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이 며칠이지? 화창한 날씨를 바라보며 문득 떠올렸다. 시간의 흐름이 참 빠르다고. 창 밖에 눈이 쌓여있던 것이 바로 어제 같은데 벌써 벚꽃이 피었네. 꽃 피는줄도 모르고 집에 들어앉아 있던 것이 우스워 조용히 발걸음을 옮겼다. 산책이라도 해야지. 충동이 이끄는대로 발을 옮긴다. 봄날이다. 햇볕이 부서지는 호수, 희미하게 풍겨오는 화향, 저 멀리서 웃고 있는 사람들의 목소리. 공기에서 향이 묻어난다, 청명한 향이다. 긴 겨울이 가고 비로소 봄이 온 것이다. 휘날리는 벚꽃, 어린아이의 목소리. 자각하지 못하고 흘려내는 노래가 입술 사이에서 길게 늘어진다. 느릿하게 끌어당기는 발걸음. 느긋하다. 따뜻하다. 정말로, 날이 좋아.
바람이 불어온다. 벚꽃이 휘날린다. 꽃이, 지며 하늘하늘 온 시야를 뒤덮는다. 아이의, 웃음소리.
아, 시간이 지났구나.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 아, 그러게. 이만큼이나 시간이 지났네. 긴, 시간이 지났네. 얼마나 지났지? 습관처럼 제 손을 들여다보다가, 문득, 이 손이 더 이상 희미하지 않음을 깨닫는다. 희미해지지 않은지 오래 되었다. 그렇게 생각해보면, 분명히. 능력을 쓰지 않은지 오래 지났다. 그저 쓸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쓸 이유가 없어서. 그냥, 그저, 인간과 같이 생활해 온 것이다. 아니, 나는 애초에 인간이었는데. 그렇지, 나는 인간이야.
뚝, 뚝, 턱에서 눈물이 떨어진다. 손바닥에 떨어진 눈물을 들여다본다. 왜 울고 있을까? 왜, 눈물이 나는걸까? 생각이 길게 이어지기 전에 몸이 무너져내린다. 바닥에 부딪힌 무릎이 아프다. 그러나 이 아픔은 더이상 경계가 되지 못한다. 그저 고통, 고통이 되어서. 나는 속절없이 떠올린다. 그토록 도망치던 그 말을 어쩔 수 없이 떠올리고 충동적으로 입으로 뱉어내고 마는 것이다.
"전쟁이 끝났네."
입 밖으로 내뱉은 말은 정말 아무것도 아니다. 그냥 그 정도의 말이다. 전쟁은 끝났어. 그렇게 많은 사람을 죽인 전쟁은, 이렇게 끝나버린거야. 모든 것을 잃었다. 남은 것 하나 없이, 사랑하는 모든 것을 잃고 나는 홀로 살아남았다. 그 곳에서 내 삶이 끝났다고 생각했다. 사실, 끝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한거야. 그렇지? 알고 있다. 사실 알고 싶지 않았지만, 나는 그저 살아남은 것을 부정하고 싶었던거야. 그러면서 너희를 영원히 살아갈 수 있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어, 잊어버려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어.
우윽, 윽, 흐으, 입에서 울음이 흘러나온다. 오랫동안 쌓인 울음이 저마다 앞다투어 입 밖으로 새어나온다. 알고 있어, 나는 너희를 조금씩 잊어가고 있다는 거. 그래서 더 죽고 싶었는데, 잊고 싶지 않았는데, 어느새 상처의 고통은 무뎌지고 처참함은 조금씩 익숙해진거야. 그렇지만 전쟁이 끝나지 않았다고 믿고 싶었다. 이 전쟁이 끝나면 너희들은 정말 죽어버리는 것이니까. 이야기의 마침표를 찍는다는 건 그런 의미니까. 반전같은 건 없어, 아무것도 돌아오지 않아.
하지만, 우리는 인간이었다. 신화의 주인공이 아니면 안 된다고, 우리는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끊임없이 강요받았지만 우리는 인간이었다. 살아있는, 살아있는 인간. 이야기의 끝은 없고, 죽지 않으면 살아있다. 잊고, 익숙해져서, 결국 앞으로 나아가게 되는 인간. 비참한 운명에 짓눌려 죽을 날을 정해도, 결국, 어떠한 변수가 일어난다면 어그러지는 대신 새로운 길을 찾아 나아가게 되는 그런 인간.
