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뮤가 사랑해 마지않는 그 소녀는, 종종 교향곡을 저 혼자 켜는 것을 즐겼다. 오케스트라를 위해 만들어진 곡을, 거짓말처럼 바이올린 한 대로 완전하게 재현해내고는 했다. 카뮤는 언제나 그 경이를 사랑했다. 그의 구원, 완전한 봄이 거짓말처럼 그에게 선사하는 그 음악의 경이를, 죽어도 된다 생각할 만큼 사랑했다.
Winter Daydream. 겨울날의 환상. 현의 바이올린은 나무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만큼 차갑고 맑은 음색을 끌어낸다. 눈을 감고 제 세계에 빠져든 작은 소녀, 그의 뮤즈.
문득 그녀가 살아있는지 확인하고 싶다는 충동이 고개를 든다.
연주를 방해하는 일이 얼마나 무례한지 모를 사람이 아니다. 그 자신도 지금 그에게 떠오른 충동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것인지, 얼마나 그녀에게 방해가 될지 잘 알고 있다. 그 모둔 사실을 감안해도, 그는 지금 당장 그녀가 살아있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그녀를 품에 끌어안고, 이 세상에 서 있다는 실감을, 그가 환상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실감을 얻고 싶었다.
이유 없는 불안, 공포. 막연하게 느껴지는 세계와, 사라진 감각. 바이올린의 선율이 연습실을, 세계를 가득 채운다. 언젠가 그의 연인이, 사랑스러운 뮤즈가 했던 말이 머리를 때린다.
‘크리스자드, 나는 어릴 적에, 연습실에서 하염없이 운 적이 있어요. 방음 처리된 그 작은 방 안에서, 내 음악이 갇히고 내가 갇혀 영영 나갈 수 없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죠.’
처절한 외로움이 묻어나던 그 말에, 카뮤는 그저 그녀를 끌어안아 대답을 대신했다. 쓸데없는 소리를 해 버렸네요, 잊어요. 하고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지독히도 아름다워 기억 한 구석에 고이 싸서 간직했던 것을 그가 기억하고 있다. 그 기억이 문득 치고 올라와, 그를 괴롭게 만든다. 그는 이제 그녀의 말을 이해한다. 이 좁은 연습실 안에 갇히기에는 너무 거대하고 아름다운 음악이, 정신없이 휘몰아친다. 그녀는 음악을 쓰는 일이, 연주하는 일이 그녀의 세계를 드러내는 일이라 이야기했다. 그 말을 이해한다. 카뮤는 그녀의 음악 속에서 온전히 그녀를 이해하고, 그가 긍지높게 여기는 이름에 담긴 의미를 잃어버리고, 그녀가 보고 사랑했던 ‘그’가 되어, 그녀의 뮤즈가 되어 그 자리에 선다. 사랑해 마지않는 그의 작은 소녀. 언제까지나 그 자리에 멈춰 설 것만 같은 사랑스러운 그의, 연인. 혼약자. 언젠가, 아내가 될 사람.
세계가 아득하게 멀어진다. 소리가 거대하게 변한다. 한 대의 바이올린, 한 명의 연주자가 낸다고 믿을 수 없는 소리. 시야가 변한다. 그녀를 중심으로 꽃이 피어나고 있다.
공간을 초월하며 펼쳐지는 꽃밭. 희게, 희게, 은빛으로, 반짝거리며, 아름답게! 이 겨울 속에서 피어난다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답고 화려한 꽃이 사방에 펼쳐진다. 좁디좁은 연습실, 그를 꽉 채우며 지평선까지 늘어선 은빛의, 흰색의 꽃. 어느 것이 진실인가? 눈물이 나도록 아름다운 광경. 바이올린의 선율은 그칠 줄 모르고 고조된다. 드높게, 창공을 가득 채우며. 카뮤는 문득, 곡의 어느 부분이 연주되고 있는지 망각했다는 사실을 자각한다. 파르바네는 이 곡을 자주 켰다. 카뮤도, 이 곡이라면 질리도록 들었다. 그러나 바로 이 순간, 나비가 그려낸 꽃밭 위에서, 곡이 어디 즈음 왔는지 자각하지 못한다.
1악장인가, 하고 생각하면 다른 악장과 같다. 마지막인가, 하고 생각하면 마치 처음 같다. 그가 어디 서 있는지, 세계가 어디인지 망각한다. 남은 것은 그와, 꽃과, 하늘과, 그의 연인.
그의 사랑.
바이올린의 선율이 마치 노랫소리처럼 변한다.
푸른 하늘에 희게 빛나는 해를 본다. 해와 같더니 어느 순간 달이다. 노래한다. 가사를 붙이기 위해 만들어진 곡이 아님에도, 파르바네의 바이올린에서 청명하게, 맑고 투명한 목소리가 들린다. 나비의 날갯짓 소리 같은 노래다. 덧없고 허망하여 떠난 자와 떠나온 곳, 돌아갈 수 없는 과거를 그리게 만드는 목소리다.
카뮤는 문득, 그의 이름에 담긴 의미를 떠올린다. 그의 긍지 높은 조국. 눈과 얼음의 땅을 떠올린다. 그 하늘에 때때로 펼쳐지던 오로라의 아름다움과, ‘여왕의 검’으로서 여왕을 보좌하기 위해 그 옆에 서던 순간에 느꼈던 긍지와, 어둠이 지는 날, 그믐밤이면 찾아들던 외로움, 아름답게 반짝이던 다이아몬드 더스트와, 그가 사랑을 위해 버리고 떠나온 모든 것을 떠올린다. 그 모든 것을 되돌려주기 위해 필사적으로 싸우던 그의 연인이, 얼마나 허망한 아름다움을 가졌는가 실감한다.
