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옛날. 아주 먼 옛날이 아닐지도 모르는 그런 옛날. 숲 속에는 아름다운 꽃밭이 있었어요. 그 누구도 모르는 숲의 한 가운데 있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밭. 나비와 벌이 춤추는 그 곳에는 사람이 올 수 없었답니다. 숲이 사람들을 모두 밀어냈기 때문이에요. 커다란 숲은 사람을 좋아하지 않았거든요. 그러던 어느 날, 작고 여린 소녀 하나가 꽃밭으로 걸어 들어왔어요. 아름다운 색의 긴 머리를 싹둑 짧게 자르고, 빛을 잃어버린 허망한 눈으로 터덜터덜 걸어서. 사람들은 올 수 없는 꽃밭이지만, 숲이 어리고 여린 소녀가 안타까워 길을 열어주었기 때문에 소녀는 꽃밭에 올 수 있었어요.
허탈한 걸음은 터덜터덜, 힘이 빠진 몸은 비틀비틀. 픽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소녀는 죽어있었어요. 물론 소녀의 숨은 남아있었고, 심장도 콩콩 잘 뛰고 있지요. 하지만 소녀는 가장 중요한 무언가를 잃어버렸어요.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는 그런 중요한 물건. 그래요, 마음의 보석이에요. 소중한 마음의 보석을 잃어버린 소녀는 죽어버렸지요. 죽음 앞에서도 죽지 않은 신비한 색의 눈을 반짝이며 소녀는 꽃밭에 털썩 주저앉아요. 그러고는 말했지요.
"나비야, 나비야. 내 보석을 잃어버렸어. 어떻게 해야 할까?"
하늘, 하늘 날갯짓하며 나비는 비웃었어요.
"보석을 잃어버린 인간은 인간이 아니야! 인간이 아니지!"
소녀는 너무나 슬펐지만 보석이 없어서 울 수 없었어요. 그래서 다시 물어요.
"벌아, 벌아. 내 보석을 찾을 수 있을까?"
윙윙, 벌은 날아다니며 쏘아붙였죠.
"잃어버린 보석은 깨져버려! 죽어버린 마음으로는 아무데도 갈 수 없어!"
소녀는 너무 슬펐어요. 어, 슬픈 게 뭐지? 소녀는 잠시 갸웃하고는 다시 입을 열었어요.
"꽃아, 꽃아. 나는 뭐가 될 수 있을까?"
색색의 꽃은 그 잎사귀를 파르르, 흔들며 소리치지요.
"돌이나 되어버리렴! 가장 회색의 하찮은 돌이!"
그런 말을 듣고도 소녀는 아무 느낌이 들지 않았어요. 하지만 슬퍼해야한다는 생각이 들었죠. 슬픈 게 뭔지 모르지만, 소녀는 차가운 양 손을 들어 얼굴을 가리고, 몸을 웅크렸어요. 가장 낮은 바닥에 몸을 붙이고 조용히 웅크리고 있지요, 마치 바위처럼. 그러자 모든 아름다움이 소녀를 비웃어요.
"저것 보렴, 보석 없는 인간이야."
"빛나지 않네. 필요 없을 정도로."
"사라져버리면 좋을 텐데."
하늘하늘, 파르르, 윙윙. 소란스러운 말들 사이에 묻힌 작고 연약한 소녀는 더 이상 빛나지 않았어요. 보석 없는 사람을 노리는 어둠이 소녀를 야금야금 좀먹기 시작하지요. 하지만 슬프다는 느낌을 궁금해 하는 소녀는 눈치 채지 못해요. 보석이 없으니까요. 그렇게 서서히 물들어가는 소녀를 안타까이 여긴 가시나무가 작게 속삭였어요.
"소녀야, 소녀야. 겨울 요정님이 되렴. 보석의 자리를 얼음으로 채우는 거야. 그러면 돌이 되지 않아."
무슨 말인지 모르지만, 소녀는 끄덕였어요. 가시나무의 목소리가 듣기 좋았거든요. 그렇게 소녀의 빈자리는 얼어붙고, 소녀의 보석은 얼음이 되었어요. 하지만 그 대가로 소녀는 이름을 잊어버렸지요. 하지만 소녀는 괜찮아요. 기억 저 편으로 가라앉은 이름대신 요정님이라는 이름을 받았거든요! 소녀는 이제 겨울 요정님이 되었어요.
