켄의 입을 빌리자면, 불길한 날이었다. 이상할 정도로 맑고 아름다워서, 오히려 위화감을 느끼고야 마는 날.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고, 바람은 선선하게 불어오고 있건만 온 신경이 한계에 치닫아서 아, 무슨 일이 일어날 수밖에 없구나 하고 자각하는 그런 날. 불길한 예감에 하루 종일 신경을 곤두세우다가 결국 중요한 순간에 지쳐 쓰러져 잠들고야 마는, 그런 날.
참으로 이상한 날이라고, 켄은 몇 번이고 되풀이했다. 아침부터 뜻대로 풀리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열심히 만들어 놓은 도시락은 가지고 나오는 것을 깜빡하였고, 핸드폰은 충전을 까먹었으며, 보조 배터리는 케이블이 끊어져 연결 할 수 없었다. 이런 날은 집에 일찍 가서 쉴 수 있으면 좋으련만, 쉬기는커녕 학생회의 일을 돕느라 제 일조차 할 수 없었다.
그야말로 일이 꼬이기 위해서 존재하는 날 같았다.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을 몇 번이고 올려다보며, 켄은 불길함에 짓눌렸다. 입 밖으로 말을 내는 것이 어색한 날이다. 빨리 일을 끝내고 집에 가야지. 그런 생각으로 손을 재게 놀리지만 결국 그것이 오히려 피로를 불러오고야 마는 그런, 날. 정신이 흐려지는 것을 자각하고 나서도 조금만, 조금만 더, 를 되뇌며 의식을 되찾지 못했다. 그게 당연하게 느껴지는 날이었다.
켄이 정신을 차린 것은 한참 시간이 지난 이후였다. 온 사방이 조용하고, 학교는 끝없는 침묵 속에 잠겼으며, 교실은 어둠으로 꽉 차 있었다. 기기묘묘하게 뒤틀린 느낌을 주는 주변의 풍경 속에서 고개를 들면, 하늘에 달이 떠 있다.
만월의 밤이었다.
오직 달이 하늘에서 빛나며 모든 빛을 집어 삼킨 밤. 별조차 빛나지 않아 하늘은 검게 물들고, 달 하나를 지우고 본다면 그믐과 다를 게 없는 기묘한 밤이었다. 잠이 가시지 않은 머리로 달을 홀린 듯 바라보고 있으면, 문득 진실을 깨닫는다. 아, 학교 폐문 시간이 지났으니 문이 잠겼겠네. 멍하니 창문 너머 달을 바라보던 켄은, 느릿하게 일어나 가방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연락. 연락을 해야지. 굼뜬 손길로 핸드폰을 꺼내들자 꽤 많은 부재중 연락이 쌓여있다. 누군가에게 온 연락을 확인하는 대신 몇 번이고 액정을 만지작거리던 켄은, 이내 쿠죠 키신의 연락처를 눌렀다. 이 선배라면 언제고 연락을 받으리라.
언제나 신호음이 다섯 번 울리기 전에 전화를 받던 쿠죠 키신은 신호가 가다 못해서 끊길 때 까지 전화를 받지 않았다. 기묘한 정적이 계속되는 가운데, 음성 사서함의 녹음을 알리는 삐- 소리가 귓가에서 울렸다. 켄은 아직 잠이 덜 깬 듯 한 기묘한 부유감 속에서 전화기를 가방에 밀어 넣었다. 이상한 일이다. ‘그’ 쿠죠 키신이 연락을 받지 않는다니. 아무래도, 오늘은 담을 넘어야 할 모양이다.
불 꺼진 교사는 어둠 속에서 이질감을 품었다. 늘 사람들이 어지럽게 떠들던 복도는 소란을 품고 있는데, 소란을 쥐어 줄 사람이 없으니 어색함을 견디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닫히고 어둠이 내린 교실의 창문 너머에서는 시선이 느껴지는 듯하였고, 복도는 삐걱삐걱 소리를 내었다. 그리 낡지 않은 학교임에도, 사람을 잃어버리자 이곳저곳에서 삐걱임이 느껴졌다.
다음에 이사장을 만나면 보안을 강화하라고 해야지.