그 실감이, 그를 자각으로 이끈다. 꽃이 필 정도로 아름다운 봄이라면 그에게 더위를 가져다줌이 당연하련만, 그는 기분 좋을 정도로 적당한 온도 속에 서 있다. 연인의 사랑속이라 그런가, 했더니 겨울이다. 한겨울의 칼날 같은 바람이다.
겨울바람이 폭풍이 되어 몰아친다. 몰아치는 폭풍이 꽃잎을 산산조각 낸다. 바람에 휘말려 하늘로 비상하는 ‘꽃이었던’ 조각들. 햇빛인지 달빛인지 모를 것을 산란시키며 화려하게 빛나는 모습에서 다이아몬드 더스트를 떠올린 카뮤가 자각한다. 아, 저 모든 꽃이 눈과 얼음, 유리로 이루어져 있노라고. 파르바네가 주었던 사랑의 시작과 같다. 그 자신과 그녀 자신을 위해 꾸며내어 만들었던 온기 없는 사랑. 아름다운 장식품과 같았던 그 모든 순간. 카뮤는 침묵한다, 침묵할 수밖에 없다.
그들의 사랑은 지속되어 이리 진실 된 것이 되었으나, 그녀가 그려낸 꽃은 부서져내려 화려하게 빛날 뿐이다. 순간의 아름다움, 사라진 가능성의 아름다움을 뽐내며 그저 허망하게 녹아내릴 운명이다.
세계가 부서져 내린다. 그저 아름답기만 한 세계는 그 어떤 의미도 잉태하지 못하고 음악의 끝과 함께 사라진다. 내내 눈을 감고 있던 파르바네는 그제야 눈을 뜨고, 곡의 마지막을 향해 질주한다. 아니, 마지막인가? 론도로 편곡하여 다시 시작이 되고야 말지는 않았나? 카뮤의 혼란스러움은 반복된다. ‘크리스자드’, ‘카뮤’, ‘크리스자드’, ‘R.’, ‘선배’. ‘내 사랑’
‘───’
곡이 끝났다.
언젠가부터 막혀있던 숨이, 그제야 흘러나온다. 오랜시간 막혀있어 탁한 공기를 폐에 가득 채우며, 카뮤는 현실감을 되찾으려 애쓴다. 지금 그의 앞에 사랑하는 이가 서 있노라, 지금 그는 어딘가 외딴 곳에서 홀로 외로워하고 있지 않노라 이해시키기 위해. 그 자신이 이해하기 위해 발버둥 친다.
그러나 그 모든 발버둥은 파르바네의 눈을 마주하는 순간 허사가 된다.
‘아이돌’로서, 사람들의 앞에 서 눈을 사로잡고 마음을 빼앗는 엔터테이너로서 가장 큰 장점이라고 한다면, 단연코 외모다. 인간은 시각에 많은 것을 의존하는 생물이다. 그 시각을 만족시킬 수 있는 자는 쉬이 정상에 오른다는 사실을, 누구나 알고 있다. 그렇기에 ‘파르바네’의 눈은 그녀의 가장 큰 장점이 된다.
검은색에 가까운 눈은 깊이 마주하면 두 가지 색이 섞여 소용돌이치고 어지러이 이지러져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검은색에 가까운 진청색. 그 색을 깊이 들여다보고 있으면 그녀의 머리색도 푸른색에 가깝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더욱 깊게 들여다보고 있으면, 그녀 속에 있는 세계가 보일 것만 같아서. 시간감각조차 잊어버리고, ‘아, 아름다움을 인간의 모습으로 빚는다면 바로 저 소녀와 같겠구나.’ 하고 생각하여서─
카뮤는 문득 지금 그가 동화 속에 들어왔다고 생각한다.
그는 어릴 적, 몰래 읽곤 했던 동화를 떠올린다. 백작가의 아이에게 어울리지 않는 주제이기에 허락되지 않았지만, ‘여왕님’에게 몰래 들려드리기 위해 서재에 숨어들었던 기억이 있다. 그 기억 속에서, 그는 눈과 오로라에 휩싸여 자신을 잃어버린 소녀를 떠올린다.
동화 속에서 화자는 소년이었다. 어린 소년, 눈 속에서 물건을 찾아내는 방법을 알고 있던 소년은 소녀에게 다가가 잃어버린 것을 묻는다. 그리고 차례차례, 소녀의 꿈과, 감정과, 사랑과, 잃어버린 가족과, 이름을 찾아서 쥐어준다. 소년은 눈 속에서 춥지 않는 방법을 알았고, 겨울에게 식량을 받는 방법을 알고 있었으며, 지치지 않는 마법의 허리띠도 가지고 있었다.
눈 속에 파묻힌 이름을 찾아낸 소년은, 아무리 해도 그것을 읽을 수 없어서 소녀에게 달려간다. 그 이름의 주인이 소녀라고 믿으면서.
그 동화의 마지막이 어땠던가?
문득, 파르바네가 화사하게 웃는다.
아, 기억났다.
소녀는 갑자기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말한다. 소리 높혀 웃지 못해 운다고 이야기 하며 말했다.
‘그건 네 이름이야.’
그가 사랑해 마지않던 소녀가 말한다.
“또 환상이죠? 알고 있어요.”
흐드러지게 웃는 모습이 조각나 하늘로 소용돌이치며 올라가던 꽃을 떠올리게 만든다.
환상을 보고 있던 자는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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