겨울 요정님은 늘 외로워요. 꽃들도, 나비들도, 벌들도 요정님 주위에는 오지 않거든요. 외로운 겨울 요정님의 주위에는 늘 하얀 눈이 내리고 있어요. 소복하게 쌓인 눈 위에 첫 발자국을 찍으며 움직여야하니까요. 하지만 요정님의 눈에 닿으면 누구나 얼어버려서, 요정님은 움직일 수 없었어요. 비록 차가운 몸을 가진 요정님이라도 눈앞에서 산산이 부서져나가는 생명 조각은 보고 싶지 않았거든요. 요정님을 비웃었던 마지막 나비가 얼음조각이 되어 부서져버리자, 요정님은 움직이기를 포기했어요. 그저 꽃밭의 한 가운데 앉아있기로 했지요.
요정님의 주위에는 눈이 쌓였지만, 절대 많이 쌓이지는 않아요. 소복하게, 딱 그만큼만 쌓이지요. 그래서 요정님은 눈에 파묻히지 않을 수 있었어요. 손 위로 소복하게 눈을 얻고서 늘 어딘가를 바라보는 요정님이 정말 가끔 움직여요. 그렇게 가끔 움직이고 싶은 날이면, 몰아치는 겨울바람 하나에 몸을 살짝 실어서 떠오르지요. 그러면 바람이 요정님을 옮겨주고, 요정님은 눈을 뿌려요. 그 해의 첫 눈을. 첫 눈은 그렇게 요정님이 뿌려야만해요. 요정님이 첫 눈을 내려주지 않으면 그 해에는 눈이 내리지 않거든요.
어느 날, 먼 왕국의 왕자님이 첫 눈을 뿌리는 요정님을 보았어요. 어리고 어린 왕자님은 요정님의 눈에 반해버렸지요. 왕자님은 확신해요, 요정님이 운명이라는 걸! 그래서 어린 왕자님은 왕국의 군대를 끌어 모아요. 저 멀리 숲 속의 꽃밭에 앉아있는 요정님을 데려오기 위해서. 그렇게 군대는 저 멀리 길을 떠났어요.
산을 넘고 바다를 건너서, 아름다운 겨울 요정님을 데리러. 어린 왕자님은 달콤한 꿈에 젖어있죠. 요정님은 날 보고 웃어주실까? 요정님을 만나면 당장 끌어안아야지! 방실방실 달콤한 꿈을 꾸며 왕자님은 앞으로 나아갔어요. 요정님의 아름다운 눈을 떠올리면 힘도 들지 않았어요. 배도 고프지 않았고, 목도 마르지 않았어요. 그래서 왕국의 군대가 모두 돌아가도 왕자님은 앞으로 나아갔어요. 사람을 거부하는 숲을 뚫고, 가시나무를 넘어서. 마침내 왕자님은 요정님을 만났어요.
아아, 불쌍한 왕자님. 왕자님은 기대로 가득 찬 눈을 반짝이지만 요정님은 왕자님을 보고 웃어주지도, 끌어안지도 않았어요. 그저 왕자님을 그 아름다운 눈으로 빤히 바라볼 뿐이었지요. 상처받은 어린 왕자님이 말했어요.
"요정님, 나를 안아줘요."
요정님은 그저 왕자님을 바라보기만 했어요. 안타까움에 왕자님은 한 발짝 앞으로 나아갔지요.
"허락되지 않았다면, 내 이름을 불러주오."
허나 요정님은 여전히 왕자님을 바라보고 있어요. 왕자님은 다시 슬픔에 한 발짝 앞으로 나아가요.
"그 조차 안 된다면, 나만을 바라봐 주시오."
요정님의 아름다운 눈은 왕자님을 향하고 있지만, 요정님의 눈 안에는 무엇도 비치지 않았어요. 그저 앞을 바라볼 뿐. 결국 왕자님은 절망에 마지막 발을 내딛었어요. 요정님의 눈을 맞은 왕자님은 얼어붙기 시작했지요. 눈송이가 내리는 곳에서부터 눈꽃이 피듯이 온 몸이 얼어붙기 시작해요. 완전히 얼음조각이 되기 직전, 요정님이 움직였어요. 낭창한 팔과 흰 손을 내저어 바람을 불러들여서는 왕자님을 감싸 안았어요. 그리고는 어린 왕자님이 떠나온 왕국으로 멀리, 저 멀리 보내버렸어요. 왕국으로 돌아온 어린 왕자님은 얼음을 눈물로 흘려내면서, 요정님을 포기해야만했지요.