켄은 그런 쓰잘데기 없는 생각들을 몇 번이고 머릿속에서 반복했다. 와슈인 사다오미는 사람의 말을 꽤 잘 들어주는 이사장이었으니, 이번에도 켄의 말을 어김없이 귀 기울여 줄 것이다. 사람이 있는 것도 모르고 문을 잠가버리는 학교라니, 최소한 교실 확인 정도는 해야 할 것이 아닌가. 입 밖으로 투덜거림을 꺼내어 놓은 켄은, 퍼뜩 입을 다물었다. 목소리가 집어삼켜지는 느낌이 들었다.
다행스럽게도 나가는 문은 잠기지 않았던 터라, 켄은 건물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꼼짝없이 학교에서 밤을 지새울 뻔 했네. 안도의 중얼거림은 입 밖으로 튀어나오는 순간 기묘함을 담았다. 켄은 또 다시, 제 목소리가 어색함을 자각한다. 목소리를 빼앗기기라도 한 양, 제가 기억하는 모든 당연함이 어그러지기라도 한 양 무언가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다. 학교가, 온 학교가 저를 지켜보고 있었다. 끈적거리는 어둠이 목을 옥죄려고 금방이라도 손을 뻗어올 것 같았다.
등 뒤의 어둠에서 시선이 느껴지는 기분이라, 켄은 도망치듯 문을 밀고 밖으로 달려 나갔다.
건물 밖으로 달려 나온 켄은, 무심코 침음성을 냈다. 달빛 아래서 교사가 요요한 빛을 반사하고 있다. 침묵, 침묵. 무인의 침묵이 무겁게 건물을 짓누르고 있었다. 햇볕 아래서 눈에 익었던 건물은 달빛 아래 익숙함을 버리고 제 모습을 드러낸다. 둥근 달을 등에 지고 있는 후지시로의 교사는 일상과 비일상의 경계 어딘가에서, 고고하게 비밀을 숨기고 있는 듯한 모양새였다. 있어서는 안 될 곳에 서 있는 것 같은 감각. 켄은 부러 발을 재촉했다. 등 뒤에서 시선이 느릿하게 달라붙는 느낌이 들고 있다. 조금 더, 조금 더 빨리. 잘 포장된 길 위를 구둣발로 재촉하면서 허공에 또각이는 발소리가 울렸다. 켄은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면서 달렸다. 달리다가, 문득 깨닫는다.
지금 나는 이 발소리가 여럿이 되는 걸 기다리고 있는 거야.
켄은 그 자리에서 우뚝 멈춰 섰다. 침묵, 침묵. 귀가 아플 정도로 조용한 침묵이 사방에 울린다. 아직 발소리는 없다. 켄은 홀로 서 있다. 다행스럽게도.
켄은 다시 조심스럽게 발소리를 죽여 걸음을 재촉했다.
예상한대로, 후지시로의 교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그치, 잠깐 기대한 내가 바보였지. 혹시라도 열려 있을까 기대했던 것이 무색하게, 교문은 당당하게 제 위용을 과시하고 있었다. 그 모양이 마치 학교와 외계를 격리하는 결계의 문처럼 보여서, 켄은 신음소리를 흘렸다. 이걸 어떻게 넘지? 제 키보다 높은 철문을 바라보며, 켄은 난감한 얼굴을 했다. 후지시로는 깔끔하게 관리되는 학교다. 그 말인 즉슨, 문을 넘기 위해 도움을 줄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뜻이다. 밟고 올라 설 수 있는 물건도, 문 너머로 던져 타고 올라가는 것을 도와 줄 물건도 없다. 이걸 어쩌지? 그나마 몸은 가벼우니, 도움닫기해서 뛰어넘는 것이 가장 현실적이다. 조금 시끄러워지기야 하겠지만, 시도할 가치는 있다. 좋아, 여기서 얼마나 뛰어야 제대로 매달릴 수 있을까. 팔짱을 끼고 견적을 내고 있을 무렵, 어깨에 닿는 무언가가 있었다.
