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건실에서 그 이야기를 하게 된건, 정말 별 것 아닌 소재에서 시작했다. 그러니까, 아마 취미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나온 주제였던가? 야나기 켄은 이런 주제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일을 퍽 즐겼고, 와카사 이쿠토의 취미는 술 이외에는 마땅히 없었다. 본인의 이야기를 즐기지 않는 사람이니 자연스레 이야기의 주도권은 야나기 켄에게 넘어갔고, 황홀에 젖은 소녀는 강하게 타오르는 눈으로, 초점을 잡지 않고 먼 곳을 바라보았다.
“그래도 저는 글이 좋아요. 오직 저만 볼 수 있는 꿈을 위해서 모든 걸 거는거예요. 당장 쓰지 않으면 사라질 것 같은 세계가 날 짓눌러서, 쓰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는 순간이 온전한 환희로 물드는 그 순간.”
야나기 켄은 황홀에 몸을 떨며 잘게 웃는다. 백금색의 눈이 번들거리고, 광기에 물들어, 사람의 시선을 사로잡아 놓아주지 않는다.
“저는 그 순간을 미친 듯이 사랑해요. 살아간다는 일이 온전히 환희가 되는 그 감각을, 상상할 수 있어요?”
큭큭거리는 웃음에, 와카사 이쿠토는 홀린듯한 기분이 되었다. 홀린 듯이, 입을 연다. 평소와 다름 없는, 다름 없게 느껴지는 목소리가 허공에 희미한 울림을 남긴다.
“그럴까나…… 그러면 켄쨩이 쓴 글, 보여줄래?”
“에, 왜 이야기가 그렇게 되나요?”
“싫은…… 걸까?”
“별로 그런 건 아니지만, 알아 볼 수 없을텐데요.”
저, 한국어로 쓰고 있으니까요. 하고 덧붙이는 말에 와카사 이쿠토는 문득 깨달았다는 얼굴을 한다. 야나기 켄이 구사하는 일본어는 자연스럽고, 그녀 본인도 본국의 이야기를 즐기지 않으니, 이렇게 때때로 켄의 국적을 까먹고는 한다.
“그건 유감……일지도.”
“정 읽고 싶으시면 번역 할 수는 있어요. 아, 그래. 퇴고를 제대로 안 하긴 하지만 연재 중인 소설도 있고요. 그건 한국어랑 일본어 같이 쓰고 있거든요.”
라며 뒤적거리더니 메일로 사이트의 링크 하나가 날아온다. 언뜻 훑어 보았더니 그도 한 두 번 정도는 들어 간 적이 있다. 뭐, 그의 경우는 소설에 관심이 있다기 보다는 적당한 대화주제를 위해서 두어 번 들여다 보았다 뿐이었지만. 그러나 곁눈질로 봐도 상당한 호평이다. 그러니까, 제목이…….
그 소설은, 우습게도 그가 알고 있는 것이었다.
“사이트 가입을 해야 볼 수 있을텐데……, 뭐, 귀찮아지면 메일 해 주세요. 파일, 보내드릴테니까.”
“괜찮아. 이 사이트라면 가입 되어있고…… 다른 사람들의 평을 보는 것도 즐겁고…… 말이야.”
“에, 와카센도 이런 사이트에서 글을 읽습니까? 뭔가 의외네요.”
“가끔은…… 말이지. 좋은 대화 주제가 되잖아?”
“뭔가, 역시 와카센.”
그거, 여자 꼬실 때 쓴다는 뜻 아냐? 하고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들려 그는 작게 웃음을 흘렸다. 틀린 말은 아니었으니까. 그가 켄쨩의 소설을 알고 있는 것도 가끔 어울려 놀던 여자가 정말 좋다며 권해주었을 때 보았던 제목을 기억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건 그렇다고 해도, 설마 ‘그’ 야나기 켄이 소설까지 쓸 줄이야. 늘 수면 부족에 지쳐 보이던 얼굴의 일면을 엿 본 기분이 되었다. 분명 ‘나기사’라는 가수도 본인이라고 했지. 주주 총회라며 학교를 빠지는 일도 잦고. 와카사 이쿠토는 묘한 기분으로 야나기 켄을 바라보았다.
“켄쨩은 성실하네……? 정말로.”
“별로? 그렇게 성실하지는 않아요. 기본 적으로 좋아하는 것만 즐겨 하는 편이고.”
“좋아하는 것을 꾸준히 하는 것도 성실함의 일종인걸?”
“그런가……. 와 닿지는 않는 이야기네요.”
시답잖은 잡담을 하는 동안 금새 점심시간의 끝을 알리는 종이 울렸고, 켄쨩은 으악, 다음 시간 수학이야. 같은 말을 남기며 다급하게 뛰어나갔다. 부활동도 시작하지 않아 찾아오는 사람이 적은 보건실, 와카사 이쿠토는 문득 소설의 프롤로그를 눌렀다. 방과 후, 혹은 저녁을 먹을 때, 적당히 대화거리롤 삼을 생각이었다. 분명, 시작은 그랬다.
연재된 분량만 세 자리수를 헤아리는 분량이 기대감이 되는 건 오래 걸리지 않았다.
오후 수업을 모두 마치는 종이 치고나서, 와카사 이쿠토가 정신을 차렸을 즈음에는 이미 해가 지고 있었다. 일이 남았는데, 하는 불평이 고개를 들기도 전에 아쉬움이 치밀었다. 페이지를 넘기는게 아까워지는 책이 얼마만이지? 그는 진실로 글에, 켄이 그려내는 세계에 빠져들었다. 상황의 묘사가 많지 않음에도 눈 앞에 그려지는 야나기 켄의 세계가, 따라가기 벅찬 속도로 그를 붙잡고 흔들었다.
환희, 환희라고 했지.
와카사 이쿠토는 야나기 켄의 말을 이해했다. 텍스트의 나열 속에서 흘러 넘치는 감정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무언가’가 선명하게 읽혔다.
감상을 방해한 건 가벼운 노크소리였다. 대답을 듣지 않고 여는 문, 기척이 옅고 가벼운 몸짓으로 글의 주인은 얼굴을 내민다.
“와카센? 뭔가 멍해보이네요. 피곤 합니까?”
“별로……. 그렇게 보이는걸까……?”
“예. 평소랑은 달라보이네요. 제대로 쉰 겁니까?”
평소랑 다르지 않게 내미는 걱정의 말이 오직 그의 눈에 다르게 보인다. 야나기 켄이 창 밖을 향해 던지던 초점 없는 시선을 기억해낸다. 떠올리는 것만으로 벅차 큭큭거리는 웃음을 흘리던 얼굴이 걱정스러운 얼굴 위로 겹쳐진다. 와카센? 하고 부르는 목소리가 글을 낭독하던 목소리로 바뀐다.
와카사 이쿠토는 문득, 야나기 켄의 사고방식이 궁금해졌다.
2018.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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