짜증나, 이 불쾌함을, 어디 풀어내면 좋지? 목 끝까지 차오른 폭력적인 충동을 억누르기 위해서 부러 주먹을 꾹 쥐었다. 살면서 이렇게나 짜증났던 적이 있던가. 이 짜증의 이유는 무엇인지 알 수 없어 더욱 화가 치밀었다. 이유라면, 그래. 여럿 있었다. 유난히 바쁜 학생회의 일이며, 서서히 숫자를 줄여가는 수능 D-day, 도저히 적응할 수 없는 일본의 무더위며, 숨도 쉬기 어려울 만큼 목을 조여오는 더위. 그래, 이 정도라면 능히 해결 할 수 있다. 더욱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걸 해결 할 수 있다면 진즉 내가 결판을 냈지. 야나기 켄은 입술을 짓씹으며 생각했다. 아, 이걸 진짜 어떻게 해야 좋아.
18세의 첫사랑, 덥고 습한 계절 속 뜨거운 감정은 어찌 할 줄 몰라 불쾌하기만 했다.
첫사랑이라고 해서 애타고, 사랑에 눈이 멀어 당신을 보지 않고서 견딜 수 없고, 네가 아니라면 절대 안 된다고 애닳는 종류는 아니었다. 저는 꽤 담백한 사람이었고, 그 사실이 유감스러운 적도 없었다. 사랑을 자각하였다고 하여 의식적으로 태도를 바꾸지도 않았고, 겉으로 드러내지도 않았다. 아마? 이 꼴이 난 걸 보면 나만 그렇게 생각한 모양이지. 하, 호감을 숨기지 않는 버릇이 이렇게 사람을 엿먹일줄은 몰랐는데.
아니다, 날 엿먹인 건 순전히 와카사 이쿠토, 저 인간이다.
인간관계에 있어서 최고는 역시 가늘고 긴 관계다. 굵고 깊게 얽혀봤자 끊어낼 때 깊게 상처입을 뿐. 담백하고 별 일 없이 무탈한 관계를 지향하는 쪽이 피차 깔끔하게 끝낼 수 있지. 굳이 무겁고 벅찬 감정으로 서로를 얽어낼 필요가 있나? 감당할 수 없는 이야기를 하지 않고, 무거운 이야기는 다음 날 잊은 양 굴고, 서로의 역린을 건드리지 않을 정도로 거리를 유지한다. 그 정도만 해도 충분히 편한 관계를 얼마든지 이어갈 수 있다. 사람의 가장 깊은 곳까지 파고들지 않고 관계를 이어가는 법을 겨우 익혀나가고 있던 참이다. 이 사랑만 아니었더라면, 충분히 익숙해 질 수 있었는데.
저 인간이 모두 뒤흔들어 버렸다.
제 성격이 좋지 않다는 사실은 자알 알고 있다. 어차피 성격 좋다는 평가를 들어봤자 인생에 도움 될 일은 없다. 적당히 잇속을 차려가면서 나쁜 놈으로 사는 쪽이 훨씬 편한 인생을 살 수 있다. 그러니 이 성격에 대해 유감을 가졌던 적은 한 번도 없다. 앞으로도 없을 예정이었고, 이 일만 아니었다면 예정대로 순조롭게 흘러갔겠지. 그런 점에 있어서는 고맙다고 해야하나? 그래, 아주 고마워 죽겠다.
으득, 이를 갈면서 켄은 머리를 쓸어넘겼다.
사랑을 숨겨야 한다고 생각한 적은 없다. 숨길 이유가 어디 있나? 내뱉지 않고 전해지는 감정은 없다. 더군다나 나는 내가 사랑을 하고 있다는 사실도 막 알아차린 참이다. 숨기는 쪽이 무리. 아, 그러니까, 시팔! 이성적이 생각이 이어지지 않는다. 사랑이라는 게 원래 이런 감정이었나? 내가 읽고, 다루고, 쓰던 감정은 조금 더 부드럽고 상냥한 종류의,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것이었는데. 이토록 분노에 차서 이성을 흐리게 만드는 감정을 사랑이라고 부르게 될 줄은 몰랐다. 아니다. 이 분노는 사랑에서 오는 분노가 아니다. 그저 인간 대 인간의 관계에서 나오는 배신감. 손바닥 뒤집듯이 태도를 바꾸어 버린 사람에게, 우리 사이가 이 정도였어? 하고 터뜨리는 분노.
