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조롭게 이어지는 수업. 토트의 낮게 깔린 목소리가 교실을 가득 채우는 가운데, 셰키나 테오파네스는 조용히 턱을 괴고 책을 내려다보았다. 웬일인지 맑은 하늘은 화려하게 제 색을 뽐내고 있고, 창 너머에서는 부드럽게 햇살이 비치고 있다. 볕 아래서 그녀의 검은 머리카락은 푸른 광택을 띠고, 눈동자를 뒤덮은 금속성의 금색은 희미한 반짝거림을 뽐낸다. 흥미 없다는 듯 어딘가 초연한 구석을 보이는 얼굴이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처럼 허무해 보여서, 하데스는 남몰래 숨을 삼켰다.
셰키나 테오파네스는 늘 어딘가 어렴풋한 인상을 주는 사람이다. 분명 그 자리에 존재함에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느낌을 주는 사람. 잠시라도 신경을 놓으면 금세 어디론가 사라져서 돌아오지 않을 것 같은, 불안한. 하데스는 그런 생각을 조용히 헤아리다가, 그녀의 모습에 시선을 빼앗긴다. 실로 허망한 아름다움이다. 금방이라도, 금방이라도 볕 아래서 녹아 사라질 것만 같은 사람. 수업중임에도 불구하고 멍해져서 그녀의 얼굴을 쳐다보고 있으면, 셰키나가 그의 시선을 알아차린다.
눈이 마주친다. 의아한 기색을 띠고 그에게 무슨 일이 있는지 살피더니, 그저 그녀를 바라보고 있음을 알아차린다. 눈을 마주치고 있는 순간이 길어진다. 셰키나는 그가 시선을 돌리지 않음에 의아해 하고, 하데스는 그녀의 눈동자에 압도된다. 온전히 그를 향하는 금빛 도는 눈. 그가 멍한 얼굴을 했나, 활짝, 이라고 이야기 할 수도 없지만 부정할 수도 없는 희미한 웃음이 셰키나의 얼굴 위에 떠오른다.
‘집중해요, 곧 끝나요.’
입모양으로 뻐끔거리며 이야기 하는 말은 다정하기 짝이 없다. 듣지 않은 목소리가 귓가를 맴도는 느낌이라, 하데스는 조금 멍한 심정으로 칠판을 향해 시선을 돌린다.
오늘따라 토트는 수업에 불성실하게 임했다. 하늘이 맑은 탓인지, 그저 으레 있는 그의 변덕인지 알 수 없는 노릇이지만, 평소보다 낮고 긁히는 목소리가 그의 불쾌한 의중을 대변한다. 하지만 셰키나의 말대로 수업은 얼마 남지 않았다. 토트가 불편한 심기를 가감 없이 표현하는 목소리로 수업하던 도중, 스피커에서 부드럽게 종소리가 울린다. 그 순간 토트는 설명을 멈춘다.
수업에 쓰던 교재들을 빠르게 정리한 그는 교실을 훑어보며 차가운 목소리로 고한다.
“오늘의 수업은 여기까지다. 전원, 숙제를 누락하지 않도록.”
말이 끝남과 동시에 그는 조금의 미련도 남기지 않고 밖으로 걸음을 옮기고, 어깨 위에 걸친 코트가 화려한 궤적을 그리며 시선을 허공을 수놓는다. 푸른 코트가 펄럭이는 모습을 눈을 쫓는 셰키나를 바라보던 하데스는 문득 이 모든 일상에서 기시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어딘가 신경에 거슬리는 구석이 있건만, 어디인지 알 수 없다. 그는 무엇을 놓치고 있는가?
소란스럽게 학생들이 모두 빠져나간 교실. 셰키나는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그저 모든 것을 응시하고 있다. 여전히 웃음인지 아닌지 구별이 가지 않을 정도로 희미하게 미소 지은 얼굴. 그 어떤 기척도 내지 않기에 느껴지는 존재에 대한 의심. 하데스는 그 모습을 조용히 바라보다가, 그녀를 향해 발걸음을 옮긴다. 오늘은, 관측회를 준비하기로 한 날이다.
