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 감금당한 포로의 일상은 단조롭다. 굳이 할 일이 없다면 더더욱. 하루의 대부분을 잠으로 보내고, 깨어 있을 때는 비실거리는 몸을 이끌고 저택을 방황하거나 친구, 혹은 남자 친구와 수다를 떨고. 책을 읽거나 가끔 청소도 한다.
86 하루에 10시간 이상을 건설적인 활동으로 보내지 않으면 버틸 수 없던 한국의 국민으로서 한동안 괴로웠지만, 이제 꽤 익숙해졌다. 어차피 그가 질리지 않는 이상 나는 여기서 나갈 수 없을 것이고, 그동안 밥을 굶기지는 않겠지. 느긋하게 생각하자면 감금 생활도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다.
87 시간 감각이 흐려지고 있다는 자각쯤은 있다. 마지막으로 확인했을 때 화요일쯤 되었을 텐데, 지금은 얼마나 지났을지 모르겠다. 날짜 감각도 흐려지고 있는 건가. 제멋대로 잠들어서 제멋대로 일어나는 생활을 반복하고 있으니 당연할지도 모르지만 어딘가 섭섭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88 교도소에 갇힌 죄수나 어딘가 한 군데에서 버텨야 하는 사람들이 벽에 금을 그으며 날을 세는 것을 기억하고 있다. 예전에는 예정된 클리셰라고 넘어갔던 것들이 요즘 새삼스럽게 대단하게 느껴진다. 어떻게 하루가 지나갔다는 것을 알지? 분명 규칙적인 생활과 식사를 병행했을 것이다. 그러지 않고서야 그런 착실한 짓은 못하지. 착실하지 않은 나로서는 가끔 오는 친구들에게 시간을 묻는 것이 전부다.
89 “엘리엇, 오늘이 며칠인지 알아?” 이렇게.
90 그는 언제나 단조로운 어조로 대답해주고, 나는 가끔 웃는다. 웃는 얼굴을 보면 엘리엇은 안심했다는 듯 말을 돌리고, 나는 그와 장단을 맞추며 가만히 생각할 때가 있다.
91 그건 내가 알아도 되는 정보구나.
92 웃으며 넘겨버리지만 가끔 무섭도록 빠르게 지나가는 시간이 섬뜩하게 다가올 때가 있다. 구체적으로 따지자면 이 정도 시간이 지났으면 본국의 가족은 나를 포기했을까? 날 찾기 위해서 헤매는 일은 그만 뒀을까? 하고 생각하게 되는 순간들. 최대한 빨리 잊고 일상으로 돌아가 줬으면 좋겠지만, 그러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어서 서러울 때가 있다.
93 그러니까, 그 사실이 유난히 시리던 날은, 엘리엇이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 한 날이 내 생일이었을 때였다.
94 “네 생일이잖아? 자, 오늘을 위해서 준비한 당근 케이크! 둘이서 먹어도 모자라지 않게 특대 사이즈다!” “엘리엇, 진짜 고마운데……. 나 당근 알러지야……. 먹으면 죽어…….” “먹어보면 의외로 맛있을지도 모른다고? 절대로 너도 좋아하게 될 거다!” “아냐 먹으면 죽어.”
95 물론 진짜 당근 알러지가 있는 건 아니다. 그냥 당근을 먹지 못할 뿐이지. 먹으면 죽지는 않는데 실수로 당근을 씹는 순간 토하기는 할 거다. 절친한 친구가 애써 준비해 온 생일 케이크를 한 입 먹고 헛구역질을 시작하는 순간 이 작은 방은 호러가 된다. -경험담이다. 참고로 저번에는 독인줄 알았다. 불쌍한 엘리엇…….나는 당근을 못 먹는데…….―
96 다행스럽게도 그는 베이커리에서 챙겨줬으리라 추정되는 일반 디저트를 챙겨 왔고, 나는 당근 먹방을 지켜보며 멍때리는 생일 당사자가 되는 불상사를 피할 수 있었다. 누군지 모르지만 정말 감사한 파티시에가 아닐 수 없다. 물론 내 이름을 당근으로 굳이 새겨 넣은 정성에 대해서도 감사를 표한다. 돈 받아도 그런 건 하지 마라 좀.
