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다시 해가 졌다. 이제 도서관 이용시간이 끝났다는 말이다. 아, 젠장. 떠나기 싫은데. 하루에도 다섯 번 씩 하는 생각이지만 한 번 더 반복해 봤다. 내 방으로 돌아가기 싫어. 사방에 가득한 책이 주는 안정감을 포기하기란 쉽지 않다.
책 밖으로 벗어나면, 끔찍한 일들 투성이야.
투정 같은 생각을 멍하니 하다가, 현실을 받아들인다. 어차피 여기 계속 있어봤자 먹을 게 욕 말고 또 뭐가 있겠는가. 책의 마지막 한 줄을 탐욕스럽게 집어삼켰다. 또 내일 학교가 마칠 때 까지는 안녕이네.
미미한 기대를 담아서 선생님 쪽을 바라보았지만, 저 쪽은 전혀 미동이 없다. 조금 있으면 쫓아내겠지? 좀 더 버텨볼까. 하지만 딱히 미움 받고 싶지는 않으니까 대충 책을 정리한다. 팔랑팔랑 책장을 넘기는 속도가 경이롭다. 좀 아름답기도 하고. 나도 저렇게 빠르면 좋겠다.
아아, 진짜 여기 평화로운 분위기가 좋아. 하루 정도는, 여기서 있고 싶은데. 몇 만 권의 책으로 가득 찬 곳에서, 밤을 보내고 싶은데. 투정어린 생각들을 하다가 모두 집어 삼킨다.
느릿느릿한 몸짓이지만 어차피 길게 할 것도 없는 일이다. 미적미적 움직이면 또 저 쪽에서 쫓아내겠지. 느릿하게 인사를 남긴다. 아쉬움이 뚝뚝 떨어지지만 어차피 숨길 생각도 없다. 동정이라도 받으면 좋겠네.
"실례하겠습니다."
이쪽으로 시선을 던지지도 않는다. 딱히 기대도 안 했지만. 저 옆모습까지 잘생겨서 조금 설렜다고 하면 많이 병인가? 이건 별로 티내기 싫은데. 마른세수를 하고 있으면 아누비스만이 제게 손을 흔들어 준다. 저도 마주 손을 흔든다. 몸이 무거워.
아, 좀 이상한데.
몸 상태를 자각하는 순간 냉기가 몰려든다. 아무래도 이거 좀 위험해. 익숙한 감각이 아니다. 세계가 바뀌어서 능력의 통제도 불안정한데. 휘청거리는 몸을 억지로 바로 세운다. 무리를 했을 때와 비슷한 감각. 가벼운 목례를 할 때 머리가 핑그르 돈다. 미치겠네, 통제가 안 돼.
그래도 아직 안 된다. 여기는 아냐. 최소한 쓰러져도 내 방에 가서, 학교를 벗어나서.
도서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온다. 노을, 창문 밖으로 펼쳐져있는 노을. 노을의 기억. 그, 끔찍하기 그지없던.
숨이 막힌다. 기도를 누군가 틀어쥐기라도 한 양 공기가 흐르지 못한다. 안 돼. 몸이 통제를 벗어난다. 냉기, 냉기가 몰려들어서. 아아, 아니야. 내가 그러고 싶었던 게, 아니야. 몸이 쓰러진다. 볼품없이 바닥을 긴다. 해일처럼 몰려드는 무력감, 고통. 죽음의 기억. 단절감.
아, 아아.
아파. 아파. 이러기 싫어. 아파. 무서워. 외로워. 죽을 것만 같아. 억지로 몸을 움직이지만 제대로 되지 않는다. 시야가 흐릿해져. 여기서, 이러면. 마지막 이성이 저를 채찍질한다. 코끝에 혈향이 스친다. 선명하게 떠오르는 풍경. 익숙한 감각. 이러다가는 능력을 제어할 수 없게 된다. 그러면, 모두 보여 버릴 거야.
싫어, 그건 싫어.
