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 있는 자리가 바뀌지 않는 이상
죽어도 구원은 없다
/허연, 경계선의 나무들
*
‘구원’이라고 말하는 것이 늘 그를 괴롭게 만들었다. 그에게 있어서 구원이란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 무엇이 그를 구원할 수 있는가. 행복을 바라는 것이 죄가 되는 자리에 서 있는 그에게, 누가 감히 ‘구원’을 입에 담을 수 있었는가? 그런 오만을 부렸던 이들의 결말은 하나같이 똑같았다. 불행에 먹혀, 다치고, 구르며, 결국 사자의 원념이 되어 그를 저주하고야 말았다.
그는 실로 구원보다 더한 기만이 없다고 생각하는 이였다.
어찌 질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에게도 자아가 있는데, 어찌 행복과 빛을 바라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를 옭아매는 저주 앞에서 그는 몇 번이고 생각했다. 모든 것을 내던지고 싶다고. 누군가를 이 저주의 먹이로 던져서라도, 그는 행복해지고 싶다고.
그가 기르던 식물이 죽었을 때, 그가 소중히 여기던 동물이 더이상 심박을 가지지 않았을 때, 그에게 사랑한다고 너는 행복해 질 수 있다고 단언하던 이가 크게 다쳐 울고 있을 때. 그는 몇 번이고 생각했다. 차라리 누군가가 그의 대신 불행해졌다면. 그가, 행복해 질 수 있다면.
그는 언젠가부터 저 자신을 다른 존재처럼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렇지 않으면 그의 불행이 그를 모두 집어삼켜 버릴 것 같았다.
그는 그렇게 해서라도 행복을 쥐고 싶었다.
늘 아무것도 모르는 자들이 밝다.
그를 아래로 내려보낸 동생은 하늘을 지배하며 이런 저런 사람을 끼고 놀았다. 제게 허락된 여인 이외에도 수많은 여인을 품었고, 수많은 가족을 두었으며, 사랑하는 이들을 많이 두었다. 그는 그것이 허락되었다. 오직, 그가, 하늘의 지배자이기 때문에.
그 같잖은 자리는 그에게도, 포세이돈에게도 주어질 수 있는 것이었다. 그저 그가 제비뽑기에서 이겼기 때문에 허락된 행복이다. 그는, 단 한 번 선택을 잘못한 대가로,
이리도 어둠 속에서 지내는데.
그렇기에 태양신 아폴론의 호감은 그에게 있어서 기만 이상의 의미가 되지 못했다. 그를 백부라 부르며 따르는 그는 늘 하데스를 비참하게 만들었다. 태양신. 그는 빛의 신이었다. 그의 어둠을 짙게 만드는 존재였다. 그리 생각할 수 밖에 없었다.
아폴론의 밝음이 그 자신의 어둠을 드러낸다. 그는 아폴론의 앞에서 어쩔 수 없는 열등감과, 질투와, 혐오를 마주해야만 했다. 홀로 있을 때는 무시할 수 있었으나 타인과 함께 있을 때는 흘러넘쳤다.
그는 그래서 늘 모든 호감을 기만으로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다.
아아, 그에게 있어서 구원은 실로 다시 없을 기만이었다.
어느 날, 제우스는 또 제멋대로 일을 꾸미고 저를 끌어들였다. 우습지도 않은 이야기였다. 애초에 그의 자식뻘 되는 신들과 함께 무엇을 배울 것이며, 인간에 대해 그가 배워 좋을 것이 무어 있단 말인가? 그는 살아있는 인간과 대면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은 존재였다. 그에게 있어서 인간은 언젠가 그를 저주할 존재에 지나지 않았다.
아니,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버틸 수 없었는지도 모른다.
결국 그는 또다시 제우스에게 휘둘릴 수 밖에 없었다. 오직 그가 최고신의 자리에 있기 때문에. 동급의 신임에도 인간들의 신앙이 제우스를 최고로 만들었기 때문에. 그는 그 제멋대로인 신에게 휘둘릴 수 밖에 없는 위치였다.
그럼에도 그가 그를 후회하지 않은 것은,
그의 자리에서 그를 끌어내고야 말 이를 만났기 때문에.
길고 긴 생의 첫사랑이었다.
*
나를 견딜 수 있게 하는 것들이
나를 견딜 수 없게 한다
- 김경주, 비정성시
*
그녀의 눈은 늘 금빛이었다. 강도의 차이가 있더라도 그녀의 눈은 금빛을 띠고 있었다. 그것은 아주 익숙한 색으로, 그가 늘 마주해야만 했던 색이다. 신위를 상징하는 색. 그에게는 반쪽밖에 주어지지 않은 색. 언젠가는 열등감으로 나타나고야 말았던 그 것.