톡, 톡, 톡
등골을 타고 내달리는 소름과 냉기. 닿은 듯, 만 듯 어깨를 건드리는 감촉. 으악, 시팔! 켄은 방정맞은 욕설을 내지르며 팔을 휘둘렀다. 당황을 가리지 못하고 다급하게 몸을 돌리니, 딱 그림자가 닿지 않고 팔이 닿을 거리에 서 있는 소년이 있었다. 기묘함, 기묘함. 켄은 일순간 침묵했다.
170이나 되었을까? 교복을 입고 있으니 저와 같은 후지시로의 학생이겠지. 그러나 처음 보는 얼굴이다. 빠르게 온 몸을 훑어보아도 학년을 식별 할 만한 물건은 없다. 몇 반의 누구지? 제가 아는 얼굴을 빠르게 훑어보아도 기억나지 않는다. 허나 제가 어찌 후지시로의 모든 학생을 알고 있겠는가. 켄은 저 홀로 납득하며 부러 상냥한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무슨 일인가요, 당신도 학교에 갇혔습니까?
욕설을 내지른 것의 수습을 위해서라도 좀 더 정중한 어조였다.
일순의 침묵. 눈조차 깜빡이지 않고 켄을 응시하던 소년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고는 또 아무 말 없이 켄을 응시하였다. 달빛 아래 서 있는 소년을 보며 켄은 난감한 얼굴을 숨기지 못했다. 어쩌지. 소년이 왜 이곳에 있는지 이유를 가늠하다가, 철문 쪽을 바라보고 무언가 납득한 표정을 했다.
혹시 나갈 방법이 없다면 같이 문을 넘죠. 제가 먼저 넘어가서 당신을 끌어주면 쉽게 넘을 수 있을 겁니다.
퍽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제안을 내뱉었지만, 소년은 여전히 켄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눈 한 번 깜박이지 않고, 달빛 아래서 빤히. 기묘한 침묵이 실처럼 길게 늘어졌다. 초면에 그저 서로를 응시하기엔 긴 시간이 흘렀다. 켄은 이 기묘하고 눅진한 침묵이 거슬려 소년을 재촉했다.
마음에 들지 않는 겁니까?
끄덕.
말이라도 해 보시지요. 설마 말을 못합니까?
끄덕.
소년은 목소리를 내지 않고 그저 고갯짓으로 제 의사를 드러내었다. 말을 못 해? 켄은 어이가 사라짐을 자각했다. 그냥 나랑 대화하기 싫은 게 아니고? 잠시 비틀린 생각이 고개를 들었지만 이내 마음을 고쳐먹었다. 뭐, 감기라도 든 모양이지. 켄은 저 홀로 마땅한 이유를 들이대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침묵을 납득하여도 소년의 의사는 납득할 수 없었다. 교문 앞까지 와 놓고 넘지 않는다는 건 대관절 무슨 소리인가? 약간의 비아냥거림을 담아서 켄은 목소리를 높였다.
문을 넘고 싶지 않다면 다른 좋은 방법이라도 있습니까?
소년은 갑자기 손을 들어 올려서 제 뒤쪽을 가리켰다. 마치 켄이 그 말을 하는 걸 기다리기라도 한 태도였다. 그 기묘한 당당함이 못내 마음에 걸려서, 켄은 소년의 손끝으로 시선을 옮기는 대신 그와 눈을 마주치고 이야기했다.
담을 넘는 게 더 편하지 않겠어요?
그는 다시 뒤쪽을 손짓했다.
하지만 이곳까지 와서 돌아가기도 좀 그렇잖아요.
소년은 흔들림 없이 뒤쪽을 가리켰다.
그런 문답이 몇 번 오가고 나서, 켄은 기묘하게 설득되었다. 기실 켄이 눈을 마주치고 확신을 담아 이야기하였을 때 설득당하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허나 몇 번이고 종용하여도 소년은 흔들림 없이 뒤쪽으로 손짓하고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저리 당당하니 뭔가 믿는 구석이 있는 모양이지, 하고 질려버린 얼굴로 납득한 것이다.
그렇다면 한 번 가보죠.