억지로 바닥을 긴다. 몸이 무너져 내리는 느낌이 든다. 젠장, 이대로 기숙사까지 가는 건 무리다. 아무래도 나아질 때 까지는. 여기 있어야. 몸을 세우고 싶지만 제대로 되지 않는다. 바닥을 기어 복도 벽에 기댔다. 아파. 아파. 혹시 누가 지나가면, 안 되는데. 모습을 숨겨야 한다. 이런 모습을 누군가에게 보일 수는 없다. 최소한 눈에 보이지 않게라도,
제 위에 이미지를 덧씌우는 순간 쓸고 지나가는 격통. 몸이 부서지는 느낌. 아파.
능력이 통제를 벗어난다. 끌어올린 능력이 사라지지 않는다. 기억이 해일처럼 머리를 덮친다. 억지로 내리누르려는 저를 비웃기라도 하는 듯 더욱 강해진다. 그 끔찍한 풍경이 눈앞에 보인다. 향이, 소리가. 듣기 싫어, 보기 싫어. 날 놓아줘.
어느 날, 교정에서 네가 내게 말했다.
'너는 세계를 멸망시킨다면 어쩔 거냐?'
'글쎄? 왜, 하고 싶냐?'
'어.'
'그러냐. 막을 거다.'
'그 지랄 맞은 미래가 있는데?'
'너랑, 친구들이랑, 후배랑, 가족이랑. 또 선배들도 있네. 그 사람들은 행복해야 할 거 아냐?'
'그런가.'
씨발, 이 때 나는 운명을 알았다. 이대로 간다면 무언가 크게 무너지는 운명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래서, 그래서 할 수 있는 한 솔직하게 대답했는데. 그게, 널 망쳐서. 차라리 내가 도울 수 있다 이야기할 걸. 그러면, 그러면. 비극을 막을 수 있었을까.
저 때도 노을이었어. 노을이었어. 노을이었다고. 저 한마디가 모두를 망쳤다. 그가 세계를 멸망시키겠다 마음먹었다. 내 친구가, 가족이, 세계가 모두 죽어버렸다. 내가, 내가 더 잘했어야 했어. 내가 좀 더 노력해야 했었다고.
더욱 노력했다. 내가 너를 빼면 가장 강한 능력이었으니까. 물리력이 없어도, 만들어낼 수 있었다. 혼자서는 무리지만, 모두와 함께였으니까.
함께라서 어떻게 되었지?
'제발, 제발 여기서 나가게 해 줘. 니가, 씨발 니가 이 돔을 만들었잖아!'
대답하지 못했다. 이 돔이 무너질까봐, 대답하지 못했다. 너를, 우리를 가두어서 죽이고 있는 이 돔이, 무너질까봐. 오래 봐 온 친구들보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수많은 생명이 너무나도 소중해서. 그리고, 너는. 그렇게 절규하던 너는. 뭐라고 했더라?
'미안해.'
그러고는 죽어버렸어. 내 앞에서, 내가. 미숙해서. 차라리 너라도 내보내 줄 걸. 아니, 진작 내가 죽어서 해결 할 걸. 할 수 있었는데. 내가, 무서워해서.
"흐윽……."
입 밖으로 신음이 튀어나온다. 아파. 능력을 멈추려고 하면 온 몸에 격통이 내달린다. 앉아있기도 힘들어서 바닥에 웅크렸다. 이대로 작아져서 사라질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뺨을 타고 올라오는 냉기. 아파. 추워. 외로워. 지독한 단절감이 나를 괴롭힌다.
죽고 싶어. 날 죽여줘.
기억은 멈추지 않는다.
'야! 수업 땡땡이치자!'
'미친 자야. 지금 수업 학년 부장이잖아.'
'창문으로 뛰어내리면 못 잡을 걸.'
'오, 괜찮네.'
시끌벅적하던 교실. 즐겁게 소리치며 창문 밖으로 몸을 내던지고, 친구가 받아 주리라 믿었던 시간. 그리고, 다. 다 죽어버렸어. 내가 전쟁을 좁은 범위에 국한 시켜서. 내가 가둬버려서. 다 나를 원망하면서 죽어버렸어.