그러니까, 이 모든 잘못은 와카사 이쿠토에게 있다.
시작은 1학년의 봄이다. 실패에 대한 짜증과 중압감, 도피에 대한 자책에 눌려 제대로 사고 할 수 없던 시기. 저 인간하고 처음 관계를 맺기 시작한 건 그 때였다. 친해졌다고 해야겠지. 아니, 이걸 ‘친하다’고 할 수 있나? 그냥 조금, 미적지근한 사이가 되었다. 서로 매일 만나 이야기를 하고, 아플 때 간호하고, 사적인 자리에서 우연히 만나서 어울리는 사이가 되고, 집 열쇠를 건네주고, 술 먹고 들어오면 씻고 누우라고 짜증내고. 그래, 일본 생활에서 보내는 휴일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사람이 되었다. 이런 식으로 설명하면 꽤 친한데, 확신 할 수는 없다. 그 인간은 원래, 내 입으로 말하고 싶지 않지만, 여학생에게 무르다. 내가 ‘여자’이기 때문에 모든 행동을 받아줬을지도 모른다.
아, 이렇게 말하니까 진짜 쓰레기 같아. 거칠게 머리를 헝클었다.
어쩌겠어, 내가 좋아한 사람이 쓰레기다. 입으로 내뱉으면 헛웃음밖에 나오지 않는 말이다. 도대체 그 사랑이 뭐길래 내가 나와 타협까지 해 가며 유지하고 있지? 나는 무겁고 깊은 감정과 연이 없다. 적당히 친구도 있고, 꿈도, 돈도 가지고 있다. 결혼에는 뜻이 없고, 굳이 인생에 연인을 들여야 한다면 엔조이가 좋다. 적당히 가벼운 관계로 외로움을 채워나가면서 부평초같은 삶을 살고 싶었다. 이렇게 애닳아 절규하는게 아니라. 그러니까, 이 모든 말들은,
허울 좋은 변명이다.
젠장! 애꿎은 벽을 걷어차면서 짜증스럽게 소리친다. 아무도 없는 여름 낮의 땡볕 아래, 내 목소리만 복도에 가득 울린다.
나는 호감을 숨기지 않는다. 한 번 친구를 다 잃을 뻔 한 적도 있고, 오해 받기도 싫어서 생각을 그대로 입으로 내는 버릇이 있다. 뭐, 그렇다고 고백으로 착각할 말을 입 밖으로 내는 수준은 아니다. 그럭저럭 무난하게 이렇게 보내는 시간은 기분 좋다, 다음에도 같이 나오자, 나는 당신을 꽤 좋아한다. 같은 말을 무난하게 하는 정도. 내 의도와 속내를 짐작할 수 있게 만드는 말을 하는 버릇이지. 그리고, 와카사 이쿠토 그 인간은, 여자라면 이골이 난 사람이지.
하, 이렇게 말하니까 웃겨 죽겠다. 내가 어쩌자고 그 인간을 좋아하고 있지? 나는 사랑을 한다면 나만 바라볼 수 있는, 순진한 사람이 좋았다. 서로 풋풋하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사람. 정작 내 첫사랑은 어떤가. 고백 이후 눈물을 흩뿌리며 보건실에서 뛰어 나가는 사람을 얼마나 많이 보았던가. 고백을 거절하던 그 허울 좋은 말들과, 내게 늘어놓던 이유 모를 변명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다. 고등학생은 연애대상으로 보지 않는다, 어차피 졸업하면 잊을 감정이다, 어른에 대한 동경과 사랑을 헷갈린 것이다. 뭐, 처음에는 나도 그런 줄 알았지. 저렇게 절절한 감정을 겪어 본 적이 없어서 그런갑다 하고 넘겼다.
