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려움은 예고없이 찾아오는 악우와 같다. 문득 정신을 차리면 손 끝, 사고의 끝자락에 눅진하게 달라붙어서, 끝없이 고민하게 만든다. 이 삶을 과연 삶이라 부를 수 있는가. 이 신아에서 살아가는 나는 제대로 존재하고 있는가. 토오우치의 이름을 쓰며 존재하는 이 몸은, 어떻게 해야하는가. 두려움, 오직 두려움이 몸을 이끌었다.
오다의 군대, 광신도와 같은 자들. 저 홀로 앞으로 나아가는 군주와 군주에게 사고를 의탁하여 생각을 멈춰버린 자들. 토오우치는 그들의 광신과 맹목을 이해하였으나, 그들과 같은 족속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 장기짝이 되어 게임 위에서 놀아나고 싶지 않았다. 걸어야 하는 판돈이 저 자신인 것은 기꺼웠으나, 얻는 것이 타인의 목숨이라면 가지고 싶지 아니했다.
그러나 이 시대는 전란에 젖어있었다.
“주군,”
나는 평화의 시대에서 태어나 죽을 자이다.
“부디 명을 거두어주시지요.”
저 오연함이 가지는 아름다움. 그저 응시하는 눈동자에서 읽어낼 수 있는 조각들. 군림하는 자로 태어나 군림하며 살아온 자가 가지는 매혹.
“불허하지. 이후의 전투는 너도 같이 출전한다.”
이견을 허락하지 않는 절대자에게 홀리는 자들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분명 저라도, 그에게 매혹되었겠지. 이 시대에서 태어나 자랐다면, 선망을 따라 움직였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허나 말하지 않았는가, 나는 이 전란에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다.
회의장을 나서면 어울리지 않게도 제게 위로를 건네는 이들이 있다. 노부나가님도 생각이 있으실 것이라는 말, 토오우치씨가 무리하지 않으셔도 괜찮다며, 지켜주겠다고 맹세하는 말. 분명히 상냥한 울림을 담고 있는 목소리. 허나 저 이름이 주는 것은 망향의 병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나는 이 자들의 입술에 매달린 것에서 절망 이외에는 아무것도 읽어내지 못한다.
죽어버리는 것은 몸이 아니라 마음. 거두어지지 않는 명에 반항하지 못하고, 저는 또다시 전장을 전전하였다. 피와 비명, 죽음이 난무하는 곳에서 나는 차마 발을 빼지 못한다. 이기적이라고 욕해도 좋다. 그러나, 차라리 이 전쟁이 빨리 끝나버린다면. 내가 가세하여 압도적인 힘을 가지게 된다면. 하고 바라고야 마는 것이다.
병법을 진즉 공부해 둘 것을 그랬지. 자조적으로 중얼거리는 말에 병법서를 받아 들었던 날, 나는 저 자의 그것이 호의임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주군, 주군이라 부르는 저 자는 제육천마왕이다. 마왕의 이름을 받은 얼간이. 잘 알지 못하는 타국의 역사를 기억 속에서 헤아리고 조소한다. 내가 그의 변명거리를 만들어 준다고 하여서 무엇이 바뀐다는 말인가. 이미 재앙의 상징이 되어버린 사랑스러운 친구, 개라 믿었던 늑대의 목을 끌어안는다. 푹신하게 몸을 감싸오는 털, 살아있는 것의 움직임. 들숨과 날숨이 만들어내는 느릿한 리듬과, 쿵쿵 뛰어대는 심장이 중명하는 생명. 내가, 이 손으로 살려낸 생명.
나는 흐르는 눈물을 참을 수 없을 때면 네 털에 얼굴을 묻었다.
검은 털을 가진 늑대는 죽음의 상징이 되었다. 네가 무엇을 하였는지 알아도 나는 안타깝다. 말 못하는 짐승에게 무슨 죄가 있는가. 너는 내가 살린 탓에 죽음의 상징으로 살고 있다. 허나 너를 죽도록 놓아두고 싶지 않았다. 나는 네가 이리 전장에서 뛰어다닐 것을 알았더라도 너를 살렸을 것이다. 그러나 네가 전장에서 뛰며 내게 이빨을 박을 줄 알았다면, 네가 생명을 앗아가는 화신으로 불리게 될 것을 알았다면, 같잖은 호기심을 채우기 위해서 너를 월아족으로 만들지 않았을 것이다. 가능할지 궁금하다, 는 어이없는 이유로 네게 피를 주어 살리지 않았을 것이다. 다른, 다른 방법을 강구하였겠지.
그러나 이미 늦은 것을 후회하여 무엇한단 말인가?
죄악은 끊임없이 발치를 적신다. 피는 흐른다. 피가 흐르고 흘러 강을 이룬다. 죄악 속에서 도망치지도, 직시하지도 못하는 나는 무엇이 될까. 시위를 떠난 화살은 어떻게 될까. 나는 화살이 맞을 것을 알고 활을 쏜다. 이 확신은, 무엇을 맞춰야 할까. 두서 없는 생각들이 순서 없이 얽히다가, 결론으로 굴러 떨어진다.
두려워.
두렵다. 아아, 나는 이 삶이, 전쟁이, 앞을 알 수 없는 나날이, 죽지 않는 몸이 두렵다. 목이 떨어지고 심장이 뚫려도 죽지 않는 내 몸이 두렵다. 잃어가는 인간성, 사라져가는 현실감, 죽어가는 생명을 하나의 현상으로 취급하고, 인간의 존엄성을 무감하는 정신. 서서히 무너져가는 ‘나.’ 세상을 그려내고 나를 살게 하던 언어는 그 누구도 알아듣지 못한다. 내가 살린 너는 이 말을 알아듣겠지. 그러나 너는 인간이 아니다. 세계를 공유하고 같은 풍경을 바라 볼 수 없다.
어느 순간, 나는 견딜 수 없어 네게 매달렸다.
도망가자, 도망가자. 우리 저 멀리 어딘가로 가버리자. 나는 너만 있어도 괜찮아. 대의따위 어떻게 되어도 좋아. 이 전쟁에서 눈을 돌리고 자연 속에서 죽을 방법을 찾자. 죽으면 돌아가겠지? 울면서 애원하는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동물. 성의 담을 뛰어넘어, 평야를 달린다. 검은 어둠에 녹아든다. 어디로든 가자, 우리 아무도 모를 곳으로 가버리자.
흐르는 눈물을 주먹으로 닦아낸다. 네 목을 간절하게 끌어안고 앞을 바라본다. 별이 빛나는 밤, 맑고 차가운 공기가 얼굴을 덮는다. 바람이 시원하다. 불빛이 없는 밤, 무엇도 보이지 않는 밤에 네 감각을 믿는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달리는 밤, 나는 날 추적할 자들을 안다. 내가 언젠가 끌려갈 것을 상상한다. 그러나 그것이 이제 무슨 상관이 있지? 이제 무엇도 신경쓰지 않을 테다.
자, 별이 쏟아질 것 같은 밤이다.
저 멀리, 하늘이 푸르게 물들며 해가 떠오르고, 차가운 여명의 공기 속에서 눈물은 멈추지 않는데.
사람이 죽고, 다치고, 누군가의 욕심에 어지럽게 흔들린다 하여도.
보아라. 언제나 세상은 눈부시게 아름답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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