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u cannot see this page without javascript.

 creative

우천

admin 2018.11.18 19:02 read.3

  비가 온다. 아주 오랜만에 보는 비. 비가 오는 날은 전쟁이 떠오르지 않는다. 아니, 비 오는 날의 기억은 특히나 끔찍해서 떠올리고 싶지 않은지도 모른다. 나는 여전히 나를 확신 할 수 없고, 확언해야 할 일은 늘어난다. 글쎄, 나는 모르겠어. 유이, 넌 알아?

  인간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일은 어렵다. 어떻게 말해야할지 전혀 알 수 없어서. 수많은 일반화를 거쳐서 미화된 이야기를 들려주어야 할지, 제가 겪어온 이야기를 해야 할지 감을 잡을 수 없다. 그러나 하나 확실한 일은, 쿠사나기가 겪어온 세계는 제 것보다 상냥하다는 것이다. 그녀의 세계는 제 것보다 훨씬 따스하고, 안정되었다. 그래, 그녀의 삶은 투쟁과 피로 얼룩지지 않았다. 그녀에게 주어진 칭찬은 제가 얻었던 것 보다 따스했다. 우습게도 나는, 질투라도 하고 있는 모양이다.

  교실 창 너머로 보이는 빗물은 다를 바가 없다. 사라진 세계의 빗물도, 목적을 위해 만들어 낸 세계의 빗물도. 비를, 얼마 만에 보더라. 전쟁 내내 비가 오지 못했으니 아주 오래 되었다. 내가 맞았던 비는,

  갑자기 끔찍한 기분이 된다. 차임벨이 울린다. 점심시간.

 

 

  도망치듯 교실을 빠져나왔다. 떠올려서는 안 될 기억을 떠올렸다. 펜 대신 손에 쥐고 있던 스태프가 아프게 손을 찌른다. 생각하기 싫어, 생각해서는 안 돼. 억지로 이미지를 머릿속에서 밀어낸다. 도망쳐야, 도망쳐야 해.

 

 

  "키나씨, 점심은 안 먹게요?"

  "입맛이, 없어서."

 

 

  호의를 받아들일 수 없다. 그녀에게 어설프게 웃어주고는 밖으로 뛰쳐나간다. 계단을 이용할 여유도 없어서, 그대로 창문으로. 익숙한 부유감. 머리 위로 떨어지는 물방울은 차갑다. 아프게 피부를 때리고, 온 몸을 적신다.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심한 폭우. 이 속에서 나를 쫓아 올 사람은 없다. 이제 아무도 없다. 상실의 어감은 끔찍한데, 나는 의외로 괜찮다고 생각하고 만다.

  숲 속으로 하염없이 걸어 들어간다. 넓은, 탁 트인 공터를 알고 있다. 아마 오늘 오후 수업은 못 들어가겠지? 이런 기억을 품고 수업을 들을 수는 없다. 혹시 조금이라도 의식이 흐려진다면 분명 실수를 하고 말테니까. 이 기억을 통한 실수는 일어나서는 안 된다. 최소한, 상냥한 그녀의 세계를 지치기 위해서라도.

  언젠가 밤하늘을 보았던 공터는 아무도 없다. 우중충하기 그지없는 분위기가 마음에 든다. 그래, 이런 분위기가, 이런 풍경이. 그리웠어. 회색의 하늘, 명도가 낮아져버린 숲. 깨질듯이 아파오는 머리와 열이 올라 휘청 이는 몸. 익숙한 한기가 척추를 타고 돈다. 조금 있으면 또 붕괴가 시작 될 것이다. 그러면 나는, 또 과거로 빠져들겠지.

  팔에서 절그럭거리는 사슬, 서서히 열이 오르는 머리, 차갑게 식어가는 몸. 언젠가 내가 이 이야기를 글로 써 낼 수 있을까? 나는, 이 글을 소화할 만큼 성장할 수 있을까? 사라진 줄 알았던 열망이 희미하게 고개를 든다. 생존 본능과도 같은 열망이, 머리를 들고 나를 살리려고 발버둥 친다. 대답을 떠올리면 격통이 찾아든다. 흐윽, 작은 신음이 입 밖으로 흘러나간다. 죽고 싶어, 제발, 죽여줘.