직접 사랑을 하는 입장에서 코멘트를 남기자면, 아주 멋들어진 개소리다. 아, 딱히 거절에 대한 평가는 아니다. 저 인간은 선생이고, 당연한 반응이지. 내가 짜증내는 부분은 다른 지점이다. 지가 뭐라고 내 감정을 단정짓고 앉아 있나? 설령 내가 동경을 착각했다고 하여도 그건 내가 알아차려야 할 문제이다. 남 입에서 그건 동경이야, 할 게 아니라 시간이 지나 졸업 이후에 사랑을 정리하고 아마 그건 동경이었어. 하고 말해야한다. 고백 거절의 핑계로 쓰이기에 첫사랑의 나이는 너무 애달픈 소재지. 차라리 내가 연애 대상에 들어가지 않는다고 간단하게 이야기 해 주는 쪽이─
시팔, 나는 또 왜 고백하는 걸 전재로 생각하고 있는거야.
짜증나, 짜증나, 마음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어! 갈 곳을 잃고 헤매는 분노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이대로 무언가 때려 부수면 좀 나아질까? 일단 진정, 진정하자. 아직 학교다. 창문에 기대 서서 눈을 감는다. 이런 날은 꼭 사고를 쳤다. 여름의 습기는 사람의 성질은 다 뒤집어놓고, 나는 지금 인간의 꼴이 아니다. 컨디션도 나쁘고, 잠도 며칠이나 제대로 안 잤고, 도시락도 걸렀고, 인내심이 바닥나기에 충분한 조건이다. 평생의 흑역사를 오늘 만들면 안 된다. 아, 시팔, 확 멱살 잡고 고백이라도 해버려? 가능성 없는 이야기를 떠올리고 큭큭거렸다. 차라리 고백을 할 수 있었다면 좀 나았을까?
멍하니 창 밖을 내다보고 있으면, 눈이 아플 정도로 강렬한 색채가 펼쳐져 있다. 저토록 생명력 넘치는 여름인데, 어찌 짜증 밖에 나지 않는지. 느릿한 발소리가 제 앞에서 멈춘다. 의아함에 고개를 들면, 짜증의 근원이 눈 앞에 예쁘게 서 있다.
이게 지금 무슨 상황이지? 그러니까, 지금 눈이 마주쳤고, 저 인간이 날 내려다보고 있는데, 젠장, 왜 저렇게 예뻐?
“좋은 낮, 켄쨩.”
“……좋은 낮입니다.”
한 템포 늦게 대답이 나가버린다. 귀에 꽂히는 목소리가 듣기 좋다고 생각하는 나도 중증이지. 늘어져 있던 자세를 수습하려다, 누구 좋으라고 이러나 싶어 다시 몸을 늘어뜨린다. 한 낮의 햇볕이 따갑게 눈을 찌른다.
“켄쨩은, 휴식 중……일까나?”
“예, 뭐 그렇죠. 오늘도 점심을 까먹어서. 와카사 선생님은 드셨습니까? 점심.”
“딱히……? 오늘도 그다지 배고프지 않고, 나는 그렇게 많이 움직이지 않으니까 별로 먹지 않아도 괜찮다고 생각하는데.”
“그래도 웬만하면 챙겨주세요. 안 되면 또 저번처럼 가져다가 먹이겠습니다.”
그리고 3초의 침묵. 눈을 감는다. 어차피 눈 앞에 여학생이 보이니까 말을 건다는 감각으로 다가온 사람이다. 적당히 보인다는 이유로 말을 걸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일이 있다고 가 버리는, 그런 심심풀이. 그런 말에 기분이 좋아지는 나도 짜증나지만, 사람을 심심풀이 취급하는 저 인간도 짜증난다. 최소한 한 순간 만이라도 최선을 다해서 진심일 수 없는 건가?
“켄쨩은 어딜 가는 중일까……?”
“딱히 정해 둔 목적지는 없어요. 대충 옥상에라도 갈 생각입니다.”
“그런가……. 중간까지 같이, 라고 말 하고 싶지만 나는 교무실에 용무가 있어서.”
“그러십니까.”
반대 방향이네, 하는 말에 괜히 이를 악문다. 등을 돌려 걸어가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아서 눈을 꾹 감는다. 입술 밖으로 튀어 나가려고 발악하는 말을 이로 눌러 찢는다. 내가 멍청이인줄 아나. 발소리가 들리던 방향이 교무실이었는데. 사람이 오는 방향을 모를만큼 멍하게 있지는 않았다. 왔던 길로 돌아간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대충 넘겨버린다. 짜증나, 짜증난다. 이 상황이, 저 태도가, 알면서도 대처하지 않고 넘어가는 내가 짜증난다. 이를 갈면서도, 이 걷잡을 수 없는 짜증에 괴로워하면서도, 저 얼굴을 보면 예쁘다며 기분이 좋아지는 내가 싫다.
