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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reative

한 걸음

admin 2018.11.18 21:17 read.9

 

 

 
야나기 켄은 적당하게 거리를 두고 소파에 길게 몸을 늘어뜨렸다. 덕지덕지 달라붙은 느른함이 배부른 맹수를 연상케 만든다. 반쯤 감긴 눈이 만드는 느긋함, 잠과 현실의 경계에 애매하게 걸친 의식. 평소보다 배는 느릿하게 흘러가는 생각이 어지럽게 얽힌다. 무엇도 먹지 않으려고 굴어서 결국 식사로 쓸 수 있을 만한 안주와 술을 가져다 준 사람의 등을 멍하니 응시한다. 생각, 생각, 단어들이 서서히 몰려들어 뭉친다.
 
그러고 보면, 사람은 어떻게 책임져야 하는 걸까.’
 
사람을 주워오는 일은 동물을 주워오는 일에 비해서 배는 당황스럽다. 먹고, 입히고, 살 곳을 제공하고, 건강을 책임지는 것만으로 해결되지 않는 일들이 너무 많다. 살던 곳에 돌려보내서 혼자 살 수 있도록 만드는 걸로 사람이 행복해지진 않는다. 행복, 행복. 그러게 말이야. 켄은 그 사람이 알아듣지 못할 한국어를 느릿하게 읊으며 몸을 돌렸다. 천장의 불빛이 눈을 아프게 찌른다. 팔을 올려 눈을 가린다.
 
내 행복도 모르는데, 저 사람을 책임져도 되는 걸까? 내가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나?’
 
켄은 상처가 이미 짓물러서 덤덤하던 목소리를 떠올린다. 바로 어제의 일이다. 주워온지 한참 지났는데 이름도 묻지 않았다는 사실을 떠올리고, 이름을 물어보려고 하다가 들어버린 이야기. 들어도 되는 이야기인지 판단하기 전에, 켄에게서 환멸과 경멸을 뜯어내기 위해서 공격적으로 내뱉은 말들.
 
요시와라라고 했지? 오이란. 오이란이면 최고 유녀였지. 많이, 비참한 삶이었을까? 잠도 잘 못자던데. 아니, 남의 인생을 내가 재단하는 건 웃긴 일이지.’
 
감은 눈. 켄은 밀려드는 어둠 속에서 오늘 낮에 급히 알아 낸 사실들을 차분하게 나열했다. 요시와라. 그 말을 꺼낸 순간 어색해진 분위기를 기억한다. 이치노세 가쿠나 무카이 카즈키가 을러준 말은 분명 상냥한 배려로 가려진 부분이 있음에도 야나기 켄을 난도질했다. ‘이쿠사토라는 이름으로 그 사람이 살아야 했던 삶은 처참했다. 도망칠 수 없는 세계, 돈으로 사람을 거래하고, 지옥을 화장으로 가린 채 웃는다. 어렴풋이 기생과 비슷한가? 하고 생각했던 일에 죄책감이 치솟을 정도로 지옥 같은 이야기. 이치노세 가쿠가 추천해 준 고전에, 이쿠사토가 덤덤하게 내뱉던 말이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적혀 있었다.
꽃의 거리는, 지상의 지옥이야.
그 불행이 그저 가련한 피해자를 표현하기 위해서, 불행을 아름답게 포장하기 위하여 사용된 언어임에 분노했다. 켄은 제 분노가 정당하다는 사실에 한 치의 의심도 가지지 않는다. 그러나, 눈앞에 존재하는 이쿠사토에게, 어떻게 대해야 할까? 분노를 표현하는 건 기만이다. 당신의 아픔이 그랬겠지 재단하는 건 동정보다 못하다.
 
모르겠어.’
 
야나기 켄은 결국 평소랑 똑같은 태도를 고수했다. 제 판단에 의문을 품는 일이 처음임에도 불구하고, 답을 찾을 수 없었다.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소파의 등받이를 향해 몸을 웅크린다. 머릿속이 복잡하다.
 
드문 일이네.”
……?”
만난지 얼마 안 된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것도 좀 그렇지만, 당신, 평소랑 조금 다른 분위기 아니야?”
그런, 가요. 저는 잘 모르겠지만.”
 
이쿠사토가 말을 건 순간, 켄은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처음, 처음이다. 쓰러진 그를 주워 온 그 날 이후로, 처음으로 그가 켄에게 말을 걸었다. 감흥에 젖기도 전에 그의 단어가 켄을 옭아 맨다.
 
그렇게 티가 났나?’
 
