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을 차려보면, 모르는 곳이다.
망할, 내가 꿈을 꾸나? 방금 전엔 침대에 누워있었는데, 갑자기 숲 속에 누워있을 이유가 없다. 등에 배기는 돌의 감촉과, 축축한 바닥이 너무할 정도로 선명하다. 아, 꿈인가.
축축한 등이 기분 나빠 몸을 세운다. 돌에 깔려있던 등이 욱신거리며 비명을 지른다. 깨질 듯이 아픈 머리. 아무리 생각해도 꿈이라기엔 너무 생생한데.
주변을 둘러봐도 별로 특별한 점은 없다. 흔한 활엽수림에, 지나가는 동물 하나 없는 풍경. 두통이 조금 잦아들 때 까지 앉아있었지만, 생물의 기척은 느껴지지 않는다. 어쩌지?
일단 자리에서 일어섰다. 가다가 죽으면 죽겠지.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발을 옮긴다. 일단 앞으로 쭉 가다 보면, 무엇이든 나오지 않겠나.
좋아, 정정한다. 아무것도 안 나온다. 벌써 앞으로 걷기만 한참. 도대체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감도 안 잡힌다. 슬슬 체력적으로 한계인데. 게다가 발목도 아프-
아, 망할.
벌써 세 번째 같은 발목을 삐었다. 제대로 걷지도 못해서 절뚝거리는 꼴이라니, 비참해 죽겠네. 평소처럼 눈에 보이는 것을 걷어차려고 했지만, 발목이 아파서 그만 뒀다. 바닥에 이끼가 잔뜩 껴서 어딜 밟아도 위험하다. 게다가 나무뿌리도 엄청 많이 얽혀있고. 아무래도 여긴 사람이 다니지 않은 숲이다.
이 시대에 그럴 이유가 있나? 이거 진짜 산간오지 아냐?
여기서 더 걸어도 아무것도 안 나오는 게 아닐까. 문득 그런 생각을 하는 순간, 분위기가 바뀐다. 바람소리, 무언가 도망치고 숨을 죽이는 감각. 아, 본능이 경종을 울린다. 이상할 정도로 길게 늘어지는 정적. 온 몸이 저리다. 의심할 수 없이, 이건 포식자의 기척이다.
아, 젠장.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야?
긴장한 몸에서 억지로 힘을 뺀다. 정적, 정적. 언제라도 도망칠 수 있게 준비하는 그 순간, 괴성이 울린다. 다음 순간, 나는 뛰고 있다. 무의식적인 생존본능. 도대체 뭐야? 정신없이 기억을 뒤져도 저런 소리를 낼 수 있는 생물은 없다.
넘어질 것 같은 몸을 억지로 균형 잡고, 앞으로 달린다. 소리의 반대편으로, 어디로든! 의식 한 구석에서 숨어있는 게 낫지 않냐, 말을 건다. 웃기지 말라지. 내 인생이 어디 제대로 풀린 적이 있던가. 저기 있으면 기다리는 건 개죽음이다. 그건 깊이 생각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한참을 달린다. 몇 번 발을 삐고, 균형을 잃으면서 손목도 꺾인다. 의외로 아프지는 않지만, 이제 슬슬 정말로 뛰긴 무리다. 기도가 타들어가는 느낌이고, 제대로 숨이 쉬어지지 않는다. 망할, 이러다가 넘어지면 진짜 뒈지겠네.
속도를 늦춘다. 서서히 숨을 들이쉬려고 노력하지만 기침이 터져 나온다. 쿨럭 거리면서 튀어나오는 막힌 숨. 숨이 쉬어지지 않는다. 무리했나, 내장이라도 토해낼 양 터져 나오는 기침은 퍽 괴롭다. 아, 약도 없는데. 일단 앞으로 걷는다. 저 너머에 나무가 끝나는 곳이 보인다. 이 쯤 뛰었으면 따돌렸겠지?
힘겹게 숲을 벗어나면, 탁 트인 하늘이 보인다.