사랑에 빠지면 원래 다 멍청이가 되는건가?
시간은 빠르게 흐르고, 속에서 휘몰아치는 마음은 격해질 따름이다. 상황을 곱씹고 떠올리며 이해하려고 굴수록 심해져서, 이제 얼굴에 드러나는 걸 숨기지도 못하겠다. 결국 가쿠 선생님은 무슨 일이 있냐며 걱정을 표했고, 타카무라 선생님은 보건실에 가서 쉬다 오지 않겠냐고 말하기까지 했다. 물론 최대한 성질을 죽여서 거절했다. 컨디션 수습하러 보건실에 갔다가는 혈압으로 쓰러진다. 그 예쁜 얼굴로 능글거리는 꼴을 보고 있다가는 응급실에 실려가서 내일 결석하게 될걸. 신경질적인 생각을 억누르며 억지로 책에 집중한다. 조금, 조금 남았다.
이를 악물고 견딘 보람은 빠르게 찾아왔다. 수업 종료를 알리는 벨이 울리고, 사방에서 소란스럽게 귀가 준비를 시작한다. 나도, 나도 돌아가야지. 빨리 집에 가서 에어컨을 틀고 누워서, 마음을 가라앉히자. 이대로 학교에 남아있고 싶지 않다. 버릇처럼 보건실에 들어가서는, 이야기하고 싶어질게 뻔해.
왜 내 사랑은 이렇게 비참하기만 하지?
도를 넘은 짜증은 서러움이 된다. 도대체 내가 뭘 잘못했지? 그래, 사실 처음부터 잘못이었다. 그냥 지나칠 수 없다는 이유로 호의를 베풀었고, 그 사람과 대화하는게 즐겁다는 이유로 쎄함을 무시했다. 때때로 보이는 결핍의 편린을 무시하지 못했고, 결국 착각해버렸다. 가볍게 던지는 말에 진심이라는 단서를 붙이는 저 인간의 농을 흘려 넘기지 못했다. 젠장, 내가 저 사람을 편하게 생각한 건 서로 가벼운 말을 할 수 있어서였다. 깃털같은 말로 간질이며, 웃어 넘길 수 있어서 그랬다. 와카사 이쿠토가 말을 넘겨버리기에, 나도 넘길 수 있을 줄 알았다. 나는 내가 할 수 있을 줄 알았어.
깃털 같은 말들이 내 숨통을 틀어막을만큼 쌓일 줄 알았다면, 어울리지 않았을텐데.
이제와서 떠올리기에는 늦어버린 말이다. 사랑을 후회하지 않는다. 언젠가 이 경험을 글로 쓸 수 있다면 그걸로 좋다. 하지만, 하지만 말이야. 아까부터 입이 닳도록 말하고 있지만, 이토록 비참한 사랑은 하고 싶지 않다. 내가 사랑한 게 죄인양 매달리고 싶지는 않았다. 그냥, 졸업할 때 까지 저 얼굴을 보면서, 가볍게 특별한 느낌을 주는 관계나 즐기고 싶었는데.
시팔, 이런 식으로 휘둘리고 싶지 않았다고.
건물의 2층, 부정할 수 없을만큼 확실하게 눈이 마주친 순간, 모른척 시침을 떼며 시선을 돌려버리는 옆 얼굴. 그 얼굴마저 예쁘다고 생각하는 자신을 자각한 순간, 내 안의 무언가가 뚝 소리를 내며 끊어졌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달리고 있었다.
계단을 뛰어 올라가는 동안 누군가 내 이름을 부르는 느낌이 들었다. 복도에서는 달리지 말라고 소리치는 소리도 들렸다. 아, 몰라. 될대로 되라고 해. 이런 취급을 당하고 호구같이 앉아 있을 수는 없다. 그래, 이건 분명 여름의 짜증이다. 이대로 뛰어가도 딱히 할 말은 없다. 분명히 후회하고야 만다. 그런 생각이 머리를 가득 채우지만, 이미 달리기 시작한 몸을 멈출 수는 없다.