97 그렇게, 저녁이 되었고, 나의 로맨틱한 남자친구께서는 당연하다는 듯 정찬을 준비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럴 것 같아서 옷장을 열어서 옷을 뒤져 입긴 했다마는, -참고로 다 어떻게 내 사이즈를 알아서 채워 놓았더라.― 진짜 준비한 모습을 보니 기이한 기분이 되었다.
98 그야 생일을 알려 준 적이 없기 때문이지만. 당연히 알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고, 실제로도 그러했지만, 알려주지 않은 것을 당연하게 언급하는 타인을 바라보는 것은 기이한 기분이 된다. 그러니까, 맨 몸으로 칼날 앞에 서 있고 그것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는 기분.
99 “생일 축하해, 아가씨.” “축하 고마워요, 블러드.” 이렇게 입발린 소리를 하면서 내 취향으로 가득 찬 식탁을 보고, 날을 들어 스테이크를 썬다. 눈앞에 있는 사람은 내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고 아마 오늘도 누군가를 죽이거나 인생을 끝장냈을 사람이며, 납치범이다. 몇 번쯤 고기를 씹으며 자기 자신에게 되뇌어 보지만 딱히 위기감이 생기지는 않는다.
100 오히려, 나는, 아주 미묘한 기분에 사로 잡혀 있다.
101 “입에 맞지 않나?” “응? 아니, 별로……? 맛있어요, 이거.” “그렇다면 식기 전에 들도록. 모처럼 맞이한 네 생일이다, 주역이 멍하니 있어서는 자리가 아깝지 않은가.” “딱히, 자리라고 할 것도 없다고 생각하지만 말이에요. 여긴 나랑 당신뿐이고.”
102 입을 놀리면서도 손은 고기의 결을 따라 나이프를 밀어 넣는다. 적당히 핏물이 배어나오는 고기는 분명 취향이고, 질이 나쁘지도 않다. 안심은 내가 좋아하는 스테이크 부위이고, 분명 이것은 소고기겠지. 입에 넣어 씹으면서도, 이상한 기분이 든다.
103 “그러는 당신이야 말로, 블러드. 손이 멈춰 있지 않아요?” “나는 이미 식사를 들었다. 일이 있어서.” “일로? 그러면 오지 않아도 괜찮았는데.” “사랑하는 연인의 생일을 축하하지 않고 넘어갈 수는 없는 노릇이지.” “정작 나는 생일인 것도 까먹었지만 말이에요.”
104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고 와인으로 입을 축인다. 처음 만날 때도 그랬지만 역시 술에 까다로운 사람이다. 고기에 딱 맞는 와인이 찾기 쉬운 것도 아닌데, 그와 함께 하는 저녁에서 나온 와인은 헛도는 일이 없다.
105 “이거 맛있네요.” “마음에 들었다면 좀 더 들거라.” “괜찮아요, 더 마시면 취할 것 같군.” “약한 소리를 하는군. 네 주량은 그 정도로 취할 정도로 적지 않았을 터이다, 루시.” “그렇긴 하지만, 생일 저녁에 취하는 건 좀 멋없잖아요?” “그런 것 치고는 작년 생일에 고주망태가 되어서 집에 기어 들어가지 않았나.” “아, 그건……. 실수죠, 실수.” “타인 앞에서 할 수 있는 실수라면 내 앞에서 해도 문제없겠지.”
106 잔을 채워주는 블러드의 앞에서 잠시 유리잔을 두 손으로 받쳐야 할지, 한 손으로 들어야 할지 고민하는 시간을 가진다. 물론 한 손으로 들고 있는 동안 잔이 차오르고, 나는 꽤 도수가 있는 와인을 꿀꺽꿀꺽 삼킨다.
