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앞에 펼쳐진 압도적인 풍경. 사람의 손 한번 허락하지 않은 처녀지. 고요 속에서 직감한다. 이곳은 태초부터 예정된 무덤임을. 이곳에서 잠들기 위해 그리도 시간 속을 헤맸다는 사실을.
***
도망치는 발은 허겁지겁 땅을 박찬다. 가녀린 몸은 반항하지 못한다. 적들의 목에 칼 한 번 박아넣지 못하고 우거진 초목이 제 몸을 가려주리라 믿으며 뛰는 일 밖에 할 수 없는 처지.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작은 짐승처럼 뛰다니는 모습이 처량하기 짝이 없다. 흘러가는 생각이 과거를 되짚는다. 이 사단이 언제부터 시작되었지? 아마,
기억의 흐름은 광기어린 함성 소리에 끊긴다. 침음성을 흘리며 달리는 다리에 더욱 박차를 가한다. 등 뒤에서 펼쳐지고 있을 풍경이 눈 앞에 생생하다. 병사들을 태운 말의 발굽이 땅을 헤집어 붉은 속살을 파내고, 짓밟히고 꺾인 초목의 신음소리가 가냘프게 이어지겠지. 보상과 애국에 눈이 멀어 제가 누구를 쫒는지도 모르는 머저리들. 수없이 고민하고 문헌과 기억을 뒤져 만들어냈던 정의는 이제 권력유지를 위한 법이 되어 제 목을 조여 온다. 극보다 더 극적인 현실에 짧은 조소조차 날리지 못하고 정신없이 발을 놀린다.
놈이 코앞이다! 거대한 함성소리가 숲을 뒤흔들었다. 그 납작한 코 바로 앞에 가면 입술이 닿겠지, 설마 코 앞일리가. 몸을 숨기려 나무 뒤로 몸을 날렸다. 꽤 빨리 움직였다고 생각랬건만 꼬리가 보였다. 창이 날아든다. 우레와 같은 함성이 다시 터지며 지축을 흔든다. 억지로 잠에서 깨어난 새들이 검은 하늘 위로 비상한다. 노을 진 하늘이 우스울 정도로 붉다. 이 모든 상황이 희극적이다. 너무 긴 시간이 위기감마저 마비시켰나. 저들은 나를 고통스럽게 죽이기 위해 쫒아온 자들이건만, 태평하게 이 상황에 조소하고 있다. 허나 이 꼴이 어찌 극적이지 않을 수 있는가!
“저 쪽이다!”
“반역자를 잡아라!”
한심할 정도로 연약한 몸은 겨우 열여섯 남짓 되었다. 막 피어오르기 시작하는 싱그러운 몸. 그 어린 몸은 처참하게 베이고 까진다. 분명 제 몸이다. 신경을 난도질하는 괴로운 고통도 느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징그러울 정도로 아무 생각이 들지 않는다. 너무 긴 시간을 헤맨 영혼이 병들었나. 아니면 그를 만난 지 너무 오래 되어서 그런건가. 시간에 의미를 두지 않은지 꽤 되었지만 또 이렇게 된다. 답을 찾지 못한다. 휘몰아치는 잡념에 몸을 굴렸다. 그게 쇄도하는 화살을 피하기 위함이었는지, 그저 끝없이 이어지는 잡념을 끊고 싶음이었는지.
끊임없이 달리던 발이 일순 멈춘다. 크게 벌어진 입은 음소거 당했는지 소리가 나지 않는다. 머릿속에서 휘몰아치던 단어들이 모두 허공으로 증발한다. 수많은 상스러운 언어들이 머릿속에서 회전하고, 그 언어들은 모두 엉키고 무너져 제대로 말이 되지 못한다. 뼈를 아슬아슬하게 피해 근육을 헤집은 화살이 현실이라고 믿기 힘든 고통을 선사한다. 난자된 생각, 끊어지고 무너진 판단. 비명 지르는 신경이 이성에게 망치를 내려친다. 흔들리는 이성이 의식을 놓아버리라 소리치지만, 오랜 기억의 받침 위에 세워진 냉정함은 무너지지 않는다.