쾅! 답지 않게 큰 소리를 내며 열리는 문. 거의 발로 차듯이 열어제낀 문 너머로 당당하게 들어섰다.
늘상 여학생이 앉아 있던 자리는 참 답지 않으시게도 비어있다. 아무도 없네? 왠일이래, 어장에 한 마리 넣으셨으니까 다른 물고기 채워넣으셔야지. 빈정거리는 말이 입술 끝에 매달린다. 아니, 상처주려고 발악하는 말이 튀어나온다. 내뱉어도 나 혼자 비참해질 단어들이다. 이러려고 온 게 아니야. 최소한, 침착하게, 적당히. 이 짜증을 수습할 정도로만 이야기하자. 제발, 제발.
이야기는 들어줘야 할 거 아니야.
“와카사 선생님, 혹시 바쁘십니까?”
“켄쨩……? 뭘까, 그렇게나 급하게. 혹시 어딘가 상처라도 입었어……?”
“그런 건 아닙니다만, 바쁘지 않으시다면 이야기를 들어주셨으면 합니다.”
진정, 진정. 억지로 숨을 몰아쉰다. 당장이라도 터져나오고 싶어서 발악하는 짜증을 발로 꾹꾹 밟는다. 왜 나를 버렸냐고 짜증내는건 추하다. 그냥, 이걸로 정리하려고 온 거야. 고백하려고 온 게 아니라. 짝사랑 상대가 아니라 조금이라도 친했다고 생각한 사람에게 왜 피하냐고 짜증내려고 온거야. 젠장, 이미 여기서 구질구질하지만. 최소한,
“으응, 오늘은 조금……이랄까? 급한 일이 아니라면 내일─”
“내일 언제 말입니까? 저도 내일은 바쁠 예정이니까 지금 시간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들어주셨으면 합니다만.”
“확실히 조금 정도라면 시간이 있지만…….”
“그러면 잠깐만 이야기 해 주세요. 길지 않은 이야기입니다.”
이야기는 해 줘.
눈을 피하고 시선을 돌리는 모습이 확실하게 보인다. 내게 더 이상 관심이 없다거나,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하는 모습이 확실하게 보인다. 젠장, 도대체 뭐가 문제였을까? 내가 뭘 잘못했을까. 사랑을 한 죄? 방정맞게 사랑을 숨기지 않은 죄? 어째서 저 인간은 마치 사랑이 죄라도 되는 양 구는가. 내게 그런 식으로 대하는 저 인간이 문제 아냐? 나는, 나는, 최소한 평소랑 다르지 않게 행동하려고 노력했고, 그 노력을 존중은 해 줘야 하지 않아?
이를 갈며 말을 고른다. 진정, 진정. 지금 소리친다고 무언가 바뀌지 않는다. 최소한, 왜 피하냐고 돌려서 물어봐야지. 이유를 대답하지 않아도 괜찮다. 나는 평소와 다르지 않다고 이야기해야 한다. 그러니까, 최소한, 우스워보이지 않을 단어는 뭐가 있을까?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것 같습니까? 하면 너무 직설적이다. 관계를 망가뜨리지 않을 가벼운 말은─
“역시 켄쨩, 시간이 없어서 그러지만 내일 이야기를 하는 쪽이─”
입을 떼어 말을 시작하려는 타이밍을 맞춰 말을 끊는 모습에, 시선이 마주치지 않도록 눈을 돌리는 모습에, 무심코 말이 튀어나갔다.
“제가 우스워 보입니까?”
내가, 멍청해 보인걸까?
“그런건 아니지만, 지금 켄쨩이 너무 흥분한 것 같─”
“제가 왜 이런지는 아십니까?”
“켄쨩, 일단은─”
“사람이 말을 하면 좀 들어요! 피할 생각 하지 말고!”
밀어내려고, 쫓아내려고 다가오는 것이 스위치를 눌렀는지, 나를 정상 취급하지 않는 말이 스위치를 눌렀는지 알 수 없다. 나를 보지 않는 그 눈이 짜증나서 미칠 것 같고, 상황을 모면하려는 말이 미치도록 싫었다. 저 인간이 타인에게 무게를 두지 않는다는 사실이, 누군가의 사랑을 가볍게 웃음거리처럼 곤란한 일로 넘겨버린다는 사실이 짜증나 죽을 것 같았다. 이리저리 방황하는 시선은 말로는 고정되지 않는다. 날 보라고 넥타이를 잡아 당겨 강제로 얼굴을 가까이 들이댔을 때부터, 억지로 눌러뒀던 말은 정신없이 쏟아져내렸다.