입꼬리만 비틀어 올린, 눈이 웃지 않는 웃음. 이쿠사토는 조소했다. 그를 주워 온 사람은, 멍청했다. 언제나 그의 눈치를 보고, 조금이라도 마음이 상했을까 전전긍긍하고, 날카롭게 가시를 세운 등을 맨손으로 내리 누르며 가시가 꺾여 아파할까 걱정했다. 조소와 조롱 앞에서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이쿠사토의 말을 온전히 들어주기 위해서 노력했다. 우습고, 이용하기 좋은 사람이다.
 
당신, 뭔가 고민이라도 있지 않아?”
딱히…… 고민이라고 할만한 일은 없어요.”
나에 대한 일이라면, 신경쓰지 않아도 괜찮아. 이미 익숙해 진 일이니까 말이야.”
 
이쿠사토는 울컥, 치솟는 말을 집어 삼키는 켄의 얼굴을 바라본다. 저 사람은 저랬다. 돈을 주고 살 수 있는 사람의 감정에 공감하고, 억울해하고, 그의 일로 눈물을 흘린다. 이쿠사토는 그의 말을 듣고 어설프게 내뱉던 켄의 말을 기억한다.
 
당신의 손님과 제가 다른 점이 없을지도 몰라요. 돈으로 당신을 묶어 둔다는 점에서 똑같겠죠. 그래도, 그래도 말이에요. 이쿠사토씨, 절 이용해주세요. 책임지게 해 주세요. 당신이 절 이용하고 도망 칠 생각이라면, 운용 가능한 자금을 준비 해 줄테니까, 이 세계에 익숙해지는데 절 이용해 주세요 였던가. 바보같은 이야기지.’
 
이쿠사토는 유녀에게 홀려 집안 기둥이라도 뽑아 바칠 것처럼 구는 도련님을 질리도록 보아왔다. 그를 유곽에서 빼내 줄 양 굴었던 사람은 셀 수 없을 만큼 많았다. 결국 모두 똑같은 사람들이다. 그에게 돈을 투자하고, 그만큼 그가 보답하길 바란다. 웃음으로, 거리를 좁히는 일로, 상처를 보듬는 척하며 착한 사람이 된 기분을 즐기고 싶을 뿐이다. 이쿠사토는 그런 사람을 너무 많이 만나왔다. 결국 켄도 똑같은 부류의 인간일 뿐이다. 그가 가시를 세우고, 밀어내면 그대로 짜증내며 도망갈 사람. 대안이 없기 때문에 이용할 따름인, 멍청이. 조금 비웃었다고 울상을 지으며 얼굴을 일그러뜨릴 뿐인 화초.
켄은 한참 말을 골랐다. 아프지 않은 건 아닌걸요?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말아주세요? 무슨 말을 해도 흔하다. 흔하고, 결말이 똑같은 이야기의 대사들. 무엇을 내뱉어도 마음에 차지 않는다. 나는 당신을 책임지고 싶은데, 행복하게 해 주고 싶은데. 켄은 그런 말을 한 사람도 넘쳐났을지 모른다는 사실을 깨닫고, 구겨진 얼굴을 억지로 편다. 그의 앞에서 울어서 바뀔 일은 없다.
 
……그럴 수 없으니까 사람인걸요.”
 
켄은 웃는다. 내리누른 감정이 켄의 몸을 공격한다. 약한 그릇은 쉽게 삐걱거리고, 어지럽게 울리는 이명과 함께 시야가 흐려진다. 흐릿한 시야속에서 붉은 형체를 눈으로 좇으며, 멀어지는 의식을 붙잡고 생각을 이어간다.
 
내일은 죽 말고 다른 걸 끓여볼까. 숭늉이나 누룽지라면 먹을지도 모르고. 달콤한 걸 좋아했으니까, 디저트를 잔뜩 사 오면 먹을지도 몰라. 뭔가, 주기적으로 먹을 수 있다면 좋은, …….’
 
얇게 늘어난 의식은 끊어진다. 켄의 몸은 실이 끊어진 인형처럼 늘어지고, 이쿠사토는 어느샌가 익숙해져버린 광경을 지켜본다. 방금처럼 감정이 격해지면 켄은 쉽게 의식을 잃는다. 귀찮은 상황을 길게 끌지 않아도 되는건 마음에 들었지만, 오늘따라 마음에 들지 않는다.
 
어쩔 수 없네.”
 
결국 이쿠사토는 소파 위로 늘어진 켄의 몸을 안아올린다. 2층 계단은 조용히 두 사람의 몸을 지탱하고, 잘 관리 된 문은 소리 없이 열린다. 두 사람이 누워도 자리가 남는 침대의 매트리스가, 평소보다 깊게 가라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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