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은 없다! 절대자따위 존재하지 않는다! 소리 높혀 외치는 말에 무언의 동조가 이어진다. 술렁이는 집단, 떠오르지 않는 태양. 영원한 암흑 속에 갇힌 우리.
문명의 이기가 만들어낸 아름다운 야경은 너무나 쉽게 져버린다.
아름다운 불빛, 화려하게 흐드러진 샹들리에, 촛불, 불꽃, 네온사인, LED. 이 시대에 들어서 불빛은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기억속에 남은 거대한 불꽃, 화려한 빛. 어둠이 도래하여 무엇도 보이지 않는 세계속에서 기억을 더듬는다. 화려하게 피어 흐드러진 그 빛은 무엇의 상징이었나. 눈이 아파 찡그리게 만들고, 땀방울을 구슬처럼 휘날리게 만들던 거대한 조명은, 무대의 주인공으로 만들어 주었던 그 스포트라이트는 모두 어떻게 되었지?
빛을 노리는 괴물들이 만연한 이 세계에서, 더 이상 의미 없는 것이 되었지.
흐릿한 윤곽으로 보이는 사람을 구별하는 것은 이미 일상이 되었다. 아마 눈이 서서히 퇴화하고 있을 것이다. 그 정도 감각은 남아 있다. 빛을 보고 달려드는 괴물들, 어디서 시작되어 어디로 향하는지 모를 문명의 종말. 인간이 자랑하던 불꽃과 빛은 의미없이 져버렸다. 마지막 도시를 버리고 나오던 날, 하늘을 화려하게 수놓았던 불꽃놀이를 잊지 못한다. 그 불꽃은 장송곡이었다. 우리들에게 있어서, 더 이상 빛을 보지 않겠다 맹세한 생존자들에게 있어서.
과거의 기억은 이미 흐릿해져가고 있다. 인간은 시각에 대부분을 의존하는 생물이라고 하였던가. 딱히 부정하였던 적은 없으나 이리 처절하게 실감하게 될 줄도 몰랐다.
어둠 속의 기억은 모두 희미하다. 사랑하는 이의 얼굴마저 제대로 기억나지 않는 지금에 있어서, 무엇이 그리 중요한 기억이겠나. 제 연인의 손을 놓친 적은 없지만, 그의 얼굴을 본 적도 오래 되었다. 우리는 오르페우스와 같은 존재가 되었다. 뒤를 돌아봐서는 안 돼. 의심해서도 안 돼. 오직 목소리가 당신을 구별하는 지침이 된다. 하지만, 말을 꺼내는 것 자체가 드물어진 지금 나는 당신을 어떻게 확신해야 하지?
의심을 안고 우리는 위로 향한다. 위로, 위로. 극지방을 향해서. 별 이유는 없다. 오로라를 보기 위함이다. 카뮤, 당신이 말하던 그 아름다운 빛을 보러 가요.
극지방에는 괴물들이 적다는 소문이 있다. 아마 사람이 없기에 그럴 것이다. 그래, 저들은 자연광에는 반응하지 않는다. 오직 불꽃,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불꽃에만 반응한다. 마치 인간을 멸하기 위해 만들어진 생물인양, 인간의 불꽃을 찾아 끊임없이 배회한다.
누군가 저 치들을 핵으로 멸할수 있다고 했던가? 아닌가. 운석을 끌어들이고자 했던가. 어떠한 연유로 저 거대한 먼지구름이 떠올랐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그저 빛을 먹는 괴물들을 치우기 위해서 강한 화력을 필요로 했고, 그 화력이 인간의 종말을 앞당겼다.
푸른 하늘을 모두 가려버린 구름. 일출과 일몰을 구별할 수 없는 하늘. 끝없는 암흑.
허망함에 올려다 본 하늘은 여전히 검다. 죽음과 닮은 검은색이 하늘을 빼곡이 채우고 있다. 저것들은 우리가 가는 곳에도 떠올라 있을까. 우리는 그 곳에서 제대로 하늘을 볼 수 없는걸까? 문득 의심이 피어오른다. 뭉게구름처럼 피어오르는 의심이 불안을 부른다. 아, 아아. 내가 손 잡고 있는 이 사람은 당신이 맞는가? 나는 타인을 당신이라고 착각하고 있는게 아닌가?
붙든 손을 꽉 움켜쥔다. 익숙한 촉감이다. 버릇처럼 당신의 얼굴이 있을 곳을 올려다본다. 무엇도 보이지 않는다. 흐릿하게 보이는 윤곽이 남성의 것이라는 사실만 알 수 있다.
크리스자드.
말 없이 입을 뻐끔거린다. 나의 사람, 나의 사랑. 덧없이 아름다워 빛 잃은 세계에서도 내 빛이 되어주는 사람. 당신은 당신인가요? 나는 보이지 않는 당신을 빤히 바라보며 입술로 몇 번이고 부른다. 크리스자드, 크리스자드, 카뮤, 선배, 내 사랑.