다행이도 화살은 손을 뻗어 잡을 수 있는 위치에 박혔다. 척추나 뼈를 건드리지도 않았다. 좋아, 이 정도면 아직 뛸 수 있어. 침착하게 손을 뻗어 화살이 흔들리지 않게 잡아 고정한다. 여전히 끔찍한 통증이 뇌를 태우지만, 뛰는 도중에 화살이 흔들리거나 걸리기라도 한다면 더한 통증과 함께 잡힐 거라는 사실이 자명하다. 멈추거나 뒤돌면 파멸이다.
빌어먹을.
욕설이 입속에서 맴맴 돈다. 이 욕설이 이미 사라진 과거의 욕설이었던가? 아니, 태어나지 않은 언어였던가? 쓸데없는 생각이 잠시 스쳐지난다. 짧은 휴식이 끝났으니 다시 몸을 재촉한다.
다리를 타고 땅을 진탕으로 만드는 액체. 끈적이고 따뜻한 붉은 액체가 마치 족적을 남기듯 뚝뚝 떨어진다. 이리 도망쳐봤자 헛고생이라는 사실을 끊임없이 속살인다. 몸에서 생명이 빠져나가고 있음을 느낀다. 허나 아직 마지막에 이르려면 한참 멀었다. 쇄도하는 화살들이 다리를, 생명을 노리지만 하나도 제게 박히지 않은다. 허나 박히지 않았다 뿐이지 빗나가지는 않아, 온 몸에 생채기들이 늘어간다. 점점 닳아가는 체력과 차오르는 스트레스. 상처들은 꿀럭꿀럭 피를 토해낸다. 거대한 고통 속으로 편입된 자잘한 고통들이 뭉쳐 더욱 큰 고통과 어려움이 되어 돌아온다.
볼을 스치고 지나간 화살이 막 새로운 상처를 늘린다. 이제 고통마저 느껴지지 않아. 등에 박힌 화살대만이라도 자를 수 있다면. 헛된 희망을 그리다 다시 몸을 틀었다. 다리가 있던 자리를 흉악한 화살이 꿰뚫는다. 잠시라도 잡념을 돌볼 시간을 주지 않는구나. 조소어린 생각이 다시 상처에서 흐르는 피를 타고 흘러내린다. 등줄기를 타고 기어오르는 긴장감. 잔뜩 고조되어 예민해진 감각이 고통을 호소한다. 생각은 평소와 달리 빠르게 굴러, 갖가지 상황을 생각하고 답을 내놓는다. 허나 모든 상황에서 나오는 대답은 단 하나.
희망은 이미 말소되어 그 끝자락마저 썩어 문드러졌다.
숲속에서 말을 달리는 일은 그들에게 무리였다. 더 이상 말의 투레질소리나 발굽소리가 들려오지 않는다. 그렇다고 하여 안심하기에는 아직 이르다. 갑옷의 철그락 거리는 쇠 소리, 사람의 피를 머금은 무기에서 나는 비릿한 쇠향. 잔뜩 고조된 장정들의 거친 숨소리. 온 사방에서 느껴지는 추적자들의 기척. 잔뜩 긴장한 감각들이 정보를 전하지만 하나하나가 너무 절망적이라 말을 잃어버렸다. 잔뜩 끌어올린 기감도, 한껏 빠르게 달리는 생각도, 수없는 시간을 달려온 기억도 이런 상황에서의 답을 내어주지 못한다. 이번 생도 종말을 향해 달려가는 중이다. 하! 입속에서 드디어 억눌린 조소가 터져 나왔다.