107 술에 쉽게 취할 만큼 주량이 강하진 않지만, 독한 와인을 반 병 가까이 마시고도 멀쩡할 만큼 술이 강하지도 않다. 흐릿하고 멍하게 차오르는 머릿속,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 손. 저녁 자리에서 이렇게 취하는 것이 매너 위반이라는 사실은 알지만 끈질긴 시선이 달라붙는 순간이면 와인을 기울이지 않고서 버틸 수 없었던 것도 있다.
108 실수로 접시를 긁는 나이프, 끼이익 하고 높은 천장 아래서 메아리치는 날카로운 소리, 낭패다.
109 “긴장한 건가? 평소의 너라면 하지 않을 실수군. 아아, 잘라달라는 부탁이었나. 솔직히 그렇게 말했다면 언제든 들어 줬을 것을. 연인의 요구에 응하지 않고서야 남자라고 할 수 없는 법. 차라리 먹여줄까?” “……그냥 나이프가 미끄러졌을 뿐입니다.” “취한 것이겠지, 아무리 술에 강하다고 해도 이 술은 꽤 도수가 있는 물건이다.” 능글거리는 웃음 앞에서 괜찮다고 웃으며 속으로 꿍얼거렸다. 네가 먹였잖아, 네가.
110 아닌 척 하지만 저 인간은 지금 기분이 더럽다. 어느 정도냐면 이렇게 억지를 부리고 강짜를 놓을 만큼 더러운 상태다. 평소에도 마이페이스에 기분파, 변덕쟁이기는 하다마는, 평소보다 심한 상태이다.
111 저 새끼 설마 내가 작년에 술 처먹고 집에 기어들어가서 그런가?
112 미리 변명하는데 그렇게 추태를 부린 건 아니다. 그냥 주량의 한계를 시험하겠다고 생일인 김에 친구들이 사주는 술을 한계까지 퍼먹다가 나는 몸이 먼저 가지 필름이 끊기지는 않는다는 귀중한 교훈을 얻고 집 앞에서 균형이 도저히 안 잡혀서 네 발로 계단을 올라갔을 뿐이다. 물론 귀한 딸의 그 꼴을 본 부모님은 등짝을 자진모리장단으로 때렸지만.
113 근데 저 새끼가 그걸 어떻게 알지? 집 대문을 넘고 나서야 네 발로 기었는데? 불현 듯 찾아온 깨달음에 조용히 고기를 입에 밀어 넣었다. 도대체 어디서 화내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네 부모님을 알고 있다 협박하고 있거나, 그러한 식으로 받아들일 여지가 충분함 정도는 알아차렸다.
114 지가 미리 연락을 하던가, 하고 꿍얼거려 보지만 도망친 입장에서 할 말은 아니다. 그래, 번호나 남겨두고 갈걸 그랬지. 그러면 뭐…… 뭐가 바뀌었겠냐마는. 술에 취한 머리가 같은 생각을 반복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순간 눈을 감았다. 아무래도 정말 취기가 도는 모양이다.
115 “식후의 다회는 정원에서 할까. 오늘은 달이 밝은 날이다. 분명 너도 마음에 들겠지.” “나는 어디든 좋지만……. 적당히 술이 깨고 나서 홍차를 마시는 걸로 할게요.” “아쉬운 말은 하지 말아 줘. 오늘은 드문 물건을 손에 넣은 참이다.” “오, 어떤 종류 길래요?” “잉글리시 블랙퍼스트 계열의 상등품이다. 이전 네가 마음에 든다고 이야기했던 농원의 찻잎을 사용한 것으로─” 아, 제기랄.
116 주댕이가 방정이지, 제 전 남자친구의 나쁜 버릇을 건드려버렸다. 저 작자는 다른 점은 다 괜찮지만 –아냐, 사실 괜찮지도 않아.― 유난히 거슬리는 점이 있다면 홍차에 관해서 시끄럽다. 까다롭기도 까다롭다마는, 떠들기 시작하면 정말로 시끄럽다. 목소리 톤부터 달라져서는 거의 다른 사람이 된다니까. 게다가 저럴 때는 괜히 말을 걸거나 섞으면 세 배쯤 귀찮아지기 마련이라, 나는 조용히 그릇 위의 완두콩의 깍지를 벗겨 콩을 긁어먹었다.
