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엿 됐다. 아주 크게.
눈 뒤쪽에서 타들어가는 느낌이 잠시 난다. 고통이야 늘 차단해 두니 괴롭지는 않다. 허나, 그 뒤로 찾아오는 어둠. 앞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지금 시각이 날아간 건가? 시험 삼아 주변에 빛을 펼쳤다. 보이지 않는다. 젠장, 아주 확실하게 날아갔네.
조금 허탈한 기분이 되어서 몸을 뒤로 기댔다. 하필이면 나무 위에서 이렇게 될 게 무엇이란 말인가. 아무리 몸이 회복된다고 하여도 최소 이틀. 이틀은 앞을 보지 못한다. 심지어, 다리 근력도 같이 날아갔어.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신세다.
다시 말하지만 여기는 나무 위다.
“깔끔하게 망했네.”
어차피 아무도 듣지 못하겠지만, 허탈하게 중얼거려 보았다. 눈이 보이지 않으면 전령을 보낼 수도 없다. 그렇다고 무리하게 여기서 실체화를 사용했다가는 정말 사지가 날아갈 수도 있다. 아니면 청각이 날아가거나. 그러면 회복에 더 오래 걸리겠지.
결국, 여기서 최소 이틀은 보내야 한다는 소리다.
“전쟁 때나 이렇게 있었지. 지금은 어색한데.”
시야를 차단당한 상황은 익숙하다. 비상시에 날릴 수 있는 가장 큰 감각. 셀 수 없는 시간을 어둠 속에서 머물렀다. 이미 대충 주변을 감지할 수는 있어. 문제는, 아무래도 조금 있으면 기억이 묶일 것 같다는 것이다. 어쩌지. 눈이 나가면 메시지를 남길 수도 없지 않나. 정말 여기서 이틀을 버티기라도 해야 하나.
처음부터 이런 상황을 감안하지는 않았으나, 이 나무는 상당히 크다. 올라 올 때는 방해가 되더니, 지금은 도움이 된다. 제가 앉아있는 가지는 사람 한 명 정도는 굴러도 떨어지지 않게 생겼다. 잘 때의 일이라면, 하네스를 연결하면 된다. 어차피 매일 입고 다니니까. 문제는, 식량인가.
회복기 동안은 영양분을 몸 안에 만드는 방식으로 보충 할 수 없다. 그러다가 다른 부위가 날아가 버리면 악순환. 여차하면 아예 사지를 날릴 수도 있다. 거대한 힘을 다루는 일이라면 몰라도 세세한 컨트롤은 지금으로서는 무리. 결국 이틀 동안 통째로 굶게 생겼다는 말인데. 망할, 내일은 아예 의식을 못 차리겠군.
신호를 보내 이곳에 제가 있음을 알려 볼까 생각도 했으나, 이상하게도 딱히 가고 싶지 않다. 아무도 없는 곳. 무엇도 보지 않아도 되고, 오직 숲의 소리만 존재하는 곳. 무언가 신경 쓸 필요도 없이 느긋하게 구상이나 하면 된다. 소리도, 사람도 없이. 과거에 마음껏 얽매이며.
차라리 이대로 굶어 죽어버리기라도 한다면, 편할 텐데.
희미해지는 의식을 굳이 붙잡지 않았다. 눈을 감으나 뜨나 어둠은 변함이 없다.
희미한 흔들림. 분명 몸이 식었어야 하는데, 체온이 유지되었다. 왜 식었어야 했다고 판단했지? 야외에서 내가 왜 잠들어서, 기억이 날아갔나. 졸려. 노곤하게 풀린 몸이 기상을 거부한다. 일단 눈이라도 떠야, 아. 나 지금 눈이 멀었지.
제 다리는 몸을 지탱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니, 분명 이동은 타인에게 의존해야 한다. 그럼 지금 날 옮기는 건 누구지. 꽤 높은 위치에 안겨 있는 것 같은데. 이 정도 키에서 날 안을 사람이, 누구 있더라? 호? 민우? 멍한 머리가 사람의 이름을 떠올린다. 허나 돌아온 의식은 그들의 죽음을 이야기한다. 나를 안고 옮길 사람은 더 이상 없는데.
그럼, 여긴 어디지?
“……의식을 차렸나.”
“……여기가, 어디 입니까?”
“……학교로, 돌아가는 길이다.”
“학교?”