날카로운 웃음이 숲속에 울린다. 소란스러워지는 주변이 저들이 자신의 위치와 방향을 알아차렸음을 알려준다. 허나 상관없다. 저들의 손에 죽느니, 산짐승의 먹이로 이 몸을 던져 주리라. 아직 어려 아름답고 부드러운 몸이 저 피 묻은 손에 유린당하게 두느니 죽음으로 몰아가리라. 시간의 먹이로 던져주는 일이 헛된 광기에 휘둘리는 쪽보다 낫다. 수없는 죽음의 기억에게 빼앗긴 죽음의 공포는 이제 긍지보다 못하다. 지금 아쉬움을 느끼는 이유는 이번 생에서 아직 그를 만나지 못하였기 때문. 그 외의 아쉬움은 없다.
짧은 흑발이 땀과 피에 젖어 찐득하게 볼에 달라붙는다. 흐르는 피라도 좀 멎는다면 이렇게 불쾌한 일은 좀 줄어들텐데. 슬슬 무뎌지는 감각이 죽음을 목도했음을 처절하게 절규하며 알린다. 몸은 더이상 도망치는 일은 무리라며 호소한다. 그리고 느껴지는 피로. 육신을 벗어나 끊임없이 느껴지는 피로. 호사스러운 일이지만 잠시 멈춰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 떴다. 한 번, 두 번. 문득 세번째 깜빡임에서 빛은 돌아오지 못할거라는 확신이 들어 더 쉬자고 설득하는 몸을 이끌고 다시 달렸다.
결심과 함께 차오른 결의에 젖은 눈동자가 일렁인다. 달리는 내내 비웃음만 차오르던 얼굴에는 이제 무기력함과 피로가 엿보인다. 어린 황녀에서 슬슬 영혼의 본 모습으로 돌아간다. 이 수많은 기억
일렁이는 눈동자가 주변을 기민하게 살핀다. 이 눈동자가 저를 죽음으로 몰고 가고 있다. 초대 여제의 상징. 이 눈동자를 타고난 황녀는 의심의 여지없이 황제가 된다. 허나, 현황은 아직 자리에서 물러나고 싶지 않았는지 저를 죽이려고 든다. 제 후손. 제 선조. 어느 쪽이든 다 되니 그냥 핏줄이라고만 칭하겠다. 이미 육신의 가족에 대한 미련은 버린 지 오래이나, 이리도 혈육에 대한 정이 사라지고 폐단이 생겨났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조금 안타까울 지경이다. 이러니 황가의 인간들이 제 정신을 유지하지 못하지. 그리고 슬프게도 저는 황가의 인간이다.
이 사연에 대해서 이야기하자면 수없이 많은 시간과 쌓아놓을 손수건이 필요하다. 허나 우리의 사정은 그런 사소한 이야기를 할 정도로 좋지 않으니, 뒷이야기는 묻어두기로 하자. 단지 지금 우리에게, 내게 중요한 사실은 죽음을 강구할 방법이다. 뒤늦게 고고하게 죽음을 받아들일 용의가 생겼다. 사랑스러운 연인, 나의 빛이자 삶의 이유. 당신을 만나지 못하고 이번 삶을 포기함에 조금 아쉬운 생각이 들었지만, 당신도 내 사연을 듣는다면 이해해 주리라 믿겠다. 안, 당신은 어떤 상황에서 어떤 이유로 어떤 행동을 한다고 해도 나를 이해해 줄 사람이다. 나의 완벽하고 아름다운 연인.
서서히 손발에서 힘이 빠지기 시작한다. 너무 많은 상처를 입고 오랫동안 뛰어다녔다. 이미 과다출혈로 죽고도 남았을 시간이지만, 놀랍게도 아직 죽지 못했다. 이게 이 빌어먹을 몸뚱이의 덕인지, 영혼이 끈질기게 몸에 붙어있는 탓인지 알 수 없다. 아아, 둘 다일 가능성도 열어두어야겠군. 허나 이제 죽을 예정이니 별로 중요하지 않다. 과다출혈로 꼴사납게 죽는 게 아니라, 제 의지와 선택으로 목숨을 끊을 수 있어 얼마나 다행인지. 어울리지 않게도 얼굴에 미소가 떠오른다. 다음 생에서는 당신을 만날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가 샘솟았다.
