “그럴까도 생각했지만, 기분이 내키지 않아서 말이야. 너를 내 집으로 데려 갈 생각이다.”
67 “잘 자도록, 좋은 꿈을 꾸길 빌어, 루시.” 나는 그 말과 훅 끼쳐오는 담배와 장미, 홍차가 뒤섞인 향기. 코와 입을 뒤덮는 손수건의 감촉을 마지막으로 자각했다. 한계까지 당겨져 있던 신경줄은 작은 자극에도 툭 하고 끊어져 내렸고, 예? 하고 반문하던 목소리는 결국 입 안에 갇힌 채로 영영 빛을 보지 못했다.
68 그렇게 나는 일상과 영영 작별한 것이다.
69 과거 이야기는 이걸로 끝이다. 이야기의 주인공, 루시, 그러니까 나는 그대로 마피아의 저택에 납치당해서, -엘리엇이 만나서 반갑다며 친근하게 알려주었다. 여기는 저택, 그것도 본거지인 모양이다.― 가장 안쪽 방에 정중하게 갇힌 상태로, 하늘을 바라보며 누워있는 정도가 가장 거센 반항이 되었다는 것이다.
70 제기랄, 하여튼 하늘은 더럽게도 맑다. 사람이 독백하면 마른하늘에서 벼락이라도 내리쳐야 하는 것이 아닌가? 아쉽게도 그런 운 좋고 조건 좋은 일은 일어나지 않아서, 나는 멍하니 구름이 떠가고 달이 떠오르고 별이 빙글빙글 돌아가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71 이쯤 와서 수줍게 고백하건데, 나는 사실 당장 이 곳에서 탈출할 생각이 없다. 흔한 이야기대로 하자면 블러드에게 찾아가 사랑을 속삭이고, 그의 매력을 깨달았다며 애걸하고, 마피아 보스의 아내라는 자리도 탐난다고 깔깔거리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러다가 그의 방심을 이끌어내고, 성격을 이용하여 틈을 타고, 있는 힘껏 달려서 경찰에게 몸을 의탁하는 것이다. 하지만 문제라면, 도무지 그럴 기분이 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72 나는 멍청이가 아니다. 아니, 자부하건데 꽤나 대가리가 굴러가는 편이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내가 처한 상황은 흔한 이야기의 소설이나 영화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고, 경찰에 몸을 의탁하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는다고 자각하고 있다. 그대로 보호 신청을 하면? 그대로 끝인가? 그가 포기한다고 자부할 수 있나? 나의 가족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면 한 없이 무기력해져서 침대 위를 느긋하게 뒹굴 뿐이다.
73 결국 이리 죽어도 한 생, 저리 죽어도 한 생이다. 이곳은 마피아의 저택이고, 총이라면 바닥에 굴러다닐 정도로 있다. 사방에 널린 총 중에 하나를 집어서 대가리에 대고 한 방 땡기면 아무리 그라도 살릴 방법은 없을 것이다. 내가 탈출 할 수 있다면 그것뿐이겠지.
74 나는 마지막 자비로 그가 내 가족에게 손대지 않기를 빌 뿐이다. 어쩐지 이런 이야기의 주인공들은 가족과 연이 옅거나 없더라. 나는 그들이 그 무엇보다 확실한 족쇄가 되었음을 자각하고 있다. 물론 자각만 하고 있다. 가족을 어떻게 포기하겠어. 최소한 내가 가지고 있는 한국인의 정서로는 무리다.
75 그게 이렇게 느긋하게 마피아의 저택에서 하늘 구경을 하고 있는 이유가 되어 주고 있다. 여기 와서야 알았는데, 유학 시절에 사귀었던 친구들이 마피아가 많더라. 거대한 체구의 엘리엇은 분명 이 쪽에서 일하겠다는 생각은 했지만 누나누나하고 따라다니던 쌍둥이 두 명이 이쪽에서 유명한 마피아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는 조용히 신에게 기도했다.
76 너네 나보다 연하 아니었잖아.
77 어쨌든 나는 여기서 꽤 즐거운 생활을 영위하고 있다. 밖에 못 나간다는 사실은 괴롭지만 어떻게 긴 투쟁 끝에 정원 정도는 산책할 수 있게 되었고, 나는 사실 그 정도로도 만족하기로 했다. 이 방 안에만 있어야 했다면 진즉 벽에 대가리 박고 자살했다. 거짓말이 아니라 진짜로.
78 즐거운 삶을 강조하고 있는 것은 주변에서 내 정신 건강을 꽤 걱정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아닌 척 해도 엘리엇은 계속 신경 써 주고 있고, 쌍둥이는 가끔 자기들 기준의 신기한 것이나 재미있는 것을 가져다주기도 한다. 다들 자주 대화 상대를 해 주니까 심심할 틈도 없고.
79 사실 저택 안이라고 해도 이곳은 별채다. 덕분에 꽤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지만, 저택을 관리하는 사람이 보이지 않을 때는 기묘한 기분이 된다. 뭐, 유능한 마피아 보스가 알아서 하겠지만. 그래도 가끔 걱정되는 날이면 먼지떨이를 들고 용감하게 복도에 나설 때도 있다. -불론 대부분의 경우 한 세 번 흔들고 기력이 없어져서 침대로 돌아간다.―
80 다행스럽게도 책은 만족스러울 만큼 있고, 그 방에는 때때로 블러드 듀프레가 들어앉아 있다. 이 저택의 주인, 마피아 조직을 지배하는 보스, 내 전 남친 이라고 생각했으나 본인은 현 남친 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사람이며 납치범. 그리고 단언 컨데 이 세상에 다시없을 또라이 새끼다.
81 그리고 문제라면 내가 아직도 저 새끼를 사랑하고 있다는 점이다. 사실 이 점이 제일 놀라운데, 나는 나한테 세상에 다시없을 희대의 미친놈을 사랑하는 취향이 있는지 꿈에도 몰랐기 때문이다. 딱히 새로운 취향을 발견하고 싶진 않았는데, 어떻게 사람은 늘 신경지를 개척하며 살게 된다.
82 별로 새로운 자신에 대한 깊은 고찰을 할 생각도 아니니까 묻어두기로 할까. 다행스럽게도 그 외의 취향은 평소와 별로 다르지 않아서, 블러드 듀프레가 준비해주는 책과 영화는 재미있었다. 뭐니 뭐니 해도 사귀던 때에 좋아하는 것에 대해서 입이 아프도록 떠들었던 보람이 있다.
83 어쨌든, 나는, 이 저택에서 꽤나 잘 살고 있다. 이곳저곳에 장미가 장식되어 있고, 바쁠 터인 남자친구는 자주 자신을 불러 홍차를 마시는 곳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 하나 이야기 해 주지 않고 묻지도 않으려고 하면서.
84 그리고 이 이야기는, 어떤 의미로든 탈출기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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