 

 

  비가 내린다. 하염없이 비가 내린다. 앞이 보이지 않고, 나는 눈물인지 빗물인지 알 수 없는 것으로 엉망이 된 얼굴을 감싼다. 온 몸을 휘감은 사슬. 움직일 수 없는 격통. 몸을 옥죄는 힘도, 날뛰는 힘도 하염없이 강해진다. 비가 내린다. 아니, 피가? 아냐. 아니야. 나는 그 곳에서 빠져나왔, 어째서 그것을 탈출이라고 부르지? 너는 그것을 바랬니?

  자괴감이 목을 옥죈다. 능력을 억제하는 것도, 날뛰는 것도 모두 내 것이다. 괴로움은 날이 갈수록 심해진다. 언젠가, 죽음을 맞이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할 만큼. 차라리 이대로 죽어버리면 좋을 텐데. 내 의지가 아니니까. 아무런 죄책감도 없고. 아무도 없는 곳에서 죽은 시체는 서서히 썩어 문드러질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 이 세계가 사라지는 날이 되면 영영 찾을 수 없게 되겠지. 나는 아마 지윤이에게 가려나? 가면 뭐라고 말해줘야 하지. 사랑도 했고, 정말 신들을 만났다고? 우리를 버린 신은 없었다고? 신을, 감히 사랑했노라고?

  모르겠어.

 

 

  아무것도 모르겠다. 피로 젖은 몸에서는 혈향이 빠지지 않는다. 누군가를 죽여 해결하는 일이 익숙하다. 말로 부드럽게 해결하는 법을 잊었다. 내가 희생하고, 누군가가 희생하여 해결하는 일이 빨라서. 모두 상처받지 않는 법을 모른다. 그래서 부러워하는지도 몰라, 유이를. 그래서 더 필사적으로 거리를 두고, 멀리 도망치려고 하는지 모른다.

  전신의 피를 씻어 내리는 빗물. 끊임없이 붉게 물들어 스며드는 물. 이 피를 만들어 내는 이는 나다. 내가, 내가 과거에 얽매인 탓이다. 확실하게 쥘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어서, 나는 자꾸 과거로 표류한다. 어쩌지, 나는 구원하는 방법을 몰라.

 

 

  "사랑, 하는데. 나는 정말 좋아하고 있는데. 분명, 사랑하고 있는데."

 

 

  어째서 구원받지 못해?

  나를 구원할 사랑을 믿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수없는 이야기에서 사랑으로 누군가를 구원하는 것을 봐 왔다. 이렇게나 비현실적인 이야기라면, 내가 썼던 글의 한 장면이 되게 해 줘. 누군가 사랑하는 이가 나를 구원할 수 있도록, 나는 그로 인해 구원받고 일생을 희생할 수 있도록 해 줘. 내게 주어진 사랑은 너무나 거대하여 날 살리고 죽었다. 그렇다면, 나도 사랑을 해서 죽을 수 있지 않을까.

  그럼에도 나는 오직 당신에게 날 구원할 권리를 주었다. 당신이 원한다면 나는 내 상처를 드러내 보이고, 날 구원할 수 있도록 허락 할 것이다. 나를 살린 것이 타인의 사랑이기에, 사랑으로 살아가는 것은 그들에게 누가 되지 않을 테니까.

 

 

  "처량한 꼴이로군. 청승을 떠는 취미라도 있나."

 

 

  그럼에도 나는 당신이 나를 사랑하지 않으리라 믿어 당신을 택했다.

 

 

  "어떻,게?"

  "오후수업의 도우미는 너였다. 감히 내 수업을 망치다니, 좋은 담력이로군."

  "그랬습,니,까."

 

 

  흐느끼는 소리가 새어나와 몸을 구부린다. 듣기 좋은 목소리. 그는 내 상처를 들추지 않는다. 이리 피 흘리고 온 몸의 피를 빗물에 씻어내고 있어도 그저 내려다 볼 뿐이다. 비를 맞지 않는 몸으로, 차가운 인간의 눈을 하고. 그렇다, 결국 구원은 자신이 해야 하는 법이다.

  나는 나를 구원하지 않을 이를 찾았다. 그러나 그이를 사랑하여 가끔 구원을 바라고 마는 것이다.

 

 

  "일어나라. 수업이 곧 시작이다."

  "그건 아무래도 조금, 무리일, 것 같습니다."

  "호오?"

  "몸 상태가, 이래서."

 

 

  사슬은 이미 붉게 달아올라 화상을 입히고 있다. 어차피 능력으로 인한 환상이다. 발작이 지나가면 사라질 상처. 그럼에도 제 꼴이 우스우리라는 사실은 알고 있다. 그래, 내가 모르는 것이 무엇 있겠는가. 나에 대한 것을 모두 알고 있지. 외면하고 도망칠 뿐이다.