왕궁으로 돌아온 어린 왕자님이 말했죠.
‘정말 아름답고도 차가운 소녀였어. 요정님은 정말 차가운 사람이야.’
아아, 왕자님 말고는 아무도 요정님을 보지 못했기 때문일까요? 왕자님이 말하는 요정님은 너무나도 아름답고 비현실적이어서, 모두들 왕자님이 헛것을 보았다고 생각했지요. 하지만 단 한 명. 왕궁의 이야기꾼은 왕자님의 말을 믿었어요. 이야기꾼도 첫 눈이 오는 날이면 요정님을 볼 수 있었거든요. 그렇게 요정님을 기억 하는 사람은 단 둘. 동화속의, 아이들의 잠자리의 머리맡에서 읽어주는 이야기의 주인공이 된 요정님은 분명 존재했어요.
요정님은 사람들이 자신을 알게 되었다는 사실도 모른 채 계속 겨울의 첫 눈을 뿌렸지요.
시간이 지나고 지나서 어린 왕자님이 늙은 왕이 되어서 땅 속에 눕고도 100년이 지나서. 어떤 나라의 여왕님이 말했어요.
"얼음 요정을 데리고 와라. 그 모습을 보고 싶구나."
여왕님의 기사인 백금발의 백작님은, 무릎을 꿇고 명령을 받들었지요. 차갑기 그지없는 백작님. 백작님은 모두가 얼음 백작님이라고 불러요. 차가운 눈을 마주한 사람들은 모두 그렇게 부르지요. 여왕님의 명령만 받는 차가운 백작님. 그렇게 백작님은 여왕님의 명령을 받고 길을 떠났어요. 백마를 타고, 왕자님처럼. 여왕님의 명령을 한시라도 빨리 수행하기 위해서 말을 재촉하고, 또 재촉해서는 숲으로 달려요. 길을 막는 나무들을 베어내고, 상냥한 가시나무를 짓밟고서 요정님의 앞까지.
마침내 요정님의 앞에 당도한 백작님은 잠시 숨을 멈췄어요. 옛날 옛적 어린 왕자님이 말 했던 그대로, 요정님은 비현실적이었어요. 얼어붙은 백작님의 보석이 일렁거렸어요. 차가운 불꽃이 날름거리며 머리까지 타고 올라가자, 백작님은 그제야 숨을 쉬었지요. 냉기로 가득 한 공기. 눈송이들 사이로 언뜻 보이는 아름다운 눈동자. 요정님은 마치 그림 같았어요. 잔잔한 얼음 호수 위의 그림. 가까이 가면 부서져버릴지도 모르는.
그런 백작님을 요정님은 그저 바라만 보았어요. 나무들의 비명소리가 울리고 가시나무가 신음하는 소리들을 모두 들으면서. 텅 비어버린 눈으로 빤히. 백작님은 듣지 못하는 비명소리가 요정님의 귓가에는 선명하게 들렸어요. 멍하니 있는 요정님의 귓가에 울려 퍼지는 신음소리, 비명소리. 작고 상처 입은 누군가가 소리쳤어요, 백작을 얼려버려! 그제야 요정님은 느릿하게 몸을 일으켜, 꿈결 같은 발걸음으로 백작님의 앞에 다가섰죠. 요정님의 주변에 내리는 눈은 언제나처럼 길을 만들고, 백작님의 위에 내려앉았어요. 허나 백작님은 얼어붙지 않았어요. 얼음 백작님이라서 그랬을까요? 얼어붙지 않는 백작을 모두 이상하게 바라보았지만 요정님은 아무런 표정도 짓지 않았지요. 제 발로 걸어 앞에 선 요정님을 이상하게 생각하던 백작님은 좋게 생각하기로 했어요. 끌고 갈 수고를 덜었으니까요. 백작님은 거칠게 요정님의 손목을 잡아끌었고, 요정님은 순순히 따라나섰어요.