서러움에 눈물이 흐른다. 이토록 간단했는데. 그냥 입 밖으로 내뱉으면 되는 말이었는데, 우리는 왜 그렇게나 안절부절 못했던걸까? 인간이면 안 된다고 말한 자들의 문제였을까, 우리의 문제였을까? 두서없는 질문이 어지럽게 떠돌다가, 결국 결론을 내린다. 이제와서 말해도 늦은거야. 모두 죽었다. 수많은 생명은 사라졌고, 나는 이제 돌아갈 곳을 가지지 못한다.
그러나 살아있다.
그 사실이 두려워서 지금까지 다른 이름을 썼던 것이다. '셰키나 테오파네스'라고 말하고, 도망치고, 제멋대로 굴었던 것이다. 그냥, 나는, 내가 살아있었던 것이 두려웠던거야. 누군가의 생명을 지고 살아가는 것이 두려웠고, 네가 죽었다는 사실이 두려웠고, 내가 누군가를 책임지지 못했다는 사실이 두려웠던거야. 그냥, 나는 두려웠어.
인정하고 나면 정말 당연하고, 아무것도 아닌 사실이다. 나는 어렸고, 이런 날이 올 것이라고 생각한 적 없는 사람이었다. 두려웠을텐데, 나도, 너도. 되돌리기엔 이미 늦어서 앞으로 나아갔을 뿐인데. 용서할 수 없다, 용서할 수는 없다. 하지만 친한 친구라서, 너를 친애의 의미로 더없이 사랑하였기에, 이해할 수 있다. 너도 그저 두려웠을 것이고, 뒷 일을 길게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나와 더없이 닮아있던 너였기에, 맹목적으로 앞을 향했을 뿐이라고.
미안해, 행복해지진 못했어, 불행하지도 않아서 미안해. 네가 좋아하던 것을 기억하고 싫어하던 것을 잊어버렸어, 네가 어떤 방식으로 우는지, 웃는지 기억하는데, 그 날의 네가 어떤 표정이었는지 기억나지 않아. 당연한 망각, 인간이기에 놓아두고 온 기억들. 웃음이 터져나온다. 쌓인 울음이 틀어막은 목구멍은 쓰린데, 웃음이 터진다. 미안해, 행복해 질 것 같아. 영생을 약속하지 못할거야. 나는, 결국 이 길에 조금씩 너희를 놓아두고 걸어갈거야.
하지만 살아있다. 망자를 잊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은 생자의 의무이다. 죽은 사람을 붙들고 놓아주지 않으면, 결국 저승에서도 행복할 수 없다고 들었어. 그리고 나도 행복하지 못할거야. 미안해.
"미안해..."
반복되어 의미를 잃어버린 사과가 입 밖으로 흘러내린다. 그러나 이제 서서히 눈물이 잦아든다. 아무리 격한 감정이라도 쏟아내고 나면 동나는 것이다. 붙잡고 끌어안고 괴로워하려고 노력해도, 시간이 지나면 무뎌지는 것이다.
봄날이 괴롭지 않다. 그 수많은 죽음은 결국 상처가 되고, 흉터가 되었다. 때때로 아픈 상처는 다시 피를 흘리지 않는다. 긴 시간은 흘러가서, 셰키나 테오파네스는 내가 되었으나, 결국 나는 나였을 뿐이다. 도망치고 이름을 바꾸어도 나는 나다. 그들과 행복하였고, 사랑했고, 살아남아서, 괴로워하면서도 앞으로 나아간 것이다. 피 흐르는 상처가 아물고 흉터가 되는 것도 모르고 걸어서, 나는 결국 봄날 아래로 걸어온 것이다.
뒤에 남은 이들에게 미안하다고 소리치고, 이래서는 안 된다고 눈물짓고, 그러나 인간이기에 타인을 온전히 품지 못한다. 인간이니까, 나는, 신이 아니니까. 신화가 끝난 순간부터 인간으로서 이 길을 걸어온 것이다. 사랑한 자들의 사랑으로, 호의로, 상징으로, 그리고 그저 살아남았기에.
봄이 왔다. 청명하게 아름다운 푸름이 만연한 봄날이 되었다. 나는 살아서 이 봄날을 마주한 것이다.
2018.06,09 첫 업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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