“제가 우스워 보입니까? 다 잡은 물고기에는 떡밥을 주지 않는 주의입니까? 아니면, 도대체 뭡니까. 대놓고 피하고 있지 않아요? 제가 그 정도도 알아차리지 못할만큼 눈치 없어 보였습니까?”
눈 앞의 얼굴이 흐릿해졌다가 제대로 돌아오기를 반복한다. 씨근덕거리는 자신이 부끄럽고, 이렇게까지 매달리는 내가 구차하고, 지금, 이 사랑을 하고 있는 내가 한심하지만, 말하지 않으면 내내 품고 짜증낼 텐데. 온갖 생각이 뒤엉켜서 코가 시큰하다. 당장이라도 울 것 같은 제가 싫어서, 분노가 머리 끝까지 차올라서 할 말과 못할 말이 가려지지 않는다. 한심해, 우스워, 어째서 이렇게까지 하고 있지? 이대로 사라지고 싶다, 도망치고 싶다, 이 인간이 내 말을 들어줬으면 좋겠어.
“제발, 그렇게 다 잡은 물고기 대하듯이 대하지 마세요! 제가 선생님을 좋아한다고 해서, 언제 그런 말을 했습니까? 누가 나하고 사귀어 달라고 했습니까? 좋아하는 건 나 혼자 알아서 감정을 잡고 정리하든 졸업 할 때 까지 안고가든 할 테니까 그렇게 굴지 마세요. 눈에 띄게 피하고, 마치 내가 좋아서 매달리는 듯이 굴지 말아주세요! 나는 평소처럼 굴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러면 최소한 당신도, 평소처럼 굴려고 노력이라도 해 줘야 하는 거 아닙니까? 좋아하게 만들었잖아, 하지 말라고 해도 몇 번이나 그런 말을 쏟아냈잖아요. 깊은 의미가 없는 말들이라는 걸 알아도 그런 표정으로 그런 말을 일 년이나 들으면 좋아하게 된다고요!”
놀란 표정이 우스워서, 이딴 말을 내뱉는 내가 구차해서 흘러나오는 말을 막지 않았다. 이 쯤에서 그만둬야 하는데, 관계를 끊을 생각이 아니라면 여기서 수습해야 하는데, 말이 끊기지 않는다.
“뭘 놀란 얼굴입니까? 알고 있는 것 아니었습니까? 예, 좋아합니다, 당신이라는 사람을 좋아합니다. 정말로, 정말로 좋아해요! 사귀어 달라는 소리 아닙니다. 최소한 밀어내지 말라는 소리도 아닙니다. 불편하라고 말하는겁니다. 나 혼자 의식하고 불편해 하는 꼴은 우습잖아요?”
침묵, 침묵, 씨근덕거리는 소리가 보건실에 홀로 울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을 때, 던지듯이 그의 멱살을 놓았다.
“됐습니다, 이런 말을 해서 죄송합니다. 알아서 정리 할 테니까, 최소한 제가 정리할 때 까지는 불편해 주세요.”
이런 구질구질한 말을 남기고 보건실을 뛰어 나오는 내가 우스워서, 눈물이 흘렀다. 울고 싶지 않은데, 울어봤자 내가 한심하기만 한데, 격해진 감정이 눈물 말고는 다른 방식으로 터지지 않았는다. 서럽다, 우습고, 서러워서 어쩔 수 없다. 누군가 날 볼지도 모르는데, 변명할 말도 없는데, 하염없이 눈물이 흐르기만 해서.
앞을 보지 않고 달리다가 누군가의 품에 부딪혔을 때, 그 사람이 누군지도 모르고, 그저 나를 위로하고 있다는 사실에 휘말려서 와앙 하고 울어버렸다. 어쩔 줄 몰라 하는 목소리에 기대서 있는 힘껏 눈물을 터뜨렸다.
첫사랑이 이딴 식으로 날 한심하고 볼품없게 만든다면, 차라리 끝내고 싶었다.
2018.0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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