가시나무를 얼리거나 밟지 않기 위해서 요정님은 백작님을 다른 길로 이끌었어요. 요정님을 미워하지 않는 숲은 길을 열어주었고, 어떤 나무도 베이거나 꺾이지 않고 숲 밖으로 나올 수 있었지요. 호오, 백작님은 요정님을 흥미롭게 바라보았고, 요정님은 여전히 무표정했죠. 그렇게 백작님이 요정님의 손목을 잡고 백마에게 다가가자 말은 도망쳤어요. 요정님의 눈에 얼어붙을까 무서웠거든요. 그제야 요정님은 손목을 잡은 손을 쳐내고, 바람위에 몸을 실었어요. 둥둥 떠서 바라보는 요정님에게, 백작님은 그저 한 번 짧은 웃음소리를 흘렸지요. 하, 비웃음인지 모를 짧은 소리. 얼어붙은 보석이 웃음도 빼앗아간 걸까요? 백작님은 이내 무표정하게 말 위에 올라탔지요.
영리한 말은 백작님이 출발하라고 신호하지 않아도 천천히 발을 옮기기 시작했어요. 발굽소리가 잠시 울리다가, 달려 나가기 시작했지요. 명마로 유명한 백작님의 말은 정말 바람처럼 빨랐고, 요정님을 실은 바람은 열심히 달려야했어요. 그렇게 산을 건너고 들을 넘어서. 요정님을 궁금해 하는 여왕님에게 요정님을 보여드리기 위해서.
쉴 새 없이 말을 재촉해서 도착한 왕궁에서, 요정님은 들어가려고 하지 않았어요. 눈이 사람들을 얼려버릴 테니까요. 백작님은 짜증스럽게 손목을 이끌었지만, 요정님은 움직이려고 하지 않았어요. 어느새 사람들이 주변에 모여들었고, 웅성거리기 시작했지요.
“결국 요정님을 데리고 온 거야?”
“얼음백작이 이번에도 성공했네. 여왕의 명령이라면 죽어서도 수행할 인간이야.”
“쉿, 누가 들으면 어쩌려고 그래.”
“다 알고 있지 않나? 백작이 여왕의 충실한 사냥개라는 사실 정도는.”
수군거리는 말들이 차갑게 백작님을 겨냥했어요. 허나 그런 말들 따위에 하등 상관하지 않고, 백작님은 그저 들어가지 않으려는 요정님과 힘겨루기를 하고 있을 따름이지요. 백작님이 요정님에게 말이라도 걸어야 하는지 생각하려는 그 시점에, 작은 나비 한 마리가 요정님의 곁으로 날아들었어요. 꽃밭의 아름다운 향기를 맡았던 걸까요? 가여운 나비는 요정님의 눈송이에 차갑게 얼어붙어버리고 말았답니다. 자그마한 얼음조각이 떨어져 산산이 부서지자, 백작님은 알아차렸어요. 무표정한 요정님은 여왕님이 얼어붙어버릴까 걱정하고 있었던 거예요. 백작님은 피식, 웃었어요. 요정님의 걱정이 꽤나 기특하다고 생각하며 말했지요.
“눈이 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로 다가갈 수는 없다.”
냉정한 말이지만 요정님은 그 말에 발을 옮겼어요. 화려하디 화려한 왕궁의 복도에 눈길을 만들고, 그 눈 위에 첫 발자국을 찍으며 아름다운 여왕님의 앞까지 걸어갔지요.
아름다운 눈의 색을 머리에 입은 여왕님. 여왕님은 흥미롭다는 눈빛으로 요정님을 관찰했어요. 신비로운 색의 눈부터, 요정님의 머리위에 둥둥 떠 있는 눈구름, 요정의 날개 같은 옷. 무표정한 얼굴까지. 하나하나 관찰한 여왕님은 기품 있는 말투로 툭, 내뱉었어요.
“네 이름은 무엇이냐?”
요정님은 대답하지 않았어요. 그저 신비한 색의 눈을 일렁이며 여왕님을 빤히 바라보았지요. 잠시간 대답을 기다리던 여왕님은 재차 물었어요.
"너는 진정 요정이더냐?"