훨씬 나아진 공기에 겨우 숨이 트인다. 여전히 빠르게 걷는 건 무리지만, 뭐 어떻게 되겠지. 숲의 끝이 절벽이라니, 꽤 험한 산인가? 느릿하게 앞으로 걷는다. 절벽 끄트머리에 서서 바라보는 저 너머. 그 순간, 강렬한 위화감이 온 몸을 덮친다.
희열마저 느껴지는 탁 트인 곳. 축축하지 않은 공기와 시원한 바람. 눈이 시릴 정도로 푸른 하늘, 그리고 저 멀리 보이는 ‘성.’ 아, 이건 의심하기 힘들 정도로 강렬한 풍경이다. 애초에 한국이라고 확신하지도 못하겠다. 마을, 굴뚝 위로 올라오는 연기. 우습도록 아름답고 고요한 광경에, 나는 아주 뼈저리게 실감한다.
아무래도 여긴 내가 살던 곳이 아니다.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어이가 없으니 말이 제대로 나오질 않는다. 아, 이게 무슨 일이야. 저 양식으로 보아서는 일본인가? 일본사는 공부해 본 적이 없어서 모르겠다. 애초에 나는 역사에 약하다고. 멍하니 실없는 생각을 늘어놓는다.
“아, 이게 무슨 일이야.”
입 밖으로 쌕쌕거리는 숨소리 하나가 현실감을 붙든다. 이대로 뛰어내리면 돌아가려나? 정신없이 그런 생각을 조금 할 즈음에,
또다시 괴성이 들린다.
시팔, 입 밖으로 튀어나오는 욕설을 혀를 깨물어 참는다. 따돌린 거 아니었어? 반사적으로 돌아본 뒤에는 ‘괴물’이라고 밖에 할 수 없는 생물이 잔뜩 늘어섰다. 제 키를 훌쩍 넘는 높이에, 으르렁거리며 몸을 낮추는 모습까지. 이건, 아무리 곱게 자라온 사람이라고 해도 알 수 있다.
죽는다. 조금만 방심하면, 죽는다.
갑자기 우스울 정도로 머리가 차가워진다. 여기서 허탈하게 죽으라고? 그럴 수는 없다. 여기서 죽으려고 살지도 않았고, 최소한 시체가 인간 꼴은 남아있어야 하지 않겠나. 머릿속으로 스쳐 지나가는 온갖 괴수 영화를 고려할 때, 나는 여기서 뒈지면 먹힌다. 아주 맛있게.
소모성의 경계. 대치상태. 여차하면 뛰어 내리려고 절벽을 눈짓하는 순간, 그것이 달려든다. 반사적으로 옆으로 굴리는 몸. 아슬아슬한 차이로 ‘괴물’은 절벽 아래로 떨어지고, 저도 구른다. 떨어질까 두려워 다급히 바닥을 붙잡는 손. 아슬아슬하게 절벽 앞에서 멈춘다. 저 너머로 괴물의 비명이 길게 이어지는 꼴을 보니 여기서 떨어지면 뒈지게 생겼다. 망할, 이 건도 보류네.
억지로 몸을 일으킨다. 절벽 너머로 멀어지기 위해서 노력하지만, 긴장으로 몸이 굳는다. 젠장, 한 번은 운이 좋아서 넘겼다고 하자. 다음에도 이럴 수 있다는 보장이 있나? 저 너머로 같이 떨어지면 그런 꼴불견이 없다. 분명, 형체도 남기지 못하겠지.
또다시 팔을 휘두르며 튀어나오는 그것, 옆으로 다급하게 뛰지만 균형을 잃는다. 휘두르는 팔에 가슴을 맞고, 헉 하고 숨을 토해낸다. 절벽 아래로 균형을 잃는 몸. 망할, 이대로 끝이야?
비명이라도 지르려고 입을 벌린 순간에, 몸을 끌어올리는 손이 있다.
던지듯이 끌어올린 바람에 제대로 균형을 못 잡았다. 덕분에 아주 꼴사납게 바닥에 처박혔지만 일단 살아는 있다. 아무래도 막 오른쪽 발목을 다섯 번째로 삔 모양이지만, 뭐 어떤가. 일단 살아있으면 언젠가 낫겠지. 망할.