  흙바닥에 머리를 댄다. 비에 젖은 흙과 풀의 냄새.

 

 

  "하여튼, 귀찮은 녀석이다."

 

 

  쩡, 하고 공기가 갈라졌다. 등에 희미한 온기가 닿고, 사슬이 부서져 사라진다. 억제되었던 능력이 사방으로 튀어나간다. 해방감, 다급함. 사방에서 내리는 비가 피로 바뀐다. 끔찍한 기억은 재생된다. 아, 아아.

 

 

  "싫어, 이러기 싫어. 아냐. 내가 죽이지, 내가 죽였어. 어째서. 살리고 싶었는데. 나 때문에. 내가 약해서, 내가 조금만 더, 조금만 더 강했어도. 아, 아냐. 아니야. 미안해, 미안해, 미안해. 알아들을 수 없어서, 내가 모자라서……."

 

 

  몸 위로 떨어지는 액체가 점성을 가진다. 익숙한 향이 사방에 몰아친다. 아, 아아. 이러기 싫다고, 이래서. 나는.

 

 

  "꽤나 끔찍한 꼴이로군. 인간이, 그것도 어린 축에 드는 인간이 이런 곳에서 버텼다니. 그 점은 칭찬해 주겠다."

  "어째서? 왜, 어째서. 내가."

  "그대로 있으면 네놈의 몸은 붕괴했다.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싶었나?"

  "그랬다면 차라리, 이런 모습을 보지는 않았어요. 아, 저는 왜. 또. 피가, 피가. 제가, 제가 이렇게."

  "하찮은 환상일 뿐이다."

 

 

  그는 여전히 피에 젖지 않았다. 오직 나만 이 피 아래 서서 죄악을 뒤집어쓰고 있다. 또. 나 때문에 또. 이건 누구의 피? 내가 또 누굴 죽였지? 어째서 나를 살리기 위해서 다른 사람이 죽어야 하는 거야? 내가 더 강할 수는 없어? 모두를 살릴 수 있도록 강할 수는 없어?

  어째서.

 

 

  "네놈은 인간이다. 그것을 기억해라."

  "하지만, 저도, 분명."

  "겨우 능력을 가졌다고 동등한 존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나."

  "그렇지 않다면, 저는 어째서."

  "인간이기 때문이다. 뭐, 지금의 네놈은 이해하지 못하겠지."

 

 

  하염없이 높은 곳에서 내리 떨어지는 시선. 그는 손짓 한 번으로 내 환상을 깨뜨린다. 다시 비가 내린다. 피는 사라졌다. 흔적도 없이. 그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고. 이곳에는 오직 신과, 인간이 있을 뿐이다. 어떤 과거도, 미래도 없이. 오직 현재가 제 색을 짙게 퍼뜨리며 존재하고 있다.

  이런 식의 구원은, 나를 엉망으로 만들어.

 

 

  "수업이 시작할 시간이다. 어서 준비해라."

  "……네."

 

 

  고통이 사라진 몸을 이끌고 교정으로 돌아가는 길. 한참 앞서 나가는 그의 등을 보며 문득 생각했다. 지금 저 신은, 그 나름의 방법으로 저를 생각한 것이 아닌가. 울컥, 하고 올라오는 거부감이 이성을 잠식한다. 날 그대로 놓아둬. 제발.

  그럼에도 나는 그에게 감사해야 할 필요성을 느낀다.

 

 

  "제후티,"

  "그 이름은 지금 이 곳에서는 사용하지 않는다고 하였을 텐데. 무슨 용무냐."

 "감사합니다." 

 

 

  내가 어떤 표정을 짓는지 알 수 없어졌다. 나는 저 지혜의 신 앞에서면 모든 지혜를 잃어버리는 느낌이 난다.

 

 

2017.01.09 첫 업로드

7 노을진 하늘 2018.11.18 2018.11.18 4
6 키스 2018.11.18 2018.11.18 5
> 우천 2018.11.18 2018.11.18 3
4 [ 드림 평일 전력 ; DOLCE ] ❥ 제 77회 주제 : 만약에 2018.11.18 2018.11.18 8
3 시각 상실 (1) 2018.11.18 2018.11.18 11
2 드림전력 [당신의 수호천사] 167회 주제 '목도리' 2018.11.18 2018.11.18 5
1 기억 2018.11.18 2018.11.18 8

men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