귓가에서 계속 목소리가 울린다. 빌어 처먹을 기억력. 씨발, 잊어버리지도 못해. 아니, 잊어서는 안 돼. 기억의 바다가 범람한다. 가장 강렬한 기억이 넘쳐흐른다. 아냐, 잊게 해 줘.
'이 방법뿐이잖아.'
내가 약해지는 바람에, 모두 죽을 뻔해서. 할 수 있는 일을 했다. 심장을 파고들던 검의 감각. 나를 대신하여 죽은 자들의 피로 만들어 냈던 결계. 그의 눈에 비쳤던 나는 금안과 날개를 가지고 있었지. 갈기갈기 찢긴 옷 조각, 겨우 속옷과 그 옷 조각으로 상체를 가리고. 피에 젖지도 않은 모습으로, 이질적으로.
그리고 우리는.
'행복해졌으면 해. 우리 모두를 대신해서.'
그리고 내가 돌아갈 곳은. 오직 내가 행복하기를 바라면서. 너는 나를 사랑한다고 말했어. 사랑이 뭐야? 내가, 어떻게 하면 알 수 있을까?
눈물이 흐른다. 얼굴을 적시는 눈물이 너무 선명한 감각을 남긴다. 온 몸에 소름이 돋아서, 추워서, 외로워서. 너무 무서워서. 나는 그냥 죽고 싶었는데.
예전 학교라면 보건실에 갔다. 아니면 병원에. 하지만 이곳의 보건실은 분명 그 신이, 나는 그에게 이딴 꼴은 보이고 싶지 않아. 조금만, 조금만 더 회복되면. 움직일 수 있게 되면 학교 밖으로 나가자. 아무도 없는 곳이면 이미지를 보이지 않아도 돼.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발걸음 소리도 들린다. 아파. 소리가 아파.
몸을 안아드는 손길이 있다. 괴로워. 손의 온기가 지독하게도 괴롭다. 척추를 타고 내달리는 감각이 지독하다. 춥고, 외로움의 정수와 같아서, 너무 강렬해서 아픈 감각. 언어로 표현할 수 없어서 사방으로 이미지가 쏟아진다. 흔들린다. 누군가가 있다. 나를 알고 있어. 눈물을, 거둬야.
"여전히 시끄러운 놈이다. 아누비스, 그 곳에 내려둬라."
"응응!"
흐으……. 작은 목소리를 내면서 몸을 옹송그린다. 목소리가 너무 강한 자극이다. 내 머릿속에서 나온 소리가 아니라서, 너무 무겁게 나를 후려친다. 괴롭다. 괴롭다는 생각 밖에 못하겠어.
흘러넘치는 기억. 이름을 밝히기 싫었다. 마지막으로 내 이름을 부른 사람이, 너무 상냥하게 말 했거든. 그래서, 내 이름을 부르면, 생각날 것 같아서. 여기선 가명을 댔다. 아무도 날 모르니까. 몰라줬으면 해서.
기억은 이제 내 이름을 밝히려고 든다. 싫어. 아직 말 한 적 없는데. 아무에게도 내 이름 제대로 말 안 했는데.
'현아, 우리를 만나러 올 때는 사랑도 하고, 꿈도 이루고, 정말 행복하게 살았다고 확언할 수 있을 때 와야 해.'
미안해. 미안해. 나 그냥 죽고 싶어. 사랑, 하라고 해서. 사랑할 사람을 찾았는데. 순간 토트 선생님의 이미지가 스쳐 지나간다. 순식간에 사라진 이미지. 그리고 잦아드는 능력. 보일 건 다 보였다는 거야? 허탈함을 느낄 새도 없다. 무리하게 끌어올린 능력은 몸 상태를 악화시킬 뿐이다.
춥다. 몸 안이 너무 차갑다. 한기가 아파. 머리가 울려. 아파. 무서워. 외로워. 날 놓아줘. 돌려보내 줘. 이마 위에 차가운 손이 놓인다. 그 손 덕분에 내가 열이 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린다. 괴로워. 온 몸이 날카롭게 곤두서서 손이 너무 괴롭다. 감각이 사방으로 흘러넘친다. 아냐, 수습해야.