켄이 그 말을 하는 것 또한 기다렸다는 듯 소년은 앞서 걸어가기 시작했다. 켄은 그 당당한 걸음을 조금 질린 얼굴로 바라보다가, 이내 묵묵히 따라 걸었다. 소년의 망설임 없는 발걸음이 눈 속에서 기묘하게 번졌다. 흐릿하게 잔상을 남기는 발만 바라보며 쫓아가고 있으니, 다시 기묘한 기분에 젖어든다. 달이 중천에 뜬 것 치고는 앞이 잘 보이지 않는 밤이었다. 후지시로의 돌길만이 눈앞에 걸리고, 앞서가는 소년의 등 말고는 모든 것이 형체로 존재했다. 길 밖의 무언가는 제대로 보이지 않을 만큼 어두운 밤. 켄은 제가 제대로 걸어가고 있는지, 살아있는지 조차 의문을 던지고 싶었다.
길을 걷는 순간은 기묘한 침묵이 반복해서 이어졌다. 귀가 아픈 침묵. 소년에게 말을 걸까, 하고 생각해도 입술을 달싹이는 순간 목소리를 내겠다는 마음이 사그라진다. 꽤 오래 걸었지만, 여전히 잘 포장된 길은 이어져 있다. 달빛 아래 희게 빛나는 길. 고개를 돌리면 방금 걸어 나왔던 후지시로의 교사가 보인다. 그 사실로 아직 학교라는 사실을 알 수 있지만, 이상하게도 멀었다. 저 먼 곳에서 어둠 속 교사가 기기묘묘하게 달빛을 반사하며 희게 빛나고 있었다. 평소의 저라면 분명 감탄했을 아름다움이, 이상하게 소름 돋는다. 모든 빛이 소름 돋는다. 이 학교는, 지금 마치─
문득, 가방 속의 폰이 울었다.
침묵을 깨부수며 울려대는 벨소리. 가방을 뒤져 확인하니 쿠죠선배다. 그러고 보면 방금 전화를 걸었지. 바쁜 줄 알았더니 아닌가? 의문을 몇 개 되짚으며 수신 버튼을 누른다.
여보세요? 야나기입니다.
전화기 너머에서는 아무런 말이 들려오지 않는다.
선배?
종용하는 목소리를 내어도 웅성이는 소리 이외에는 무엇도 들리지 않는다. 이상하네, 쿠죠 선배가 이럴 사람이 아닌데. 몇 번 더 말을 걸어도 대답은 없다. 장난 칠 사람이 아닌데, 파티에서 실수로 누른 건가? 저절로 찌푸려지는 얼굴을 수습할 무렵, 누군가 손목을 쥐었다.
전신을 내달리는 소름과 거부감, 소스라치게 놀라며 팔을 휘두르는 순간, 핸드폰이 손을 떠나 바닥 위로 처박힌다. 탁, 하고 돌 위로 묵직하게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켄은 제 손목을 잡은 이상하게 창백한 손의 주인을 바라본다. 세 걸음 정도 앞서 걸어가고 있던 소년은 어느새 켄의 옆으로 다가와 손목을 쥐고 있다. 잡힌 손목에서 기어 올라오는 거부감과, 온 몸에 느껴지는 냉기. 켄은 예기치 못한 접촉에 짜증을 내며 손을 탁 하고 쳐내었다.
뭡니까?
대놓고 짜증으로 가득 찬 목소리를 내어도 소년은 요지부동이었다. 여전히 아무런 말없이 켄을 빤히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또다시 이어지는 기묘한 대치, 켄은 저를 바라보는 소년에게 지고 싶지 않아 눈을 마주치고 한참 서 있었다. 그러나 켄은 눈을 마주할수록, 잠에서 깬 이후로 이어지던 부유감이 강해지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금방이라도 어디론가 날아가 버릴 것 같은 감각, 두려움과 맞닿아 있는 이 기묘한 감각이.
저리 가시죠?
켄은 결국 소년의 옆을 지나쳐 제 핸드폰을 주워드는 쪽을 택하였다. 아까부터 배터리가 간당간당하던 핸드폰은 바닥에 부딪히며 완전히 명을 달리했다. 젠장, 케이블이 없어서 충전도 못하는데. 잠시 제 가방 속의 짐덩어리를 생각하던 켄은 치밀어 오르는 짜증을 억누르려 노력했다. 되는 일이 없다. 피곤해 죽겠는데, 빨리 집에 가서 쉬고 싶다. 쟤는 어딜 가는 거야. 빨리 쟤가 가자는 곳에 가서 마무리 짓고 집에 가고 싶은데.