마침 저를 위한 듯 낭떠러지가 나타났다. 나무가 없고 비어있는 공간. 낭떠러지. 사방에서 포위망을 조여 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허나 이제 그 모두 상관없다. 팔을 움직여 지금까지 애달프게 잡고 있던 화살을 빼 던져버렸다. 다시 솟구친 고통이 신경을 태우는 기분이 들지만 이제 상관없다. 옷은 이미 축축하게 젖어 더 이상 피를 흡수하지 못한다. 날개뼈 아래로 뚝뚝 떨어지는 핏방울이 루비처럼 노을에 반짝인다. 제 뒤로 펼쳐진 노을하늘이 지독하게 아름답다. 이제 어둠이 내리겠지. 슬슬 사물의 분간이 어려워진다.
"순순히 투항해라, 반역자."
"누굴 반역자라 칭하고 있습니까? 초대 황제의 상징을 가진 제게? 아니죠. 반역자는 당신들이 맹목적으로 따르는 그 황제입니다. 초대황제의 유지를 잊었습니까? 같은 눈동자를 가진 황녀가 태어나 15가 넘으면 무조건 황제라는 그 유언을?"
"닥쳐라!"
유지를 잊었을 리가 없지. 그러니까 저를 이리 죽이려 수없는 군사를 보내지 않았겠는가. 안타깝게도 그 황제 본인이 이 앞에 서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우매한 황제. 제 아득한 후손이면서 선조. 끝없는 환생 속에서 시간 감각도, 혈육에 대한 감각도, 생명에 대한 감각과 고통에 대한 감각도 지독히 흐려졌지만 기억은 사라지지 않았다. 기억은 처음부터 끝까지 조금의 손실도 없이 제 머릿속에, 영혼에 박혀있다. 저들이 무시하고 있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사람이 저다. 뭐, 상관없지만. 알릴 의지도 없고. 죽어 썩어 문드러질 몸뚱이에 미련을 가져 무엇 하겠나.
"당신들의 임무는 이미 실패했습니다."
"뚫린 입이라고 잘도 나불대는군. 이미 너는 포위되었다."
"포위의 기본도 모르는군요. 사방을 포위해야 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지금 당신은 실패했습니다."
화려하게 피어오르는 미소가 아름답게 노을빛에 물든다. 그리고 저는 몸을 던졌다. 조금의 망설임도, 조금의 서두름도 없이. 끊임없이 익히고 해 왔던 우아한 움직임 그대로. 찢어지는 외침이 들리지만 이내 바람소리에 묻힌다. 꽤나 긴 추락이 이어지고, 끔찍한 고통이 다시 이성을 뒤흔든다. 이미 너무 피가 빠져서 약해진 몸은 더 이상 고통을 견딜 수 없는지 의식이 흐려진다. 암전. 추위가 몸을 감싸 고요 속으로 밀어 넣는다. 나는 이 차가운 눈에서 당신을 떠올린다.
긴 꿈을 꾸었다. 어둠 속에서 보이는 빛에 다시 환생하였나, 하고 생각하였지만, 아니었다. 이건 그저 첫번째 생의 기억. 과거라 칭해야 하나, 아니 지금 숨쉬고 있는 시간보다 앞의 시간에 제 첫 생이 있으니 미래라고 해야하나? 어떻게 칭하든 저 생이 제 첫번째 생이고, 가장 큰 기억과 애정을 가지고 있으며, 당신을 처음 만나 사랑하기 시작한 시간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영영 변하지 않는다. 그 시절의 제가 영원을 믿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그래, 이제와서 고백하는 사실이지만 저는 영원을 믿지 않았다. 사랑이 그저 생식을 위한 호르몬 반응이라 생각하며, 이 아름다운 감정도 언젠가 끝이 있을거라 불안해 하며 현실에 충실하기 위해 노력했었다. 허나 사랑은 십 년이 지나고, 이십년이 지나도 식지 않았다. 심지어 당신과 함께 눈을 감던 그 순간에도.