요정님은 여전히 대답하지 않았어요. 하지만 눈을 돌리지도 않았지요. 요정님은 그저 그 곳에 존재하면서, 여왕님을 바라보고만 있었어요. 정확히는 여왕님을 포함한 왕궁을. 무엇도 요정님에게는 의미가 없었으니까요.
다시 대답을 기다리던 여왕님은, 조금 화가 났어요. 여왕님이 요정님을 죽이라고 명령할까 잠시 고민하는 동안, 동화가 떠올랐지요. 요정님이 첫 눈을 뿌리지 않으면 영영 눈이 오지 않는다는 동화 이야기. 여왕님은 동화를 믿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요정님이 정말 있는데 동화가 거짓말이라고 할 수도 없었어요. 그래서 여왕님은 화를 누르며 요정님한테 다시 말을 던졌어요.
"생각보다 시시하구나, 물러가라."
요정님은 그 말에도 반응하지 않았어요. 얼음 백작님도 존경하는 여왕님의 말에는 부정하지 않았지요. 주변의 모든 사람들도 요정님이 시시하지 않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았어요. 그렇게 산을 넘고 들을 넘어 찾아온 요정님은 시시해져버렸지요. 불쌍한 요정님.
그 누가 한 번만이라도 요정님과 제대로 눈을 맞춰 보았다면, 요정님의 꿈결 같은 발걸음과 눈을 뿌리는 나긋한 손짓을 한 번만이라도 보았다면 결코 시시하다고 말할 수 없었을 텐데. 요정님의 그런 모습을 본 사람은 옛날 옛적의 어린 왕자님처럼 요정님이 자신의 운명이라고 굳게 믿고 몸이 얼어붙을 때 까지 요정님에게 다가가겠지요. 하지만 여기 있는 사람들은 아무도 요정님의 신비한 눈을 제대로 바라본 적 없었고, 눈이 마주쳤던 백작님은 여왕님의 말 만을 섬기는 사람이었어요. 그렇게 시시한 겨울 요정님은 왕궁 밖으로 나가야 했어요.
사람들은 요정님을 처음부터 왕궁 밖으로 내쫒고 싶지는 않았어요. 시시하다는 말을 듣기는 하였지만 요정님은 아름다웠고, 꿈결 같은 발걸음도 그대로였으니까요. 하지만 세 번째로 요정님께 다가가려던 사람이 바람에 뒤로 밀려나고 나서, 아무도 요정님에게 다가가지 않았어요. 상냥한 요정님은 얼어붙게 하고 싶지 않아서 했던 행동이지만, 사람들은 다르게 생각했어요.
'차갑기 그지없는 겨울 요정. 가진 재력, 권력 하나 없는 주제에 오만하기만 하구나.'
누군가 소리쳤어요. 그리고 모두들 고개를 끄덕였죠. 다들 요정님을 좋아해서 다가가려고 했으면서, 요정님의 걱정을 알지도 못하고 마음대로 떠들었어요. 요정님을 모욕하고, 매도하고, 깎아내렸어요. 그 모든 모욕들 사이에서 요정님은 그저 서 있었어요. 옛날 옛적 꽃과 나비와 벌들에게 당했던 그 때와 같이. 그 아이들은 모두 얼음이 되어버렸지만, 여기 있는 사람들은 얼음이 되기 위해서 요정님한테 다가올 만큼 어리석지 않았어요. 감정을 모르는 요정님은 그저 서 있었고, 눈구름은 요정님을 떠날 수 없어서 그들을 얼릴 수 없었어요. 그렇게 끝나지 않을 매도 속에 서 있던 요정님을 구해 준 사람은, 얼어붙은 백작님이었어요.
“여왕님의 손님을 모욕한다면, 이쪽의 명예를 더럽히는 일로 받아들이겠다. 어디 더 할 말이라도 있나?”
순식간에 공기가 얼어붙었어요. 끝없이 쏟아지던 매도가 뚝, 멈춰버리고 어색한 침묵만이 공기 중에 맴돌았지요. 그 누구도 함부로 입을 뗄 생각을 하지 않았어요. 누가 말 할 수 있었을까요. 한 마디라도 잘못 했다가는 백작님이 그 사람을 얼려버릴지도 모르는데. 그렇게 싸한 공기가 흐르는 복도에서, 누군가 침묵을 깨고 한 마디를 던졌어요.