켄이 그런 생각을 떠올린 순간, 소년은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달빛 아래 희미하게 빛을 발하는 돌 위로 걸어가는 소년의 등. 켄은 그 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발을 옮겼다. 타박, 타박 발걸음이 다시 이어진다.
쿠죠선배, 왜 전화를 하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지? 반복되는 걸음이 상념을 끌어낸다. 그럴 사람이 아닌데. 제가 알고 있는 쿠죠 키신은 어떤 상황에서도 예의를 버릴 사람이 아니다. 더군다나 이 새벽에 전화를 걸고, 왜 한 마디도 하지 않았을까? 파티장의 웅성거림과는 좀 다른 소리였는데. 머릿속을 쿠죠가 가득 채우는 순간, 기묘한 부유감이 잦아든다. 발이 땅에 닿는다는 감각. 타박, 타박하고 울리는 걸음소리. 켄은 부유감 너머에서 제 직감이 끊임없이 경고하고 있던 사실이 무엇인지 깨닫는다.
왜, 발소리가, 하나밖에 없지?
귀를 기울인다. 교사에서 도망쳐 발걸음을 줄이던 그 때와 같이 발소리가 두 개가 되는 순간을 기다린다. 그러나, 발걸음은 하나뿐이다. 돌로 깔끔하게 포장된 길 위를, 두 사람이 구두를 신고 걸어가고 있는데, 어째서 발소리는 하나밖에 울리지 않는 걸까? 어째서?
피가 빠져나가는 느낌과 함께 귓가에 파도소리를 닮은 싸아- 하는 소리가 울린다.
켄은 눈을 데굴 굴렸다. 이 기묘함에서 도망치기에는 이미 늦었다. 그렇다면 최소한, 몸을 지킬 무언가 정도는. 마침 길가에서 돌이 달빛을 받아 흰 빛을 흘리고 있었다. 좋아, 저걸 이용하자. 켄은 걷는 척, 아무렇지 않게 돌을 주워 가방에 넣는다. 묵직한 돌을 넣고도 안심이 되지 않아 몇 개고 주워서 가방에 넣는다. 여차하면 가방을 휘둘러서 머리를 후려쳐야지. 돌로 채워 무거운 가방이라면 일어설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가방이 돌로 가득 차고도 안심되지 않아서, 켄은 무거운 돌 하나를 손에 쥐었다.
소년은 앞을 향해서 계속 걸었다. 걷고, 걷고, 걷는다. 사라졌던 부유감은 어둠 속에서 돌아오고, 켄은 제가 바닥을 딛고 있는지, 허공을 딛고 있는지 알 수 없는 기분이 된다. 긴, 어디까지 이어져 있는지 알 수 없는 길. 후지시로의 부지는 무엇을 위함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넓고, 걷는 것에 자신 있는 켄도 이제 슬슬 지쳐가고 있었다. 차라리 다시 돌아가는 것이 좋지 않을까. 그런 생각도 해 보았지만 어둠 속에서 방향 감각을 잃어버린 켄은 소년의 등 뒤를 따르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었다.
그리고 귀가 아플 정도로 깊은 무인의 침묵 속에서 켄은 제 발소리만 울리는 것에 귀를 기울여가며 계속 앞으로 나간다.
얼마나 더 걸었을까. 이제 정말로 지쳐서 걷고 싶지 않다고 생각할 때, 눈앞에 울타리가 보인다. 드디어 학교의 끝인가. 그러고 보면 후지시로는 사방이 숲으로 둘러싸여 있으니, 숲을 통해 밖으로 나가는 쪽이 편할지도 모른다. 확실히, 그게 편하긴 하겠네. 먼저 울타리를 넘어가는 소년의 등을 바라보면서 홀로 끄덕였다.
켄을 한 번도 돌아보지 않고 걷던 소년은, 어느 샌가 울타리 너머에서 손짓하고 있었다. 저긴 또 언제 넘어갔담. 나도 데리고 가지. 켄은 기묘하게 비틀린 짜증을 느끼면서 발을 옮겼다. 소년은 울타리 너머에서 도와줄 생각은 하지 않고 그저 이 쪽으로 넘어오라며 손짓하고 있었고, 켄은 그것이 짜증나서 부러 울타리를 넘는 손에 힘을 주었다.
