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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약에, 내가 당신을 사랑하지 않았다면 좀 덜 괴로웠을까?

 

  조심스러운 그 한 마디가, 빌어 처먹게 아프다. 젠장. 그럼에도 나는 이 생각을 지우지 못함이, 본디 글을 쓰고 창작을 하려면 그 기본은 생각인 탓이다. 나는 생각하고, 상상하고, 이미지를 빚어내는 일에 너무 익숙해져있다. 당신을 사랑할 때는 차마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것들이 이제 흘러넘쳐서 나를 괴롭힌다. 만약, 내가 사랑을 아직 하고 있을 때 고백했더라면. 만약, 내가 당신에게 나를 구원해 달라 매달렸다면, 만약에- 우리가 연인이 되었다면.

  '우리'가. 나는 그 말이 문득 우리처럼 느껴졌다. 잘 길들인 동물을 가둬놓을 우리가 '우리'라는 발음을 가지고 나한테 매달렸다.

 

 

  도서관의 정적은 늘 거대한 몸집으로 나를 꾹 누른다. 나는 그 아래 눌려 바르작거리면서 문득 상상하고야 마는 것이다. 이런 곳에서 영생을 보내게 될 나 자신을. 그리고 그 너머에서 또다시 나를 응시하고 있을 신을. 만약에- 아주 만약에 말이야. 내 고백이 이루어져서 당신이 나를 구원했다면 어땠을까? 그러면 나는 세계를 구원하지 않고, 당신은 세계를 멸망시키지 않고. 그렇게 평화로운 시간을 보냈을까? 언젠가 다가올 멸망을 무시하면서? 그건 어떤 기분이었을까.

  나는 마치 글을 쓰듯 조심스럽게 당신과 함께했을 일상을 그려본다. 토트 님이 아니라 제후티라고 부르며, 셰키나 테오파네스가 아니라 현으로 존재하는 일상을. 내 힘은 전혀 강대하지 않아서 누군가를 지킬 필요가 없고, 당신은 나보다 강하지 않아서 나를 지킬 필요가 없다. 전쟁도, 갈등도 없어서 그저 우리는 존재하는 것이다. 서로의 일을 하면서, 나는 글을 쓰고. 당신은 기록하고. 무언가 지식에 대해 토론하면서, 억겁의 시간을.

  그 일상 속에서 나는 행복했을까?

  행복, 행복. 행복이 뭐지? 나는 행복이라는 감정을 모른다. 그건 격렬하게 달려들어서 모든 세상을 색채로 물들이는 감각과는 다르다. 누군가의 말을 애타게 기다리고 무슨 말을 하던 간에 심장이 조여드는 기분과도 다를 것이다. 그러면, 행복은 무엇이라고 생각해야 하는 거지? 행복이라. 언젠가 누군가 그랬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일상 속에서 행복이 있었다고. 그럼 말이야, 만약에. 내가 당신과 이루어져서 전쟁터를 돌아다녀도 행복했을까?

 

 

  내게 있어 전쟁은 일상과 같았다. 늘 피가 흐르고, 사람들이 절규하고. 나는 그 속에서 내 몸을 깎아 내어가면서 모두를 구하기 위해 아둥바둥했다. 허나 그 노력은 늘 부질없게 느껴지기 마련이라, 어느 날은 정말 죽고 싶었다. 당신이 나를 사랑했다면, 내가 당신하고 이루어진다면, 그런 날이 힘들지 않을까? 당신이 내 옆에 서서 내려다보고, 나는 그 눈을 올려다보면서 위로받을 수 있을까? 수많은 가정 아래 이미지가 피어난다. 문득, 글이 쓰고 싶어졌다. 수많은 가능성을 박제하고 빚어내는 일은 내 특기이다.

 

 

  만약에, 우리가 사랑했다면.

