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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스타] 레이 진단메이커

admin 2018.11.18 21:09 read.13

 

  그에 대한 기억은 다 그곳에서 시작한다. 어둠이 내리는 노을진 복도. 그에게 있어 아침이나 새벽쯤 될 시간. 나는 슬슬 돌아가야할까 고민하거나 오늘은 잠을 포기할까 따위의 생각을 하면서 그 복도를 걸어 경음부의 부실 앞에 도착한다. 여전히 정적과 어둠에 감싸여 있는 곳. 방 안에는 어두운 색의 관이 놓여있고, 그 안에는 흡혈귀라 불리는 사람이 잠들어 있겠지. 그녀는 쉽게 제가 볼 풍경을 예상했다. 
  고의는 아니었다. 맹세컨대 고의는 아니었다. 제가 문을 열다가 발이 걸린 일도, 우연찮게 그가 관에 누워있지 않았던 일도 다 내 고의일 수 없지 않은가. 나는 분명 넘어질거라고 생각했다. 얼굴을 부딪혀서 다치면 안될텐데, 따위의 태평한 생각이나 하고 있었다. 허나 바닥에 부딪히지는 않는다.
  로맨틱하게 품에 안기거나 하는 사고는 일어나지 않았다. 그랬다면 나는 이미 이 자리를 떴겠지. 그냥 넘어가는 몸의 팔을 잡아챈 사람이 사쿠마 레이고, 덕에 저는 바닥에 넘어지는 불상사를 면했다. 팔에 닿은 손의 온도가 생각보다는 높았다. 흡혈귀라고 해서 얼음장같은 손을 상상했는데. 
 
  "아가씨는 팔이 이렇게 가늘어서 생활은 할 수 있는건지 모르겠구먼. 좀 더 먹는게 좋을 것 같네."
  "아, 식욕이 없어서요."
 
  배고프지도 않고, 이제 무언가를 먹는다는 행위에서 찾을 의미도 없다. 딱히 맛을 느끼는데 집착하지도 않으니까. 애초에 음식은 죽지 않을 정도로만 먹어도 괜찮다고 생각하고 있다. 영양분 공급의 의미 이상을 찾지 못했는데, 굳이 내가 그 이상의 수고를 들여가며 끼니를 챙길 이유가 있나?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니 그가 가볍게 한 팔로 저를 일으켰다. 제대로 중심을 잡고나서는 그에게서 멀어졌다. 내가 그렇게 가벼웠던가. 
  붉은 색의 눈을 잠시 마주하고 시선을 돌렸다. 생각보다 손이 따뜻하다. 강하게 잡혔던 팔을 살짝 훑어내리니 온기가 맴돈다. 늘 느끼지만 저 체구에서 저런 힘이 어떻게 나오는지 모르겠다. 저번에 관도 들던데. 그 안에 냉장고를 넣겠다는 말도 들었으니 관이 물리적 법칙을 무시하거나, 아니면 그가 무시하거나 둘 중 하나다. 아마 후자일 가능성이 더 높지만. 
 
  가방에서 토마토 주스를 꺼내서 그에게 한 병 넘겼다. 그는 자주 토마토 주스를 마시고는 했다. 흡혈귀라고 말은 하지만 피의 쇠맛은 싫어한다며 토마토 주스를 마시는 모습을 보자면 영락없이 그냥 조금 이상한 인간이었다. 뭐, 햇볕 아래서 쓰러지는 모습을 보았으니 완전히 흡혈귀가 아니라고 생각하기도 어렵지만. 
  주스를 마시는 그의 모습이 의외로 퇴폐적이었다. 저게 토마토주스라는 사실을 몰랐으면 정말 흡혈귀라고 해도 믿지 않았을까- 같은 생각을 했다. 붉은 액체와 지독히도 잘 어울리는 눈동자. 암막커튼으로 가려진 부실과, 그 안의 당신.
  어둠이 내리는 시간은 짧고, 완전히 햇빛이 사라져버리면 나는 커텐을 걷는다. 자연적이지 못한 어둠을 걷어내는 손가락, 내리쬐는 달빛. 은색의 차가운 빛 아래 열려있는 관. 정말 시체가 살아 움직일지도 몰라. 문득 목덜미를 스치는 바람이 느껴졌다. 이대로 물려도 별 상관없을텐데. 
 
  "그럼, 저는 갈게요. 오늘은 일이 있어서."
 
  주스 병을 챙겨서 일어섰다. 실로 기묘한 밤. 
 
  "아. 사쿠마씨 손, 생각보다 따뜻했어요."
 
  붉은 눈이 크게 뜨이고, 놀라움으로 가득 찬다. 그 모습을 바라보고 발길을 돌렸다. 닫히는 문 사이로 무어라 중얼거리는 소리. 아무도 없는 복도에서 울리는 발소리를 듣다보니, 그 말을 알아들을 수 있다고 느꼈다. '아가씨는 이 몸을 흔드는구먼.' 정도로 해석할 수 있지 않을까. 
  평소처럼 일상은 기억 아래로 침잠하고, 달빛은 내리쬐고, 흡혈귀는 고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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