그러나 그녀는 제 눈을 바라보고 덤덤하게 말했다.
“아룸다워요, 그 눈. 가릴 필요가 있나요?”
“무섭지 않은가?”
“그럴리가요. 제가 무서워해야 하나요? 절 해치지 못하는 것을 두려워 할 필요가 있을리가 없잖아요.”
그녀는 그보다 강했다.
별을 좋아하는 이였고, 그와 다른 세계에 사는 이였다. 제멋대로인 제우스가 만든 별자리에게 다른 의미를 부여하고, 다른 이야기를 들려주는 이였다. 그는 그것이 좋았다. 그래, 좋았다. 철모르는 어린아이처럼 행복을 바라게 만들었다. 그녀가 강했기 때문에. 오직, 그녀가 그보다 강했기 때문에.
어쩌면 그는 무언가 빛이 필요했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의 자리에서도 쥘 수 있는 빛을. 그래서 그가 그녀를 제가 있는 곳 까지 끌어내리고야 말았는지도 모른다.
기나긴 명계에서의 시간이, 길고 긴 시간동안 내려진 저주가, 그를 뿌리까지 썩게 했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많은 것들이 바뀌어간다. 그에게 다가오는 이들을 그는 서서히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그 모든 애정을 기만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그 모든 행복을 질투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있게 되었다. 어쩌면, 그도 꽤 괜찮아 졌는지도 모른다. 믿어도 될지도, 모른다.
그는 이것저것 모르는 것 투성이였지만, 학교이기에 괜찮다고 생각했다. 학교는 배우는 곳이 아닌가. 그는 서서히 배워가면 되는 일이었다. 아무리 짧은 시간이라도, 그녀의 손을 붙잡고 서서히 나아갈 수 있었다. 그녀가 저를 보지 않아도, 오직 그녀가 빛이기에 괜찮았다. 빛은 그저 내리쬐면 될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가끔 그에게 상냥했고, 다정했으며, 그를 사랑스럽게 쳐다봤다. 그는 그걸 희망삼기로 마음먹었다.
늘 모든 것을 망치는 것은 안일함이지.
그는 행복했다. 감히 행복을 말할 수 있었다.
‘감히’ 행복했다.
그 죗값은 어찌 돌아왔는가. 그를 기만하던 자들이 불행에 먹히고 나서야, 그는 안도하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의 행복은 이렇게 얄팍하기 짝이 없었다. 누군가의 희생을 대가로 행복하고 있었다.
울컥, 치밀어 오르는 혐오감이 그를 다시 물들였다. 그를 버티게 만드는 모든 것들이 그를 밀어 넘어뜨리고 있었다.
*
눈 앞으로 불쑥 네가 나타나. 나를 쳐다봐.
너는 어떻게 어둠 속에서도 빛이 나? 어떻게 이렇게도 아름다워?
/서덕준, 네온색 다이너마이트
*
잠간의 망설임은 그녀를 나락으로 밀어 넘어뜨렸다. 그는 제 자리가 그 곳임을 알고 있었다. ‘하데스 아이도네우스’라 할 지라도 그는 결국 ‘하데스’이다. 그는 단 꿈에 젖어서 멋모르고 행복을 손에 쥐었다 착각하였다. 그래서, 그는, 자리를 벗어나 구원을 얻을 수 있지 않았나. 실제로 행복을 손에 쥐지 않았나. 그녀는 그가 생각하는 것을 이루어 줄 수 있었다.
허나 그의 자리에는 늘 누군가 서 있어야 했다. 누군가가 불행해야만 했다. 그래야 균형이 맞았고, 그것이 그의 생이었고, 신을 지배하는 절대적인 법칙이었다. 행복할 수만은 없는 노릇이라고 온 세계가 외치고 있었다.
그는 그녀라서 괜찮다고 생각하는 자신을 발견하고, 혐오감에 토악질을 하고 싶었다.
그녀는 인간이었다.
그보다 강한 인간이었다.
신은 인간보다 강한 존재다.
그는 그녀가 차라리 울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아니면, 그에게 화를 내어도 좋았다. 그에게 면죄부를 내려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어떤 방식으로 그를 내쳐도 좋았다. 그는 그 고통마저 달게 받아들일 것이다. 그녀가 빛이 되고 제가 어둠이 되면 된다고 생각했다.
허나 어째서 그녀는 어둠 속에서도 밝게 빛나는가. 어찌 고통스러워 하는 모습이 더욱 아름답기 짝이 없는가. 끔찍히도 아름다운 모습에, 하데스는 사고를 포기하고 싶은 기분이 되었다. 고삐풀린 망아지처럼 달려가는 생각이 그를 어디로 데려갈 지 알고 있었다.
허나 사고를 멈출 수는 없는 노릇이라, 그는 결국 그 혐오스러운 단어를 떠올리고야 말았다.