 

 

  우리 속에 갇힌 같은 단어들이 어지럽게 요동쳤다. 만약은 너무나 거대해서 그 미음 속에 나를 가두고 미음을 먹는 병자로 만들어 버린다. 그러면 나는 환상이라는 약을 지어 먹어야만 한다. 그 약을 홀짝이면서, 잘 길들여진 동물이 되어서 안주하는 것이다. 그게 싫어서 나는 만약을 싫어한다. 만 가지 약을 가져다주어도 치료되지 않을 나약함의 병을 죽도록 증오한다. 그러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만약은 결국 모든 것을 치료할 수 있어서 내 절망마저도 치료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오랜만에 펜을 든다. 아주 오랜만에 들어보는 펜이다. 이 펜이, 나를 아주 먼 곳으로 데려다 줄 것이다.

  한 자 한 자 엮어서 그려내는 일상은, 어쩌면 내가 당신과 영위했을 무언가. 인생에서 생으로 넘어가는 순간 너머에도 당신이 내게 함께 해 준다면 좋을 텐데. 그러나 나는 결국 막히고야 만다. 길게 묘사한 배경은 대단하지만, 상황을 구성할 수 없다. 내게는 그 어떤 조각도 없는 탓이다. 나는 당신이 쥐어주었을지도 모르는 사랑의 조각을 모두 내던져버렸고, 당신에 대한 내 사랑의 조각은 모두 불태워버렸다. 조각 없는 퍼즐 판은 무언가를 끼워 넣어 달라고 그저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수많은 가능성이 어지럽게 요동치지만 박제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그야, 내가 다 내던져 버렸으니까.

 

 

  문득 아름다운 목소리가 들렸다. 낮고, 오만한 소리. 깊게 울려서 심장을 얽매고 마는 그 목소리가.

 

 

  "무엇을 하고 있나. 방으로 돌아가라."

  "아?"

  "모르겠다는 눈은 하지 마라. 네놈은 예의라는 것을 잊었나?"

  "그야, 조금 더 있고 싶으니까요."

  "네놈은 지치지도 않고 지껄이는 군."

  "그야,"

 

 

  '당신을 사랑하니까?'

  사랑하고 물음표는 어울리지 않아서 내뱉지 않았다. 너무 들떠버렸네. 문득 그런 생각도 했다. 어차피 버린 사랑이지만, 글을 쓰고 내 스토리를 위해서 만들어낸 사랑은 쉬이 사라지지 않는다. 감정은 버린 지 오래지만 버릇처럼 당신을 사랑하는 척 행동하고 마는 것이다. 내 일상의 대부분이 당신에 대한 생각으로 차 있는 것은 다르지 않은 맥락이다. 아, 이래서 나는 만약이 싫다. 생각을 좀먹고 그 사이에 들어앉아서 내 사고체계를 엉망으로 만들어버리기 때문이다.

 

 

  "그야?"

  "아무것도 아닙니다."

  "실없는 놈이군."

  "그건 아니지만-"

 

 

  아. 또 버릇처럼 대답해버렸어. 책을 주섬주섬 팔에 모은다. 품에 빠듯하게 들어차는 이 무게가, 당신의 온기였다면 또 어떤 기분이 될까? 알 수 없어서 나는 결국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떠올리지 않았던 말을 하고야 만다.

 

 

  "있죠, 토트 님. 만약 제가 사랑한다고 말한다면 어쩔 거예요?"

  "쓸데없는 말을 하지 마라. 무슨 의도냐."

  "딱히 의도는 없고, 지혜의 신 이시니까요. 이런 걸 물어볼 데도 토트 님 밖에 없고."

  "니야니야 시끄럽다. 돌아가."

  "대답, 듣고 싶은데."

  "호오, 좋은 담력이로군. 지금 내 말에 반항하는 건가?"

  "그건 또 아니지만."

 

 

  만약이라는 게 있잖아요. 라고 말하려다가 삼켰다. 그 만약이 모든 것의 약인지, 나를 가두고야 말 만약인지, 모든 것을 가정하고 희망 품게 만드는 만약인지 어떻게 알고. 그러니까 내가 할 말은 없다. 그렇게 생각하고 뒤돌아가려던 참이었다.

 

 

  "나는 사랑이 알고 싶다고 말했다. 그 말을 거짓으로 들었다면 유감이군."

 

 

  아.

  문득 나는 사랑의 조각 하나를 손에 쥔 기분이 들었다. 

 
 
2017.01.05 첫 업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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