능력의 흐름을 거스르면 몸이 또 아프다. 아파. 결국 날카롭게 곤두선 감각을 사방에 흘려보낸다. 이러기 싫어.
"발열, 한기, 두통. 감기의 증상이다."
눈물이 흐른다. 목소리가 너무 아파서, 무서워서. 들키기 싫어. 내가 아픈 걸 들키면, 그러면. 아냐, 괜찮아. 혼자서도 나았는걸. 어차피 아플 때에는 혼자였으니까.
"거기 눕혀라."
"토토의 침상? 여기 토토가,"
"상태를 보아서는 멀리 옮기는 건 무리다. 빨리 눕혀."
흐읏, 하아, 흐으. 아, 아. 입에서는 의미 없는 신음이 흘러나온다. 소리가 아파서, 죽을 것만 같아서. 차라리 죽여줘. 머리는 제대로 된 생각을 하지 못한다.
몸 위로 덮여지는 이불이 무겁다. 온기가 생겨나지만 그 속에서 냉기가 더 아프다. 이럴 때면, 늘 누군가 찾아와서.
나는 지금 혼자인데, 왜 생각하고 있지?
머리 위에 차가운 무언가가 놓인다. 열이 식고 나서야 제대로 사고가 돌아간다. 여기, 선생님의. 아냐, 있을 수 없어.
몸을 일으킨다. 세상이 핑핑 돌지만 이 정도는 버틸 수 있다. 나가자. 나가서, 어디로든. 일단 담요 정도는 구현할 수 있을 테니까. 피가 빠지면 춥지만, 괜찮겠지. 가벼운 피 정도는 채워 넣을 수 있,
"누워라. 병자가 어딜 가겠다는 거지?"
머릿속에서 비명이 울렸다. 아파, 괴로워. 추워. 목소리가 뇌를 헤집는 느낌이다. 얇은 송곳이 되어서 머릿속을 사정없이 난도질한다. 그러나 이 목소리를 이제 구별 할 수 있다. 이렇게 폐나 끼칠 사람이 아니다.
억지로 입을 연다. 여기 있을 수는 없다. 잠들면, 또 이미지가 범람한다. 악몽을 보일 수는 없어.
"실례했, 습, 니.. 그, 이제 갈 수 있,어요."
"그 꼴도 잘도 지껄이는군. 움직여도 된다고 허가한 적은 없다. 누우라고 말 했을 텐데?"
"폐를 끼칠 수는,"
"나는 누우라고 말 했다."
가까이 다가온 그가 제 몸을 침대에 밀어 넘어뜨린다. 한 손인데, 밀어낼 수 없다. 한 손에 눌린 어깨가 아프다. 미동조차 할 수 없다. 반항, 해야. 허나 몸은 서서히 의식이 사라지고 있다.
"나는 학생들의 건강을 책임지고 있기도 하다. 괜한 반항 해 봤자 병자의 몸으로는 소용없다. 쉬어라. 상태를 보아하니 어디 갈 수도 없겠군."
서서히 신경이 가라앉는다. 침대에서 올라오는 향이 머리를 진정시킨다. 이거 분명.
의식이 흐려진다. 기절하듯 잠에 빠져들고, 그 너머에서 희미한 몇 마디가 들렸다. 그러나 인식할 수 없다. 우습게도, 제 체온 말고 다른 사람의 온기가 느껴지는 기분이 들어서.
2016.12.01 첫 업로드
7 | 노을진 하늘 | 2018.11.18 | 2018.11.18 | 4 |
6 | 키스 | 2018.11.18 | 2018.11.18 | 5 |
5 | 우천 | 2018.11.18 | 2018.11.18 | 3 |
4 | [ 드림 평일 전력 ; DOLCE ] ❥ 제 77회 주제 : 만약에 | 2018.11.18 | 2018.11.18 | 8 |
3 | 시각 상실 (1) | 2018.11.18 | 2018.11.18 | 11 |
2 | 드림전력 [당신의 수호천사] 167회 주제 '목도리' | 2018.11.18 | 2018.11.18 | 5 |
> | 기억 | 2018.11.18 | 2018.11.18 | 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