그제서야 영원을 인정할 수 있었다. 이대로 죽어버린다면, 사랑하며 죽어버린다면. 그렇게 사랑은 영원하게 완성되는게 아니겠는가. 사라져가는 영혼의 끝자락. 그 기억속에 당신을 사랑했노라 그렇게 기억된다면. 그렇다면 영원한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 이미 희게 세어버린 머리카락과, 주름지고 힘 없어진 손. 그 손을 여전히 사랑스럽게 쓰다듬는 당신. 이게 행복이고 사랑이라면, 영원할거라고 믿었다. 그런 생각으로 평화롭게, 잠자듯 죽음에 빠져들었다. 사랑은 완성되는 듯 했다.
그렇지 못했다. 끝없는 암흑 속에서 흐려졌던 의식이, 잠에서 깨어나듯 확실해졌다. 그 때의 저는 몇 살이었더라? 기억나지 않는다. 아니 흐려져서 셀 수 없다. 확실한 사실은 그가 저와 함께 숨쉬고 있었다는 사실 하나. 그는 그 곳에, 제가 태어나자마자 보였다. 처음과 다르지 않게 여전히 저보다 5년 먼저 태어나 저를 그렇게 기다리고 있었다. 그 사실 하나로 앞으로 펼쳐질 삶이 얼마나 아름답게 보였는지. 사랑하며 살아갈 수 있는 사실이, 여전히 그가 내게, 제가 그에게 얽매여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큰 삶의 의지를 주었는지.
오래전 존재했던 나라의 공작. 그리고 그의 태중 혼약자. 그렇게 그와 저는 두번째 삶을 시작했다. 여전히 사랑하며, 손을 붙잡고 앞으로 나아갔다. 과거라고 칭해야할지 미래라고 칭해야할지 헷갈리는 전생과 달리 조금 더 전투적인 삶. 거대한 땅을 앞에 두고 그는 제게 무릎을 꿇으며 맹세했다. 저를 최고의 자리에 올려놓겠다고. 제가 무릎꿇을 이는 단 하나 뿐이라 이야기하던 그 전생의 기억과 같이.
"맹세하겠습니다, My Precious."
그렇게 말하며 제 손등위에 키스하는 그를 저는 그저 바라보았다. 이번생에서 드러난 그의 사랑이 그런 방식이었다. 그래서 저는 그의 어깨 위에 검을 내리며 그를 제 기사로 명하였다. 전생에서도 그런 말을 제게 하고 싶었을까? 부질없는 물음이 잠시 떠올랐지만 이내 지워졌다. 그가 그리 원한다면 저는 도우면 되는 일. 공작의 약혼녀라는 지위와 제 능력으로 저는 어렵지 않게 사교계의 여왕 자리를 쟁취했다. 그는 정계에서 지위를 확보하고 있었고, 저는 사교계와 상계에서 최고의 자리에 올랐다. 공작의 권세가 유례없이 커지던 날, 왕은 저희를 치러 군대를 보냈지만 역으로 잡아먹혔다. 누구나 카뮤가, 선배가 왕이 되리라 예상하였으나 그러지 않았다. 그는 저를 제국의 여황으로 올렸다. 그렇게 시간을 건넌 맹세가 지켜졌다. 제게만 무릎을 꿇겠다던 맹세가.