구해준 사람의 얼굴이라도 보려고 몸을 움직이지만, 거칠게 기침이 터진다.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을 정도로 오랫동안 지속되는 소리. 손 위로 피가 튀지만 이 피가 어디서 흘렀는지 알 수 없다. 목이 터졌는지, 얼굴이 다쳤는지, 어떻게 아는가.
눈물 맺힌 눈을 억지로 들어 초점을 맞춘다. 앞을 막아선 등. 은발. 길고 찰랑거리는 은발이 가장 먼저 시선을 사로잡는다. 뒤돌아보는 얼굴은 의연한 분위기로, 흔들리지 않을 것처럼 굳다. 아, 실로 아름다운 사람이다.
“무사한가, 여자.”
“ㄱ,”
반사적으로 대답하려고 입을 벌리지만, 목소리는 나오지 않는다. 제대로 된 소리도 되지 못한 말. 목을 타고 도는 고통과, 기침이 터진다. 두어 번 더 시도해도 마찬가지. 감사 인사도 할 수 없다니, 비참하기 짝이 없다. 망할.
의중을 알 수 없는 얼굴을 올려다본다. 올곧은 눈. 그 뒤로 달려드는 괴물이 보이고, 나는 그의 옷자락을 다급하게 끌어당긴다. 그는 의아한 눈으로 허리를 숙이고, 나는 그대로 내 몸이라도 던지려고 한 그 순간에,
달려들던 모든 것이 일소한다.
“켄신님, 상처는 없으십니까!”
다급하게 뛰어오는 키 큰 남자. 그 뒤로 온화하게 웃고 있는 사람이 뒤따른다. ‘켄신 님’이라고 불린 이 사람은 아무렇지 않게 그들을 맞이한다.
“문제없다. 구해졌군.”
“이 정도, 별거 아닙니다!”
“‘야쿠마’를 발견했을 때는, 순간 놀랐지만요.”
“그렇군. 설마 이렇게, 성에 가까운 곳에서까지 나올 줄이야…….”
일본어. 제대로 알아들을 수 없지만 대충 감을 잡을 수 있다. 이 곳의 언어는 일본어인 모양이지? 그나마 구사 가능한 언어라는 사실에 안도한다. 기본이 있으면 어떻게든 살 수 있다.
제 존재를 신경 쓰지 않는 모양인가, 저들 셋의 대화는 막히지 않고 이어진다. 용건은 끝났겠지? 그럼 언제까지고 이 쪽에 앉아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일어서려 손을 짚은 순간.
“……!”
불타는 것 같은 고통이 팔을 휩쓴다.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고꾸라지는 몸. 숨을 억지로 몰아쉬며 겨우 고통을 몰아낸다. 아, 망할. 제대로 다쳤나봐? 그래도 이대로 앉아있을 수는 없다. 팔을 안 쓰고 일어나면 될 문제.
그러나 오른 발을 딛고 일어서려던 몸은 바닥에 털썩 소리를 내며 쓰러진다. 나는 또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바닥을 긴다. 아파, 아파. 망할, 진짜 아파.
“괜찮은가?”
문득 들린 목소리에 고개를 든다. 아무래도 제게 묻는 모양이라, 서투르게 고개를 끄덕인다. 아프지만, 정말 괜찮지 않지만, 그렇다고 여기서 고개를 저을 수도 없는 노릇이 아닌가.
“그래서 켄신님, 저 쪽의 분은?”
“모르는 여자다. 야쿠마에게 공격당하고 있었다.”
“근처 마을의 여자라고 하기엔, 이상한 모습이군. 어이 여자, 어디 마을의 사람이냐.”
“카게이에, 대답은 들을 수 없다. 말을 못하는 모양이다.”
