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다시 계절이 지나갔다. 한 걸음 더 익숙해진 일상. 천천히 숨을 내쉰다. 모든 생각을, 사념을 내려놓는다. 이 순간, 나는 그 무엇도 아니다. 화살, 활, 시위를 당기는 감촉. 내가 보는 것은, 이미 과녁에 꽂혀 있는 화살.
시위를 놓는다. 핑, 하며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나고, 언제나와 같이 화살은 과녁의 정 중앙에 꽂힌다.
벗어 두었던 옷을 걸친다. 이걸로 오늘의 연습량은 끝. 일상이 되어버린 길을 걷고, 훈련과 관리에 대한 일을 조용히 되짚는다. 해야 할 것, 배워야 할 것. 이미 신아의 문자나 가벼운 병법에 대해서는 끝마쳤다. 오늘은 사냥매를 돌봐야 하나? 그러고 보면, 쿠로의 사냥도 준비해야 한다. 아아, 할 일이 태산이다. 그저, 나는.
바람이 불어 옷자락이 펄럭인다. 버릇처럼 얼굴을 들어 하늘을 바라본다. 덧없이 푸르기만 하구나. 덧없음, 답답함. 이미 익숙해져버린 감정에 굳이 이름을 붙여 입 밖으로 내어본다. 아아, 참으로 좋은 날이구나. 이미 풍류를 읊을 줄 알게 된 머리는 예전의 입버릇을 말끔하게 잊어버린 양 곱게 다듬어진 언어를 내어 놓는다.
“시간이 야속하기도 하지. 정신을 차리니 벌써 추풍이 불어오고 있어.”
상스러운 욕을 섞어야 했을 말들은 이미 고상한 일본어가 되어버린지 오래. 벗 하나 없는 생활은 자신을 잃어버리기엔 충분하고도 남는다. 벗, 벗이라. 그래. 마음 붙일 사람 하나 없는 신아의 생활에 익숙해 진게 언제부터였던가? 외로움을 무감케하는 생존의 욕구. 태어나 처음으로 느껴본 두려움은 사람을 미치게 만들기에 충분했던 모양이지.
그 무엇도 해내지 못해도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는 시대는 없다.
느릿하게 흐르는 생각을 따라 느릿하게 발걸음을 옮긴다. 잃어버린 것들에 대한 야속함. 가지지 못했던 것에 대한 비난. 그리고, 무엇이 남았더라. 남아있는 것들을 가만히 헤아리다가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게 남아있는 것이 얼마 없다. 글을 쓰지 못한지 얼마나 지났더라. 의무처럼 총을 개량하고, 활을 쏘고, 누군가를 죽이는 것에 무감해지는 일을 반복한다. 그래, 이건 의무였다. 그러나 힘 있는 자의 의무였다면 나는 차라리 기분 좋게 이를 악물었으리라. 그저 이건, 비인간적인 삶의 의무였다.
살아남기 위해서 지불해야 하는 대가가 인간성인줄 알았다면, 나는 진즉 죽어버렸지. 그러나 이미 인간의 껍데기를 지닌 무언가에게 남은 것은 그저 집념 뿐이다. 언젠가, 내 언젠가 돌아가리라. 언젠가 내 처절하게 울며 후회하는 일이 있어도 돌아가고야 말겠다. 그런 생각들이 조금의 틈도 없이 나를 얽매고 있다. 화살은 손을 떠나는 순간 내 권역이 아니다. 그렇다면, 생각은 어떻게 되는가.
느릿하게 걷고 또 걷는다. 사냥매들의 날개짓 소리. 입술 밖으로 느릿하게 흘려내는 노래. 무엇을 믿고 이리 인간에게 달려드는 것일까. 월아족으로 만들고자 시도했던 매들이 날개짓한다. 나는 무엇을, 아니다. 어지럽게 흐트러진 생각을 알아차린 새들이 부산하게 날개짓한다. 휘날리는 깃털 너머로 보이는 얼굴에 덧없는 웃음을 반복한다.
“주군.”
저 인외의 아름다움에 언제까지 두려움을 느껴야 할까. 나는 그 두려움이 신선했기에 당신에게 무릎 꿇었다. 그리고 지금은, 글쎄. 차라리 바람이 되어 멀리 사라지고 싶다. 껍데기만 남은 인간은 인간이라고 부를 수 없다. 그러면, 사슬로부터 도망쳐도 좋지 않을까.
2018.02.11 첫 업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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