모르는 목소리. 어딘가 익숙한데. 허나 제대로 떠오르지 않는다. 날아가 버린 기억은 시각과 함께 돌아올 테니, 지금은 포기해야겠지. 생김새를 알면 대충 떠오르려나? 손을 뻗어 그의 얼굴을 만진 건 거의 무의식적인 반응이었다.
처음 손에 닿아 오는 건 머리카락이다. 짧게 잘린, 투블럭? 그러나 어느 부분은 완전히 밀려있다. 조금 거친, 남성 머리카락의 표본. 그리고 손끝에서 턱 걸리는 피부. 광대뼈를 지나 눈 아래로 올라가면 조금 피곤한 기색이 읽힌다. 무언가, 고민하고 있나?
손끝에 힘을 주었을 무렵, 그의 팔이 흔들린다. 몸의 중심을 잃을 정도라서, 다급하게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단단하게 근육이 잡힌 몸은 저를 떨어뜨릴 것 같지는 않았지만, 그냥 본능 같은. 목에 팔을 두르고 나서야 그는 정신을 차렸다.
“……미안하다, 사과하지.”
누가 들어도 크게 미안해하는 목소리라서, 저는 답지 않게 위로의 말을 하고야 만다.
“아니, 당신이 그렇게 말할 일은 아닙니다. 제가 너무 갑작스럽게 행동했으니까요. 그, 잠시 얼굴 윤곽을 만져 봐도 괜찮겠습니까? 젠장, 말이 이상해지네요. 누구인지 확인하기 위해서입니다.”
“……? ……상관없다만. ……허나, 누구인지 확인하기 위해서라면 눈을 뜨면 되지 않나.”
“시각이 아예 날아갔습니다. 이틀 정도. 더불어 기억도 같이 날아간 덕에 여기가 어딘지도 모르겠군요. 누구인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토르, 메긴기요르드. 북유럽 신화의 신이다.”
“신화……? 죄송합니다만, 제 이름이 무엇이죠? 그리고 여기는 어디입니까.”
“……셰키나 테오파네스. ……이 곳은 신들의 교육을 위해 만들어진 곳. 모형정원.”
“저는 그런 이름입니까.”
도대체 저는 무슨 장난을 쳐 놓은 것인가. 히브리어랑 그리스어. 신화에서나 사용하던 언어로 이름을 지어놓다니.
희미하게 떠오르던 기억마저 침잠한다. 무언가, 놓치고 있는 것이 있는데. 분명 제 마지막 기억은 전쟁터이다. 신, 신이라. 능력자를 지칭하는 단어가 아니라 정말 신을 지칭하기 위해 사용되었나? 혼란스럽다. 이상하게 익숙한 목소리, 주변을 경계하지 않는 몸. 억제되지 않은 능력.
시야를 되찾는데 이틀이라고 확신한 저는 도대체 어떤 근거로 판단했지? 분명 제게는 회복능력이 없어 마땅한데, 몸은 서서히 회복되고 있다. 능력으로 만들어낸 회복력이 아냐. 망할, 묶인 기억 속에 내가 알지 못하는 부분이 너무 많다.
하나라도 더 많은 조각을 찾아야 해.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다시 손끝이 얼굴의 윤곽을 더듬는다. 왼쪽은 짧게 밀려있었는데, 오른쪽은 아니다. 차갑게 얼어붙은 손아래 눌린 피부는 따스하고, 거칠지만 거슬릴 정도는 아니다. 전체적으로 단단하고 믿음을 줄 만한 인상. 눈이 보이지 않으니 확신할 수 없지만 미남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허나 그와 별개로 옷 아래 느껴지는 몸은 단단하게 근육이 잡혀있다. 그냥 단련한 것이 아닌, 실전에서 구르고 살아남은 몸. 아무래도 전사 같은데.
이 정도라면 분명 손꼽히는 전투인원이다. 육체파라면 제가 가장 취약한 자. 그럼에도, 내가, 경계하지 않고 있다고?
“혹시 제가 당신이랑 연인 관계였습니까?”
“……아니다.”
“그럼 꽤 믿거나, 특별하게 여겼나보네요.”
또 흠칫했다. 내가 하면 안 될 말을 했나? 갸웃했지만 현재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그를 자각하며 딱딱하게 굳어있던 몸에서 힘을 뺀다. 친구들 이외의 존재와 이런 관계를 구축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셰키나, 라는 나는 도대체 무엇을 하고 다녔던 걸까.
뭐, 별로 상관없겠지.
“지금 학교로 가신다고 했죠? 도서관으로, 데려다 주실 수 있을까요.”