문득 당신의 입술이 움직여 내 이름을 부른다. 파르바네, 현. 그러면 나는 안심한다. 당신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아도 안심한다. 당신일거야. 저토록 달콤하게 내 이름을 부르는 사람은 이미 이 세계에 남아있지 않으니 당신일거야.
붙잡은 손을 끌어당긴다. 말 없이 앞으로 향한다. 우리는 서로에게 말을 걸지 않은지 조금 되었다. 이유는 간단하다. 만약 당신이 아니라면, 내 사랑이 당신이 아니라면 우리는 버틸 수 없게 될 것이다. 속절없이 무너져 내려서 죽음보다 비참한 삶을 살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차라리, 당신이라 믿고 나아가는 것이 좋다. 끝없는 불안과 바닥 없는 절망에 시달리면서도, 당신이 있으면 된다. 당신이라고 믿는다면 당신이다. 우리는 서로에게 그리 약조하고 말 없이 걸어나간다.
시간감각은 사라졌다. 무언가를 섭취하는 것은 허기를 느낄 때. 끝 없는 무력감과 우울함은 분명 햇볕을 보지 못해서라고 누군가 고명한 학자가 외쳤다.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다. 이건 그런 과학적인 이유가 아니라, 조금 더 깊은 곳에 문제가 있다.
마음이 죽어버린 것이다.
가장 사랑하는 사람의 정체를 확신할 수 없고, 아름답던 시절을 추억할 수 없고, 내일이 오지 않게 되어버린 세게에서 우리는 삶을 이어가는 대신 마음을 버린 것이다. 이것을 어떻게 인간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하지만 인간이다. 우리는 아직 인간으로 살아남았다.
문득 참을 수 없는 허기에 다리가 꼬인다. 넘어지려는 몸을 안아드는 것은 내 사랑. 작은 신음 소리 하나 흘리지 않고 나를 안아드는 것은 익숙해졌다는 증거일까. 문득 서글퍼져 그의 가슴팍에 머리를 기댄다. 쿵, 쿵. 일정하게 울리는 심장소리가 유일하게 삶을 증명한다.
먹어라.
입가에 가져다 대는 식량은 그런 말을 담고 있다.
먹고싶지 않아요.
고개를 젓는다. 지금은 무엇도 소화시키고 싶지 않다. 애초에 그럴 기력이 없다.
여기서 쓰러져서는 무엇도 되지 않아.
그는 재차 식량을 가져다 대며 재촉한다. 나는 그의 재촉에 못이겨 그것을 받아 먹는다. 아주 조금씩, 무리가 가지 않을 정도로 오물거리며 씹어 삼키는 식량. 이것이 무엇인지는 잊어버린지 오래이다. 그냥 식량, 먹을 수 있는 것이라는 사실이 중요하다.
다시 걷는다. 사실, 걷는 것 말고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그리고 우리는 또다시 시간을 잃어버린다.
걷고, 걷고, 걸어서. 온도가 내려가는 것이 느껴진다. 다리 아래 밟힌는 것이 얼음이라고 자각한다. 우리가 어디쯤 있을까, 극지방에 도착했을까? 의심이 서서히 수그러드는 것을 느낀다. 익숙함을 느낀다. 이 곳은 분명 우리에게 더 없이 익숙한 곳이다.
조금 더, 조금 더. 몇 번이고 탈진한 다음, 당신의 손을 부여잡고 소리 없이 애원하기를 수 없이 반복하면서, 어느 순간.
우리는 도착했음을 느낀다.
이 곳이다. 우리가 원하며 걸어온 곳은 이곳이다. 그런 감각이 어쩔 수 없이 온 몸을 휘감는다. 더 이상 걸어나갈 필요는 없다. 돌아갈 필요도 없다. 돌아올 곳에 도착했으니, 우리는 할 일을 다했다.
문득 고개를 숙인다. 하늘을 보기 두려워 고개를 숙인다.
손을 꾹 쥐는 힘에 억지로 고개를 든다. 그래, 우리는 답을 알고 있다. 답을 알고 있으면서 절망하기 위해서 이 곳에 왔다.
하나, 둘, 셋. 셋에 고개를 들어요, 카뮤.
말 없이 그에게 말을 건다. 그가 수긍하는 것이 느껴진다. 숫자를 세는 것은 손을 쥐어서.
하나.
입술을 깨문다.
둘.
눈을 감는다.
셋.
아아, 하늘은 여전히 검다.
우리는 얼굴을 보겠다는 일념으로 이 곳까지 왔다. 오로라 아래서 가장 아름다운 얼굴을 보고싶었다. 내사랑, 내 구원, 내 뮤즈. 울지 못하고 소리 없이 절규한다. 우리는 하늘을 하염없이 올려다본다.
신은 없다! 신 따위, 죽어버린지 오래다!
사제가 소리치던 소리가 귓가에 윙윙 울린다. 나는, 누구에게 기도하면 좋지? 기도할 대상은 어디에도 없다. 우리는 그 사실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서로의 손을 마지막 구원처럼 부여잡고.
너를 보게 해달라고
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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