사랑스러웠다.
그녀는 그리 고통받고, 그가 불행했던 그 나락에 서서도 사랑스러웠다.
아아, 차라리 제 목을 자르고 싶은 심정이다.
그녀는 덤덤하기 짝이 없는 눈으로, 더이상 빛나지 않는 눈으로, 그의 눈을 마주했다. 그녀의 눈에서 빛을 그가 다 빼앗아 가기라도 한 양 그의 오른 눈이 금빛으로 빛났다.
차라리 이 눈을 빼어 그녀에게 줄 수 있다면. 그녀가 잃어버린 왼쪽눈은 그가 줄 수 없었다. 그의 어둠을 한 가득 담은 눈을 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하데스.”
“지금이라도, 내가,”
“괜찮아요. 마음에 없는 소리 하지 않아도.”
그건 여상스러운 말이었고, 그에게 세상을 무너뜨리는 질책이었고, 혐오스러운 안도감을 불러 일으키는 말이었다. 그는 푸르게 일렁이는 제 주변의 빛이 혐오스러웠고, 제 금빛 눈이 혐오스러웠고, 다시 저주받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제 내면이 혐오스러웠다. 그 모든 것이 혐오스러워 저를 저주하던 원념을 이해하고야 말것같은 심정이었다.
그런 그의 머리 위에서 가시관을 벗겨낸 셰키나 ‘테오파네스’는 그것을 제 머리 위에 뒤집어쓴다. 더 이상 빛나지 않는 눈으로, 신의 고난을 제가 기꺼이 받겠다 이야기한다. 그녀가, ‘테오파네스’이기 때문에.
혐오스럽기 짝이 없는 그의 양 뺨에 상냥하게 손을 대고, 울 것 같아 뜨거워진 눈을 상냥하게 감겨서, 그 위에 사랑을 담아 입 맞춘다.
그녀가 그리스의 뜻을 모를리가 없으니 이것은 그를 지키겠다고 말한 것이다.
“괜찮아요, 하데스. 저는 ‘셰키나 테오파네스’가 아니던가요.”
그녀의 본명을 알면서도, 그는 입을 다물어 버렸다. 그 어떤 뜻도 가지지 못한 이름을 들고 울던 소녀를 알면서도 그는 외면하고 싶었다. 그녀는 그보다 강하니까, 괜찮다고 믿고 싶었다.
그는 정말 철모르는 어린아이처럼 굴고 있다.
그녀는 가시관을 쓰고 알 수 없는 노래를 흥얼거리면서 앞으로 나아갔다. 덩그러니 남겨진 그는 울었다. 울 수 밖에 없었다. 그에게 감히 울 자격이 있는지도 모르고 울었다.
죽을 수 없는 주제에 제 나약함이 죽도록 혐오스러웠다.
*
미안해,
당신이 내 새벽이야.
/새벽 세 시
*
그에게 사랑할 자격을 주고, 그에게 사랑이 되고, 구원이 되고, 기만을 부정하고, 괴로움이 되고, 결국 그가 간절히 바라는 별이 되어 행복이 되어갈 이에게, 그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는가?
사과 뿐이었다. 닿지 않을 사과와 기원만이 그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불행하지 않아도 되고, 사랑을 바라고 행복을 바라도 되는 믐으로 그가 할 수 있는 전부는 그것이었다.
닿지 않고 끊이지 않을 기도를 올리며, 그녀에게 닿기를 바라며 그는 허락되지 않은 이름을 중얼거렸다. 그에게 있어서 끝까지 셰키나였던 현의 이름을 끝없이 중얼거렸다.
여명이 동 트는 날이면 그는 조용히 사과헀다. 그가 나빴으니 사과해야했다.
첫사랑이었다.
2017.12.03
댓글 0
> | 暁 | 2018.11.18 | 2018.11.18 | 11 |
16 | 죽음 앞에서 | 2018.11.18 | 2018.11.18 | 10 |
15 | 포기 | 2018.11.18 | 2018.11.18 | 5 |
14 | 셰키나 테오파네스에 대한 독백 | 2018.11.18 | 2018.11.18 | 8 |
13 | 셰키나 테오파네스, 그리고. | 2018.11.18 | 2018.11.18 | 13 |
12 | 그냥 그대로의 표정으로 (잔혹동화 합작) | 2018.11.18 | 2018.11.18 | 3 |
11 | 책합작- 천일야화 | 2018.11.18 | 2018.11.18 | 6 |
10 | 열쇠 | 2018.11.18 | 2018.11.18 | 5 |
9 | 무지를 벗어나는 일은 | 2018.11.18 | 2018.11.18 | 3 |
8 | 꿈을 꾸었다 | 2018.11.18 | 2018.11.18 | 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