“테오파네스.”
“아, 하데스 씨. 무슨 일인가요?”
“관측회의 건으로, 할 말이 있다.”
“아, 이야기하기로 한 게 오늘이었던가요? 시간감각이 없어서.”
이제야 약속을 떠올린 셰키나는 퍽 미안하다는 어조로 이야기하지만, 여전히 표정에는 변함이 없다. 은은한 미소와 희미한 인상. 나긋하게 휘어져 빛을 받지 않는 눈동자. 그러나 그녀가 눈을 내리까는 순간이면 그 눈가에서 금빛이 반짝인다. 셰키나의 눈동자 깊은 곳에 있는 진청색에 홀린 하데스에게, 그녀는 나직하게 이야기한다.
“늦었지만, 갈까요.”
으레 의자를 뺄 때면 나던 ‘드르륵’ 하는 소리조차 나지 않는다.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들리지 않는 옷감이 스치는 소리. 그녀가 환상이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은 오직 그 소리뿐이다. 그녀는 늘 그렇게, 그렇게나.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하데스는 문득 입술 끝에 ‘너는 괜찮은가?’ 라는 질문이 걸리는 것을 자각한다.
저렇게나 아무렇지 않은 표정이, 그녀에게는 일상인가? 실로 모든 생활이 은은한 미소를 띠며 바라볼 수 있을 정도의 무게로 느껴지는가. 그녀의 과거를 알고 있는 자이기에, 하데스는 묻고 싶어졌다. 그 표정 너머에 있는 감정을, 그녀는, 실로 괜찮은지.
“오지 않을 건가요?”
그러나 그녀의 재촉에 그는 모든 생각을 멈춰버린다.
“아, 아. 가지.”
“무슨 일인가요, 고민이라도 있나요?”
“별로. 그런 것은 없어.”
“그럼 다행이지만.”
그녀는 고개를 돌려 앞으로 걸어간다. 그 뒷모습에서, 하데스는 문득 사랑스러움을 느끼고, 저 자신을 혐오하기 시작한다. 그녀에 대한 걱정, 대답을 듣지 못한 질문이 뒤섞여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사랑은 끊이지 않는다. 그에게 허락되었는지조차 알 수 없는 감정이, 그를 속절없이 좀 먹고 있다. 아니, 좀 먹히는 것은 그녀의 행복이다. 감히 그가 바란, 아이도네우스의 성이다.
부원들과 다 함께 만든 천체모형이 매달려 있는 빈 교실. 믿기지 않는 행복과 행운으로 가득 찬 기억이 흘러넘칠 것만 같은 그 곳에서, 그는 제가 가장 불행하던 시절의 일상이 행복이 되어가는 방법을 논하고 있다.
“……날을 정하면, 분명 비가 올 것이다.”
“그건 문제가 되지 않아요, 하데스 씨. 제가 있잖아요?”
여전히 은은한 미소를 띠며 말하는 나긋한 말. 저 말이 하데스를 속절없이 무너지게 만든다. 진실로 그녀가 있어 괜찮다고 생각하게 만들고, 지금 모두가 행복하다고 믿게 만든다. 마치, 동화와 같이. Happy ever after로 끝나는 수많은 이야기들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고 들은 느낌이다. 그의 앞에 앉아있는 셰키나가, 그에게 그럴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그러면 그 날로 하지. 그날의 계절은…….”
“알 수 없으니까, 모두 준비하는 걸로 할─”
그 순간 하데스의 귀에 이명이 울린다. 삐─하고 길게 늘어지며 머릿속을 헤집는 소리. 저주의 일환이라 생각하며 그저 얼굴을 조금 찌푸리고 말아야 했을 그 순간에, 옷으로 가린 셰키나의 손목에서 익숙한 검은 얼룩을 본다.
순식간에 머릿속이 하얗게 변한다. 그가 떠올릴 수 있는 단어는 단 하나. ‘어째서?’ 어째서 그녀에게 불행이 닥치는가. 그녀는, 그녀는. ‘셰키나 테오파네스’는 강한 인간이 아니었던가?
