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표정 짓지 말아요."
이제 목소리에 웃음기를 담을 줄도 알게 된 그녀는, 세계를 구했다. 분명 세계를 구했다. 운명을 보란 듯이 바꾸고, 제 몸을 제물로 삼았다. 수명을 날리고 수많은 인간들이 살아갈 세계를 주었다. 제가 살아갈 세계를 잃어버렸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하데스는 말을 잃었다. 그녀는 인간이다. 아무리 거대한 힘을 가지고 아무도 해 낼 수 없는 일을 해냈다고 하여도 인간이다. 절대적인 힘 앞에서 거부할 수 없고, 그녀는 거부할 의사조차 가지고 있지 않을 것이다. 그래, 그녀는 제게 가해지는 운명에서 벗어나려고 하지 않는다.
"옥상에 올라갈까요? 하늘, 예쁘네요."
"……그러지."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그는 알 수 없다. 이 빛을 희망으로 삼아 영원을 살아갈 자신이 있다. 허나, 어째서 그는 다시 욕심을 내고야 마는가. 그에게 행복할 자격을 주고, 불행을 거두어 간 그녀에게 어째서 또다시 연심을 품고야 마는가. 그는 제가 과하다는 사실을 알았다. 허나, 그녀는 너무나 찬란하여.
신인 그 보다 더욱 신 같아 보인다.
"테오파네스."
"셰키나입니다. 현이라고 불러도 괜찮아요."
"……현."
"네, 전 여기 있어요."
그가 하지 않은 말을 그녀는 알아듣는다. 그가 한 말의 의미가, 이름을 통해서 은유된다. 테오파네스. 신의 현현. 그녀는 신인 저보다 신 같았고- 셰키나. 신이 머무는 곳. 그녀는 지금 제게 머물러도 된다 이야기했다. 그녀 자신으로 바라보아도 괜찮다 말한다. 그러니 그가,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불행하고 어두운 세계에 내리비치는 빛을, 희망을.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일렁이는 감정은 주체할 수 없이 흘러내린다. 이미 족쇄가 풀려 그는 신화에 거리낄 것이 없다. 흘러넘치는 감정, 억지로 내리누른 사랑. 모든 것은 얽히고 뭉쳐져서 한 마디의 말이 된다. 절대 내뱉을 수 없는 말이, 영원히 품고 갈 한 마디의 말이 된다.
"곧 이 학교도 안녕이네요."
"그렇군. 너도, 작별인가."
"그렇겠죠? 다시 만날 수 있으려나요."
"찾아가겠다."
"그 말, 기대할게요."
현은 웃는다. 가려진 눈. 그녀가 눈을 가리게 된 이유를 본 적 있다. 그녀는, 예전에도. 그와의 첫 만남부터 그랬다. 그녀는 오직 그를 지키려고 들었고, 한참 약하고 작은 주제에 제 품 안의 모두를 끌어안으려고 들었다. 그의 불행마저. 인간으로서는 감히 상상할 수 없는 거대한 외로움과 상처마저, 제게 털어놓아도 괜찮다 이야기한다.
그는 얼굴을 가렸다. 이대로는, 자신이 없다. 더 이상 능력을 억제하는 일이 힘들어져서, 그는 그대로 힘을 놓아주었다. 쩡, 하고 공기가 깨져나간다. 등 아래로 넘실거리는 머리카락. 머리를 찌르는 가시관의 감촉이 그를 현실로 되돌린다. 이제 그녀도 그를 두려워하겠지. 아니, 그러지 않을 사람이다. 허나, 두려워지고 만다. 그는 그녀를 잃을까 두려워한다.
"오랜만이네요, 그 모습."
허나 아무리 두려워하여도 그건 현실이 되지 않는다. 그녀는 그저 조용히 저를 바라보고, 가까이 다가올 뿐이다. 시야의 아래에서, 감히 신을 두려워하지 않고. 눈 깜짝할 사이에 그의 가시관을 벗겨낸다.
"이거, 하고 있으면 아프잖아요."