“……당연히 그 곳으로 가고 있었다만. ……기억을 잃었다면서, 그렇게 판단한 이유가 궁금하군.”
“그거야, 저는 분명 도서관에서 오랜 시간을 보냈을 테니까요. 그러면 거기 있는 사람이 절 알고 있겠죠.”
예전부터 도서관은 제 아지트나 다름없는 곳이었다. 그러면 그 곳의 사서랑 꽤 깊은 관계를 맺었을 터. 대충 제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물어 보면 괜찮은 답을 얻을 수 있겠지. 퍽 이성적인 방식으로 생각을 전개했으나, 분명 마음 속 어딘가에서 거부감이 일었다. 마치 그 곳에 가면 좋지 않으리라 경고하는 듯.
허나 그건 쉬이 흐려지고 말 감정이다. 눈앞이 보이지 않으니 의식이 쉬이 밝아지지 않는다. 여전히 밀려들며 저를 멀리 보내는 졸음. 뜨나 감으나 차이가 없다지만 눈을 감아 보았다. 조금 어리광을 부려도 괜찮을까.
“저는 잠시 잘 테니까, 부탁드리겠습니다.”
“……잠시, 묻지. ……전쟁을 겪었다고 들었다. ……어떻게 그렇게 쉽게 나를 믿지?”
“아마 기억을 잃기 전의 제가 전적으로 신뢰했을 테니까요. 한 번 믿은 사람이라면 또 믿지 않을 이유가 있나요? 아, 사람이 아니라 신이라고 했던가.”
여상스러운 대답. 당연한 것을 묻는 이에게 할 말은 이 정도 뿐이다. 전쟁은, 떠올리고 싶지 않아. 눈앞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은 지금 나를 돕는다. 암흑위에 이미지를 뒤집어씌우는 일은 어려워서, 눈앞에는 붉은 색만 맴돈다. 저 멀리서 울리는 비명. 억지로, 눌러서.
서서히 흐려지는 의식은 글자를 흩어놓는다. 문장, 단어, 글자, 자음과 모음. 점.
제가 깨어났다는 사실을 인지하는 데는 꽤 걸렸다. 앞이 보이지 않는다는 건, 이래서 불편하구나. 흐릿하게 돌아온 이성. 시각을 제외한 감각에 파악을 맡긴다.
사방에는 책의 향이 감돌고 있었다. 연대가 오래된 종이들에서 풍기는 갈색의 향. 귀가 먹먹해지는 정적. 익숙한 감각. 도서관이구나. 꽤 거대한 공각이네. 아, 책 읽고 싶다.
이런 한가한 생각을 할 만큼 몸이 나른하게 풀려있다. 나 여길 정말 편하게 여겼나봐. 그럼에도 어딘가 긴장감이 남아있어서, 여기서 불편한 사람을 만났나 싶을 정도다. 젠장, 도대체 과거의 나는 뭘 하고 다닌 거야. 셰키나라는 가명을 썼을 저에 대해서 가만히 고민해 보았다. 전쟁이, 끝나고. 무슨 일이 있었기에.
사람의 기척. 목소리가 들렸다.
“일어났나. 정신을 차렸다면 그렇게 눈을 감고 있지 말고 제대로 움직여라. 어쩌다가 숲에서 정신을 잃었지?”
“그러게요. 토르, 라는 신이 말해주지 않았나요? 저는 기억을 잃었다고.”
“그 말을, 믿으라는 건가.”
“진실입니다.”
목소리를 듣는 순간 기묘한 긴장감이 고조된다. 기대감과 닮은 그것은 이성을 마비시키고 마치 그래야 한 다는 듯 명령한다. 심장께가 저릿하게 굳어서, 그의 말을 기다리게 된다. 이런 감각은 익숙하지 않은데. 언제 이런 느낌을 받았었지? 한 번도 겪어 본 적이 없는 감정이다. 제가 아는 것 중 이것과 가장 닮은 것은, 사랑?
그러니까, 지금 내가 저 사람을 사랑하고 있는 건가?
자각과 동시에 웃음이 솟구쳐 오른다. 지금, 내가? 이 내가? 차마 웃지 못하고 저 자신을 매도한다. 어리석구나, 셰키나, 셰키나 테오파네스. 무엇을 위해서 사랑을 택했니? 무엇을 위해서. 네게 주어진 사랑이, 무엇이었는지 잊었나.