나라를 선물한 공작 이야기가 미담으로 이어지고, 동화와 연극, 소설, 음악, 오페라.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창작물의 형태로 세상에 떠돌았다. 나라는 날이 갈 수록 부강해져가고, 이미 역사는 뒤틀린지 오래였다. 허나 상관하지 않았다. 제 기억속의 전생은 바뀌지 않았고, 설령 바뀌었다고 하더라도 알아차리지 못하였을테니까. 과거에서 숨쉬는 일은 그랬다. 무언가 바뀌어도 그게 현실이었다. 전생에서도, 지금도. 바뀌었다 한들 신경쓰지 않았을 테니 걱정할 필요도 없다. 그와 제가 사랑한다는 그 절대적인 명제가 변하지 않았으니까.
시간속에서 퇴색될까 걱정하던 사랑은 오히려 색을 더해갔다. 몇 십년이 다시 흘러가고, 전생과 다른 한날 한시에 다시 눈을 감으며, 이제는 완성되는걸까. 라는 생각을 했다. 물론 착각이었다. 다시 눈을 뜨는 시간은 어김없이 찾아왔고, 이번에는 아득한 미래였다. 당신이 없는 미래.
별 의미가 없어 당신을 찾아가기 위해 한 번 더 삶을 포기할까, 라는 생각을 했다. 무력한 아기의 몸이었으나, 그만큼 연약해서 조금 높은 곳에서 몸을 떨어뜨리기만 하면 죽을 수 있다. 난간 앞에 어린 몸을 두고, 흐릿한 감각속에서 뚜렷한 통증을 느꼈다. 아기의 몸에 너무 과도한 생각이었나. 조금만 더 가면 될 이었지만 얌전히 포기했다. 그냥, 두번째 생의 당신이 그래왔던 그대로 저는 기다리기로 했다. 기다리면 언제가 태어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어서. 그래서 삶을 끊어내는 일을 미루었다. 그리고 언젠가 당신이 태어났을 때 당신에게 완벽한 환경을 제공하기 위해서 군대에 입대했다. 첫번째 생에서 흔히 읽던 SF와 같은 현실. 끊임없는 전쟁으로 군인이 좋은 대우를 받고 있고, 상대적으로 음악과 문학은 천대받고 있다. 그렇기에 저는 군대에 들어갔다. 당신이 음악으로 성공할 환경을 만들어주기 위해서. 그렇게 군대에서 최고의 자리에 오르기 위해 부던히도 노력했다. 10년. 자그마치 10년이 지났다. 5년간은 자라났고, 5년은 전쟁에서 죽도록 굴렀다. 단지 당신이 태어날거라는 확신 하나로 미친듯이 버텼다.
알 수 없는 행성의 유일한 생존자로 발견된 선배. 아직 어리고 연약하기만 한 당신을 나는 최고의 교육기관에 넣었다. 당신이 하던 첼로와는 다른 악기들이 있겠지만, 음악은 변하지 않는다. 저는 피를 묻히고 전장에서 구르지만, 당신은 노래와 음악을 잊지 않고 그 예술 하나로 살 수 있었으면 했다. 그렇게 저는 전장에서 지내고, 그는 음악을 배우는 시간들이 지나갔다. 최고의 환경을 제공하며, 당신이 나를 기억해내길 기다렸다. 이게 이번 생에서 제가 줄 수 있는 최고의 사랑이고, 제 방식이었다.
어쩌면 이 때부터 기다림에 익숙해지기 시작했는지 모른다. 몇 백년이 되어가는 기억은 당신이 자라나고 성숙해지는데 걸리는 일이년 정도는 아무렇지 않게 여기기 시작했고, 극도로 발달한 과학이 사람의 수명을 오백년에 가깝게 늘려놓아 같이할 시간은 충분하다 못해 차고 넘쳤다. 그러니 나는 하등 서두를 이유가 없었다. 언젠가 완벽하게 자라난 당신에게 청혼을 하고, 당신의 웃음과 함께 결혼을 하고. 나이가 바뀌어도 서로에 대한 관계는 아무 지장을 받지 않았다. 열정적인 사랑은 지속되었다.