수많은 단어들이 어지럽게 섞이고 휘몰아치는 가운데, 그가 내뱉을 수 있는 말은 단 하나였다.
“너도, 불행해지고 말았나.”
“……? 아.”
“어째서, 말하지 않았지?”
이명이 목소리가 된다. 죽어, 죽어, 죽어, 죽어버려. 어째서 너는 행복해지는 거야? 우리는 죽었는데. 감히 너 따위가 우릴 죽였어! 불행해져라, 불행해 져, 불행해 지라고. 행복이 네게 어울릴 리가 없어. 네가 행복해지기를 바라는 자는 모두 불행해질 거야. 네가 행복을 느끼는 그 모든 순간이 저 자의 지옥이 될 거야. 감히, 감히, 감히 너 따위가.
셰키나는 교복의 소매를 끌어당겨 문양을 가리려고 한다. 그 모습을 참을 수 없어, 하데스는 억지로 그녀의 손목을 붙잡는다. 옷깃을 조금만 걷어 올려도 보이는 거대한 문양. 지금까지 그가 몰랐다는 것이 기이할 정도로 선명하게 드러난 저주의 증거. 그의 귓가에는 아직도 악의로 가득 찬 목소리가 들린다.
이제야 알아차렸구나! 네가 사랑한 죄야. 감히 사랑 따위를 하니까 그렇게 되는 거야! 불행해져, 불행해 지라고. 영영, 네가 감히 바라서는 안 되는 행복을 바라지 말고 불행해 져!
깔깔거리는 목소리에 머리가 울리는데, 분명 그녀에게도 같은 목소리가 들릴 것임이 자명한데, 셰키나 테오파네스는 여전히 표정을 바꾸지 않는다. 아무렇지 않게, 그저 하데스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문득 참을 수 없는 두려움에 짓눌린 하데스가 소리쳤다.
“너는, 너는. 테오파네스, 너는 이 저주가 아무렇지도 않─”
“하지만 하데스 씨.”
셰키나 테오파네스는 그 은은하고 은근한 웃음을 지우지 않고, 그의 말을 끊는다. 감정에 격해진 그를 달래기라도 하듯 상냥하고 부드러운 어조로, 관측회를 논하던 때와 다름없이, 여상스럽게 이야기한다.
“이건 모르는 사람의 원망이잖아요?”
불행해져라.
“모르는 사람의 원망과 저주를 듣는 건 일상이에요.”
영원히, 죽지 못하는 삶 전체를 상처받으며 지내라.
“너무 그러지 않아도 괜찮아요.”
지금 그녀는 어째서 표정을 바꾸지 않는가?
하데스는 차라리 그가 고통 받고 싶다 생각했다. 아니, 묻지 않았으면 좋았을 걸, 하고 생각했다. 아니, 아니다. 그는 지금, 그녀가 이 일에 아무렇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닌가? 그녀가, 누군가의 원망을, 저주를 받아들이는 것이 그와 같이 일상이라서? 그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어서 안도했나?
어지럽다.
하데스 아이도네우스는 셰키나 테오파네스의 말을 듣는 순간 이해한다. 어째서 굳이 ‘모르는 사람’의 이야기를 하였는지. 그녀가 지금 무엇을 보고 있는지. 그녀가 죽였던 친구와 후배, 사랑했던 사람들, 떠나와야 했던 세계. 그 모두가 쏟아내는 원망. 그의 언급이 아니었다면 굳이 수면위로 끌어올리지 않았을 기억들.
아아.
셰키나 테오파네스는 저주를 아무렇지 않게 드러낸다. 희고 상처 없는 피부 위에 검고 흉측하게 박힌 원념. 그러나 그녀는 아무렇지 않게 손으로 한 번 털어내는 것만으로 저주를 지운다. 일상처럼, 여상스럽게. 은근한 미소를 띠고.
그냥 그대로의 표정으로.
“하던 이야기나 마저 할까요, 그럼.”
하데스 아이도네우스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 밖에 할 수 없었다. 혐오감이 입을 막아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2017.12.27 첫 업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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