117 “듣고 있나? 이 차의 특별함이라고 한다면─” “네, 네. 듣고 있어요.” 그렇게 저녁 정찬이 끝났다.
118 그가 장담한 만큼 달이 뜬 정원은 특별히 아름답다. 그의 저택 전체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이 별채의 특징이라고 한다면 주변의 정원이 모두 장미로 가득 차 있다는 점인데, 어떻게 유지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4월 말에 만개한 장미를 보는 건 시간 속에서 유리된 기분이 든다.
119 취기는 금세 가신다. 아니, 취기가 가셨다고 생각하고 좀 취한 상태인지 모르겠지만 최소한 멍한 머리가 제 속도로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사실은 자명하다. 속이 아파서 그리 내키진 않지만 진한 향을 풍기는 홍차를 입에 대며, 차가운 밤바람을 맞을 정도로 정신을 차리긴 했다.
120 “달이 아름답네, 당신 말대로.” “후후, 그렇지. 오늘의 달은 특별하게 아름답다. 달밤의 다과회는 특별하지, 사랑하는 연인이 옆에 있다면 더욱.” “미리 말해두지만 말 그대로 달이 아름답다는 소리예요. 나츠메 소세키의 은유를 할 생각은 없었어요.” “그 정도는 알아차릴 수 있어, 아가씨. 단지…… 후후. 그래, 하지만 완전히 아니라고 할 수도 없지 않은가? 달이 아름답다……. 밤을 함께할 사이가 아니면 할 수 없는 말이지. 네가 밤놀이를 즐기는 성격도 아닐 테니, 이런 말을 듣는 사람은 얼마 없잖아? 그렇다면 의도가 없더라도 충분히 낭만적이다.” “도시전설에서 낭만을 찾지는 않지만요……. 게다가 지금은 그 정도로 보수적인 시대도 아니고 말이에요.”
121 홍차를 홀짝이는 시간, 차가워지는 밤바람. 나츠메 소세키의 ‘일본인은 그런 말을 하지 않는다.’는 도시전설에 대한 이야기를 아무렇지 않게 나눌 수 있는 상대. 혀끝에서 퍼지는 씁쓸하고 따뜻한 향. 나는 눈을 감고 차를 마시며, 어쩔 수 없이 실감하고 만다.
122 나는 여전히, 이 사람을 사랑해서 어쩔 줄 모르겠다고.
123 나의 비극은 꼭 이런 곳에서 시작하고 만다. 한 번 사랑한 사람을 쉬이 놓지 못하는 성정, 사소한 것에서 낭만을 찾고 즐기는 성격. 지금 입 밖으로 내어서는 안 되지만, 내었다고 하여도 무언가 바뀌지 않을 것들.
124 “블러드?” “뭐지, 아가씨.” “나는 당신을 사랑한다고 돌려 말하는 일은 없어요, 지금도 그렇고.” 티 테이블 너머의 눈동자는 식탁보다 가깝게 느껴진다. 찻잔을 내려두고, 고개를 숙여서 모자 아래를 들여다본다. 그늘진 눈동자는 늘 미묘한 색으로 물들어 있고, 나는 초록이라고도 파랑이라고도 이야기하지 못하는 눈동자를 마주보고, 덤덤하게 속삭인다.
125 “사랑해요.” “……그렇게나 저녁이 마음에 들었나? 생일 축하 정도로 사랑의 말을 들을 줄은 몰랐군. 네가 그렇게 좋아한다면 언제라도 선물하도록 하지. 언제나 선물 앞에서 떨떠름한 표정을 짓지 않았나?” “뭐, 그렇긴 하지만요. 이 사랑 고백은 그런 게 아니거든요.” 애매한 지칭으로 모호해진 말투. 드물게 침묵했던 블러드 앞에서 가볍게 웃는다. 이것 봐, 하고 나 자신에게 타이르는 듯 한 어조를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가린다.