"어이, 잠시만! 놓아라. 분명 손이 다쳐서,"
"겨우 이 정도 상처로 죽진 않아요. 몇 분이면 나을 텐데."
그의 관은 그저 나무가 아니다. 망자의 원한, 원념, 고통이 모여 만들어 진 관. 그를 옥죄고 영원히 괴롭게 만들 주박. 그런 물건을 그녀는 아무렇지 않게 다룬다. 아무렇지도 않다고 이야기한다. 분명 그녀의 팔을 타고 넘실거리는 검은 물결이 보임에도 불구하고.
"좀 앉을래요?"
그는 건물의 난간에 걸터앉는다. 등으로 비치는 햇살은 따뜻하다. 그의 앞에 선 그녀도, 이토록 따스하겠지. 그의 불행한 인생에 다시는 오지 않을 행복. 불행을 거두어간, 인간. 인간이다. 그녀는 결국 인간이었다.
그는 눈앞에 보이는 그녀를 끌어안았다. 품에 가득 들어차지도 않는다. 한 팔로 감아 들 수도 있을 것 같은 몸. 조금 힘을 주면 멍이 들고 어딘가 부러질게 확실한 몸. 희미한 체향이 풍겨온다. 그녀만이 가지고 있는 향기. 잃어버린 고향의 향. 그는 그녀가 난감해 할 것을 알면서 조금 욕심을 부렸다. 어차피, 이 순간도 모두.
"해가 지네요, 하데스."
"모두 잊히겠지. 지금 이 순간도, 상냥한 순간도. 네 상냥함마저도……."
"그렇겠죠."
그녀의 팔이 그의 머리를 안는다. 한 손으로는 그의 가시관을 들고, 한 팔로는 그를 끌어안는다. 그는 어리광을 부리듯 그녀를 더욱 강하게 끌어안는다. 가녀린 허리가, 조금만 힘을 주면 스러질 것 같은 몸이 안타깝다. 허나 그녀가 그보다 강했다. 어떤 순간이라도, 그녀가 그보다 강했다.
"잊히겠죠. 저는 잊어버릴 거예요. 아마 셰키나 테오파네스는 그대로 죽겠죠. 존재하지, 않은 존재가 되어서."
"……."
"그래도, 사라지진 않아요. 당신의 기억 속에, 모두의 기억 속에 조금씩 남아있겠죠. 인간은 잊어버려도, 신은 기억하잖아요."
그는 입술을 깨물었다. 볼품없이 울고 싶지는 않았다. 그를 끌어안은 손은 너무 가냘팠고, 등에 떨어지는 온기는 필요 이상으로 따뜻했다. 하지만 해가지면, 그리고 별이 사라지면, 이제 우리는 졸업을 한다. 한낱 꿈같았던 학창시절은 끝이다. 이미 그들이 학교를 다닐 나이가 아니라 하더라도, 만들어진 세계에서 만들어진 학교라고 하더라도, 한 순간으로 끝날 학창시절이라도. 분명 빛나고 아름다웠던 추억이,
끝이다.
"하데스 씨, 원한다면 해가지지 않게 할 수 있어요."
그녀는 그렇게 말했다. 지는 해를 바라보면서. 저 먼 어딘가의 닿을 수 없는 고향을 그리며.
그는 차마 해가 지게 해 달라 할 수 없었다.
> | 노을진 하늘 | 2018.11.18 | 2018.11.18 | 4 |
6 | 키스 | 2018.11.18 | 2018.11.18 | 5 |
5 | 우천 | 2018.11.18 | 2018.11.18 | 3 |
4 | [ 드림 평일 전력 ; DOLCE ] ❥ 제 77회 주제 : 만약에 | 2018.11.18 | 2018.11.18 | 8 |
3 | 시각 상실 (1) | 2018.11.18 | 2018.11.18 | 11 |
2 | 드림전력 [당신의 수호천사] 167회 주제 '목도리' | 2018.11.18 | 2018.11.18 | 5 |
1 | 기억 | 2018.11.18 | 2018.11.18 | 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