제게 말을 걸었다거나, 제 이야기를 한다는 사실은 알겠다. 하지만 목소리는 나오지 않고, 일어설 수도 없고, 여기는 모르는 곳이다. 망할, 저 사람들이 가고나면 저 괴물들이 돌아올 것 아닌가. 일단 대책을 강구해야 할 터인데.
“여자, 일어날 수 없나?”
또 물음. 망설이다가 고개를 끄덕인다. 사실이니까. 분하고, 인정하기 싫은 사실이지만 지금 나는 완전히 거동이 불가능한 상태다. 일본어로 좀 있으면 나아진다고 쓰는 방법은 모르고, 목소리는 안 나오고. 미치겠네.
“도망치면서 다리를 다친 모양입니다.”
“여자, 어느 마을의 사람이지? 데려다 주겠다. 말 할 수 없다면 문자로 표시해도 좋아.”
대답 대신 왼 손으로 오른 손목을 움직일 수 없음을 표현한다. 하지만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겠지. 손목이 이미 보기 힘들 정도로 부어올라있는데.
“……여러모로 곤란한 상황이네요.”
“그렇다면 일단 성으로 데려간다.”
“……! 하지만 켄신님, 이런 수상한 자를 성에 들이는 것은,”
“하지만 산 속에 버려두고 갈 수도 없지 않나. 무엇보다 힘 있는 자에게는 힘없는 자를 지킬 의무가 있다.”
저를 빼놓고 이야기가 진행되고 있다. 분명 제 거처를 정하는 일이 틀림없는데, 왜 내 발언권이 없지. 목소리가 안 나와서인가. 한층 여유로워진 머리로 그런 생각을 좀 했다.
“알겠습니다. 켄신님이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어이, 여자. 운이 좋았군. 켄신님의 관대한 처사에 감사해라.”
아무래도 데려가는 쪽으로 결론이 난 모양이다. 지금이라도 부정하려고 입을 열지만, 여전히 목소리는커녕 제대로 바람소리도 나지 않는다. 정말, 제대로 다쳤다. 난감한 얼굴을 하고 있자니, 저 앞에서 ‘켄신님’이라고 불린 사람이 가까이 다가와 말을 건다.
“무리해서 말하려고 하지 않아도 좋아.”
고개를 끄덕인다. 아무래도 저 사람의 말에는, 저항하기 어렵다.
“그럼 가지.”
그렇게 말하며, 가까이 다가왔던 켄신이라는 사람은, 아무렇지 않게 내 등과 무릎 아래로 손을 넣어 들어올린다.
아니, 잠시만.
놀라 단박에 몸이 뻣뻣하게 굳는다. 아니, 이건 좀 아니다. 다급하게 밀어내려고 움직이지만, 격하게 움직이면 떨어질 것 같아 제대로 저항 할 수도 없다.
“무슨 일이지? 걸을 수 없는 게 아니었나?”
물론 그렇다. 하지만 차라리 기어서라도 가겠다. 이건 아니다. 그런 생각을 담은 눈을 해 보였지만, 제대로 전달되지는 않은 모양이다.
“그러면 이 방법 밖에 없다. 가지.”
망할.
완전히 일본풍의 성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곳은 몇 백 년 전의 일본에 가까운 풍토를 보이고 있다. 내가 자세히 알지는 못한다고 하더라도, 전국시대를 나타내는 창작물 두어 개는 본 적이 있다.
“이 방을 좋을 대로 쓰도록 해라.”
그런 말을 하고 그 사람은 완전히 사라졌다. 남은 사람은, 칼을 들고 있던 키 큰 쪽. 가지 않고 남은 모습에 대충 무슨 말을 할지 짐작이 된다.
“어이, 여자. 말을 하지 못하고 걷지 못하니 이상한 짓을 하기는 어렵겠지만, 헛된 생각은 하지 마라. 내가 방 밖에서 감시할 테니까.”
으음, 예상대로. 오히려 이런 말이 없는 쪽이 더 이상하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가만히 고개를 끄덕인다. 일단 죽이지 않고 살려줬다는 점에서 이 자들이 좋은 사람이라는 건 알겠다.
2017.10.12 첫 업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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