“그럴 리가 있습니까.”
어느 변방의 남작이었어요. 오늘은 왜 왕궁에 있었던 걸까요? 남작의 말을 시작으로 모욕을 쏟던 사람들이 조용히 작은 사과와 부인의 말을 남기고 사라져갔어요. 결국 느릿하게 떨어지는 눈송이와 백작님, 그리고 여전히 변함없는 요정님만이 복도에 남았어요. 백작님은 여전히 차가운 눈으로 요정님을 바라보았지요. 한 차례의 소란이 지나가고 침묵이 돌아 온 복도에서, 여전히 요정님은 미동도 없었어요. 느릿하게 떨어지는 눈송이들. 몇 개의 눈송이가 요정님의 위에 쌓이고 나서, 백작님이 툭, 말을 던졌어요.
“한심한 꼴이군.”
여전히 반응이 없는 요정님. 백작님은 벽에 대고 말을 하는 기분이라고 생각했어요. 그 순간, 작지만 요정님이 백작님을 흘끗, 바라보았어요. 그 누구도 바라보지 않던 요정님의 눈에, 순간 백작님의 푸른 눈동자가 담겼어요. 백작님은 굳어버렸죠. 작게, 아주 작게 파삭. 이라는 소리가 들렸어요. 요정님의 얼음이, 백작님의 얼음이 물방울을 하나 똑, 떨어뜨렸어요. 눈동자가 일렁이기 시작해요.
요정님은 돌아가야 해요, 다시 그 아름다운 꽃밭으로. 하지만 밤이 깊고 깊어서 백작님은 요정님을 데려다 줄 수 없었어요. 결국 요정님은 백작님의 성에 머물러야 했지요. 왕궁에도 방이 있었지만, 누군가 얼어붙을 수는 없으니까요. 그 일에는 아주 작은 백작님의 욕심도 들어 있었어요. 백작님은 요정님의 아름다운 눈에 담겨있던 하늘색이 너무나 선명해서, 그 이유를 알고 싶었거든요. 그래서 백작님은 요정님을 자신의 성에 데리고 가기로 했어요. 그렇게 마차를 타고 백작님의 성으로 돌아가는 길. 마차의 지붕 아래 갇힌 눈구름이 눈을 열심히 뿌리지만 요정님도, 백작님도 얼어붙지는 않아요. 조용한 마차 안. 너무나도 당연해질 거라는 느낌이 드는 침묵 속에서 문득 백작님이 말을 꺼냈어요.
“네 이름은 무엇이지?”
요정님은 대답하지 않았어요, 그저 멍한 눈으로 바라보며 응시했을 뿐. 하지만 그 가운데, 분명 하늘색이 담겨 있어요. 백작님의 보석도, 요정님의 얼음도 다시 똑, 물방울을 떨어뜨려요. 조금, 아주 조금 요정님의 마음에 틈이 생겼어요. 작게 입술을 달싹거리고 말이 나오려는 그 순간, 마차가 멈췄어요. 잠시간의 흔들림이 지나고 나서, 요정님은 거짓말처럼 입을 다물고 아까와 같은 눈을 하고 있었지요.
백작님의 성에 도착했어요.
하녀들도, 시중인도 모두 요정님을 피해요. 요정님의 눈구름은 너무나 차갑고, 백작님의 눈빛은 너무나 시리니까요. 하지만 어쩌겠어요. 그들은 고용된 입장이었고, 백작님의 말을 들어야만 했지요. 그렇게 아무도 없는 텅 빈 홀에서 식사를 하고, 각자의 방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 돌아왔지요. 각자의 방을 써야 할 테지만, 지금 청소 된 방은 하나도 없었고, 하녀들의 방을 줄 수는 없었지요. 결국 요정님은, 백작님의 방에서 잠들게 되었어요.
백작님의 방은 집무실과 붙어있었어요. 침대가 둘은 되었고, 백작님의 방에서만 살아도 별 상관없는 크기였지요. 그런 방에서 백작님과 요정님은 누웠어요. 사실 요정님은 눕지 않아도, 잠들지 않아도 별 상관이 없었지만, 그냥 백작님이 누웠기에 따라 누웠지요. 두 사람의 사이에서는 어떤 말도 오가지 않아요. 그러나 둘은 침묵을 어색하게 여기지 않았기에, 방의 공기는 무겁지 않았지요. 그렇게 밤은 깊어만 가고, 부엉부엉 울던 부엉이마저 입을 다무는 시간이 돌아왔어요.