126 “굳이 따지자면, 아부겠네요.” 달칵 소리를 내며 잔을 내려놓는다. 생일 선물로 받은 오르골의 뚜껑을 열어 음악을 틀고, 자리에서 일어나 정원의 한 가운데로 걸어 나간다. 익숙하지 않은 신발을 벗어놓으며 목소리를 높인다.
127 “사랑한다는 말의 대답으로, 같이 춤이라도 춰주겠어요? 헤어지기 전에 한 번 약속했던 기분이 들거든요. 무도회에 데려가 주겠다고. 뭐, 무산되어버린 약속이지만. 생일 선물이라는 걸로 해 줘요.” “선물을 받고도 그런 식이라니, 내 연인은 꽤나 어리광쟁이인 모양이군. 나는 대단한 아가씨를 연인 삼은 모양이야.” “부탁한 적 없는 선물이잖아요? 선물은 원래 원하는 걸 받는 거니까, 자.”
128 지루한 얼굴로도 일어나 주는 블러드와, 맨 발이라 발이 아프니까 당신의 구두 위에 발을 올리고 춤을 추겠다고 부탁하는 나. 큭큭거리는 웃음으로 춤을 출 줄도 모르니까 당신이 리드 해 줘야 한다고 이야기하면 당신은 어딘가 색기를 띤 목소리로 오늘 밤 내내 리드 하겠다고 이야기한다. 아니, 그 정도는 아니어도 되지만. 하고 당황하는 목소리.
129 달밤 아래서 바람은 불고, 공기는 차가워지고, 문득 이대로 시간이 멈추면 좋을까 하고 생각하는 순간이 오지만, 달은 저물고 밤은 깊어간다. 아침이 되면 허전해진 옆자리와, 사라진 마피아를 보며, 야수의 저택에 갇힌 벨 같은 것을 떠올린다.
130 아무리 사랑한다고 속삭여도 당신은 내 말을 믿지 않을 것이고, 나 또한 믿지 않는 사람에게 사랑의 진정성을 토로하는 대신 그럼 어쩔 수 없지. 하고 넘겨버릴 것이다. 어차피 내가 설득한다고 믿을 사람도 아니고. 한 번 배신한 사람을 믿을 정도로 어리숙한 사람을 사랑한 기억은 없다.
131 그래, 이렇게 된다면 결국 저 마피아 보스, 전 남자친구와 내 사이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신뢰의 문제가 된다. 저 작자는 내가 이곳에 안주했다거나, 그가 납치한 것에 대해서 사실 별 생각이 없다거나, 이곳에서 탈출 할 생각이 없다는 사실을 진심으로 믿지 못한다.
132 물론 나로서는 우스운 이야기였다. 굳이, 탈출 할 이유가 있는가? 앞서 이야기했듯이 이것은 로맨스 영화나 소설이 아니고, 내가 탈출해서 가족에게 돌아간다고 해서 엔딩 롤이 올라가진 않는다. 도망을 봐 준다면 다행이지, 그가 다시 나를 납치하려 든다면? 내 가족은? 나는 영원히 도망치며 살아야하나?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면, 딱히 도주에 대한 열망이 생기지도 않는다.
133 더군다나 나는 이런 점에 있어서는 꽤 둔한 편이다. ‘이런’이라고 한다면 스토킹이나, 남몰래 알아본다거나, 실질적인 해를 끼치지 않는 선의 범죄 행위 같은 것을 이야기하겠지. 딱히 좋은 버릇이 아니라는 사실은 알고 있지만 이제 와서 고쳐라! 는 말을 듣는다고 고쳐질 정도로 가벼운 버릇도 아니다.
134 하지만 가장 결정적인 것을 말하자면, 그래. 나는 아무래도 저 마피아가 이런 짓을 했다는 것에 일말의 책임감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135 ‘책임감’이라고 말한다면 사실 우스워진다. 내가 그에게 책임감을 느낄 것이 뭐 있단 말인가? 그럼에도 나는 때때로, 저 작자가 이런 짓을 하게 되었다는 점에 내가 어느 정도 일조했다는 생각이 들고는 한다. 그러니까, 이것은, 도망에 대한 후회와 닮아있을 것이다. 그대로 연락하나 하지 않고 도망가 버린 자신에 대한 후회.