곱게 빚어내었던 과거를 떠올리다가, 결국 의미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셰키나가 어떤 사람이었든, 저는 결국 현의 잔상. 그녀가 기억을 되찾으면 사라져버릴 망령. 그러니 괜찮다. 그녀가 하지 못할 말을 하여도.
“그래서 고압적이신 분. 당신의 이름이 무엇입니까? 제가 뭐라고 불러야 할까요?”
“토트 카도케우스. 토트 님이라 불러라. 그것 말고는 불허하지.”
“그런가요. 그럼 묻겠습니다. 토트 님, 제가 당신과 어떤 관계였나요?”
“네놈이 알지 않나. 연인이었다.”
“거짓말.”
반사적으로 말이 튀어나온다. 이 감각은 연인에게서 느낄 것이 아니다. 그가 그 말을 꺼내는 순간 온 몸에 소름이 돋지 않았나. 극렬한 거부감. 확신할 수 있다. 그와 나는 연인이 아니다.
눈이 보이질 않으니 그의 표정을 알 수 없다. 감정을 모르니 답답하기 짝이 없어. 두려움일지 모르는 사랑을 억누르며, 여상스러운 목소리를 뽑아 올린다. 거대하고 고즈넉한 공간 속에서 느직하게 울리는 목소리는, 어딘가 질척하기까지 해.
“장난이 아닌 진실은 무엇인가요.”
“네가 나를 사랑하고 있었다.”
“역시, 그랬죠? 외사랑 이라니. 안타까운 셰키나 테오파네스. 어리석기도하지.”
“호오. 자신일 인간에게 하는 말로는 어울리지 않는 군. 그리 확신하는 이유가 있나?”
“어째서 다들 제게 이유를 물어보는 건지 모르겠네요. 감입니다.”
어깨를 으쓱한다. 못마땅한 기운이 사방에 흘러내린다. 역시, 저 사람. 익숙한 계열이다. 토트, 면. 이집트의 신? 아마 지혜, 도서관, 또 무엇이 있었지. 후대에 헤르메스랑 동격으로 취급 되었고, 중심 숭배지는 헤르모폴리스. 따오기 머리를 한 신으로,
새 머리? 설마 내가 새 머리에 반한 건 아니겠지. 문득 치고 올라오는 생각에 작게 웃음 짓다가, 눈을 감았다. 어차피 보이는 것의 차이야 없다지만, 그저 기분을 내기 위함이지. 지금 제 눈이 어떤 색을 하고 있을지 궁금해졌다.
“저기 토트, 님? 제가 당신 얼굴을 만져 봐도 괜찮을까요?”
“좋은 담력이로군. 왜 그러지?”
“제가 새 머리에 반했는지 궁금해서요.”
“애초에 인간의 몸을 입은 신이 이형을 취하고 있으리라 생각하나?”
“아, 인간의 몸을 입었습니까?”
“네놈은 정말로 기억을 잃었군.”
“사랑했을 이에게, 거짓말은 하지 않습니다.”
말장난처럼 웃었다. 못마땅함이 강해지는 그의 앞에서, 조용히 반응을 기다린다. 이런 이들은, 실로 익숙해서. 그는 조금 있으면 제 예상처럼,
“허락하도록하지.”
직접 그의 얼굴로 제 손을 대어 줄 것이다.
꽤 따스하고 큰 손에 이끌려 닿은 그의 얼굴은, 알 수 없는 감상을 일으켰다. 벨벳처럼 손가락 아래서 부드럽게 미끄러지는 피부. 광대즈음에서 턱 아래까지 미끄러뜨린 손가락은 미미한 열기를 머금어, 조금 뜨겁다. 부러 아무렇지 않은 척 움직이면 그의 오른쪽 눈 부근에서 만져지는 안경의 테. 모노클? 손등에 걸리는 금속장식이 유난히 차갑다.
그 옆으로 미끄러뜨린 손은 머리카락에 닿는다. 머리카락 일부를 기르고 장식을 매달아 놓았네. 부드럽기 그지없는 감촉. 꽤, 짧다. 손가락을 좀 더 밀어 손바닥으로 그의 얼굴을 느낀다. 날카로운 눈매를 부러 꾹,꾹 누르고. 손바닥 아래 잡혀있을 볼을 상상하면서, 완전히 끊어지는 이성 너머로, 당신에게 해야 할 말을.
“정말, 사랑할 만한 얼굴이네요.”
대답은 듣지 못했다.
2017.01.01 첫 업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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