백년 정도 지나고 나서는 로망이라고 여길 모든 행동을 했다고 자부할 수 있다. 그제서야 조금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이러다가 정말 사랑이 식는걸까? 기우였다. 이번생이 끝날 때 까지 당신은 나를 열렬하게 사랑했고, 그건 저도 마찬가지였다. 몇 백년이 지나 이제 기억은 천년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한다. 죽음이 당연한 삶의 과정이 되어가고, 미래와 과거의 경계가 흐릿해진다. 현재와 다음생만이 존재할 뿐이다. 손을 잡고 들어간 무덤 속. 눈을 감고 빛을 기다리는 과정이 이제 당연해지기 시작했다.
수없는 생이 지나갔다. 그와 제 성별이 뒤바뀌는 일도 있었고, 만나지 못하고 편지로만 사랑을 속삭였던 적도 있다. 만나지 못한 생은 죽음으로 끝냈고, 당신을 이번 생 안에서 만날 수 있다는 생각이 들면 당신을 기다렸다. 설령 그게 생의 마지막 하루라 할 지라도 당신을 기다렸다. 수많은 생을 거치며 외모와 나이의 의미가 사라지고, 고통과 죽음은 더 이상 공포가 되지 못하였다. 기억은 쌓이고 쌓여 첫번째나 두 번째 정도의 최초의 생들은 더이상 떠올리기 힘들다.
꿈은 모든 생을 비춘다. 그 희노애락이 다시 떠오르고, 저는 다시 당신과 사랑하던 시간을 떠올린다. 꿈은 흐르고 흘러 이번생을 비춘다. 몇 없는 황녀. 초대 황제의 상징. 쏟아지던 기대와 질시. 혐오. 그러나 이번 생에서는 당신을 만날 수 있다는 막연한 예감이 들어 버텼다. 끊임없이 버텼다.허나 결국 이리 되는구나. 꿈의 끝자락에서, 문득 첫번째 생의 여상스러운 대화가 떠올랐다. 특별하지도 않고, 평소와 같은 대화였으나, 그 상황이 갑자기 떠올랐다.
그 어떤 생에 비추어도 가장 찬란한 색. 그보다 더 전투적인 삶은 존재했으나 그보다 더 치열한 삶은 존재하지 않았다. 당신의 그 아름다운 목소리와, 첫번째 생의 그 앳된 목소리가 생생하게 귓가에 울린다.
'선배는, 영혼을 믿어요?'
'믿지 않을 이유가 무어있나. 존재한다면 그 영혼을 바칠 이가 여기 있는데.'
'그래요? 저는 믿지 않았는데.'
'존재하든, 존재하지 않든. 네 영혼은 내 것이다.'
'그리고 당신의 영혼은 내 것이죠. 그냥, 영혼의 수명은 만 년이라는 이야기를 들어서요. 관념적인 의미인지, 아니면 실질적인 시간을 말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만일 사실이라면, 그 만년 내내 네게 사랑을 바치겠다 맹세하지.'
'저도 당신을 사랑하겠다 맹세하죠.'
특별하지 않던 기억이 이리 떠오르는 이유는, 수명이 다되었기 때문일까. 아득한 추위에 눈을 떴다. 사방이 붉게 물든 풍경이 보인다. 산에서 떨어졌다고 믿기 어려운 풍경. 눈앞에 펼쳐진 신성한 땅에 본능적으로 직감한다. 이는 태초부터 예정된 제 무덤임을. 나는 이곳에서 잠들기 위해 그리도 시간 속을 헤맸다는 사실을. 아득하게 풍겨오는 매화향기가 몽환적이다.