136 사랑이란 얼마나 어리석은가. 그러니까, 이 기반을 굳이 뒤져보자면, 나는 저 작자를 상처 입히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과 동일한 크기로 내가 상처 입혔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머리로는 그것이 전혀 상처가 되지 않았음을, 그가 상처 입는 것보다 내가 상처 입는 것이 빠름을 알면서도, 때때로 이러한 생각에 사로잡히고 만다.
137 제기랄, 사랑이란 얼마나 미친 짓인지. 나는 그러니까, 이즈음에서 터무니없는 생각에 사로잡히고야 말았던 것이다. 저 제멋대로이고,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 있으면 은근히 분위기로 위압하고, 내 모든 행동에 대해서 오해나 하고 있는 마피아의 곁에서, 견딜 수 있을 때 까지 견뎌 보자고.
138 말하자면 나를 실험대 위에 올리는 것과 똑같은 감각이었다. 그의 곁에서 한 번쯤 시들어 죽어 주겠다고,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은 그 누구보다 제가 잘 알면서 마음이 죽고도 몸은 그의 곁에서 살아가게 놓아 두어 보자고 생각했던 것이다.
139 어차피 나는 이곳에 납치 되고, 나갈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인 그 순간부터, 나의 생이 끝났다고 생각했다. 일상은, 지금까지 누려왔던 대부분의 것들은 끝나버린 것이다. 블러드의 기분이 내킨다면 다시 쥘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그의 기분파적인 성향을 고려했을 때 다시 빼앗길 수도 있다. 그러면 애초에 기대하지 않는 것이 옳다.
140 기대하지 않고, 바깥을 떠올리지 않고, 무뎌지는 시간감각을 내버려두고, 걱정하는 이들에게 아무렇지 않게 웃어 보이면서, 나는 때때로 밀려오는 충동을 죽이고, 침대를 놓아두고 차가운 바닥에 멍하니 누워 구름을 지켜보거나 하늘을 들여다보며 머리를 비운다.
141 그러니 나의 모든 행동에 저 마피아들이 걱정하는 만큼 자학적인 이유는 없다. 뭐, 저들이 제대로 알고 있는 것이 얼마나 있겠냐마는 걱정하는 만큼 심오한 계획을 세워서 그들을 달래고 안심시킬 생각도, 도망치려는 생각도 없다. 최소한, 책임감에 사로잡혀 있는 동안은 없을 것이다.
142 나는 그동안은 침대를 내버리고 바닥에 누워서, 하늘과 구름을 바라보면서, 언젠가는 내가 이런 생활에서도 의미를 찾을 것이라고 낙관적인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다. 그가 나를 심하게 배신하지 않는 이상은 아마 그렇겠지. 하지만 그 배신이 될 바람을 내 앞에서 필 수는 없을 테니 죽는 것이 더 빠를 게 분명하다.
143 영 견딜 수 없어진다면 나는 온 사방에 굴러다닐 마피아의 총을 주워 대가리에 대고 한 방 땡겨버리면 된다. 지금 내가 버티고 있는 모든 시간은 이러한 죽음 앞의 짧은 유예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모든 시간이 조금 더 편해진다.
144 도피에 대한 후회를 끌어안고, 저 작자가 나보다 강하다는 사실을 이해하면서도 어쩌면 내가 이 관계를 망가뜨렸을지 모른다는 책임감에 휩싸여서, 견디지 못할 순간이나 내가 모든 것을 견딜 수 있게 되는 순간을 기다린다. 결국 도망의 끝에 우리가 도착한 관계의 형태란 이 꼬라지인 것이다.
145 그리고, 탈출하기 위해서는, 관계가 어그러질 정도의 큰 사건이 필요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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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1. 마피아 보스 애인 탈출기 | admin | 2020.03.08 | 1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