침묵이 깊어져서 귀가 아플 정도로 울리기 시작했다. 이명을 닮은 귀울림이 어지럽게 깊어지는 가운데 울타리 너머의 소년이 입을 찢어질 듯 벌려 웃기 시작하고─
“어이 네놈!”
몸이 뒤로 넘어갔다.
바닥에 내팽개쳐진 몸이 쿨럭, 하고 숨을 토해낸다. 지칠 대로 지친 몸은 일어서지도 못하고 바닥에 드러눕고, 눈앞에 보이는 것은 쿠죠 키신의 화난 얼굴. 매고 있던 가방이 바닥에 부딪히며 가득 채운 돌을 차르륵 소리를 내며 쏟아낸다.
“한밤의 학교에서 입수라니, 비상식에도 정도가 있다. 애초에 네놈, 어째서 전화를 걸어 놓고서 용건을 남기지도 않은 거지? 더군다나 내가 건 전화를 받아 놓고서는 말이 들리지도 않는 것처럼 굴더니, 갑자기 끊어버리고 전화기를 꺼두는 것은 도대체 어느 나라의 예의─”
쿠죠 선배가 잔뜩 화나서 내어 놓는 말들을 하나도 이해할 수 없다. 말을 안 한건 쿠죠선배잖아. 게다가, 왜 저렇게 화를 내고 있지? 핸드폰이 꺼진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문득 쿠죠 선배 뒤로 보이는 달이 한참 기울어진 것을 깨닫는다. 분명 교실에서 깨어났을 때 까지만 해도 중천에 있던 달이, 서쪽으로 한참 기울어져 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지?
“애초에 네놈은 너무 긴장감이 없어. 학교에 갇혔다면 얌전히 교문에서 사람을 기다릴 것이지 왜 홀로 이 깊은 연못까지 걸어와서는 돌을 잔뜩 지고 기어 들어가려고─”
그러게. 왜 돌을 지고 들어가려고 했지? 아냐, 이 돌은 그 새끼의 뒤통수를 여차하면 후려치려고……. 발소리도 없는 것을 후려칠 수 있다고 생각한 건가?
불길한 예감이 든다. 지독하게 불길한 예감이. 온 몸을 휘감고 끊임없이 나를 종용하던 부유감이 다시 몸을 휘감는다. 당장이라도 하늘로 떠서 사라져 버릴 것 같은 불길함, 불안함, 두려움. 천천히 그것에게 잡혔던 손목을 내려다본다.
손자국 모양으로 멍이 들어있다.
이제야 이곳이 학교 연못 근처임을 알아볼 수 있다. 나는 울타리를 넘는다고 생각하면서 저 말뚝 위에 올라 선 것이다. 누굴 따라왔는데, 도대체, 내가 누굴 따라왔지?
“네놈, 사람이 말을 한다면 경청하는 것이 기본적인─”
“저기, 선배.”
아까부터 걱정한 기색과 당황을 숨기지 못하는 쿠죠 키신을 부른다. 그는 일순 침묵한다. 달빛 아래서 걱정을 머금은 따스한 눈동자를 마주하며, 나는, 어색한 말을 내뱉는다.
“제가 혼자 있었나요?”
쿠죠 키신은 어리석은 이를 보면 늘 짓는 그 표정을 지으며, 당연한 것을 내뱉듯 이야기한다.
“심야의 학교에 네놈 말고 다른 인간이 어디 있지?”
상식을 내뱉는 그 목소리에, 침묵의 이명이 길게 울린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기분. 서서히, 삐걱이는 고개를 돌려 연못을 바라본다.
“씨발.”
등 뒤로 달려오는 누군가의 발소리를 들으며, 나는 속절없이 손에 얼굴을 묻고 무너져 내렸다.
주저앉아 얼굴을 가린 손가락 사이로 보이는 물에 비친 달은, 이제 얼굴조차 기억나지 않는 ‘그것’의 눈동자와 똑같은 색깔을 띠고 있었다.
2018.06.15 첫 업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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