얼어붙은 몸을 억지로 일으켜 세운다. 끊임없이 불어대는 바람이 음악소리로 들리고, 흩날리는 눈발이 꽃잎과 같다. 움직이는 몸은 휘청거리며 춤추는 듯 움직이고, 뚝뚝 떨어지는 피에 물든 눈이 마치 매화 꽃잎과 같다. 굳고 움직이지 않는 몸을 움직여 땅의 정 가운데 도착한다. 더 이상 움직일 필요는 없다. 당신은 이미 죽었을까. 아니면, 당신의 수명은 나보다 조금 더 길까. 알 수 없다. 그러나 여전히 아득한 확신은 하나 있어, 언젠가 그가 제게 찾아올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여기 내 가난한 노래의 씨앗을 심어라.
검은 어둠이 찾아들고, 의식이 사라진다.
***
쓰러진 소녀의 몸 위로 눈이 쌓인다. 붉은 피가 물들인 눈은 마치 꽃잎이 쌓인 듯 보인다. 허나 그 눈은 결국 붉은 꽃잎마저 삼켜버리고, 소녀는 그대로 영영 잊혀진다. 시간이 지나 눈이 녹고, 소녀의 육신은 한 줌 재가 되어 흩날린다. 그녀의 흔적이라고는, 첫번째 생의 이름을 닮은 나비들. 겨우 한두 마리이던 나비는 시간 속에서 몇 천 마리가 되고, 몇 만 마리가 되어 땅을 뒤덮는다. 하늘색과 진청색의 나비는 마치 그들의 사랑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 보인다.
수없는 시간이 지나 이제 이 곳에 꽃이 만발하고, 나비로 가득 찬 어느 봄날. 사람 하나 찾지 않던 장소에 누군가가 말을 달려 찾아온다. 흰 백마 위에서 달빛과 같은 머리칼을 휘날리며 달려온 남성은 소녀가 죽기 직전까지도 그리던 연인. 그는 먼저 가버린 소녀를 용서하지 못하고, 그 자신조차 용서하지 못한다. 그녀가 심었던 노래의 씨앗은 어느새 이렇게 흐드러졌고, 남자의 등장에 놀란 나비가 일제히 날아오른다. 날개에서 떨어진 가루가 환각을 일으켜 그에게 소녀를 보이고, 소녀는 마지막 말을 남긴다.
'기다릴게요.'
미래가 될지 과거가 될지 모르는 시간. 그의 과거에도, 미래에도 존재할 사랑. 그는 그녀의 환각에 말에서 떨어지듯 내려 무릎을 꿇었다. 잔잔하게 미소짓고 있는 소녀의 모습이 너무나 아름다워, 생전과 다를바가 하나 없어, 그는 절규할 수 밖에 없었다. 환청처럼 들려오는 노래. 그 뒤로 아득하게 들리는 절규. 그녀의 첫번째 이름을 부르짖는 그를 위로하듯 나비의 날개에서 떨어진 가루가 흩날린다. 아득한 매화 향. 여전히 시간에 구애받지 않는 소녀의 모습에 그는 눈물 흘렸다.
2016.0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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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 어쩌면, 손 끝에서 | 2018.11.18 | 2018.11.18 | 9 |
29 | 죽여줘 | 2018.11.18 | 2018.11.18 | 6 |
28 | 당신이 | 2018.11.18 | 2018.11.18 | 2 |
> | 무제 | 2018.11.18 | 2018.11.18 | 5 |
26 | 겨울요정님과 얼음백작 이야기 | 2018.11.18 | 2018.11.18 | 8 |
25 | 1년 전의 나, 10년 후의 당신 | 2018.11.18 | 2018.11.18 | 4 |
24 | [ 드림 평일 전력 ; DOLCE ] ❥ 제 186회 주제 : 너를 보게 해달라고 빌었다 | 2018.11.18 | 2018.11.18 | 32 |
23 | 생일 축하해! | 2018.11.18 | 2018.11.18 | 2 |
22 | 환상, 무엇을 보는가 (잔혹동화 합작) | 2018.11.18 | 2018.11.18 | 3 |
21 | 100번째로 반복하는 사랑의 말 | 2018.11.18 | 2018.11.18 | 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