아아, 백작님이 너무나 차가웠던 탓일까요? 검은 옷의 밤손님이 백작님을 찾아왔어요. 차가운 날붙이와 치명적인 독을 품고 살금살금, 백작님의 숨을 빼앗기 위해서 다가갔지요. 소리 없는 조용한 발걸음이 백작님의 지척까지 다갔을 무렵, 백작님이 튕겨 올라오듯 손님의 목을 노렸어요. 그리고 그 순간, 손님이 얼어붙었죠. 백작님의 칼에 산산이 부서져나가는 얼음동상.
언제부터인지 요정님이 손님의 뒤에 서 있었어요. 여전히 느릿하게 떨어지는 눈송이는 손님의 부서진 얼음조각위에, 요정님의 머리 위에, 백작님의 어깨에 내려앉았어요. 지독히도 이질적인 모습으로, 요정님이 입을 열었어요. 가장 투명한 얼음과도 같은 목소리로, 요정님은 짧게 속삭여요.
“현.”
요정님의 첫 마디였어요. 한 글자에 의아한 기색을 띄우던 백작님도 이내 입 꼬리를 끌어올렸어요. 이름을 물었던 물음의 대답이었으니까요. 그 순간, 요정님의 가슴 깊은 곳에서 확실한 소리가 울렸어요. 그 누구의 귀에도 들리지 않고, 요정님과 요정님의 눈구름에게만 들릴 소리.
파삭, 요정님의 얼음이 깨졌어요. 저 안에 가라앉아있던 이름이 떠오르고, 요정님의 아름다운 눈이 일렁이기 시작했어요. 천천히, 아무도 모를 만큼 아주 천천히 요정님이 녹기 시작해요.
밤이 지나고 새벽이 돌아왔고, 백작님의 애마와 요정님의 바람은 다시 돌아가요. 그 누구도 받아들이지 않는 숲으로. 요정님은 조금씩 녹아내리고 있었고, 눈구름은 열심히 눈을 뿌렸어요. 요정님이 조금이라도 덜 녹게 하기 위해서. 요정님이 녹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나무들은 입을 다물었고, 꽃들은 침묵했어요. 모두가 알아차린 그 사실을, 오직 백작님만이 알아차리지 못했죠.
가장 안쪽의 아름다운 꽃밭. 요정님은 그 가운데 다시 섰어요. 몇 백 년을 서 있던 그 자리에서, 웃었어요. 멈춰버린 요정님의 시간이 천천히 흘러가고, 빨라지고 또 빨라져요. 결국 꽃밭에 봄이 찾아오기 시작했어요. 씨앗이 푸른 잎을 내밀고, 자라나고, 꽃봉오리를 올리고. 뚝뚝 떨어지는 물방울을 머금은 꽃잎이 싱그럽게 빛나기 시작했어요. 아름다운 꽃밭에 드리운 봄. 그 한 가운데서 요정님이 아름답게 웃었어요.
마침내 마지막 한 방울마저 녹아내려 요정님은 사라졌어요. 그리고 그 자리에 혼자 남은 백작님은 깨달았죠.
백작님은 요정님을 사랑해버렸어요. 영영 사라진 요정님을.
2015.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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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 무제 | 2018.11.18 | 2018.11.18 | 5 |
> | 겨울요정님과 얼음백작 이야기 | 2018.11.18 | 2018.11.18 | 8 |
25 | 1년 전의 나, 10년 후의 당신 | 2018.11.18 | 2018.11.18 | 4 |
24 | [ 드림 평일 전력 ; DOLCE ] ❥ 제 186회 주제 : 너를 보게 해달라고 빌었다 | 2018.11.18 | 2018.11.18 | 32 |
23 | 생일 축하해! | 2018.11.18 | 2018.11.18 | 2 |
22 | 환상, 무엇을 보는가 (잔혹동화 합작) | 2018.11.18 | 2018.11.18 | 3 |
21 | 100번째로 반복하는 사랑의 말 | 2018.11.18 | 2018.11.18 | 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